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편집위원 이상(사회학과)
Ⅰ. 들어가며 1
2000년대의 한국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화, 노동시장구조 변화, 고령화·저출산의 인구구조 변화, 정치적 무관심 등을 배경으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세대론’이 쏟아졌다. 『88만원 세대』 (우석훈·박권일)는 세대 담론 분출의 기점과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담론들이 주로 문화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연구자들은 세대의 문제를 경제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20대를 세대 간 착취의 희생자로 위치시켰다. 이러한 세대론은 대중문화나 담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주체’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20대’를 규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담론이었다. 20대는 고용불안과 청년실업이라는 구조 속에서 ‘스펙 쌓기’와 자기계발을 통해 각자도생하는 주체라는 것이 담론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담론은 대학생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프로젝트화된 삶을 수행하며 타인과 경쟁하는 이들로 재현했다.
이 연구들이 갖는 의의는 이전 세대들과는 구분되는, 2000년대 이후의 ‘청년 세대’가 처한 구조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청년실업, 고용불안으로 상징되는 노동시장과 고용 구조의 변화나 신자유주의화가 주체와 문화 담론에 미친 영향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대론은 다양한 결이 존재하는 청년 세대를 단일화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왔다. ‘88만원 세대론’과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의 대학생’ 논의는 ‘청년 세대’ 내의 계급, 젠더, 지역, 학력 등의 차이를 간과하고 지나치게 동질성을 강조했다. ‘20대’ 혹은 ‘청년세대’를 대학생과 동일시함으로써 중산층 ‘명문대’ 학생들이 ‘청년’ 정체성을 과잉 대표하는 문제를 심화시켰다. ‘88만원 세대론’이 ‘청년 세대’를 대학생으로 전제하면서 비대학생 청년은 지워졌고,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의 대학생’은 그러한 주체화가 중산층 이상의 계층 출신 ‘명문대’ 학생에게만 가능함을 드러내지 않는다(김효진, 2010). 본고가 저소득층 ‘명문대생’이라는 특정한 위치에 있는 대학생들에 주목한 것은 이들의 경험과 해석이 동질화된 ‘대학생’ 담론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소득층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명문대생’이라는 ‘학벌’ 지위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결합을 살펴봄으로써 단일한 대학생 내지는 ‘자기계발 주체’라는 담론의 균열을 발견하고자 한다.
또한 본고는 “대학교육의 대중화 이후 대학 간 위계에 따른 사회계층별 차이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 대학 내 사회계층별 학생경험에 대한 국내연구가 미흡하다”(김미란, 2014: 25)는 문제의식에 기반을 둔다. 부모의 사회계층의 차이에 따른 자녀 대학의 위계서열뿐만 아니라 대학 내의 사회계층별 차이에 따른 대학생활 경험의 분화에 주목해야 한다. ‘어디를 갔느냐’만큼이나 ‘어떤 생활을 하는가’ 역시 중요하다. 자기계발이나 ‘스펙 쌓기’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적 대학생’ 담론에는 저소득층 대학생의 경험이 배제되어 있다. 저소득층 ‘명문대생’의 대학생활을 연구함으로써 ‘학벌’이 가져다주는 전망이나 자기계발이라는 조건이 사회계 층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Ⅱ.인터뷰 참여자 소개
본고는 심층면접 방법과 자기기술지를 사용하였다. 면접과 자기기술은 2016년 10월에 이루어졌으며 인터뷰 참여자는 총 9명이다. 인터뷰 참여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에 ‘참여자 모집 공고’를 게재하여 모집하였다. “저소득층 ‘명문대생’”의 기준으로는 각각 소득분위와 재학 중인 대학을 고려하였다. 소득분위는 한국장학재단의 기준을 참고하여 2분위 이하를 대상으로 하였다. ‘명문대’는 중앙일보 대학평가를 기준으로 상위 10%의 대학으로 한정하였다. 참여자들의 대학생활 경험을 듣기 위해 최소 2학기를 초과 이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하였다. 또한 1년 이내에 졸업한 사람도 대상으로 하였다.
Ⅲ. 대학생활
1. 이질적인 소수자 : 저소득층 ‘명문대생’
“중산층 이상이 많은 것 같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 그들이 가시적인 건 맞는 것 같아요”라는 수연의 말처럼 ‘명문대’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중산층이다. 이는 계층구성에서 중산층 학생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들이 대학 내에서 가장 가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문대’는 중산층적인 공간으로, ‘자기계발’, ‘계층상승’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인터뷰 참여자들이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출신계급을 가진 또래집단과 만나게 된다는 것은, ‘명문대’ 안에서 저소득층 대학생으로서의 경험이 극대화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김효진, 2010)
저소득층의 사회경제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높은 학업성취도를 얻은 인터뷰 참여자들은 적극적 차별조치(affirmative action)로서의 ‘기회균형전형’(해경, 서윤, 지연, 수연)을 포함한 다양한 전형을 통해 ‘명문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명문대’라는 공간에서 저소득층 ‘명문대생’은 소수자였으며 대학의 행정 및 제도에서 제대로 고려되거나 배려 받지 못했고 교수, 학생들에게는 마치 지워진 존재처럼 여겨졌다.
인터뷰 참여자들 대부분은 각자의 학교에 합격하고 첫 등록금과 입학금을 낼 때부터 부담을 느꼈다고 했다. 국가장학금제도를 늦게 알았거나 학교에서 소득 분위와 연계된 교내 장학금을 등록 이후에 몇 달이 지나서야 지원하는 등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몇 백만원의 목돈을 구해야 하는 경험을 했다. 대학행정은 저소득층 학생의 경제적 여건에 대한 배려 없이 일률적으로 집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교외장학금을 알아보러 뛰어다니거나”(해경) 부모님이 지인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지연).
