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
지난 3월 중순 경, ‘꼴빼미’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
라온 한 장의 그림이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페미호 노젓기도 턱 끝까지 숨차 오르는데 가로막는 암초에 이젠 다른 배 노까지 저으라고 압박하네요”라는 글과 함께 게시된 그림이다. 이 한 장의 그림 안에는 “페미니스트라면 종차별 하면 안돼요! 고기 끊읍시다!”라며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 “페미니스트라면 소수자와 공감해야죠! 병신이란 말 쓰지마 씨발련아!”라고 하고 있는 ‘장애인권’ 활동가, “게이도 약자인 거 알죠? 페미니스트라면 게이인권에도 힘써주세용”하고 있는 게이, 그리고 “저 저번 달에 여자됐어요! 우리 성매매 하는 거 도와주세용! 페미니스트라면 우리 마음도 잘 알겠죠?”라고 하고 있는 ‘트젠’(트랜스젠더)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이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표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페이지의 게시자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여성까지 배제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항변했다. 남성 중심의 문화와 여성혐오를 성찰하지 않으면서 ‘페미들에게만’ 연대를 강요해온 다른 운동의 요구들과는 단절하고 ‘여성들만’ 챙기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장애인 남성, 게이 남성, 트랜스젠더 여성은 이미 남성이라는 특권을 지니고 있거나 경험했으므로 시스젠더(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사회적/법적 지정성별과 일치하는 사람) 여성에 비해 소수자이거나 약자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그림은 표현된 내용만 놓고 보면 “여자만 챙기겠다”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소수자 혐오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등장한 표현들이 혐오표현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이런 그림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논쟁해볼 필요가 있다. “여자만 챙기겠다”, “페미호 노 젓기도 힘든데 다른 배 노까지 저으라고 한다”, “자기 노는 자기가 젓는 것으로”와 같은 말들은 어떤 인식과 운동방식을 담고 있는 것인지,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그림의 등장 배경을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최근 SNS를 중심으로 한 미러링 전략에서 나타난 문제들과 소위 ‘진보’ 운동에서의 여성들의 경험을 짚어보아야 한다. 이 두 개의 배경은 애초에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전자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데 있어서 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이런 그림이 나오게 된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주로 트위터에서 벌어진 미러링 공격과 이를 둘러싼 논쟁의 과정에 있다. 2015년부터 진행된 이른 바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여성혐오에 맞서 그 어떤 문제보다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문제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한남충 패기’에 집중하겠다며 ‘생물학적 남성’으로 분류되는 게이, 트랜스/여성, 크로스드레서 등에도 비난과 공격을 가하는 이들이 생겨났는데, 이를 둘러싼 논쟁이 결국 ‘메갈리아’에서 ‘워마드’ 그룹이 분화되는 과정을 만들었다. 게이들의 하위문화 안에서 사용되던 ‘뽈록이’, ‘뒷보지’, ‘끼순이’ 등의 용어들은 1
여성혐오 표현들로 비판을 받았고, 이들에 대한 집중적인 미러링 공격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심각하게는 특정인의 트위터 계정에 있던 내용까지 일일이 공개적인 조롱거리가 되고, 신상이 알려지는 등의 일이 여러 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미러링 전략과 함께 일부러 과격하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다 보니 ‘병신’, ‘등신’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으며, 특정인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채식을 한다거나 성매매 관련 일을 하는 등의 내용은 조롱과 비판의 대상으로 조리돌림이 되었다. 개인의 익명성이 철저하게 보장되고 140자의 단문으로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글이 오가는 트위터상에서 이런 방식의 공격은 미러링을 성찰을 유도하는 전략이 아니라 단순한 혐오의 언어로 느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논쟁은 의미 있는 맥락을 이루지 못한 채 개별 표현들에 대한 격렬한 비난과 비방으로만 이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비하, 혐오표현과 심각한 조리돌림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다시 ‘자신의 소수자성을 내세워 여성을 공격하고 ‘진짜 페미니즘’을 운운하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막으려는 한남씹치들’의 문제로 돌아왔다. 여기에 “소녀들에게는 왕
