편집장 곽경은
수습위원 이조은
낳아만 주면 다 가족인가. 엄마와 아빠는 절대적인 존재인가. 피는 정녕 물보다 진한가. 혈연은 이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는 무조건적인 지지인가 혹은 끊어낼 수 없는 족쇄인가. 가족의 존재와 의미를 의심하는 자녀(아동)의 고민은 천륜을 거스르는 불효인가. 집을 나온 아이들끼리 만든 또 다른 집단은 사회적 문제아의 집합일 뿐인가.
가족(家族) :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 으로 이루어진다. 1
친족관계로 엮이지 않은 아이들의 연대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설명되는가. 앞선 말이 거창하게 느껴졌다면 다시 말해보자. 우리는 방황하는 청소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사회는 이들을 반항아, 사회 부적응자, 불효자, 가출청소년 등으로 쉽게 정의한다. 누군가는 이들을 집에서 해주는 따뜻한 밥 안 먹고 쓸데없이 밖으로 나다니는 생각 없는 사춘기 소년이라고 질책하기도 한다. 집 밖으로 나온 아이들을 사회는 깊이 이해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사정. 우리 사회는 가족의 틀을 벗어난 이들에게 이유를 묻기보다는 얼른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라고 채찍질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불 가침의 성역과도 같다.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외부인’이 신경을 쓴다면 오지랖으로 여겨진다. 현관문이 닫힌 순간부터 집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다.
웹툰 <집이 없어>는 말 그대로 집이 없는, 마음 둘 곳이 없는,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청소년의 투쟁기, 그리고 연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청소년에게 국한하지 않는다. 해준, 은영, 마리와 주완이 모두 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집이 없어>를 이끄는 두 주인공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평범한’을 굳이 괄호 안에 넣은 이유가 있다. 평범한 가정 아래서 자란 평범한 아이. 인물을 설명할 때 평범하다는 말만큼 사랑받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의 범위는 극히 주관적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집이 없어>의 아이들이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해준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고 보호자가 없는 상황에서 학교 기숙사로 들어간다. 다 허물어가는 기숙사에서 마주한 건 지지리도 안 맞는 후배 은영이다. 은영은 부모고 학교고, 몽땅 포기했다고 한다. ‘얼굴은 반반하게 생겨 밖으로 나도는 생각 없는 애’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되는 그런 아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무렇지 않은 건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지 오늘도 거리에서 밤을 보낸다. 집도 없이 텐트에서 사는 은영은 아르바이트를 하거 나 돈을 간간이 훔치는 걸로 일상을 보낸다.
첫 만남이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해준의 전 재산이 담긴 지갑을 훔쳐 친구들과 탈탈 털어 쓴 은영과 싸움을 벌이던 해준은 결국 피를 보고 만다. 도무지 좋아질 것 같지 않던 둘은 서로의 결핍을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 하는 속에서 연대를 이룬다. 집이 없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이 되어 준다. 첫 만남에서는 아직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홈 스위트 홈?
2023년 우리나라 아동 인구(0~17세)는 약 707만 명이다. 이는 전체 인구의 13.8%이며 10년 전 아동 인구와 비교하면 23%나 줄어든 모습이다. 출생률이 ‘제로’에 수렴해 가는 시점에서 한국 사회에 아동은 귀해진다. 하지만 아이가 모자란다는 아우성이 우습게도 집 안팎 아동의 안전은 여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2
2022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2년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아동학대로 신고 접수된 46,103건 중 아동학대로 판단된 사례는 27,971건이다. 한 해에 접수되는 아동학대 신고 건 수만 5만 건에 육박하는 것이다. 아동학대 행위자의 정체를 알면 가족의 의미와 부모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학대 장소의 81.3%가 가정 내에서 발생하며, 행위자의 82.7%가 부모이다. 학대로 인해 사망한 아동의 수도 매년 증가한다. 22년도에 만 무려 50명의 아이가 학대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가정 내 학대로부터 아동이 스스로 벗어나기는 어렵다. 피해 아동을 가정에서 분리 보호한 사례는 고작 10%(2,787건)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피해 아동은 학대 가해자가 있는 부모에게 돌려보내진다. 부모는 아이의 우주라고들 말한다. 대개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니 그만큼 아이에게 단단한 우주를 만들 어 주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아동 학대는 나를 감싸는 우주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죽이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집을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 아침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드는 생각. “집 가고 싶 다.” 집 밖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머릿속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자리한다. 그리 고 모순되지만 때로는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집에 있어도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 이 들면 우리는 상상 속의 집으로 도망친다. 상상의 집은 실체도 없는데 말이다. 집은 우리에게 단순히 의식주가 해결되는 공간을 넘은 기능을 한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곳,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아야 한다.
