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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7 봄여름, 72호 <변한 것 변하지 않은 것>

‘헬조선'에서 놀이터로서의 시민사회 만들기 -깃발과 촛불 이후 사회운동의 주체와 문화에 대해-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0. 4. 13.

72호, 2017 봄여름

이관후(서강대 현재정치연구소)

1. 촛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 박근혜는 왜 탄핵되었나?


  2017년 대선은 직접적으로는 최순실 게이트와 그 결과인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사건이다. 그러나 탄핵을 가능하게 했던 실질적인 배경인 촛불시위의 원인은 이보다 더 구조적인 데있다. 지난해 11월 촛불시위가 막 열리기 시작했을 때 나타난 새누리당 의원들의 발언이나,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의 발언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당시 새누리당 의원들은 최순실 게이트를 정권 말기에 발생하는 레임덕의 전형적 현상으로 보았다. 즉, 정권 말기에 선거에서 패배하고 - 이번의 경우 2016년 4월 총선 - 정부와 여당의 힘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대통령 측근의 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검찰의 수사나 언론 보도가 가능해지는 이유는, 정권의 힘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그동안 묻혀있던 진실들에 대한 제보가 본격화되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최순실 게이트를 이러한 일반적 상황으로 인식했다. 검
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각 총사퇴, 대통령의 탈당, 친(親)청와대 당 지도부의 퇴진, 당정 분리 등을 통해 다음 해 12월에 새로운 대선을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대응하려고 했다.

  이들에게, 대통령 탄핵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들은 ‘그런 논리라면, 아들이나 형 등 친인척들의 권력 남용과 비리 의혹이 일었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도 모두 검찰 수사를 받기 전에 탄핵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런 일이 매번 반복되었어도 대통령이 탄핵된 적은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만 갑자기 탄핵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정치 논리이며,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당시 새누리당의 주장은 정치공학적 논리로 본다면 크게 잘못된 판단이 아니며, 오히려 탄핵이 일어난 것이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현(現)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시각에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 그런데 왜 탄핵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 실마리는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이 정유라 입시부정 사건으로 구속되는 과정에서 한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최 총장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체육계 입시부정 사건이 수백 건도 더 될 텐데, 그것 때문에 총장이 구속되는 일은 없었다.’라며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최경희 총장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말을 타고’ 대학에 들어간 정·재계 유명 인사들의 자제들은 지금껏 수없이 많았고, 체육 특기자들에 대한 학사관리가 늘 원칙대로 철저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에서 최경희 총장은 구속을 면하지 못했다. 무엇이 달랐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번 탄핵을 놓고 원정도박 수사과정에서 터져나온 진경준 게이트와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사건이 빚어낸 나비효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비효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으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정운호, 최유정, 홍만표, 진경준으로 이어지는 총체적 사법 비리의 핵심에는 우병우 민정수석으로 대표되는 부패한 검찰조직이 있었다. 이 검찰 조직은 정권의 호위를 위해서 정윤회 문건을 덮었고, 세월호 사건 수사를 방해할 정도로 파렴치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은 흙수저 우병우가 어떻게 재산을 형성하고 민정수석에 올랐는지에 모아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부패한 경찰 출신 자산가인 처가의 힘(장모 김장자와 최순실의 관계)이 존재한다는 의혹이 일었다.