자가 필요 없다” 티셔츠 사건에서 드러났던 방식의 남성연대를 총동원한 공격의 트라우마가 다시 그대로 대입된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는 성소수자든, 장애인이든, 비건 채식주의자든 간에 결국 ‘자지’를 가지고 있다면 젠더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사회적으로 특혜를 누려왔으며, 그만큼 자신의 성차별 인식을 성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미러링 공격에 도리어 ‘소수자 혐오’를 내세워 자신들을 비난하고 공격한 데 대한 강한 비난과 반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여성혐오는 성찰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페미들’을 공격하며 성소수자 인권이니 장애인 인권을 챙기라고 하는 ‘자지들’ 하고는 연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꼴빼미’ 그림을 공유한 다른 이의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나의 댓글에 달린 아래의 글은 이 그림에 담긴 또 하나의 중요한 맥락을 짐작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나영님, 여자만 챙긴다는 건, 성소수자 인권 관련해서든 장애인권 관련해서든 노동운동 관련해서든 남자 위주 남자 주도가 됨으로 인해 여자는 결국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 경험들이 쌓여 그리 된 거라 보시면 됩니다. 장애인 인권이 향상되면 더 이상 성희롱 성추행 강간 안당하고 외모품평 성적대상화 안당하게 되나요..? 8, 90년때 진보운동 하시던 분들 여성 가사노동 갈아드시면서 운동하셨죠? 그 안에서 성추행 성폭행 사건 일어나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며 쉬쉬하고 나중으로 돌렸죠? 사소한 일 취급하고.. 여자부터 챙 기겠다는 건 더 이상 다른 ‘중요한’ 운동들이 성공하면 여자들 돌봐주겠다는 개소리에 속지 않겠다는 선언&비명 같은 거예요.. 왜 그걸 모르시나요..ㅠ“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국사회에서도 이제 와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고 과거 서구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등장하게 된 주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된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 되는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발언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 ‘반체제’, ‘반자본’, ‘반정권’ 투쟁의 대의와 명분 속에서 늘 사소한 일로 취급되거나 나중으로 밀려났던 여성들의 문제는 의도적으로라도 “여성만 챙기는” 전략을 취하지 않으면 결국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온라인 페미니즘을 주도하고 있는 2, 30대 여성들의 경우 특히 2004년, 2008년 촛불 집회의 경험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누구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광장에 나가 집회에 참여하고 온라인에서 여론을 형성했지만 결국 ‘촛불소녀’, ‘유모차 부대’, ‘시위녀’ 등으로 소비되거나 대상화되었던 경험, 집회 현장에서의 온갖 성차별, 여성비하, 여성혐오 발언과 성추행의 경험 등이 이들에겐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성들의 집회 참여와 주장들은 제대로 역사가 되지 않았고, 여전히 정치적 발언의 무대는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들의 몫으로만 남았다는 인식이 운동사회 내에 자리해 온 오랜 관행과 겹쳐지며 ‘진보씹치’에 대한 혐오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이러한 지점들을 성찰하지 않고 이들의 전략을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단순히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이는 누군가에게 정말 중요한 페미니즘 전략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단순한 비난보다는 논쟁이 필요한 주제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떠한 논쟁이 필요할까?
‘페미호’의 노를 젓는다는 ‘진짜 여자들’이란 뭘까?
나는 그간의 과정을 보면서 논쟁이 미끄러지고 있는 주요한 지점을 세 가지 정도 발견했다.
하나는, 미러링이라는 전략적 표현을 둘러싼 논쟁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정체성과 경험의 문제, 세 번째는 페미니즘 운동 전략에 관한 문제이다.
미러링 전략이 전면적으로 등장한 이후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게 옳으냐’라는 비난이야 꾸준히 지속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전략이 시스젠더-이성애자-마초 남성을 향한 것이라고 간주되었을 때는 미러링이 어느 정도 전략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때의 미러링은 발화권력을 지니고 있는 남성들의 언어를 그대로 뒤집어 그 권력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이에 대해 ‘남성혐오’라고 비난한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의 일환으로서 작동하고 있는 혐오는 엄연히 강력하게 존재하는 성별 권력관계를 뒤집어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전략이 특정한 소수자성을 지닌 남성들이나 트랜스/여성 등을 향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권력관계에는 장애,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계급 등의 다양한 문제들이 교차되고 단순히 ‘남성 대 여성’이라는 구도로는 옹호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때문에 ‘똥꼬충’이라든가 ‘씨팔(씹할)’을 대신해 사용되는 ‘후(후장)팔’, ‘병신’ 등의 용어는 단순히 전략적인 미러링의 표현으로 관용되기 어려운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이런 표현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단지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운 검열의 문제로만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미러링이 우리 전략인데 왜 ‘옳은 말’만 하라 면서 페미들을 공격하냐!”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수자 혐오표현 쓰지 말라며 여성비하나 혐오가 담긴 욕을 한다. 이런 경향은 단문으로 빠르게 오가는 트위터에서 더 심하게 벌어졌고, 문제의식을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하면 ‘설명충’이나 ‘진지충’, ‘진보꼰대’가 되어버리는 문화 속에서 결국 서로에 대한 공격과 상처만 남았다.