기회균형전형으로 입학한 참여자들(서윤, 수연, 지연, 해경)은 학과 사람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전형을 묻는 것’이 곤란했다고 말했다. 출신 지역, 나이 등을 묻는 것처럼 아무런 악의 없이 나온 질문이었지만, 기회균형전형 학생들에게 전형을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첫 모임에서 자신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실제로 네 참여자 모두 전형 묻기에 상당한 괴로움을 겪었다. 이들은 특별전형(서윤), 입학 사정관(수연, 지연, 해경) 등의 대답으로 에둘러 질문을 피해 갔다고 했다. 또한 거짓말을 하는 것에도 불편함을 느꼈지만, 혹여나 들키지는 않을지 불안했다고 회상했다.
사회복지 수업이다 보니까 가끔 빈곤층, 한부모가정 사람들에 대해 타자화해서 말하는 경향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수업 때 당연히 탈가정, 탈학교 안 했을 것이고, 극적으로 빈곤하지 않을 거라고 상정해버리고. 저 말고도 불편할 사람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현)
한 번은 교수님이 강의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빈곤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아 xx대 정도 올 애들이면 그렇게 가난한 학생 없을 거라고 봐요”라고 말씀을 이어가시는데 되게 웃겼거든요. 내가 여기 앉아 있고 또 있을 지도 모르고. 그리고 내 주변에도 많진 않지만 힘들게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분명 있는데. 교수님은 도대체 뭘 보고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그 말이 너무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가 어느 정도인지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정도가 뭔지도 모르겠고. 그럴 때도 내가 운이 좋았던 건지 아등바등 어떻게든 해서 여기 왔구나. 그런 생각도 많이 하죠. (수연)
저소득층 대학생은 강의실에서도 종종 그 존재가 지워진다. 아현은 사회복지 전공의 특성상 빈곤이나 복지와 관련된 주제를 자주 접했지만, 강의실에서 빈곤층이나 한부모 가정이 타자화되고 지워지는 경험을 했다. 수연의 사례처럼 저소득층이 타자화되는 것은 전공과 무관한 강의에서도 얼 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2. 저소득층 대학생으로서의 대학생활
‘저소득층’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참여자들의 대학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참여자들은 아르바이트, 소비수준·문화생활·자기계발·취업준비 등 수많은 측면에서 주류의 중산층 학생들과 격차를 느꼈다. 이러한 격차는 가족이라는 사적 안전망의 부재를 포함하며 참여자들에게 “절벽에 서있는 느낌”(성준)을 주기도 했다. 몇몇 참여자들은 좌절을 겪으면서 욕망의 비생성 혹은 포기 상태에 처해있었다.
➊ 타임푸어, 아르바이트가 따라붙는 대학생활
개별 참여자마다 생활비를 전액 스스로 충당하는 경우부터 가족에게 일부 지원을 받는 경우까지 차이는 있었지만, 소득 활동을 통해 생활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공통적이었다. 참여자들은 근로 장학, 과외,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소득활동에 종사했다. 상대적으로 시간 부담이 덜했던 참여 자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쏟아야 했던 참여자들도 있었다.
그나마 제가 과외를 할 수 있는 것도 명문대생이니까. 명문대생인 저소득층이 그나마 나은 건 과외를 할 수 있어서 일지도 몰라요. 과외만큼 시간 적게 들이면서 돈 많이 벌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제가 휴학 때 알바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주변 알바생들이 ‘너는 왜 xx대를 다니면서 굳이 알바를 해? 과외하면 되잖아?’ (…) 이것도 내가 명문대생이라서 할 수 있는 어떤 특권, 다른 대 학생들은 과외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구나. (서윤)
서윤의 말처럼 과외는 저소득층 ‘명문대생’이 가진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학력의 효과가 감소했더라도, 과외 시장은 ‘명문대생’의 학벌 효과가 가장 잘 가시화되는 장소다. 상당한 육체적 피로감을 동반하며 최저 시급을 주는 대개의 아르바이트들에 비하여 과외는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제공한다. 참여자들은 과외를 할 수 있었던 것이 학벌 때문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득 활동에 시간을 투여하고 자신의 생활비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은 공통적이었다. 대다수 참여자들에게 아르바이트는 금전 부족에 대한 대응책이자 시간 부족의 원인이었다. 부모의 지원으로 소득 활동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지 않아도 되는 중산층 학생들과 달리 저소득층 학생들은 대학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시간과 금전을 교환해야만 했다. 이러한 교환은 참여자들에게 중산층 학생들과의 격차를 감각하게 하고 피로감과 압박감을 주었다.
그럴 때 스트레스가 되죠. 쉴 시간이 하나도 없다는 게. 한 학기에 한 번은 폭주하는 것 같아요. 과제랑 팀플이 몰려있는 시즌인데 교지 만드는 일도 해야 할일 이 너무 많고. 알바를 안 하면 생활비가 충당이 안 되니까. 막상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과제도 대충하게 되고 교지 만드는 일도 전격적으로 온 힘을 못 쏟게 되고. 알바 가서는 내내 졸고 있고. 어떤 것도 제대로 못하지만 어떤 것도 놓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이 되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많았던 것 같아요. 내가 알바만 이틀 빠졌어도 적어도 하루는 자도 나머지 하루나 더 생겨서 다른 일을 더 좋게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 많이 하고 그랬었죠. 내가 지금 이거 안 하고 있으면 잠이라도 자고 쉴 텐데. 퇴근해서 바로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진우)
작년에 생활비가 급해서 편의점 주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근데 기말고사랑 겹쳤어요. 이틀 밤을 새고 시험 공부하면서 또 밤새고, 시험 끝나고 다시 아르바이트 있으니까 또 밤새고. 1주일은 제대로 잠을 못 잔 거죠. 그 다음에는 새벽 3시쯤에 끝나는 호프집에서 주 3일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이때는 중간고사랑 겹쳤었는데. 아르바이트하고 시험 보다가, 심지어 시험 보는 날 중에 아르바이트가 껴있기도 하고, 시험 끝나고 또 아르바이트가 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폐해져요. (해경)
매주 이틀 동안 16-18시간씩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진우는 수업과 교지 활동,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하고, 어느 일에도 깊게 몰입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교내 근로에 탈락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야간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던 해경은 시험기간과 아르바이트가 겹치면서 생활이 피폐해졌던 경험을 했다. 진우와 해경은 상당한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투여하면서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시달렸고, 아르바이트 없이 학교를 다니는 주변인들에게 격차를 느끼곤 했다. “학생이라면 공부가 ‘일’이므로 공부를 한 후에는 휴식이 있어야 하고 노동자라면 노동 후에 휴식이 있어야 하지만 일하면서 공부하는 저소득층 학생에게는 공부도 ‘일’, 일도 ‘일’로 공부 쪽으로든 노동 쪽으로든 노동력을 재생산할 시간이 없다”(김효진, 2010: 51).
