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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5 봄여름, 68호 <그들만의 비지니스>

[문화]그 많던 루저들은 어디에 - 우리 시대의 마조히스트에 관해

by 중앙문화 2023. 3. 17.

편집위원 노치원

 

루저, 외톨이, 센 척 뿐인 겁쟁이

 

요즘 유행하는 빅뱅의 <LOSER> 가사 중 일부다. 한국어가 아님에도 언제부턴가 ‘루저’라는 단어는 고유명사처럼 대중문화에 출몰했다. “키가 180이하인 남성은 루저”라는 TV 프로그램 속 한 여대생의 발언에, 대다수 남성들의 분노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2009년에 일어난 ‘루저의 난’[1] 이다. 그날 이후 루저는 하나의 유행어가 됐다. 하지만 루저는 단순히 콤플렉스적 남성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문화 전반에서 루저의 모습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중략) / 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 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장기하와 얼굴들, 「싸구려 커피」 (2009년)

 

「싸구려 커피」의 가사에는 어쭙잖은 희망도, 어수룩한 절망도 보이질 않는다. 단지 눅눅한 비닐장판에 썩으며 살아가는 일상이 있을 뿐이다. ‘88만원 세대’니 ‘아프니까 청춘이다’니 하는 책들 역시 이 시기에 등장했다. 태도는 각자 달랐지만 모두가 젊은 패배자들의 처지에 대한 전제를 깔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저는 점차 과격하게 변해간다. 진보에서 보수진영으로 정권이 완벽하게 넘어가는 동안, 루저라는 단어는 점차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갔다. 루저의 이항에 있던 ‘된장녀’라는 단어는 어느새 ‘김치녀’로 바뀌었다. 인터넷커뮤니티의 지형은 잉여로 대표되던 ‘디시인사이드’에서 좀 더 과격한 ‘일간베스트(이하 일베)’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자조보다는 자학과 가학에 가까운 문화 코드들이 서서히 등장했다. 문화적 코드의 전환이다.

 

가지려하지마 다 있어 세상의 / 주인공은 니가 아냐 / 이 멋진 세상을 그냥 받아들여 어차피 넌 /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냐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스무살의 나에게」 (2008년)

 

난 너네 월급의 1/100만큼도 못 버는 병신 / 라면 살 돈도 없어서 굶어 수돗물이 내 점심/저녁은 스윙스한테 빌붙어서 뜯어먹곤 하지 / 앰창좆거지인생 개미도 내려봐 내 삶의 가치

바스코, 「DON (JM remix)」 - BlackNut 파트 중 (2015년)

 

위의 두 노래에 간극이 있다면, 자조와 자학의 차이일 테다. 그리고 그 자학의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가학이 있다. 가령 일부 사치스러운 여성들에 붙였던 ‘된장녀’라는 이름표는 이제 한국 전체의 여성을 지칭하는 ‘김치녀’로 바뀌었다. 김치녀의 전체집합 안에 자신의 어머니 역시 부분집합임을 생각하면, 김치녀는 여성에 대한 가학적인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우둔할 만큼 자학적이다. 마찬가지로 일베가 보여주는 여러 타자들에 대한 무분별한 혐오의 이면에는, 스스로를 ‘일베충’이라 자학하는 마조히즘이 있다. 느슨해 보이기만 했던 루저들은 대체 왜 지독히 극성스러워졌는가.

 

루저의 탄생

앞선 ‘루저의 난’은 루저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유행시키는 데 한 몫 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분명한 건 루저가 180cm가 넘는 위너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루 저는 정면승부를 펼쳐본 적조차 없다. 다만 180cm라는 분명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기준에 욕망을 거세당한 남성적 루저는 여대생에 대한 욕망을 증오로 변환시킨다. 이렇게 여대생은 경제력이 없으면서 남자친구의 지갑에 의존한다는 ‘된장녀’로 바뀌게 되고, 루저는 그들과 진흙탕 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증오만을 표출하는 남성상이 루저 문화의 근간을 이루진 않았다. 게다가 루저 문화는 그들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방식과는 정 반대의 전략으로 대중들에 다가갔다. 별일 없이 산다는 장기하부터, 스스로를 스끼다시로 자청하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자신을 ‘잉여’라고 낮추는 디시인사이드 커뮤니티까지. 오히려 자신의 결핍을 스스로 드러내는 방식을 웃음 포인트로, 루저는 문화 전반에 들어섰다.

