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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23 봄여름, 84호 <르네상스: 붕괴와 재건>

[포토에세이] 목격자를 찾습니다

by 중앙문화 2023. 7. 7.

편집장 김가윤

사진 촬영 김가윤

인포그래픽 김가윤

 

“사건의 목격자 되십니까?”

 2월 24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어느 장례식장[각주:1]. 사건의 목격자들이 모였다.

 

 

 장례식장은 기묘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나 침통한 표정 대신 빨간 장미와 웃음소리가 장내를 채웠다. 입구에는 근조 화환과 축하 화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여성혐오가 낭자한 사회에 대한 고별과 그 사회에서 웃게 될 여성들을 향한 인사가 교차했다.

 

 

 이날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와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제8대 성평등위원회(이하 성평위) ‘뿌리’가 공동 기획한 전시 ‘사건의 (목격자)주인공을 찾습니다’가 열리는 날이었다. 2021년 10월 확대운영위원회(이하 확운위)[각주:2]에서 폐지 안건이 가결된 이후 약 1년 4개월의 대장정을 달려온 뿌리의 공식 해소 전 마지막 활동이었다.

 

 

여덟 번째 성평등위원회가 ‘뿌리’내리다

 전시는 출범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며 시작됐다. 2019년부터 총학생회(이하 총학)는 성평위의 독립적인 이름과 로고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외침’, ‘새벽’ 등 역대 성평위는 굴하지 않고 이름을 고수했다. 단순한 총학 산하 부서가 아닌 협력 기관으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겠다는 취지였다.

 

 

 중앙대 서울캠의 여덟 번째 성평위는 서로 얽히고설킨 인권 의제들에 연대하겠다는 의미에서 “뿌리내릴수록 연결되는 우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했다. 벽면에는 뿌리의 임기 내 업적을 엿볼 수 있는 홍보물들을 전시했다. △성폭력 신고 상담 창구 ‘우리 같이’ △중앙대학교 권리가이드라인 △연사 초청 △2021 중앙퍼레이드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활동한 흔적이 역력했다.

 

 

 한편에는 성평위실을 재구성해 두었다. 성평등 도서관 사업에 활용했던 여성학 서적들과 역대 성평위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피켓, 엽서 등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다만 훤히 드러난 공간만이 대조적이었다. 기존 성평위실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끔 전단으로 문을 도배해 두었다.

 

 학생회관 206호는 성평위의 수난사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책상과 의자 몇 개를 두기에도 빠듯한 좁은 공간은 학교로부터 학생회실을 제공받지 못한 장애인권위원회와 나눠 써야 했다. “같은 인권 단체”라는 이유였다. 피해자를 위한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는 성평위 측의 요청은 묵살됐다. 폐지 후에는 일주일 안으로 짐을 빼라는 통보를 받았다. 총여학생회 때부터 이어져 온 소중한 공간에서 하루아침에 이방인 신세가 됐다. 성평위의 물건은 현재 <중앙문화>의 창고에도 일부 보관 중이다.

 

 

학내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뿌리’뽑히다

 근절().

 

 전시장 안쪽에서는 뿌리가 잘려 나가던 날의 잔혹한 기록을 보존해 두었다. 해당 구역은 트리거[각주:3] 유발을 우려해 현수막으로 가린 뒤 경고 문구가 붙어있었다. 종이가 쏟아지는 형태의 조형물은 붕괴 공동체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학내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 쏟아진 여성 혐오적 비난과 조롱의 말들이었다. 팬데믹 동안 유일한 연결고리가 되어줬던 에브리타임은 단일한 공론장인 것처럼 둔갑했다. 소수자를 향한 일방적인 공격은 온라인 공간을 배회했다. 이름과 소속을 감춘 이들에게 제대로 된 소통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성평위의 입지 역시 유례없는 진도(震度)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평등위원회 폐지와 국으로의 조정’에 대한 연서명은 5일 만에 400명 이상의 서명을 확보했다. 학생증이나 학교 포털사이트 개인정보 등 본인인증에 대한 장치는 일 없었다.