똑같이 욕심이 많을 때 생활비에 대한 걱정이 없는 친구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욕심 있는 대로 다 하는데. 그러지 않은 사람에겐, 그렇게 했을 땐 기회비용이 있다는. 생활비도 벌면서 내 욕심도 채워야 하니까. 내 욕심을 채우는 게 때로는 죄가 될 때가 있는. 그러기 때문에 돈 없으면 노오오력을 해야 한다는 걸 많이 느껴요. 돈이 없는데 하고 싶은 건 많고 그것까지 다 해야겠으면 결국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돈도 벌면서 그것도 해야 하는 게 되는 건데. (미지)
미지는 주변 친구가 생활비에 구애받지 않고 공모전을 준 비하고 ‘스펙 쌓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열심히 할 때 포기하는 게 얼마나 되느냐”에서 경제적 배경이 작동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소득층 대학생은 생활비와 자기계발의 욕심을 함께 채우기 위해 시간을 더욱 쪼개고 쪼개야만 하며, 그런 과정에서 때로 자신의 욕심을 죄처럼 느끼기도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여유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투여했다. 참여자들은 일을 하며 피로감과 스트레스, 중산층 학생과의 격차감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한 달 살이”(미지) 생활을 반복해나가야 했다.
➋ 소비수준·문화생활·자기계발·취업준비의 불/가능성
인터뷰 참여자들은 아르바이트뿐만 아니라 소비수준, 문화생활, 자기계발, 취업준비 등 대학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격차와 제약을 인식했다. 참여자들마다 격차나 제약을 감각하는 정도는 달랐지만, 격차나 제약을 느낀다는 것 자체는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1) 소비수준과 문화생활
대학이라는 소비주의의 공간에서 참여자들은 거주지뿐만 아니라 쇼핑, 식사, 문화생활 등 다양한 지점에서 격차를 인식했다. 때론 ‘택시를 타는지’(수연)와 같은 사소한 차이가 소비수준의 리트머스 종이가 되기도 했다. 참여자들은 소비수준에서의 격차에 대하여 이이기하면서 학과 생활에 활발 하게 참여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잦았던 1학년 때를 주로 언급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타격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많이 작아지고 위축됐던 것 같고. (…) 아무리 용돈이 없고 힘들다고 하는 아이라도 부모님의 카드나 돈으로 그런 걸 사는 걸 보면서 힘들다고 해도 저 아이들은 어쨌든 지원이나 기댈 곳이 있구나. 그런 데에서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결국에 난 저 부류는 아니니까 같이 어울리긴 힘들겠구나. (지연)
지연은 1학년 초반에 친해진 친구들과 쇼핑, 식사 등에서 소비수준의 격차를 느끼고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소비수준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고등학교시기에 비해 대학교에서는 화장품, 옷, 염색 등 많은 부분에서 친구들과 격차가 명확하게 다가왔다. 지연은 먼저 잘 다가서는 성격을 가졌었지만, 1학년 초기의 경험 이후로 주로 혼자 다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현은 학생회비, 과잠바, 엠티 등으로 생활비가 100만원이 넘게 나갔던 1학년 3월이 특히 힘들었다고 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과 행사에 참여하고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술이나 밥을 함께 먹어야 하는데,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잔고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다. 서윤은 “술자리가 부담되더라도 다음날 굶으면” 되고, “고등학교에 비해서 대학교에서는 마이웨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나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누군가와 밥을 먹으려면 “통장잔고를 확인해야 하고” “애들이랑 어울리기 위해서 내 한 끼를 희생해야 하고, 부실하게 먹는” 경험들에서 자신의 소비수준을 인식 했다.
문화생활은 소비수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참여자들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비용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고, 부모님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라는 장애물도 있었다. 참여자들은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문화 활동이나 해외여행에서 가장 격차를 느꼈다.
락페(락 페스티벌)를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생 되면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대학을 오고 나서 저한테 방학은 항상 돈을 벌어야 하는 시간이었거든요. 락페를 가는 순간, 한 3일을 간다고 하면 3일 티켓이 2-30만 원 할텐데 거기서 빠지고. 거기서 먹고 놀려면 20만원은 나갈 거예요. 3일 동안 락페를 가려면 그만큼 일을 못해요. 거기서 내 일당이 빠지는 거예요. 그러면 거의 100만 원이 마이너스가 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결국 한 번도 못 갔어요. (진우)
제 개인적인 건데 한 3만원 정도가 폭인 것 같아요. 3만원 아래는 그래도 사치한다는 느낌으로 쓸 수 있는데 3만 원이 넘어가면 당장 생활비를 계산해야 되니까. 기분 따라 보러갈 수 있는 건 연극 정도가 끝이었던 것 같아요. 거의 여행 가듯이 모아야 되니까 저희 같은 경우엔. (성준)
진우는 고등학교 때부터 락 페스티벌에 가고 싶었지만, 적지 않은 비용이 소모될 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빠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성준은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한 번쯤 보러 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심리적 한계는 3만원 정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참여 자들도 콘서트, 뮤지컬, 음악회, 뮤직 페스티벌 등 적지 않은 비용이 요구되는 문화 컨텐츠를 소비하는 것에서 자신의 경제적 한계를 인식했다. 또한 따로 돈을 모으지 않고 부모님께 받은 생활비로 이러한 문화생활을 즐기는 주변의 중산층 학생들을 보며 격차를 느끼기도 했다.