가족이라는 베일
은영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다. 83화에서 해준이 은영에게 연극부 입부를 제안하며 연극을 그만둔 이유를 묻는다. 연극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무대 위에 있었을 때 분명 즐거워 보였는데, 연기를 하는 모습에서 반짝 빛이 나는 것도 같았는데. 은영이 연극을 한다면 어쩌면 이 위태로운 생활을 그만할 수도 있 을 텐데. 은영이 연극을 그만둔 이유는 하나였다. “집에서 싫어했어.” 그뿐이었다. 3
평소 남 눈치를 보지도, 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은영이 입에서 나온 답은 의아하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기한 은영은 부모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 버 림받는 것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도움의 손을 내민 어른을 외면하기도 했고, 욕설과 분 노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도 했다. 오랜 기간 쌓인 불안은 집에서 나왔음에도 여전히 부모의 고함이 울리던 방 으로 은영을 끌어당긴다. 완전히 잊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매일같이 학대를 당했지만, 그래도 한 번씩 떠오르는 가족과의 추억이 은영의 목을 죈다.
은영과 해준은 많은 부분에서 닮았고, 또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다르다. 해준에게 아버지라는 사람이 찾아온 다. 해준에게 아버지는 없는 사람과도 같았다. 최초의 기억에도 엄마와 해준, 둘뿐이다.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추억도 없는 그에게 성년을 앞두고 찾아온 아버지는 해준의 무의식 속 결핍을 단숨에 채운다. 성장 과정에서 단 한 번 모습을 비추지 않던 사람이 찾아온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 사랑에 목말랐던 해준에게 판단은 사치였을지도 모르겠다.
해준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기보다는 아버지라는 관념적 존재를 갈망해 왔다. 그렇기에 10여 년이 훌쩍 지나고서 갑자기 찾아온 사람에 의심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자신에게 남은 핏줄이 있었음을, 어쩌면 자신에게 가족이라고 부를 사람이 남아있었음을 진심으로 기뻐한다. 해준의 기대와 같았으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해준의 엄마는 오랜 시간 동안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했다. 욕설에 손찌검을 일삼는 남편에게서 해준을 보 호하고자 집을 나왔다. 그러고는 해준과 둘이 서로 화목할 때도 있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며 ‘그렇게 그냥 남들 처럼 평범하게’ 지냈다. 엄마가 죽고 나서야 해준에게 찾아온 그는 해준에게 자신을 ‘마음 놓고 돌아갈 곳’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해준은 안다. 그저 이름뿐인 관계는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해준은 드디어 희미한 기억 속에서 더듬던 아버지라는 존재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허상의 가족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엄마와 자신이 만든 가족이 진짜 가족이자 집이었음을 긍정하게 된다.
방황에는 이유가 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딱 맞겠다. 흔히 ‘가출청소년’이라고 불리는 ‘가정 밖 청소 년’들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보이는 일상 밖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출 청소년은 잘못된 사춘기의 상징 과도 같다. 거리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그 단어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가출(家出)의 사전적 정 의는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감이다. 가출이라는 두 글자로 인해 사회는 집 밖으로 나온 아이들에게 안정된 가정 을 깨부순 문제아라고 낙인찍는다.
2022년 여성가족부 ‘청소년 매체 이용 및 유해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11만 명에 달하는 청소년이 집 밖을 나 왔다. 그중 74.1%는 가정폭력을 경험했다. 가정폭력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는다. 반복되는 가정폭력은 반복적인 가출로 이어진다. 5회 이상의 반복적 가출 비율도 절반에 달한다. 가정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아이들은 어떠 한 보호도 없이 거리로 내몰린다. ‘살기 위해’ 밖으로 나왔지만, 아이들은 법적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일을 할 수도 거처를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쫓겨나듯 나온 거리에서 아이들은 범죄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작품에는 수많은 거리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던 은영의 등장은 독자에게는 기묘했지만, 함께 있는 친구들에게는 그 또한 일상이었다. 집을 나오게 된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지만, 집을 나온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보통 두 가지이다. 청소년 쉼터로 들어가거나, 상황이 비슷한 아이들끼리 거처를 구하는 것.