  흙수저가 개인적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치에서 한 발 더 나가기 위해서는 금수저들에게 포획되어 그 주구 역할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라는, 영화보다 극적인 장면이 여기에서 펼쳐졌다. 이것은 단순히 몇몇 개인들의 권력 농단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기득권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봉건적 계층 관계가 그 안에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화여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경희 총장의 말대로 이화여대에서 입시부정과 성적 조작이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 대한민국’이 아니라 ‘헬조선’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아! 대한민국’[각주:1]에서 그러한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때는 그것이 용납되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 전체의 정의감이 높아져서가 아니라, 장기간의 저성장과 극단적인 사회 양극화의 심화, 그리고 계층이동성의 극적인 하락이라는 구조적 측면이 빚어낸 결과다. 87년 체제의 수립을 할 수 있게 한 사회경제적 배경은 정치적 변화를 지탱할 수 있었던 대외적 경제여건의 호황이라는 조건이었다. 대학 내내 수업을 내팽개치고 데모를 하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취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시기에는, 입시 부정이나 성적 조작에 대해 혀를 끌끌 차고 잠시 분개하면 그뿐이었다. 그러한 부정의(不正義)가 각 개인들이 성취할 수 있는 삶이나 지위에 크게 영향을 미치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크게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용납 가능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인서울 대학’에 목을 매고, 입학 후에는 아무리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도 등록금은커녕 생활비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그러한 부정의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1학년 때부터 취업을 위해 학점과 스펙을 쌓기에 여념이 없고 그렇게 해도 취업 자체가 불투명한 세대들에게, 학위를 쉽게 받도록 한다는 ‘평생교육원’은 그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물며, 부정으로 입학해 성적조작으로 학점을 취득하고,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스펙’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정유라는 용서될 수 없었다.

  요컨대, 박근혜의 탄핵과 최경희의 구속은 ‘아! 대한민국’에서는 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헬조선’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최순실 게이트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과 주요한 인물들의 삶은, 그동안 각종 수치로 나타나고 자신들의 삶에서만 확인되었던 ‘헬조선’에서 소위 금수저들과 상층 기득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바로 이 점에서 최순실 게이트는 사건 자체의 성격은 새누리당 의원들과 최경희 총장이 본 대로 이전의 여러 사건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것이 발생한 시점의 사회 구조적 조건은 판이했다고 할 수 있다.

  정유라 사건은 대학생과, 대학생이 될 초·중·고등학생, 그들의 학부모들 - 사실상 10대에서 50대, 이번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세대 전체에 해당한다. - 에게 거대한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검찰과 청와대, 그리고 그들과 유착된 재계의 부패한 내부자 고리는 경제적으로 한계 상황에 처한 하위 50% 국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정치혁명의 원인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2) 헬조선은 87년 민주화의 왜곡 아닌 결과


  촛불 정국에서 야권의 대선주자들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이명박 정권 9년간 억눌린 자유와 민주주의의 울분이 드러난 것이며 그 대안은 정권교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촛불은 단순히 최순실 게이트나 보수 정 권의 실정에 따른 사건사적 결과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87년 체제, 경제적으로 97년 체제에 기반을 두고 나타난 2007년 체제의 구조적 산물이다.

  87년 체제는 대통령 직선제, 그리고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그러나 87년 체제의 수립을 할 수 있게 했던 그러한 정치적 변화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경제여건의 호황이라는 조건이었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 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대가인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쟁취했고, 그 결과 오랫동안 지체되었던 분배적 정의의 결과를 일부 얻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시하듯이, 노동 분야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정확히 거기서 멈췄고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정치에서 선거와 투표라는 19세기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실질적인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참여나 일상의 민주주의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개혁은 민주화를 이루어낸 시민이 아니라 권력을 위임 받은 정부의 몫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정경유착에 기반을 둔 연고자본주의의 개혁과 분배체제의 개선, 사회적으로는 지체된 복지체제의 수립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반독재 자유주의의 초기 단계를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초보적 단계의 민주화에서 불과 10년 뒤, 한국사회는 세계적인 경제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 신자유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국가주도의 압축적 산업화 기간 방기되어 왔던 경제체제의 근본적 변화와 기본적 수준의 복지체계를 수립해야 할 국가는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목표를 달성한 이후 통치의 목표를 거의 상실해버린 상황이었다.

  재벌 중심 경제와 매너리즘에 빠진 관치금융은 지속되었고, 위기상황에서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던 청와대의 경제적 무능은 국가 부도 사태로 이어졌다. 정치적 자유주의 위에 경제적 자유주의, 그것도 최소한의 공리주의적, 윤리적 기반을 갖춘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자유지상주의적 신자유주의가 자리를 잡은 97년 체제는 헬조선으로 불리는 불평등 사회의 기반이 되었다.