1학년 방학 때 애들이 ‘우리 방학에 해외로 놀러 갈래’라고 말하는 게 너무 충격이었죠. 친구들이랑 놀러가는 걸 해외로도 갈 수 있구나. 동네 요 앞에 가는 게 아니고. (지연)
제일 대표적인 게 여행 같거든요. 영화 정도 볼 수 있고 밥, 커피(할 수 있는데). 여행 가는 건 여유자금이 지금 당장 얼마가 있어야 가능한 거거든요. (…) 너무 아무렇지 않게 외국을 드나드는 친구들을 보면 약간. 외국이라는 게 나는 되게 힘들게 나갈까 말까한 곳인데 저렇게 많이들 나가는구나. 요즘은 그런 사람이 많구나. 아무래도 그런 박탈감 같은 게 좀 있죠. (수연)
해외여행 역시 많은 참여자들에게 격차를 느끼는 주요한 사례로 언급되었다. “한 달 살이”(미지)를 반복하며 돈을 모은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운 저소득층 대학생에게 부모에게 목돈을 지원받아 해외를 여행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이질적이다. 참여자들은 일상에서는 큰 차이를 느끼지 않다가도 ‘방학마다 자연스레 해외여행을 나가는’ 중산층 친구들의 모습에서 격차를 실감하게 된다.
(2) 자기계발과 취업준비
‘명문대’는 자기계발과 ‘스펙쌓기’, ‘계층 상승의 가능성’으로 상징된다. 사회 일반에서 계층 상승 전망에 대해 과거처럼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더라도, 여전히 ‘명문대’와 ‘중상류층’은 연결 지어 이야기된다. 자기계발과 ‘스펙쌓기’는 외부에서 ‘명문대생’에게로 투사되고 ‘명문대생’ 스스로가 체화하고 실행하기도 한다.
자기계발, 좋은 직장을 위한 ‘스펙쌓기’는 ‘명문대’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된 압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모두가 압력을 느낀다는 것이, 곧 모두가 그 압력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상황 아래에서 자기계발은 공기처럼 존재하지만, 그것의 실현 불/가능성은 개인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좌우된다. 누군가는 압박과 기대 속에서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지만, 무수한 누군가들은 질식하며 불가능성과 조우한다. 계급의 교차선은 ‘명문대’ 안에도 실재한다. 아르바이트로 시간과 생활비를 교환하지만 시간도 생활비도 모두 부족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저소득층 ‘명문대생’에게 자기계발은 실현 불가능한 압력이다. 인터뷰 참여자들은 학원에 다니는 것에서부터 교환학생, 어학연수 등 자기계발과 취업준비의 영역에서의 격차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류에 있는 친구들은 확실히 말하면 뭔가 비슷한 루트를 많이 겪어요. 1학년 때는 과생활을 열심히 하고 2학년 때는 아르바이트, 동아리, 학생회를 해본다거나 자기 근처에서 손뻗을 수 있는 거리로 나가고, 3학년 때는 교환학생이나 인턴 같은 좀 더 멀리 있는 거를 하고, 4학년 때는 취업준비를 한다거나 학회를 한다거나 점점 외연적으로 많이 뻗어나가는데. 저소득층 친구들은 빨리 깨닫는 친구들은 빨리 포기를 하고 집중을 해요. (…) 많은 경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교환학생 가 는 건 솔직히 꿈도 아예 못 꾸고 이러는데. 많은 친구들은 정석적인 대학생루트라는 것들이, 저희 학교만 해도 많은 친구들이 교환학생 가는 걸 굉장히 당연하게 느끼고. ‘교환학생 3학년 때쯤 당연히 가는 거 아닌가.’ 그런 것들이 저소득층 친구들한텐 당연하지 않다는 거. 그런 것들이 좀 많이 차이인 것 같아요. (민성)
토익, 토플 배우는 아이들. 운전면허 기본이라고 하라는 애들 보면 이질감 느끼죠. 사실 따고 싶고 따야 되는데 비용이 없으니까. 토익 학원 다닐 돈도 없고, 운전 면허 학원 다닐 돈도 없고, 뭐 도저히 할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없고. 다 핑계라면 핑계고 하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 상황에서는 그게 안 되는데. (지연)
민성이 말하는 “주류 대학생의 루트”는 흔히 ‘명문대생’의 자기계발 공식처럼 이야기되는 것이다. 학과생활, 동아리나 학생회, 교환학생·인턴·공모전 등을 거쳐 취업준비로 나아가는 ‘대학생’의 이미지는 ‘정석’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계발은 어디까지나 사회경제적 배경이 뒷받침되는 중산층 (‘명문대’) 학생들에게만 가능하다. 참여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듯, 저소득층 ‘명문대생’에게 이 모든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어느 정도 다들 공모전이나 스펙, 교환학생 그런 걸 차곡차곡, 그렇게 까진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쌓으려고 다들 하고 있고.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걸 할 시간도 도저히 없거든요. 안 나요. 지금 활동하는 것도 있고 알바도 해야 되고. 하려면 하겠죠. 더 쪼개서 하려면. 그럴 만큼 여유도 없는 나를 보기도 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하죠. 난 뭘 해야 하지. 더 힘든 건 제 진로나 그런 거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볼 여유를 대학생활하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어요. (진우)
취업준비는 요즘 모두가 매달리는 것 같고요. 차이가 있다면 그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는 기반?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학원을 다니잖아요. 그러려면 학원비가 필요하고 그걸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걸 지원받을 수 있는 학생들이고. (…) 다들 자기계발에 매달리는데. 그것을 여유 있게 할 수 있는 환경 같은 게 다른 거죠. 일을 해야 하거나 당장 내 앞에 닥친 어떤 과제라든지 정규학기가 벅차다보면 취업준비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고.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간다든지 폭 넓게 대외활동을 한다든지. 보통 제 주변의 저소득층 학생들은 혹은 여유 있다고는 할 수 없는 학생들은 휴학도 잘 안 하더라고요. 빨리 졸업을 해서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게 있어서. 당연히 뒤쳐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것 같아요. 모든 면에서. (수연)
진우는 진로에 대해 깊게 고민해볼 여유조차 없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스펙을 쌓고 있는 주변 친구들을 보며 조바심이 났다고 말했다. 수연은 자기계발이나 취업준비는 모두가 매달리는 일이지만, 경제적 격차가 기반과 환경의 차이를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저소득층 학생들은 경제 활동의 압력 등으로 휴학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당연히 교환학생 가야지” 장난 식으로 하는 말이어도 충격으로 왔던 거죠. (…) 교환학생이나 유학이나 생각하는데 너무 딴 세상 얘기죠 . (지연)
엄청나게 격차가 느껴지진 않는데. 당연하게 교환학생 가는 거고. 방학 때마다 여행 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에서는 좀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수연)