 

 

 그렇게 300인 이상의 연서라는 조건을 충족하며 확운위 안건으로 상정됐다. 그러나 회의 3일 전 공개된 안건명에는 연서명에 명시됐던 조직 조정에 대한 내용을 생략한 채 폐지만 언급돼 있었다. 학생총회,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이하 전학대회)가 불발된다는 전제를 가져야만 확운위가 개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학대회 소집 시도가 없었다는 점 역시 논란이 된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성평위는 과거 전학대회에서 설립된 기구이기 때문에, 존폐 논의 역시 그에 상응하는 자리에서 이뤄져야 마땅했다.

 

 발의자가 신변 보호를 이유로 회의에 불참하자 당시 의장이었던 최승혁 학생회장이 그를 대리한 것도 문제였다. 의장은 발언의 횟수와 길이를 제한받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안건설명에 덧붙여 사전 일 대 일 미팅에서 전달받은 추가설명을 제지 없이 발언했다.

 

 

  결국 과반의 찬성으로 성평위 폐지안이 통과됐다[각주:4]. 질의응답 요청, 성평위 소명권, 대안 기구 설치, 국으로의 조정에 대한 수정안은 줄줄이 부결됐다. 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점이 남았다. 성평위의 역할이 규정된 학생회칙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했다[각주:5]. 반면 의장은 산하위원회의 폐지에 대한 조항[각주:6]만을 근거로 들며 과반수의 찬성으로 충분하다 주장했다. 회칙 내 모순점을 무마해 버린 것이다.

 

 

2021-2 확대운영위원회 성평등위원회 사업 보고 송지현 전 성평위원장 발언

  전시 구역 중앙에서는 확운위 당일의 영상이 송출됐다. 당사자인 성평위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던 유일한 자리는 사업보고뿐이었다. 송지현 전 성평위원장의 나직한 음성이 울려 펴짐과 동시에 채팅창에서는 날 선 말들이 실시간으로 증식했다[각주:7].

 

 

절박함과 간절함을 흩‘뿌리’다

 하지만 세상은 한 공동체의 궤멸을 그리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재건을 향한 움직임은 신속하고 절박했다. 시작은 대자보 릴레이였다. 뿌리의 성명문을 이어 학내외 수많은 개인과 단체들이 연대의 손길을 건네 왔다. 155개 단체와 10,871인이라는 거대한 숫자가 뿌리를 지탱했다.

 

 

 커다란 벽 한 면이 당시 전해 받았던 자보로 빼곡히 채워졌다. 종이 위를 수놓은 개개인의 간절함은 방문객의 발을 붙들었다. 담백한 글씨에 묻어나는 필사적인 마음을 본 이들은 눈물을 글썽이는가 하면, 말없이 한참을 응시하기도 다.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성평등위원회 폐지 전후 타임라인.

 뿌리는 ‘페미니스트 총궐기: 부활[각주:8]’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광장에 나섰다[각주:9]. 졸속 폐지를 규탄하고 학생사회의 자성을 요구하기 위한 자리였다. 팬데믹으로 얼어붙은 중앙대 캠퍼스에 삶을 향한 의지와 동행의 온기가 넘실거렸다. 뿐만 아니라 ‘성평등한 학생자치를 위한 집담회’를 개최하거나 다양한 외부 연대 및 공동행동에도 나섰다. 학교 담장 너머로 뿌리가 뻗어나가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활동은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지면을 뚫고 시공간을 넘어 전해졌다. 이어지는 구역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지각색 여성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담은 만화와 그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전의 참담한 역사 앞에서 숙연했던 장내는 다시 희망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공간은 방문객들의 손 편지와 사진이 대미를 장식했다.