  2007년 체제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라는 토대 위에 사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보수 정권이 수립되었을 경우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통치가 아니라 지대추구를 목적으로 권력을 이용했으며, 그 결과는 수 십 조원을 투입해서 건설업자들의 배를 불린 4대강 사업과 해외자원개발 사업, 블랙리스트와 최순실 게이트로 대표되는 사상 최악의 부패 정부로 나타났다. 권력을 이용한 지대추구가 가져온 최악의 결과는 부패 그 자체가 아
니라, 집요하게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동안 완전히 방기된 국정, 곧 세월호 참사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국가 부재의 상태 그 자체에서 너무나 뼈아프게 드러났다.

  2007년 체제에서 외교는 남북관계의 완전한 단절은 물론 한반도가 미중간 갈등의 한복판에 놓이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고, 경제적으로는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세습자본주의의 폐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들어맞는 극단적 불평등의 사회가 조성되었다. 언론 자유, 국가기구에 대한 신뢰도 지표 등은 곤두박질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율은 흔들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금수저를 들고 태어나지 않으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반독재 투쟁에 불을 붙였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학생이 주축이 된 민주화 운동은 사실 세계사적으로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다. 서구에서 68혁명이 현대 사회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지적·문화적·사회적 변화의 기점이지 정치변동의 핵심적 사건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시위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역사는 대단히 한국적인 기원과 전통을 가진 독특한 것이다

  기존의 주류 이론에서는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국가들에서처럼 부르주아, 노동자, 농민이 정치변동의 의심할 수 없는 주체였다. 그러한 이론을 습득한 학생들 역시 농민과 노동자를 통해 정치변동을 촉발하기 위해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학생들 스스로 그러한 변화의 주체로 성장한 것이었다. 2·8 독립선언, 4·19, 80년 서울의 봄, 87년 민주화에서 학생들은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구한말 국가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유생들의 저항, 대규모의 농민운동과 항일전쟁이 국내에서 궤멸된 후, 그 정신을 이은 것은 소수의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대항해 젊은 의기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대학생이 주축이 된 비롯한 청년 지식인 엘리트였다. 70년대 유신독재에서도 야당의 지도자들을 제외하면, 정권에 항거한 사건들이 주요한 주체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물론 이들의 저항은 조직적·대중적으로 정권교체라는 성공을 지향했다기보다는, 소수인 자신들의 대담한 선도 투쟁을 통해 사회를 각성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강했다.

  80년대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의 전기가 마련된 시기였다. 부마항쟁과 서울의 봄이 민주주의의 복원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80년 광주라는 비극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학생운동권 세력에게 커다란 부채였다. 이들은 저항적 대학생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로 ‘전대협’이라는 전국적 단위의 학생들을 규합할 수 있는 대규모 단체를 만들어냈다.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조직적 동원이 가능하며, 일정한 공간에서 수시로 상호접촉이 가능하
고, 학습을 통해서 저항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젊은이 수십 만 명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 있는 사회운동의 거점이 나타난 것이다.

  87년의 학생운동 이후에는 7~9월에 노동자 대투쟁이 나타났다. 중공업 사업장의 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 개별 사업장별로 나타났다. 그리고 1년 사이에 전국의 노조가 50% 가까이 늘어났고, 1990년에는 20만 명의 조합원으로 이루어진 전국단위의 노조연합체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구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5년에는 참여 노조원 수 42만 명의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80년대는 70년대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도전과 실패, 그리고 80년 광주에서의 좌절을 딛고 저항세력의 조직적 역량을 대중적으로 확장하는 시기였고, 그 결실은 ‘전대협’과 ‘민주노총’이라는 결실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대학생과 (남성)노동자는 한국 민주화의 실질적 주체이면서 상징적 문화를 구성했다. 이들은 독재정부가 대중문화를 통해 국민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방향으로 돌리려는 것에도 전면적으로 대항하고자 했다.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필수적이었다. 대규모 가두시위와 그에 대한 조직적 참여를 할 수 있는 대오를 조직해내는 것이 조직의 핵심적 과제였다. 국가와 기업의 공식적·비공식적 탄압을 피하거나 버티면서 학습과 연대, 조직의 생존을 지속하려는 의지는 자연스럽게 전투적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한 특성은 시위의 형태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간부들이 발언을 독점하는 관습화된 집회양식, 중앙지도부의 지휘와 통제를 따르는 규격화된 시위 형태가 일상적이었다. 일반 참여자들은 수동적인 청취자가 되었고, 개인의 자율적 행위는 일탈 사례로서 용납되지 않았다. 시위는 투쟁을 결의하는 단식과 혈서, 투쟁 결의문을 낭독한 후 조를 짜서 가두로 나가는 방식이었다. ‘적과의 전쟁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으며 가열 찬 적개심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투쟁 한다’
는 유인물이 ‘진군식’과 ‘출정식’에서 낭독되었다. 가두 투쟁은 시위대와 전투경찰들 사이에서 공간 쟁탈전을 벌이는 시가전의 양상을 띠었다. 거기서 불린 노래가사들도 대단히 전투적이고 격렬했다.[각주:2]

