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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5 봄여름, 68호 <그들만의 비지니스>

[사회]세월호 1주년 – 다시 잔인한 봄, 지겨워진 개나리색 리본

by 중앙문화 2023. 3. 17.

편집위원 장재원 

 

버스 안 창문으로 보이는 한강과 휴대폰 잠금 화면으로 비친 벚꽃이 놓인 앨범 커버는 나를 묘한 설레임 안으로 밀어 넣는다. 두꺼운 겨울 잠바를 꽁꽁 싸매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과 비로소 나는 따듯한 핫팩 대신 손을 맞잡으며 거리에 피어나는 봄을 찾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로운 인연들과 함께 봄은 매년,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어느새 다가온 봄을 정신없이 맞이하는 동안, 맞닿은 손 위로 묶여 있던 노란 리본의 의미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시선을 내려 까맣게 때가 탄 노란 리본의 끝머리를 본 순간, 잠깐이나마 손목을 두른 팔찌가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작년 이맘때 쯤, 대학에 막 입학한 신입생이었던 나는 갑자기 한꺼번에 쏟아지는 대학생활에 서툴게나마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상상 속의 ‘논스톱’과 ‘무지개빛 로망 스’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기 시작할 즈음, 나는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부터 더 큰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했다. 내가 처음 세월호를 접하게 된 것은 ‘전원 구조’라는 제목을 단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였다. 세월호라는 선체가 악천 기후로 침몰될 위기에 처했지만, 배 안의 탑승객과 선원들 모두가 구조 되었다는 기사 내용으로, 함께 있던 동기들과 나는 다행이 라는 말을 거듭하며, 옆에 있던 연예기사로 눈을 돌렸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세월호가 다시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그러나 다시 다가온 세월호 소식 은 아까의 ‘전원 구조’가 오보였다는 사실과 함께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어 돌아왔다. 이후 모든 미디어에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실시간으로 쏟아내던 오보와 선체 내 소식에 나는 진실의 갈피를 잡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구조와 해경, 정부라는 셀 수 없는 의혹이 제기되는 동안, 배안의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과 함께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를 잃었고, 부모는 자식들을 먼 곳으로 보내야만 했다. 당시 내가 보도 화면 속 기울어진 선체를 바라볼 때 느낀 무력감은 나마저도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갇히게 하는 것만 같았다.

 

‘가만히 있는 것’이 보여주는 결과에 사람들은 직접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고, 그렇게 작년 4월, 만개하는 개나리 대신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노랗게 봄을 채워 나갔다. 나 또한 가방과 옷에 노란 리본을 달았고, 직접 분향소를 찾아가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국화를 내려놓았다. 어쩌면 나는 내 주위를 노란 리본으로 채우는 것으로 불안과 무력으로 파생된 일말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월호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많은 것들을 남기고, 또 가져가기도 했다. 광화문 광장은 분향소가 되었고, 안산에 있던 한 고등학교는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이해해. 근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이젠 지겹게 느껴진다는 세월호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해한다는 말로 시작해 노란 리본의 끈질김을 비난하며 끝맺는 것이 그 흔한 패턴이다. 우리는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일까. 그건 아마 가족을 잃은 슬픔, 딱 거기까지만 이해해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불완전한 관용의 태도는 세월호 를 더 깊은 곳으로 잠기게 한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노란색으로 물들었던 거리는 다시 본래의 색을 찾아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제 모습을 찾아가는 거리의 풍경이 반가웠던 것일까. 이 잔인한 반가움은 이제 거리에 드물게 남아있는 세월호의 기억을 지겹게 느껴지게 한다.

 

내 손목을 감싸던 노란 팔찌가 닳아 끊어졌고 나는 다시 팔찌를 달지 않았다.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새 팔찌의 매듭을 묶을 시간도 없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그저 처음 노란 리본을 둘렀을 때의 마음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것 즘은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무엇이든 같은 것이 오랫동안 곁에 맴돈다면 처음의 소중함을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한 존재에 대한 안일함은 대상에 대한 무심함에서 멈추지 않는다. 애정 어렸던 눈빛은 곧 상대의 결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곧 나와의 관계에서 비난의 논리를 만든다.

 

세월호도 같다. 처음 세월호 사건을 직면했을 때, 우리는 너도나도 희생자의 죽음과 유가족의 슬픔에 동조했고, 그들의 억울함에 끝까지 함께 맞서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멈춰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은 평소처럼 빠르게 흘러갔고 일 년이 지난 지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고 거리에 밟히는 세월호의 기억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보상을 위한 싸움이라는 명목으로 특별법을 비난하고, 아이들의 죽음을 정치적 발언의 기회로 이용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워져가는 기억에서 나오는 미움은 이렇게 새로운 비난의 논리를 만들며 세월호의 상처를 더 넓게 벌려놓고 있다. 그렇게 더 깊어지는 상처 안에서 ‘진실’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더욱 다양한 갈래로 갈라졌고, 이에 ‘진상규명’은 전 국가적인 책임이 되었다. 그러나 선체 불법 운행에서 시작해 대처를 망설이던 정부는 여전히 인양을 반대하는 것으로 사건의 ‘진실’이 세월호와 함께 바다 밑으로 영원히 잠기길 바라는 듯했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배제한 반쪽짜리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여기에 더해 ‘정부의 의혹을 정부가 직접 조사하는’ 시행령을 발표하는 것으로 모든 할 일을 끝마친 것처럼 굴었다.

어릴 적 처음 보는 작은 칼날이 신기해 커터 칼을 가지고 놀다 손을 벤 적이 있다. 십년이 넘게 흘렀고 이젠 여러 번 꿰맨 상처도 아물었지만, 엄지에 울퉁불퉁하게 자리 잡은 긴 흉터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날카로운 물건 근처에 가는 것조차 무서워 질 때가 있다. 지금은 아무런 통증도 없을 뿐 더러 딱히 신경 쓰지 않으면 몇 달을 잊고 살 때도 있는 이 작은 흉터도 종종 나를 찢어진 손을 붙잡고 울던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이처럼 온전히 아문 상처의 흔적에도 여전히 나는 당시의 두려웠던 찰나의 순간을 상기하곤 한다. 그러나 가족을 잃었을 때 얻는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묻어둔 상처의 기억은 작은 건들임에도 바로 다른 마음들을 누르고 수면위로 올라와 고름이 찬 슬픔으로 다가온다.

 

나는 타인의 상처의 순간을 완전히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 그 아픔의 크기를 그대로 가늠하지 못한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향한 이해와 위로의 노력을 통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상쇄시킨다. 세월호 사건은 유가족이라는 타인에 대한 애도를 넘어 국민 전체가 위로 받아야 할 상처가 되었다.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일 년이 넘은 지금까지 세월호 사건은 ‘이젠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세상의 눈총으로 제대로 아물 기회를 자꾸 놓쳐버 리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안전지대처럼 보이는 불안한 익숙함으로 돌아가려 한다.

 

잠깐의 추모로 끝나야 하는 국가적 재난은 없다. 나는 손이 베인 그 날을 계기로 칼을 잡는 제대로 된 방법을 배웠고, 이후론 단 한 번도 칼날에 부딪히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선체가 기울어진 정확한 원인조차 알지 못한다.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머리를 밀고 눈물을 쏟아 내는 유가족이 안타깝기 때문만이 아니다. 제대로 된 사안을 찾아내 제2의 세월호 재발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에 진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슬슬 노란색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면 삶을 무너뜨리는 것만 같았던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 마주앉은 친구의 지루함을 느낀 찰나의 순간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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