 

그래 내가 뭐 잘났나 / 스끼다시 내 인생 스포츠신문같은 나의 노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스끼다시 내 인생」 (2004년)

 

이런 비호감적인 음악을 해봤자 더 이상 /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 늦지 않았어 그 기타를 팔아버리고 옷 한 벌을 더 사 / 노래방에서 연습한 알앤비를 그녀에게 들려줘 베이베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알앤비」 (2010년)

 

루저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란 이처럼 자신을 ‘스끼다시’라고 낮추는 데서 비롯한다. 계몽을 필요로 하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주체와는 달리, 루저는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명민하게 파악한다. 스스로를 낮추는 루저의 무기력에는 ‘알앤비’라는 메인스트림이 요구하는 바에 순순히 응하지 않겠다는, 느슨하지만 체제 전복적인 저항 정신이 숨어있다. 10년도 전후로 비평의 영역에서 쏟아져 나온 루저 담론들은 많은 사람들이 루저 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핍을 담보로 역설적이게 만족을 얻으려 하는 루저의 모습은 가능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장기하의 노래와 된장녀를 혐오하는 남성이 다 같이 루저로 묶일 수 있는 건 우연이 아 니다. 180cm 이상의 남성 대신 된장녀의 상정을 통해 혐오에 봉착하는 모습이나 ‘우리 모두가 루저’식의 구호를 외치며 자신의 처지에 위안을 삼는 모양은, 쾌락의 측면에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루저의 자기 쾌락적인 면모는 필연적으로 사디즘적 성향을 동시에 띄는 마조히즘(이하 ‘사도마조히스트’ 혹은 ‘사도마조히즘’)으로 치닫게 된다.

 

자조에서 자학, 그리고 가학으로 :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의 성행

시간이 지나면서 루저 담론은 점차 사라져갔고, 180cm를 둘러싼 촌극 역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이제 문화 비평에서는 루저 대신 일베라는 폭력적인 극우 커뮤니티 사이트에 관한 담론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루저로 대표되던 전반적인 문화들은 더 자학적으로, 혹은 타인을 가학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조와 다르게 자학은 공격성을 내포한다. 장기하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읊던 말끔한 가사로 루저 문화의 가능성을 점치던 시절과는 점차 멀어지고, 비속어들과 가학적인 언어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자학과 가학이 얽혀있는 사도마조히즘적 시대다. 이제 비상식적인 가학적 행위는 타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똑같은 잣대로 자기 자신 역시 자학해야만, 가학에 대한 자기합리화가 가능하다. 위의 일베의 사례는 특정 한 유저가 적은 글의 제목들이다. ‘가슴작은년들 특징.real’과 같이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가학적인 글의 이면에는, 스스로를 ‘노가다게이’, ‘가구공장 운영 망한게이[2] ’로 표현하는 자학이 있다. 이처럼 일베에서의 비합리적인 혐오와 조롱은 자신과 타자를 가리지 않는다.

극단적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일베의 사례가 과하다고 생각하면, 페이스북에서 유행하는 ‘리뷰왕 김리뷰’와 같은 페이지 역시 비슷한 유머적 코드를 보여준다. 영화부터 시작해, 게임, 과자, 심지어 황사와 같은 날씨까지 소재를 가리지 않고 이 페이지는 리뷰를 한다. 보통 리뷰에 사용되는 말끔한 언어 대신 과격한 언어로 욕을 하기도 하고 본인의 생각을 가감 없이 토로한다. 이 때 중요한 건 끊임없이 자신을 병신이라고 비하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모자람을 어필함으로써 타인에 대해서도 가학적으로 리뷰할 수 있는 면죄부를 얻게 되고, 여기서 대중들은 웃는다.