  이러한 전투적 시위문화는 다시 참여자들의 일상적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학생활동가들의 선후배 관계에서는 위계가 분명했고, 조직 활동은 정보를 통제하고 소통을 제한하는 군사적 명령체계를 닮아갔다. 90년대 이후 80년대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서, ‘적 과 싸우며 적과 닮아갔다’는 자성적 비판은 바로 이러한 지점을 포착한 것이었다.

2. 깃발과 촛불


  촛불집회가 처음 나타난 2002년에서 가장 큰 변화는 기존 사회 운동에서 보였던 연사와 청중이란 ‘일방향적인’ 의사소통이, 촛불시위에서는 참여자의 발언 중심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2002년 촛불시위에서는 12월 7일 광화문 집회 이후 ‘더 이상 대형스피커와 지휘 차량으로 사람들을 통제하지 말라!’, ‘우리는 누군가가 동원한 사람들이 아니다.’ ‘특정 정당의 유세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등의 ‘운동권의 집회형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쏟아져 나왔다.

  깃발을 든 촛불군중과 깃발 없는 촛불군중이라는 시각적·공간적인 차이만이 아니었다. 이들 사이에는 언어, 말투, 표현, 표정, 시위방식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미묘하고 확연한 차이가 드러났다. 이런 차이를 감지한 일부 네티즌들은 집회가 범대위(범시민대책위원회) 주도로 진행되자 시위대에서 이탈했다. 실제로 12월 7일 집회가 유세차에 의해 주도되면서부터 행렬의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잘 들리지 않는 구호를 따라 외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집회는 자발적으로 모인 촛불행렬을 ‘수동적 대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촛불 군중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들이 [운동진영]이 싸우고 노력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중적으로 만든 것은 바로 네티즌이고 시민들이다. 그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조금도 안하는가?”
“범대위, 니네들은 니네가 제일 깨어있고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아둔한 민중을 선도한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거기 있는 민중들을 내쫓고 있다!”

“범대위가 주도하는 시위문화는 70년대 풍이다. 낡고 선동적이다. 분노만이 넘칠 뿐이다. 그건 오히려 일반 대중들을 멀어지는 역효과를 낼 뿐이다”

  양자 간의 심리적 거리는 논쟁의 발단이 된 깃발로 표상되는 운동조직대오의 생경한 몸짓과 말투, 문화로부터 조직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느꼈던 소외감과 위화감에서 비롯되었다. 시야를 가리는 단체들의 깃발, 오로지 연단만 보게 만드는 중앙집중식 무대배치와 공간 전체를 채워버리는 마이크소리, 단체 대표들의 의례적인 연설, 마이크를 잡은 연설가의 선동조의 말투, 4분의 4박자 리듬의 ‘하라’ 체의 구호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 때부터 비조직 참여자들이 외친 구호가 “깃발 내려!”였다. 연단을 독점하면서 그 연단에 대한 접근성마저 독점하는, 그러면서도 일체의 내부적 소통을 거부하는 운동권 문화는, 민주화 이후 15년 만에 시민들로부터 받은 개방성·평등성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학생운동과 조직노동자 문화가 저항의 과정에서 하나의 기득권과 엘리트의식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모종의 변화가 필연적이었다.[각주:3]