이론상으로는 가정 밖 청소년의 거주를 보호하며,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다양한 지원을 제공하는 쉼터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2024년을 기준으로 운영되고 있는 청소년쉼터는 135개이다. 쉼터를 이용하는 청소년 중 75%가 가정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4 그러나 10만 명이 넘는 가정 밖 청소년을 수용하기엔 쉼터의 절대적 수가 부족하다. 또한 쉼터의 절반이 수도권에 밀집해 있어 지역 간 불균형도 극심하다. 쉼터의 수도, 정보 도 부족한 상황에서 청소년은 어설프게 거처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임시 거처를 확보한 후에도 아이들의 일 상은 위태롭다. 5
은영의 친구 경수는 종교를 맹신하는 부모에서 도망쳤지만, 적절한 보호와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곳에서 크게 앓아눕는다. 결국 그토록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집으로 다시 향한다. 그 과정에서 경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은 없었다. 가정폭력으로 가정을 나온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는 질책보다는 스스로 자립 할 수 있는 환경과 지원이다.
흩어진 조각의 희망
필자는 초반 몇 화까지만 해도 은영이 소위 말하는 이야기의 ‘최종 빌런’이라고 생각했다. 사회가 약속한 기준과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은영이 얼마나 얄밉던지! 마치 안온한 해준의 일상을 잔 뜩 망치러 온 소악마의 현신인 듯싶었다.
이런 반응을 한 사람은 필자뿐만이 아니었다. 와난 작가는 2화가 공개되고 난 뒤, “백은영이 얄미울지도 몰라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도통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은영의 입장을 미리 독자에게 변명 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은영에게 제대로 박혀 버린 미운털은 쉽게 빠지지 않을 성했다. 해준이와 은영이 두 주인공이 함께 이끌어가는 전개에서 한 사람이 너무 밉상으로 그려진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우려가 무색 하게도 은영의 이야기가 하나씩 풀리자, 그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과 판단은 180도 달라졌다. 6
은영은 어릴 적부터 만성적인 실망감을 지닌 채로 몸만 커왔다. 어느 순간 한 번 ‘꺾이고’, 이를 여러 번 반복하다 마침내 갖게 되는 마음의 덫을 정서적 박탈감이라고 한다. 가장 기쁘고 뽐내고 싶었던 무대 위에서 마주한 엄 마의 비참한 표정. 늘 나를 때리는 아빠와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엄마. 평생 따뜻함을 느껴본 적 없는 은영이 아 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친구들이 많고, 여자 친구가 자주 바뀌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해 보이지 않는 은영을 역시나 간파해 버린 해준은 은영에게 진짜 친구가 있기는 하냐며 불편한 일침을 날리기도 한다. 은영이 ‘의도치 않게’ 마음을 연 대상은 다름 아닌, 첫 만남부터 잔뜩 꼬여버린 은영의 모습을 본 해준이었다.
해준과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비롯해 수많은 일이 있고 나서도 은영은 여전히 무기력하다. 재능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를 안타까워하는 친구들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갈고닦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뒤에도 은영 은 “내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한 적 없다.”라며 스스로를 속인다.
이처럼 우리의 은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사람은 그렇게나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고 작가는 끊임없이 시사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과거를 바탕으로 성장할 수는 있다. 그런 은영도 비록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공부를 시작한 것 또한 커다란 도약이다. 살아온 내내 도전 하기는커녕 비행으로의 회피만 반복하던 삶이 전부였던 은영이었다. 실패가 두려워서였을까. 그렇다기보다 긍정적인 변화가 더 두 려워서가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이는 변화를 긍정하면 그동안 충분히 괜찮다고 합리화했던 삶을 전부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붙잡 는 일은 불행에 안주하는 것보다 더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용기를 가지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말이 아니다. 특히나 친구들과 있어도 늘 철저히 혼자 세상과 싸워야 했던 은영에게는 용기를 갖는 행위조차 큰 도전이 다. 은영은 작은 결심들을 통해 엄청난 변화의 용기를 냄으로써 세상을 살아야 할 의지를 드러낸다. 정정당당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회피하던 연극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드러냈다.
마치 세상에 상처받은 존재는 있어도 진정으로 무기력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다시
은영은 단숨에 개과천선하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조금 더 생각하고 성장했지만, 여전히 어리고 미숙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달라진 것은 독자인 ‘우리’의 시선일 터. 여전히 심술궂은 은영이에 대한 독자의 시선이 어느 순간 바뀌게 한 힘은 무엇일까?
독자인 ‘우리’의 애정 어린 시선은 작중에서는 해준의 자그마한 애정, 진심 어린 하나의 선의로 나타난다. 귀신이 들끓는 집에 홀로 남겨질 은영이를 위해 편안한 기숙사를 포기한 단 한 차례의 선의 말이다. 은영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고 수차례 수모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려진 벼락과도 같은 선의. 무조건적인 다정을 베풀지 못한 부모라는 존재로부터 받지 못한 선의. 부모로부터 받지 못했으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고 은영이 삶을 오랫동안 비관하게 했던 그런 선의. 그 계산 없는 선의를 처음 경험한 은영은 그날로부터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해준은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겪고도 도망가기는커녕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 곁에 남는다. 은영이는 그런 해준에게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해준은 꽤 많아 보이는 은영의 ‘친구들’을 제쳐 두고도 은영에게 유일무이한 인물이자 의도하지 않은 구원자이다.