“우리는 ‘진짜 여자’만 챙긴다”는 전략은 이런 공격들이 오가는 과정에서 더욱 강조되고 강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여성으로서의 경험’으로 강조되는 각 개인의 경험들이 타인이 절대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으로 절대화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여성 일반의 경험이자 정체성인 것처럼 규정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피해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피해의 경험은 지정성별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서 살아온 ‘진짜 여성’들만이 제대로 증언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된다.
물론 피해의 경험을 말하고, 그것을 개인의 불행이 아닌 사회의 문제로서 의미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활동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성 중심의 사회는 여성들로 하여금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피해를 내면화하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해왔기 때문이다. 폭력은 구조적이지만 가해와 피해는 개인들의 문제로만 돌려지고, 피해를 발설하는 순간 여성은 자신을 향한 엄청난 낙인과 비난, 공격들로 인해 어쩌면 당장 겪은 피해의 경험보다 훨씬 극심한 몇십 배의 지속적인 고통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 때문에 피해를 발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고, 페미니즘은 그렇 게 용기를 낸 수많은 여성들의 증언과 행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 또한, 이 경험들을 ‘여성의 언어’로 말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등 여성들이 경험하는 젠더 폭력의 문제는 흔히 다른 형사사건 해결 과정에서 요구되는 개별 증거나 정황만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그 바탕에서 작동해 온 뿌리깊은 성별권력과 구조의 문제를 반드시 고려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합리성과 객관성을 빙자한 모든 법과 제도, 지식, 시스템 또한 대부분 남성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왔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남성연대가 강력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자원도 편향적으로 주어져 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구조적 폭력과 차별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경험들을 여성들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드러내는 과정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피해의 경험이 강조되고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이 강조될수록 여성들은 다시 그 폭력을 작동시켜 온 구조 안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여성으로서 겪은 피해의 경험을 구조적으로 고정된 위치에 두거나 그 자체를 마치 여성만이 지닌 섹슈얼리티, 정체성의 문제인 듯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보다 주체적인 대안 모색을 어렵게 만드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또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는 ‘페미호’만 저어가기도 바쁘다는 그 ‘여성들’이란 과연 누구이며, ‘여성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모든 여성들이 동일한 신체적, 사회적 경험을 하는 듯 생각하고는 하지만 사실 주민등록번호가 2 또는 4로 시작되는 ‘여성’의 묶음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정체성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가슴이 나왔다거나 생리를 한다거나 하는 경험조차 동일하지 않고, 계급이나 신체 조건 등에 따라 사회적 경험의 격차도 크다. 결국 ‘여성으로서의 경험’이란 이런 조건과 차이들 속에서 매우 다양하고
다르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주민등록번호가 2나 4로 시작되지 않는다고 해도 신체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남성 일반의 경험보다는 여성의 경험에 가까운 사람들도 존재한다. 때문에 만약 우리가 ‘페미호’를 ‘여성들’만의 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 ‘여성들’의 자격을 물을 수밖에 없고 그 자격은 실제로는 특정한 경험과 범주를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여러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저어나갈 ‘페미호’는 단일한 정체성의 묶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억압의 매트릭스와 구조 속에서 서로 연결되며 나아가는 배가 되어야 한다.
‘페미호’가 헤쳐나갈 풍랑의 바다
‘꼴빼미’ 페이지의 이 게시물에서 벌어진 댓글 논쟁 중에는 이런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항변하며 자신이 SNS상에서 공격받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일례로 이 그림에 표현된 “병신이라는 말 쓰지마, 씨발련아” 같은 내용이 억지로 장애인을 혐오하기 위해서 그려진 게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여성혐오의 욕설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옹호를 받고, 자신들은 결국 여성이기 때문에
공격받는 위치가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소수자 혐오가 아니라 성별 권력의 문제라고 결론짓는다. 때문에 이와 같은 결론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관용이 작동하는 어떤 소수자성보다 오히려 ‘여성’이라는 위치가 가장 취약하고 열악한 것이 된다.
이와 비슷하지만 좀 더 첨예한 맥락에서 트랜스/여성은 결국 ‘진짜 여성’이 아님에도 페미니즘 운동에 끼어들어 여성들의 고유한 경험을 침해하거나 운동의 방향을 위협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이 ‘(MTF)트랜스젠더’들은 어쨌든 남성으로 태어났고 남성으로서의 특혜와 사회적 자원을 누렸으며 여전히 남성의 성기를 지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이 ‘시스젠더’ 여성의 위치에 대해 특권을 운운하는 건 결국 트랜스젠더라는 소수자성을 내세워 ‘여성’의 위치와 공간을 침해하거나 위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도달할 결론은 ‘진짜 여자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밖에 없는 것일까?