  11월 30일 네티즌은 ‘만민공동회’라고 명명한 자율적인 집회 및 시위 양식을 제안했다. 실제로 서울의 경우 광화문을 중심으로, 사회자가 ‘모두들 아무나 한 사람씩 나와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는 제안에 자유롭게 단상에서 발언을 했고, 자율적으로 발언대가 만들어졌다 교보문고 건물 정문 앞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진, 참가자들 스스로 ‘만민공동회’라고 불렀던 소규모 자유발언대에서 직장인, 고등학생, 대학생, 범대위 소속 인사들이 나와서 발언을 했
다. 참가자들은 공통된 감정을 압축적인 단어와 몸짓으로 표현하는, 때로는 어눌하기도 한 날것의 목소리에 열광했고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토로하는 표현에 눈시울을 적셨다

  이런 현상은 2008년 촛불에서도 재현되었다. 운동권은 여전히 연단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 앞자리는 깃발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촛불시민은 더욱 수가 늘어났지만, 학생운동권 출신의 사회운동 지도자들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이들을 대중적으로 동원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을 뿐, 근본적인 수준에서 시위 문화 자체의 변화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02년부터 15년이 지난 세 번째 촛불에서 마침내 전복이 일어났다. 촛불이 참여자의 수와 문화에서 연단을 점령한 것이다. 2016년 촛불집회에서는 과거 운동권과 노동자 농민 등 조직된 단체들을 통한 참가자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한 번도 시위에 나와 보지 않았던 시민들이 다수를 이루었고, 세월호 이후 사회적 관심이 크게 높아진 중·고등학생들도 다수 참여했다. 진보성향 뿐 아니라 보수적인 시민들까지도 압도적으로 탄핵에 찬성하면서, 4-50대 일반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처럼 다양한 참여자들이 하나의 광장에 모이면서, 기존의 운동권 문화가 연단을 지휘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장수풍뎅이 연구회’, ‘혼자 나온 사람들’ 등 ‘깃발’로 대표되는 운동권 문화에 대한 풍자와 해학, 그리고 축제를 즐기는 광장의 분위기는 기존 시위 문화에 전복적 저항이었다. 이러한 시위 문화의 변화는 2002년 첫 촛불집회에서 2008년을 거쳐 2016년에 이르는 동안, ‘깃발’로 상징되는 연단 중심의 조직적 운동권 문화와 대비되는 자율적이고 비조직적인 ‘촛불’이 겪었던 갈등의 현 단계적 결말로 이해될 수 있다.