나는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쟤네는 그냥 갔다 오고 싶으면 갔다 올 수 있구나. 교환학생 얘기할 때도 그렇고. “교환학생 갔다 와야지. 교환학생만한 게 어디 있다고” 하는데. 교환학생 가면 등록금이야 그렇다 쳐도 비행기 값 대주는 것도 아니고 생활비 대주는 것도 아닌데. 그게 다 돈인데. (성준)
인터뷰 참여자들에게 교환학생은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요구되는 불가능한 선택지다. 일상에서 엄청난 격차를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수연이나 성준도 당연하게 “넌 왜 교환학생 안 가?”라고 묻는 친구들을 마주할 때 격차를 인식했다. 자기계발이나 취업준비는 ‘모두가 하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계층 차이에 따라 불/가능성이 명확히 구분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➌ 숨 막히는 일상, 욕망의 포기
저소득층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은 인터뷰 참여자들의 대학생활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많은 참여자들이 ‘통장 잔고를 걱정해야 하는 일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밥 약속을 하려고 해도 통장잔고가 얼마 있는지 생각하게 되고”(서윤), “통장에 만원도 안 넘은 게 보이면 엄청 스트레스 받고 힘 들 때가 많았”(아현)다는 참여자들의 경험처럼 통장 잔고는 일상을 옥죄는 그물과도 같았다.
쪼들리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저 스스로 느낌이 컸던 것 같아요. 엄청 싫었고. 그 느낌이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정해진 예산) 그걸 생각한단 거 자체가. (성준)
정신이 정말 피폐해지는 것 같아요. 계속 돈 생각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계속 뭔가를 걱정해야 되고 뭔가를 막아야 되고. 여기까진 이거로 살아야 된다든지. 뭔가 버티고 막아야 되고 통장잔고를 걱정해야 하는 삶을 반복하다보니까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지는 것 같고 여유도 없어지고 좀 그런 게 있죠. (수연)
부족한 한 달 생활비와 씨름하는 일상은 참여자들에게 커다란 압박감과 피로감을 줬다. “오늘 15,000원을 썼으면 내 일은 5,000원으로 버텨야 하는”(해경) 대학생활은 숨막힘 그 자체였다. 탈출구가 없는 일상의 반복은 더 나아가 욕망의 포기나 ‘자기 탓’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 욕망이 있죠. 꾸미고 싶고 날 더 잘 보이고 싶고. 그런 것에 관심도 많고. 그런 걸 얻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 욕구를 줄이다보니까. 이제는 사람들한테 “쇼핑하는 거 귀찮아서 싫어해”라고 말하는 게 진짜 귀찮아서 싫은 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어도 해봤자 아이쇼핑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싫어서 안 하는 거, 내가 선택적으로 내 취사선택으로 안 하는 거야.
(…) 내가 하고 싶어 하지 않을지라도 모두가 하는 것인데. 내가 안 하니까 뭔가 도태되어 가는 느낌이고. 정말 이걸 안 해도 되는 건가. 정말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건지. 못하기 때문에 하기 싫다고 명명을 내리는 건지. (…) 더 좋아지고 싶고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게 불가능하게 막혀져 있으면 그냥 여기서 만족하고 사는 게 그나마 덜 상처받고 덜 괴로운 게 아닐까. 괜히 그런 거 가졌다가 안 돼서 더 괴로울 바에야. 내가 뭘 원해도 지금까지 뭘 원한 걸 한 번도 온전하게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가진다 하더라도 가족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내 어려움을 계속 증명하고, 나에게도 낙인을 찍고. 그런 게 싫으니까. 그럴 바에야 아예 가져버리지 말자. (지연)
지연은 욕망하는 것들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욕구를 줄여 나갔다. “욕망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말하며, 패션이나 뷰티에 대한 욕망부터 ‘더 나은 삶’에 대한 전망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욕망의 좌절을 불가능이 아닌 선택의 문제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좌절에 대한 합리화임을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었다.
나도 진짜 사주고 크게 쓰고 좋은 거 먹고 나도 좋아하는데, 그런 걸 내가 신경 쓰고 자기 검열해야 하는지. 차라리 나한테 그런 욕망이 없던가. ‘나는 왜 그걸 원해 가지고 이럴까’라는 생각? 연애할 때도 그런 생각 많이 느끼는데. ‘나도 해주고 싶은데. 나의 욕심인 걸까. 나는 왜 욕심이 있어가지고’ 좀 그런 느낌. (…) 내가 만약 사람 만나는 걸 안 좋아했으면 나았을까. 그냥 아예 사람 안 만나고 그럼 돈은 안 나가잖아요? 근데 나는 사람 만나는 게 너무 좋은데. 내가 좋은 거를 참아야 하고 내가 바뀌어야 되는 거라는 게 가끔은 억울해지는 것 같아요. (…) 가난에 대해 얘기할 때 그러잖아요. 좀 참고 돈을 벌고. 그럼 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냐고. 근데 내가 무슨 돈을 버는 기계도 아니고. 저도 뭔가 쓰고 싶을 때 쓰고 나도 그렇게 할 줄 알고, 하고 싶은데. 왜 나는 참아야하는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 가정 탓은 안 되는 거고 그럼 내 탓밖에 안 되는 거니까. 결국은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게 쌓이고 쌓이는. 그런 게 싫은 것 같아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는데 그걸 내 탓으로 돌리고 그 악순환을 계속하는 게 좀 별로인 것 같아요. (미지)
미지는 부족한 생활비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사주고 크게 쓰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을 검열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로는 자신의 욕심을 원망하거나 욕망이 없어지길 바라기도 했다. 미지는 저소득층이라는 경제적 한계로 욕망을 충족하지 못할 때, 그 좌절을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욕망의 좌절과 자기 탓이 쌓이고 쌓이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➍ 안전망의 부재, 절벽 앞의 삶
저소득층 ‘명문대생’으로서 인터뷰 참여자들은 ‘통장 잔고를 걱정해야 하는 일상’에 놓여 있었다. 더 나아가 욕망의 좌절에 고통받지 않으려 욕망 자체를 포기하거나 좌절의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리기도 했다. 참여자들은 가족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혼자’ 힘으로 생활해간다. 공적 안전망이 부재한 자리에 놓여 있는 가족이라는 사적 안전망은 철저히 계층적으로 작동한다.