 

 

차마 ‘뿌리’칠 수 없던

 온라인에서 소식을 접하고 갤러리를 방문한 어텀(익명)씨는 뿌리를 향한 연대의 물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그는 “대자보를 떼어버린다 해도 성평등 의식과 여성 자치가 대학 내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며 “우리는 이 자리에 이렇게 우뚝 서 있다”고 말했다. 지인 소개로 찾아온 쥰(익명)씨는 전시를 보며 과거 대학가에 휘몰아쳤던 총여학생회 폐지 바람을 떠올렸다. 본질 앞에 눈감은 자들의 저열함이 불쾌하고 폭력에 놓인 이들이 걱정된다면서도 끝까지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는 모습에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고 덧붙였다. 임재경씨는 학교 울타리 안에 있던 성평위가 오히려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멋있었다며 “위축되거나 흩어지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해내려는 사람들이 있어 고맙다”고 전했다.

 

아직 우리가 결정적인 패배를 겪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혼자 고민하는 건 힘이 들죠. 하지만 같이 고민하면 가치있는 일이 됩니다(임재경씨).”

 

 

 사건의 목격자들의 손가락은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우리는 모두 ‘그날’을 목격했다. 동시에 ‘그 일’을 당했다. 사건은 성평등위원회의 폐지가 될 수도 있고, 총여학생회의 소멸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이 겪은, 혹은 겪고 있는 바로 그것이 될 수도 있다. 사건은 때때로 지워진다. 부정당한다. 왜곡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을 기록하며, 내일을 기대한다. 그렇게 삶은 지속된다. 공동체는 되살아난다. 몇 번이고.

 

 관람을 마친 이들이 레드카펫을 밟으며 걸어 나간다. 출구를 향해. 기나긴 억압과 배제로부터 비로소 탈출한다. 아름다운 퇴장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그리고 그들에게 던져지는 마지막 질문.

 

 “사건의 주인공 되십니까?”

 

 



  1. 실제 전시는 한남동 이음갤러리에서 진행됐다.  [본문으로]
  2. 전체학생대표자회의가 열리지 못했을 경우 최고 결정권을 위임받아 활동하는 것. 전체학생대표자회의는 학생총회가 열리지 못할 경우 최고 결정권을 위임받아 활동하며 총학생회에 대한 최고 의결권을 가진다.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총학생회회칙.  [본문으로]
  3. 과거의 트라우마 경험을 떠올려 재경험하도록 만드는 자극. 상담학 사전.  [본문으로]
  4. 출석 인원 101명 중 찬성 59명, 반대 21명, 기권 21명.  [본문으로]
  5. 회칙 개정이 발의 시 전학대회 의장은 이를 즉시 공고하고, 공고일로부터 7일 이후 14일 이내에 전학대회를 열고 재적 대표자 과반수 출석과 출석대표자 ⅔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총학생회 회칙 제67조.  [본문으로]
  6. 총학생회 산하 위원회의 신설, 폐지 및 위원회 간부의 소환 및 탄핵 결정. 제22조; 재적 대표자 과반수 참석으로 개의하고 과반수 찬성에 의해 의결한다.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총학생회 칙 제19조.  [본문으로]
  7. 비대면 학사로 인해 2021-2 확대운영위원회는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개최됐다.  [본문으로]
  8. 2021년 11월 2일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열린 성평등위원회 폐지 및 대학 내 백래시 규탄 공동행동으로, 2021 중앙대 백래시 대항 네트워크가 주최했다.  [본문으로]
  9. 성평등위원회 인스타그램(@cau_gender)과 총학생회 인스타그램(@cau_grin)을 기준으로 정리했다. 2022-1 확대운영위원회는 학생회칙 개정을 통해 성평등위원회의 명칭을 삭제했다.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한 중앙대 학생회칙에서도 성평등위원회가 언급된 부분을 인권 관련 자치 기구 혹은 총학생회로 수정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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