그간의 세계에서, 심지어 사회 변혁을 추구한다는 운동의 공간들에서조차 ‘여성의 문제’는 나중으로만 밀려왔다면 그것은 혹시 문제설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페미호’가 열심히 노 저어 나아가야 할 그 풍랑의 바다 말이다. 지금까지의 운동이 각자의 배를 저어오기만 했던 것은, 모두가 각자의 풍랑만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설정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일례로, 노동운동이 상품생산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싸워오면서 이 운동에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노동으로 고려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사회적 가치는 지금까지 가려져 왔다. 이제 많은 여성들이 가사, 돌봄, 출산, 육아 노동을 병행하고 있지만, 이 노동들을 수행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가치가 사회적으로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이나 임금에 대한 요구의 효과는 남녀 간에 매우 불평등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여전히 노동운동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남성 노동자로 설정되고 여성, 장애인, 청소년 노동자는 부차적인 위치에 놓인다. 때
문에 비장애인 남성 이성애자 가부장 중심의 직장이나 가정, 운동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폭력의 문제도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되거나 심지어 운동의 대의와 진로를 방해하는 사소한 문제 제기로 취급되어 온 것이다.
여성운동은 어떨까? 그간 진행되어 온 정책과 법/제도의 영역, 운동영역에서 모두 ‘여성’은 비장애인 이성애자 가족 관계 내에서 임신과 출산을 하는/할 여성이 가장 기본적인 정책 대상으로 설정되어 왔다.
흑인 해방운동과 여성해방 운동이 진행되던 시기에 흑인 남성에 의한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고발한 흑인 여성들은 흑인 사회 내에서 엄청난 비판과 폭력을 감수해야 했고, 동시에 흑인 노예로서 거칠게 노동을 하고 채찍질을 견디며 노동했던 자신들의 정체성과 백인 여성 중심의 여성해방 운동의 요구가 매우 괴리되어 있음을 이야기해야 했다.
때문에 우리는 문제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계급이나 성별, 각자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문제설정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가 끊임없는 통제와 정복의 역사를 통해 특정한 성별, 계급, 신체, 인종을 중심으로 한 차별과 착취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자연에 대한 정복과 수탈 위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새롭게 문제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시스템에서 몸의 정상성과 효율성을 구분하고 위계화하면서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고 통제하는 구조는 ‘신체 건장한’ 남성들의 몸을 기준으로 몸의 효율성을 성별로 구분하고 규범화하는 구조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대상화하고 구분하여 동물을 착취하는 구조는 여성의 몸을 언제든 착취 가능한 자연과 같은 상태로 두려는 구조에 연결되어 있다. 계급은 기본적으 로 이러한 구조 위에서 성립 가능한 것이 된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는 이 체제를 ‘가부장체제’라고 파악하고, 이렇게 연동된 착취의 구조를 ‘적녹보라 패러다임’으로 분석한다. ‘적녹보라 패러다임’은 체제를 분석하는 틀이자, 동시에 대안사회와 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바탕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노만 저을 수도 없고, 누군가의 노 젓기에 기대기만 할 수도 없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노를 저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 바다 위의 수많은 풍랑들을 다양한 위치에서 복합적으로 경험하며 함께 헤쳐나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페미호’는 풍랑을 혼자 헤쳐나가는 배가 아니다. 우리의 ‘페미호’가 각자의 풍랑 앞에서 고군분투해 온 다른 배들을 함께 연결하며 이 바다의 물결을 바꿔나가는 배가 되기를 바란다.
- 여기에서 ‘메갈리아’, ‘워마드’ 식의 그룹핑은 단순히 단정짓기엔 다소 난감한 지점들이 있다. 메갈리아나 워마드는 오프라인의 모임이나 조직처럼 실체가 명확한 구성원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갈리아나 워마드로 구분되는 그룹 내에는 이들이 지니는 특정한 문제의식과 경향성에 아주 밀접한 사람도 있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동의하거나 전략적으로 동조하는 이들도 있는 등 내부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온라인에서의 전략적인 행위가 오프라인에서 이들의 실제 인식이나 행동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고는 간주될 수 없다. [본문으로]
'지난호보기 > 2017 봄여름, 72호 <변한 것 변하지 않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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