걔네는 부모님한테 돈이 있는데 나한테 돈이 없는 거고. 나는 돈이 없어도 부모님은 돈이 있으니까. 아예 돈이 없다는 그 개념 자체가 잘 없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엔 내가 돈이 없고 부모님도 돈이 없고. 내가 돈이 있는 게 중요한데 내가 돈이 없으니까. (…) (부모님 이) 빌려줄 돈이 없다는 그 개념 자체를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할 때는 확실히 좀 차이가 나요. 특히 목돈, 큰돈 얘기가 나온다거나 부모님 얘기가 나온다거나. 부모님한테 돈이 없을 수가 있다는 개념 자 체가 없다는 게 제일 격차가 크게 느껴져요. (…) 걔네가 모자란 거랑 제가 모자란 건 개념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그 느낌이 굉장히 컸어요. 너무 거창한 걸 수도 있는데 저는 모자라다는 게 삶에 대한 위협 그 자체니까. 그 점에서 좀 차이가 컸던 것 같아요. 절벽에 서있는 그런 느낌이었죠. 걔네는 밑에 트램펄린이 있으면 저는 그냥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거니까. 그게 압박감으로 오고. (성준)
변수가 생겼을 때 그거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 스트레스가 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숨 쉬는 것도 돈인데 내가 왜 이 실수를 해서. 결국 자기 탓을 하게 될 때 스트레스가 되죠. 내가 좀 실수를 할 수 있는데. 나도 인간이니까. 그것 때문에 비용이 들어서 이런 저런 변수를 계속 고민해서 뭐가 제일 나을까를 골치 아프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난 왜 이래야 할까’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너무 힘들다. (미지)
성준과 미지는 ‘목돈 이야기’(성준)나 ‘변수가 생겼을 때’(미지) 주로 격차를 느꼈다. 성준에게 ‘부모님에게 돈이 있는가’는 중산층 친구들과 자신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부모님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친구들은 ‘모자라다’는 개념 자체를 자신과는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똑같이 절벽 끝에 서있게 되더라도 그 밑에 트램펄린이 있는지, 낭떠러지가 있는지는 계층의 차이가 결정한다. 미지는 변수에 대응하는 방법에서 경제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보았다. 자신과는 달리 갑자기 발생한 변수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중산층 학생들의 모습은 격차로 다가왔다.
3. 저소득층 정체성과 ‘명문대생’의 정체성
➊ 부양 부담과 계층 상승에 대한 회의적인 전망
저소득층 ‘명문대’ 학생들은 경제적으로는 하층에 속하지만 대학서열상으로는 상층에 속하는 복잡한 위치를 가지게 된다.(김효진, 2010: 35) 그러나 본 연구에서 저소득층 ‘명문대생’의 대학생활은 전반적으로 저소득층 대학생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틀지어졌다. ‘명문대생’ 정체성은 “과외를 할 수 있다”(미지, 서윤)거나 중산층 학생이라는 준거집단과의 격차를 인식할 때나 강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뷰 참여자들은 각기 다른 맥락 속에서 성장했고, 전공도 대학생활도 진로 계획도 모두 다양했다. 그럼에도 부양에 대한 압박과 낮은 소득 전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위하여 충분한 시간과 지원을 확보할 수 있는 중산층 대학생은 자기계발을 통해 계층의 유지 내지는 상승을 전망한다. 부양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돈 대신 꿈’을 선택할 수도 있다. 반면, 저소득층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틀 지워진 ‘명문대생’은 ‘명문대’에 기대되는 이미지와 달리 경제적 압력, 부양책임 등으로 ‘꿈’ 과 ‘돈’ 모두에 회의적이다.
