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위원 정다빈
‘너의 이름은’으로 애니메이션 영상미의 극한을 보여줬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올 3월 그의 신작이 개봉했다. 작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에서 이어지는 재난 3부작의 마침표였다. 그동안 3부작 시리즈에서 줄곧 감독은 죽은 이들을 향한 애도와 그들을 기억하자는 의도를 말해왔는데, 이번에는 그것에서 나아가 죽은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남은 이들이 가져야 할 생의 열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며 삶에 대한 몇몇 생각이 떠올랐다. 첫째는 작품의 주요 키워드이기도 한 생(生)에 대한 집착이었다. 5월 31일 새벽, 서울 전역에 경계경보가 울렸다. 새벽의 어스름을 날카롭게 찢으며 울려댄 경보알람 속에서 대피하는 이 하나 없었다. 물론 경황이 없어서일 수도, 매뉴얼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 “피하면 뭐가 달라지나”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요즘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모두 하나같이 적당한 나이, 적당히 아프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모두들 딱히 오래 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는 죽음에 대한 무감이 베여있다. 질릴 정도로 반복되는 일상 그 속에서 모두들 너무 지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짙어진 생에 대한 무감과 무료(無聊), 대체 어디서 시작된 걸까?”라는 삶에 닥친 재앙에 관한 질문으로 글을 열고자 한다.
‘스즈메’와 동일본 대지진: 생의 소중함
규슈에 사는 주인공 스즈메는 어느 날 소타라는 정체 모를 남성과 만난다. 그는 열쇠와 주문을 통해 문을 잠그며 재앙을 막는 일을 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타는 문을 통해 나오는 재앙을 막기 위해 스즈메의 마을에 방문하는데, 엉겁결에 저주를 받아 의자가 되고 만다. 그런 소타를 의자에서 사람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그리고 열린 문 틈새로 두문불출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스즈메와 소타는 함께 문단속의 여정을 시작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탄생 배경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이는 일기에서 언급된 날짜(2011년 3월 11일)를 통해 알 수 있다. 해당 날짜는 지진 발생 일자와 같다. 감독은 재난 3부작 내내 지진으로 희생된 이들을 잊지 말고 추억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우선, 그가 왜 그토록 동일본 대지진을 강조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동일본 대지진은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발생한 강도 9.1의 지진이다. 이 지진은 일본 여러 지역에 걸쳐 여진과 쓰나미를 발생시켰고 심지어는 후쿠시마 원전소의 방사성 물질 누출을 초래했다. 그 결과 만 오천여 명이 사망했으며 수천 명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거나 실종됐다. 2차 대전 이후 이런 대규모의 재해는 처음이었다. 따라서 충격은 더욱 컸고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피어난 것은 바로 생에 대한 갈망이었다. 사람들은 대지진이라는 언제 어느 때 자신을 찾아올지 모르는 대자연의 재앙을 경험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이 현재를 직시하도록 만들었고 “그럼에도 더 살고 싶다”라는 삶에 대한 집착을 가슴 속에 심어줬다. 그들은 재난으로 생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충분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주인공 일행은 일명 ‘뒷문’을 닫음으로써 재앙의 피해를 막으려 한다. 여기서 뒷문이란 현실 세계와 환상세계를 잇는 매개체이자 환상세계에서 발생하는 재앙이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는 통로이다. 작품은 터무니없는 자연재해를 ‘문단속’과 ‘요석’이라는 판타지적 요소를 통해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앙에 대한 공포를 유쾌한 정복감으로 승화한다.
목숨이 덧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기원합니다. 앞으로 1년, 앞으로 하루, 아니 아주 잠시라도 저희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용맹하신 큰 신이여. 부디 부탁드리옵나이다. 1 |
위의 대사는 마지막 재앙을 막는 과정에서 소타가 읊는 기도문이다. 이는 곧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삶에 대한 열망과 희망으로 이겨내자는 메시지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가치 있는 이유, 그건 이처럼 삶을 갈망하라는 결연한 이 한마디가 회의적인 우리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생(生)의 가치가 붕괴하는 우리 사회: 코로나19와 사회적 고립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59명이 압사당했다. 참사에 대한 사람들의 충격은 유독 컸다. 누구도 그런 식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 없었고, 많은 사람이 그토록 쉽게 죽는 것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던 반면, “왜 거기에 갔느냐”는 비난조의 의견도 일부 존재했다. 참 씁쓸하다. 타인의 고통, 나아가 자신의 고통에조차 무감해진 이 풍경이 말이다. 삶과 고통에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이 사회, 생의 가치가 이토록이나 추락한 이 사회의 원인으로 나는 너무나 선명해진 너와 나의 경계를 말하려 한다.