은영은 해준의 불행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해준의 불행을 보지 못해 대신해서 싸워 남들에게 얻어터지고도 생색 한 마디 없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해준에게 밥을 차려 주는 은영.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 이는 은영의 서툴지만, 진심 어린 선의가 담긴 행동들은 해준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해준의 한 차례 배려만으로 일어났다. 마치 해준이 은영 안의 무언가를 일깨운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은영에게 적대적이었던 독자들에게 은 영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백은영, 생각보다 나쁜 아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갑자기 착해졌는데?
과연 은영의 마음이 갑작스레 따뜻해진 걸까? 가슴 속에 없던 사랑이 생겨나기라도 한 걸까?
독자는 쉽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은영은 원래 그런 아이였다. 은영은 원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아이였다.
둘의 관계가 개선된 후 해준은 처음으로 은영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이 구원은, 은영이 해준에게 받았던 것처럼 의도치 않았던 것에 가깝다는 점에서 운명을 닮았다. 해준의 씻어지지 않는 트라우마. 엄마가 죽은 것에 대한 죄책감. 가정폭력 가해자인 아버지에 대한 희망이 또다시 꺾인 후, 자신의 폭력성이 아빠를 닮은 게 아닐까 하는 극심한 두려움. 은영은 해준의 곁을 늘 지키며 아빠를 믿고 싶어 하는 해준 대신 실컷 아빠를 의심해 주며 현실감각을 불어넣어 준다.
부모에게 여러 차례 정신적으로 버림받은 은영은 만성적인 실망감과 의심이 많다. 하지만 회의적인 성격 속에는 나 약한 속마음이 감춰져 있다. 바보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부모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은영은 누구보다 잘 이해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준을 도울 수 있었다. 은영은 또 모든 걸 깨닫고 고통에 시달리는 해준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던져 그를 구원한다. 너 때문이 아니라는 말, 해준은 엄마를 닮았다는 말이다. 은영은 본래 가식을 떨거나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닐뿐더러, 은영이 해준의 사랑을 통해 받은 구원을 통해 알 수 있다. 은영은 그가 받은 사랑을 근거로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사랑은 그렇게 돌고 돈다.
불완전함의 미학
상처받은 사람들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믿고, 불행을 안락이 여기며 많은 것들로부터 회피한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들을 한심하게 여긴다.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로 평행선처럼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처럼 이어진다. 상처받은 사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벼랑 끝에 내몰려 있는 자들은 종종 나를 이끌어 줄 누군가를 갈망한다. 사회로 나가기 위해 정서적 결핍이 해소되지 않은 채 허구의 독립을 강요받는 청소년들의 경우 특히 그렇다. <굿 윌 헌팅>의 윌과 상담사 숀. 나보다 나이도 경험도 많고 부모님을 대신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왠지 완벽해 보이는 산타 할아버지 같은 존재. 이는 이상적이지만 사실상 판타지에 가깝다.
현실에서 이런 어른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다. 중요한 것은, 사실 이들조차도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이 완벽할 것 같다는 기대는 부모와 달리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이 부모처럼 무조건적 사랑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완벽한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우리 모두 아주 잘 알고 있다.
<굿 윌 헌팅>의 숀은 윌의 상처를 보듬어 주려 하지만 정작 본인조차 아내를 잃은 아픔을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작은 사랑과 관용으로 누군가에게 동아줄이자 구원자가 되어줬다. 불완전한 사람끼리의 만남.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만남. 마치 해준과 은영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지혜로운 어른이 아니라도, 피가 섞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은영과 해준에게 필요한 것은 한 점의 사랑과 조금 더 큰 용기였다. 서툴고 미성숙한 아이들은 서로의 용기를 나눴다. 지금껏 불행은 바닥없는 추락이라 생각하며 빠져나오지 못한 아이들에게 끝이 있으니 걱정 마라는 손을 뻗는다. 손을 뻗어 주는 서로라는 존재 덕분에 둘은 처음으로 위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만약 해준이 은영을 그저 적당히 친절한 타인처럼 적당히 내버려둔 채 지나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초반 독자인 우리들처럼 그저 은영의 행동을 손가락질하고 지나쳤다면 이야기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작은 사랑이 담긴 관용으로 누군가를 구원해 줄 수 있고,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런 기회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테다.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혹은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외로워 보이는 누군가 생각난다면 해준과 은영처럼 손을 내밀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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