바람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거고요. 만약 그게 안 된다면 솔직히 모르겠어요. 그때는 그때 생각해야 될 것 같아요. 소득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희 부모님이 너무 적게 벌기도 하고. (…) 내가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고 취업을 하면 그래봤자 백만원 후반 벌지 않을까? 많이 버는 직업은 가질 수 없을 것 같아요 취업을 하면. (수연)
어머니가 나이가 많으시고. 공공근로, 과외 이런 일을 하시고. 일을 오랫동안 못하실 텐데 외동딸이니까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엄마가 백만원 정도를 버시는데 이걸로도 두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높은 임금을 받아야겠다는 욕심은 별로 없고. 활동가를 해도 백만원 정도 버니까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그걸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지금 대학원에 왔는데 내가 돈을 쓰는 사람이 되는지, 빨리 돈을 버는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했고.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일하실 수 있을 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고,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건 있는 거죠, 어머니가 연세가 많으시니까. 얼른 일해야겠다. (아현)
수연은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그 전망은 불투명하다. 아현은 자신의 학과에서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꽤 지원해주기 때문에 대학원 진학이 가능했던 것이며, 그렇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현은 부양 부담이 커지기 전에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어머니 가 소득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아현에게는 높은 소득을 얻는 것보다 빨리 직장을 잡는 것이 더 중요했다. 두 참여자는 모두 소득 전망에 있어서 부모님의 소득 수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수연은 아무런 생각이 없다거나 그래봤자 백만원 후반이라고 생각했고, 아현은 백만원 정도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자가정이다 보니까 지금은 데면데면한 사이여도 결국 부양책임은 저한테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부양책임이 저한테 항상 엄청난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엄청 끔찍한 생각도 하죠. 어머니가 허리에 디스크가 있으신데 당장 그게 너무 악화돼서 일을 못하신다고 하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사실 9급도 그렇게 생각 하다가 나왔던 거거든요.(…) 주변에 9급 얘기하면 다 미친놈이라고 하거든요. “xx대 나와서 9급 쪽팔려서 어떻게 하냐. 7급을 치든 고시를 치든 해야지 무슨 9급 을 이야기 하냐.” 근데 그 사람들은 출발점이 달랐으니까. (진우)
저는 당연히 9급을 생각했죠. 아무래도 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근데 여기 분위기는 대부분 7급이나 5급이 기본이고 9급은 떨어지는 사람들, 그런 느낌이 강하니까. 거기서 이질적인 느낌. (…) 저는 페이는 크게 생각이 없어요. 일반적으로 백만 원은 넘을 텐데. 결혼 생각이 없으니까 결혼자금을 모을 일도 없고. (…) 엄마도 빨리 졸업해서 돈 벌라는 말을 하시기도 하고. 사실 이 계층을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탈피는 하고 싶은데 못 할 걸 이미 알아버린 느낌. 그래서 못할 거라고 단념을 해서. 기왕 못할 건데 굳이 자괴감 들고 실망하고 더 괴로워지니까. 이게 나의 삶이고 여기에 만족하고 살아야지. (지연)
진우와 지연은 어머니에 대한 부양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의 건강 문제는 부양 부담을 가중시켰다. 두 참여자는 현실적 제약을 고려하여 9급 공무원을 목표로 했다. 7급 혹은 5급 공무원 시험은 상당한 시간과 가족의 지원을 요구하기 때문에 선택지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7급 혹은 5급 시험을 보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9급 시험을 보는 것은 ‘xx대생에겐 부끄러운 일’이었다. 계층의 차이는 ‘명문대생’ 내부에서도 기대와 전망의 수준을 구별 지었다.
지금도 집에 돈 버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엄마도 작년 초까지는 일을 했다가 몸이 안 좋아져서 그만 두고. 언니가 그나마 일을 계속 했는데 몸이 아파서 일을 그만두고. 그래서 지금은 아무도 경제활동을 안 해서. 그러다보니까 더 조급해지는 게 없지 않아 있는 것 같고. 그런 생각도 해요. 돈이 정말 중요하면 대기업을 미친 듯이 넣고. 서른 군데, 사십 군데 넣으면 될 일인데. 그래도 아직은 하고 싶은 일,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돈을 적게 줘도 할 수 있는 일에 넣고 있는데. 그 기한도 내년까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길게 잡아도. 만약 내년까지 안 된다면 진짜, 과외로 장사할 거라는 생각도 항상 하는. (미지)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미지는 채용 규모가 작고 임금 수준은 낮지만, 자신이 원하는 미디어 관련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이 부재해 취업과 부양의 압력이 커져가고 있었다. 미지는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하는 것도 내년까지가 한계라고 보고 있었다.
현재 한국의 취업 시장에서 높은 연봉의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확보하여 자기계발과 취업 준비에 매달려야 한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중산층 ‘명문대생’에게 집중되어 있다. 인터뷰 참여자들은 대부분 경제 활동을 하는 가구 구성원의 부재 혹은 확대되는 부양 부담으로 구직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높은 연봉의 직장을 기대하지 않았다. 구직 활동에 요구되는 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는 자기계발과 계층상승으로 상징되는 공간이지만, 사회경제적 배경은 개별 학생의 대학생활과 전망을 다르게 조건 짓는다.
➋ 저소득층 정체성과 ‘명문대생’ 정체성의 경합
인터뷰 참여자들은 저소득층 ‘명문대생’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대부분 저소득층이라는 한계에 의해 제약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명문대생’이라는 지위는 참여자들의 정체성에 갈등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xx대 다녀? 그럼 똑똑하고 취업 잘 되고 사회적으로 이미 인정받았고 안정되어있겠네’라고 생각하는 것과 제가 느끼는 계층의 위상은 굉장히 다른 거잖아요. 그런 데서 오는 괴리감이 가끔 있어요. 제가 느끼는 감정하고 밖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다르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저소득층, xx대생, 그 두 개가 합쳐졌을 때 더 절망적으로 느껴져요. xx대생이면 뭐하냐. 저소득층인 게 너무 크고 발목을 많이 잡고 그 것 때문에 못하는 게 너무 많은데. (민성)
민성은 외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자신이 느끼는 계층의 위상이 굉장히 다르다고 말했다. 외부의 사람들이 저소득층 ‘명문대생’에게서 ‘명문대생’에 방점을 찍고 계층 상승을 기대한다면, 자신은 ‘저소득층’이라는 조건이 자신의 삶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명문대생’의 지위와 그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전망은 저소득층이라는 한계에 발목 잡힌다.