3. 촛불 이후의 시민운동과 시민사회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것은 국회나 헌법재판소가 아니라 광화문에 나온 시민들, 그리고 광화문에 나올 여유조차 없던 시민들이었다. 극단적 사회적 양극화로 인해 생계 이외에 삶의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 시민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었다. ‘블랙리스트’가 상징하듯 민주화 이후 가장 심각한 시민사회의 위축으로 그들을 대신해 말해 줄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그러자 결국 그 시민들은 직접 거리에 나와 스스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민주화 이후 시민과 시민사회의 공적 기능이 가장 약화된 시기에 나타난 하나의 특징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대변자를 찾기보다 스스로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나 촛불 집회의 경우처럼 학생과 시민들은 기존의 대표기구를 통해서 자신들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스스로 직접 다수가 참여하는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87년 이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시민의 다수 구성원은 그 실질적 주체가 다음 세대로 넘어왔다. 87년의 20살 청년이 이제 50대가 된 반면, 지금 20-30대의 다수는 87년 민주화가 아니라 97년 외환위기의 영향 아래서 성장했다. 이들에게 80년 광주는, 80년대 학번들이 4·19에 대해 가진 기억보다 더 아스라이 멀리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젠더, 생태, 주거, 보육, 일자리, 협동조합, 대안문화, 예술 등 대단히 다양하다. 이 세대가 주도할 시민사회는 ‘깃발’로 대표되는 ‘꿘’ 세대가 주도했던 시민사회와 사회적 배경과 의사소통의 수단, 문화에서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촛불 이후의 새로운 시민사회·시민운동은 이러한 다양성과 차별성을 창조적인 민주주의의 에너지로 바꾸어 낼 수 있는 ‘놀이터(플레이 그라운드)’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민사회의 패러다임이 개별 영역에서 개별 주체들의 약진이 아니라 소통의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는, 그런 주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시민사회에서의 활동이 하나의 ‘놀이’로서 이해되고 향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즐기는 대상으로서의 ‘참여’라는 개념이 강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놀이의 공간이 진정한 수평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 공공장들, 작은 민주주의의 공간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시민적 교양과 실천의 기반이 ‘즐김’을 통해 쌓이 고, 연대와 교류는 새로운 만남과 창의적 대화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87년 민주화라는 정치적 변화가 이후에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분야에서 새로운 사회적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촛불 이후에는 그동안 형해화 되었던 한국의 시민사회를 뿌리부터 다시 다져가면서 완전히 새롭게 구성한다는 성찰과 계획이 필요하다. 그동안의 시민사회·시민운동이 엘리트 운동권 중심의 조직과 활동이었다면, 이제 수평적 리더십·팔로우십에 기초한 새로운 조직문화와 소통, 창조적인 실천의 주체들을 중심으로 재편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민사회를 재구성하는 계기는 아마도 이번 정부에서는 개헌과정을 통해 보다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탄핵을 통해 정치효능감이 높아지고 공적 사안에 관심을 갖게 된 시민들이 직접 토의의 장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헌의 과정이 단순히 국회나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촛불 시민이 참여하는, 말 그대로 ‘시민교육의 살아 있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스스로 말할 기회와 여유를 가질 수 없었던 시민들의 삶이 개선되도록 한국사회의 구조적 조건을 변화시키고, 한편으로는 시민들이 말하는 실천적 습관을 자연스럽게 함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촛불이라는 소통과 축제의 장을 시민적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의 장, 실천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비전을 가진 활동이 필요하다. 이 정부 내내, 그리고 앞으로도, 촛불 시민들이 어디서나 민주주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대한민국이 하나의 거대한 민주주의 학교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발상이 요구된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노력과 새로운 정부의 개혁의지가 비판과 견제, 협력과 소통으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한국 사회가 촛불을 지나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릴 것이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시민 없는 시민운동·시민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시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스스로 끌어내리고 새 정부를 만들어 낸 촛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이 때, 바로 지금이 중요하다.

* 참고문헌
김 원. 2005. ‘사회운동의 새로운 구성방식에 대한 연구 - 2002년 촛불시위를 중심으로’ .
『담론』. 한국사회역사학회. 201 8(2), 2005. pp. 131 - 158.
김정한 2013.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서울 : 소명출판

  1. ‘아! 대한민국’은 1983년 발표된 정수라의 노래다. 이 곡의 주요한 가사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나라”다. 당시 모든 음반에 의무적으로 1곡씩 수록되어야 할 ‘건전가요’였던 이 곡은 전두환 정권의 홍보용 관제 가요로 적극 활용되었다. 2004년에 발매된 N.EX.T(넥스트)의 5집 정규 앨범에는 대한민국의 ‘대’를 ‘개’로 변형시킨 제목의 곡이 수록되어 이를 풍자한 적이 있다. - 위키백과 참조. [본문으로]
  2. 가장 널리 불렸던 전대협 진군가는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은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라는 가사를 담고 있었다. 대체로 NL계열의 노래들은 전쟁 상황을 연상시키는 더욱 강렬한 가사들을 담고 있었고, PD 계열의 노래도 파업과 관련된 노래들은 군대, 경찰, 구사대의 폭력에 목숨을 걸고 대항한다는 가사를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3. 이는 90년대 후반, 대학들에서 비운동권 학생회들이 나타난 것과는 다소 차이점이 있다. 당시의 비운동권 학생회들은 저항 자체가 더 이상 학생들의 몫이 아니며, 학생회는 학생
    들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혹은 우선적으로 수호하는 이익단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저항의 문화가 아니라 저항 자체에 대한 반감을 동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 ‘깃발 내려!’를 외친 이들은 여전히 저항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 주체가 되고자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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