 

최근 여성혐오로 논란이 된 옹달샘(개그맨 유세윤, 장동민, 유상무)의 발언에서도 자학과 가학은 공존하고 있다.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사디스트적 발언의 이면에는 “알아요 유세윤 아버지가 유세윤 어머니를 강간했다는 걸, 강간해서 나온 게 유세윤[3] ”이라고 노래 부르는 기괴한 마조히즘적 행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모든 사태가 단지 웃음을 위해 일어났다는 지점은 사도마조히즘의 기괴망측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지금의 사도마조히스트는 이전 유행하던 루저 현상과 단절된 사태로 보기는 힘들다. 루저를 노래한다는 장기하의 프로필에는 ‘서울대학교’와 ‘183cm’가 있었으며, 불안한 루저의 멘토라는 분들의 젊은 시절은 너무나 풍요로워만 보였다. 이처럼 누군가로 대표되기 힘든 루저의 말은 결국 사도마조히스트적의 언어로 번역되어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자신보다 만만한 약자를 괴롭히는 사디스트적 행태에는 자신이 강자라는 착각이 있고,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저급하다는 마조히스트적 면모에는 자기 위안이 있다. 이 둘의 공존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쾌락적 향연인 셈이다.

마조히스트만의 웃음

이렇게 사도마조히즘이라는 단어로 묶이곤 하는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의 면모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만약 타자를 가학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 역시 아랑곳 하지 않는 상태가 마조히즘이라면, 이는 사디즘과 다를 바가 없다. 일베가 상대방을 비하하기 전에 자신들을 ‘일베충’으로 낮추는 행동이나, 옹달샘이 수준 낮게 욕하는 대상에 자신들의 부모님까지 포함시키는 마조히즘적 양상은 결국 타인을 가학하기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루저 문화의 가능성은 사라졌을까. 이는 “사디즘에서 마조히즘을 분리할 수 있을까”의 질문과 정확히 겹친다. 가령 tvn 드라마 <초인시대>에서 유병재(극중 병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초능력을 이용해 같은 면접을 37번이나 본다. 그러나 면접관의 채찍질과 같은 질문에 번번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여기서 마조히즘적 전략은 초능력으로도 취직하기 힘든 현실에 대한 조롱이지, 유병재가 받는 고통에 의한 사도마조히즘적 쾌락이 아니다.

네이버 웹툰 <우바우>와 <불만시대> 역시 마찬가지의 전략을 보여준다. <우바우>의 경우 등장인물들은 기존의 루저 문화에서 보여줬던 전형적인 캐릭터다. 등장인물들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고,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밥벌이와는 거리가 전혀 먼 꿈을 꾼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주인공을 아랑곳 하지 않고 끊임없이 가혹한 채찍질을 한다. 비슷하게 <불만시대>의 주인공은 온통 불만투성이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항상 불만을 가지는 주인공을 매화마다 끊임없이 괴롭힌다. 이 만화의 주인공 역시 마음속으로 불만을 터뜨릴 뿐이다.

 

일베나 옹달샘의 사례처럼 사도마조히즘적 증상의 경우, 고통 그 자체를 쾌락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때의 마조히즘은 사디즘과 구분되기 힘들다. 똑같이 타자에 상처를 주고 쾌감을 얻으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다. 하지만 유병재와 위의 웹툰들이 취하는 마조히즘적 전략에서 고통은 쾌락의 원인이 아니라, 쾌락의 도래에 앞서서 마련되어야 할 조건[4] 일 뿐이다. 이제 마조히스트만의 쾌락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닌, 가혹한 현실에 대한 조롱에 있다. 위의 예시들에서처럼 주인공은 잔인한 현실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지만, 역으로 조롱당하는 현실을 보며 우리는 쓴 웃음을 짓고 공감하게 된다.

 

생각보다 마조히즘적 유머 코드는 현실에서도 흔하다. 뮤직 비디오에서 도로 중앙선 위로 가수가 걷는 장면이 도로교통법에 저촉됨을 문제 삼아 방송 불가 판정을 내렸던 웃지 못할 사건[5] 을 떠올려보자. 당시 불가 판정을 내린 KBS의 도로교통법에 대한 과도한 복종은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법이 야기할 수 있는 가장 자질구레한 결과까지 철저히 추구함으로써, 엄숙성과 권위를 와해시켜버리는 [6] 전략이야 말로 마조히즘의 본체다. 그 과정에서 짓게 되는 웃음은 루저 문화의 뿌리부터 이어온 마조히즘의 여전한 가능성이다.