‘사회적 고립도’라는 게 있다. 절박한 상황에서 손 빌릴 곳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비율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이 지표는 사회관계망의 형태와 수준을 나타내는데, 이는 곧 우리 사회의 유대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사회적 고립도는 상승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영향이 컸다.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모두가 서로에게서 한 발짝 멀어지고 말았다. 병으로부터의 격리와 타인으로부터의 격리가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오랜 고립 끝에 거리 두기가 해제되기는 했지만,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이미 벌어져 버렸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견고한 공간을 만들었고 서로 마주하는 대신 벽을 사이에 둔 채 상대를 대하는 일상이 당연해졌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나’에게 너무 먼 존재가 된 ‘너’. 서로를 느끼기가 너무나 어려운 현재. 재앙을 이겨낼 수 있는 열쇠는 너와 나의 간격을 좁혀 나가는 것이다.
‘우리’ 생의 가치: 공동체와 정론(正論)
감독이 삶의 가치를 개인적인 관점에서 바라봤다면 이 글은 그 시선을 공동체로 넓혀보고자 한다. 누군가 “삶은 왜 소중한가?”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누군가의 삶에도 일정 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답하고 싶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과 같다”라고 말했다. ‘나’라는 사람이 저마다의 세계 속에서 고유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나의 삶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아껴야 한다. 너의 재난을 나의 재난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 이 모든 이야기는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간격은 앞으로 더욱 벌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임을 감히 말해 본다.
지극히 복된 사람에게 선택할 만한 것은 마땅히 그에게 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점에서 부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신실한 친구가 필요하다. 2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타인과 함께 있어야만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같이 있는 것, 좋다. 하지만 단순히 같이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공동체 정신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 정신을 발현하기 위해 서로를 잘 아는 게 처음이 되어야겠다. 나 그리고 나와는 다른 너, 나아가 우리와 그들을 알고 이해하고 존중하자.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배려와 감사, 평등과 같은 기본적인 도덕을 실천하자. 물론 이 모든 게 아주 멋들어진 이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이상적인 의식이 부족하단 걸 알아줬으면 한다.
각박한 세상에서 늘 더 나은 삶을 바라봐야 하는 이들에게 남을 위해 살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론을 바라봐야 한다. 내면에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대외적으로는 늘 사랑과 배려, 존중과 같은 교과서적 논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다시 사회적 고립도로 돌아가 보자. 앞서 말했듯, 현재 우리 사회의 사회적 고립도는 높은 편이다. 많은 사람이 혼자가 더 익숙하고 편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간의 유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심지어 능력의 차원이 아니라 의지의 차원에서 유대를 부정하기도 한다. 유대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유대의 필요성과 가치를 느끼지 못해 안 하는 것이다. 혼자가 훨씬 편하고 효율적이라는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란 흐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인생이란 불규칙하고 그래서 예측 불가하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살기도 바쁜 사람들이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서는 일은 매우 드물다.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함은 약자에 대한 무관심에서부터 시작해 모든 이들을 향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고립도는 그렇게 아래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간다. 하지만 생이란 늘 흐를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매 순간 행복과 불행이 교차한다. 요는 저 위의 강자가 때로는 저 아래의 약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결국 우리가 공동체 정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고립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생이 가치 있는 이유, 그건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세상의 파괴가 그저 단 하나의 세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누군가의 삶에 책임이 있다.
한편, 최근 코로나19가 엔데믹(전염병의 풍토병화)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이질감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법적 거리 두기는 이미 끝을 선언했지만, 심리적 거리 두기는 아직 끝을 바라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아마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듯 말이다.
페스트는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도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나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꾸준히 살아 있다가 언젠가 인간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기 위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3 |
카뮈는 페스트 종말의 시대를 그리며 연대를 하며 삶의 희망을 놓지 말라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인생의 허무는 늘 우리 주변에 머물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완전히 좁혀질 수 없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가야 한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생을 향한 간절한 열망을 갖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인식하고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 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품고 꾸준한 연대를 통해 삶의 불씨를 이어가야 한다. 파도와 같이 잔잔한, 한편으로는 격동적인 인간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등대의 빛을 제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나는 이 빛을 정론이라고 봤지만,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저 모두가 이 방대한 역사의 파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두 손 꼭 잡고 함께 나아갔으면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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