 

우리의 시대

어느덧 깃발 아래 바람 잔잔해지고 높게 쌓아 올린 벽 틈으로 이끼가 자랐지 어스름한 골목 귀퉁이에 서서 그들의 행진을 곁눈질 하던 / 우리의 시대

오, 병든 자여 / 텅빈 여기 왜 서 있나 움켜쥔 두 손에 무엇이 남았나.

조정치, 「우리의 시대」

 

견딜 수 없는 현실이다. 루저와 그 이후의 문화적 맥락에는 청년 대다수가 비정규직에 처한 ‘88만원 세대’나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3포 세대’와 같은 젊은 세대의 비참 한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정착된 한국 사회는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정글 로 변화했다. 이곳에서 가장 절박한 관심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 즉 ‘생존’의 문제로 집약[7] 된다. 이제 생존의 부끄러움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일베 등지에 유행하는 단어인 ‘씹선비’가 된다. 생존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들은 그저 피곤 을 유발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조히스트적 대응은 저항의 가능성이 아닌 그저 필연적인 등장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대한 자학적인 거절만큼 안전하고 유순한 반항은 없다. 가령 청년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조롱하는 유병재의 마조히즘적 개그는 근래의 히트 상품이지만, 그가 비판하는 현실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웃플 뿐이다. 이 웃픔은 그저 현실에 대한 냉소다. 단지 현실의 모순에 대해 발견하고 조롱을 하는 것만으로는 진정성 있는 문화가 될 수 없다. 현재 마조히즘적 문화는 다만 조롱할 뿐, 비참한 현실의 원인을 탐색하고 추궁하는 데 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사회, 경제적으로 패배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루저들의 언어가 과격해지는 동안, 넘지 못할 벽 너머 승자들의 자축하는 축포 소리는 커져만 갔다. 불안한 그들은 승자들이 쌓은 담을 부술 용기 따윈 없었고, 대신 담 주변에 서성거리는 약자들에게 혐오를 쏟아 부었다. 주지하다시피 그 약자들에는 자신까지 포함시키는 자학이 있었다. 조정치의 노래 「우리의 시 대」(2013년)의 가사처럼, “높게 쌓아 올린 벽 틈으로 곁눈질 하는 우리의 시대”다.

 

가사에 뒤이어 등장하는 ‘병든 자’가 앓는 병은 아마 현실 속 사디즘과 마조히즘일 테다. 환자들에게 노래는 질문을 던진다. “텅빈 여기 왜 서 있나. 움켜쥔 두 손에 무엇이 남았나.” 마조히 즘적 문화 코드가 여전히 전복적 가능성을 지닌다면, 이제 우리는 이 변태적 전략을 ‘왜’ 취하고 있는지, 결국 ‘무엇이 남았는지’ 살펴볼 때다. 윤리적 진정성에 대한 질문을 고스란히 품을 때, 비로소 마조히스트의 언어는 우리 시대의 상처와 기억, 분노와 좌절 그리고 열망과 희망을 온전히 담을 수 있다.

 

 

 

1  2009년 11월 9일, <미녀들의 수다>라는 KBS 프로그램에서 한 여대생이 “내 키가 170cm 라 서 180cm 이상의 남자를 원한다”,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 등의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그녀의 신상을 터는 등, 몇몇 남성들이 분노를 표출한 사건을 ‘루저 의 난’이라고 한다.

2  일간베스트에서 사용되는 ‘게이’라는 단어는 ‘게시판 이용자’의 준말에서 비롯된 은어다. 

3  <동아일보>, 「여성 비하 발언 논란 장동민, 이번엔 패륜발언」, 2015 . 04 . 14 .

4  G . Deleuze , 『 Presentation de Sacher - Masoch 』, p . 78

5  <미디어오늘>, 「 KBS 윤도현밴드 뮤비도 방송불가판정했었다」, 2009.06.03.

6  서동욱, 『차이와 타자』, 2000 , p . 264

7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2009 , p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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