저는 1호선을 타고 통학했었는데. 시청 쪽에서 친구를 만나고 내려온다고 치면 점점 뭔가 나에게 주어지거나 스스로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서울에 왔을 땐 어떻게든 서울 사람들한테 맞춰가려는 게 큰데. 그 사람들은 나보다 위에 있고 나는 그보다 밑에 있기 때문에 맞춰가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뤄지는 데. 1호선을 타고 쭉 내려가면서 집으로 왔을 때 그 지역에선 제가 유별나게 뛰어난 사람인 거예요. 괴리감이 생각보다 크거든요. (…) 고향친구들이랑 동네 공원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얘기를 하면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고 배달하는 친구도 있는데. 그 사람들 앞에선 제가 엄청나게 미래가 창창하고. 더 이상 그들 앞에선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양쪽 어디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는, 항상 괴리가 있는. 여기도 내 곳이 아니고 여기도 내 곳이 아니고. (…) 간신히 쫓아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포기했죠. 안 된다는 걸 아니까. (…) 그게 진짜 심했던 게 1학년 때인 것 같아요. 이제 와서는 덤덤해진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아예 선을 그었다고 해야 하나. 그냥 아예 다른 사람. 아예 출발선이 다르다. 그나마 이정도도 한 게 다행이다. (진우)
진우는 저소득층 정체성과 ‘명문대생’ 정체성 간의 괴리 감이 생각보다 크다고 이야기했다. 그에게 ‘서울(=학교)’은 주변 사람들을 쫓아가려고 노력해도 저소득층 정체성으로 인해 닿을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이다. 이제는 서울 사람들을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출발선이 다르다”고 선을 그어버렸다고 했다. 반면, ‘고향’에서 자신은 저소득층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별나게 뛰어난 사람”이고 친구들에게는 “미래가 창창”하다고 여겨진다. 진우는 어느 곳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없다고 생각했고 괴리감을 느꼈다.
그런 딜레마가 있었던 것 같아요. 구조적으로 봤을 때는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서열화 때문에 안에서 불평등이 생기는 거니까 줄어들어야지. 근데 저한테는 그게 사다리가 되니까, 먹고 사는 길이 되고. 최소한 과외라도 할 수 있는 길이 되는데. 만약 서열화가 줄어들면 생기는 불이익에 대해서 ‘나는 그거를 감수하고라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했을 때 항상 고민, 생각보다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요. (…) 나한테는 xx대생이라는 정체성이 먼저인지 저소득층이라는 정체성이 먼저인지. 그런 게 충돌하거나 이상하게 결합할 때가 있어서. (미지)
미지는 저소득층과 ‘명문대생’이라는 정체성의 모순적 결합을 인식하고 있었다. 저소득층 ‘명문대생’은 불평등의 피해자인 동시에 학벌의 수혜자이기도 한 것이다. 미지에게는 ‘명문대생’으로서 얻는 이익과 저소득층으로서 겪는 불편함 혹은 불평등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경합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소득층 ‘명문대생’은 모순적 지위의 결합이다. 인터뷰 참여자들의 대학생활이 저소득층이라는 사회경제적 배경에 의해 틀 지워질 지라도, ‘학벌’의 우위는 유무형의 이익을 제공 한다. 이들은 ‘학벌’이라는 지위를 소유함으로써 저소득층 정체성으로만 귀속될 수 없고, 바로 그 사회경제적 배경 때문에 ‘명문대생’이라는 집단에도 온전히 포함될 수 없었다. 인터뷰 참여자들은 “고향”(진우)친구, 가족, 더 나아가 외부인들에게는 ‘명문대생’의 지위로 부각됐지만, 자신은 ‘명문대생’이라는 지위와 가능성을 압도하는 “저소득층이라는 유리천장”(지연)에 직면했다. 이러한 모순의 결합은 인터뷰 참여자들에게 갈등과 경합, 더 나아가 소외감과 좌절감을 야기했다.
Ⅳ. 나가며
처음 이 작업을 기획하게 된 것은 스스로 가진 저소득 층/‘명문대생’이라는 정체성으로서의 경험과 고민 때문이었다. “돈은 행복은 아니지만 자유”(엄기호, 2010)라는 말에 사무치게 공감하며 보냈던 대학생활은 다른 저소득층 ‘명문대생’은 어떤 대학생활을 겪고 있고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옮겨갔다. 저소득층 ‘명문대생’의 대학생활, 정체성과 전망 등을 살펴봄으로써 단일적인 주체로 재현되는 대학생 내의 이질성을 드러내고 저소득층 대학생의 삶을 가시화하고 싶었다. 참여자들과의 인터뷰는 저소득층 ‘명문대’ 학생들이 공유하는 서사와 특징 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의 대학생활은 주로 저소득층이라는 사회경제적 배경에 의해 한계 지어졌다. 중산층 이상 출신의 대학생들이 담론에서나 실제 구성에나 다수를 차지하는 ‘명문대’에서 저소득층 대학생은 이질적인 소수자였으며, 쉽게 지워졌다. 인터뷰 참여자들은 중산층 학생들을 준거집단으로 아르바 이트, 소비수준과 문화생활, 자기계발, 진로계획, 소득 전망 등에서 크고 작은 격차를 인식했다. 이러한 격차는 욕망의 포기나 ‘자기 탓’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가족이라는 사적 안전망의 부재는 불안함과 피로감을 주었다.
자기계발과 ‘스펙 쌓기’로 상징되며, 계층 상승을 기대 받는 ‘명문대’ 학생임에도, 연구 참여자들의 대학생활 전반은 “저소득층이라는 유리천장”(지연)에 의해 크게 영향 받았다. “시장과 무한한 친화력을 발휘하는 대학은 학업능력의 계층별 차이를 상쇄할 명분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김효진, 2010: 55). 연구 참여자들의 경험은 대학교육 과정에 사회 불평등이 개입함으로써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기를 계발하는 주체의 이면은 자학하는 주체(엄기호, 2010: 61)이다. 자기 계발의 희망이 허락된 자와 자학하게 되는 자는 ‘학벌’로 한 번, ‘계층’으로 또 한 번 구분된다. 저소득층 ‘명문대생’은 계층의 구분에서 탈락한다.
계층 상승 내지 중산층 진입을 희망하는 참여자들도 있었지만, 이는 본인들이 덧붙이듯이 그저 막연한 바람에 불과 했다. 오히려 회의적인 전망을 가진 참여자들이 더 많았다. 대부분의 참여자는 높은 소득을 욕망하거나 전망하지 않았다. ‘내 집 마련’이나 ‘가족의 형성’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 참여자도 없었다. ‘학벌’에 대한 신뢰도 강하지 않았다. 준거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중산층 학생들이 ‘정석적인 대학생 코스’를 밟아가는 동안, 참여자들은 경제적·시간적 빈곤으로 그 어느 것도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어떻게 살겠지’ 내지는 ‘부/모님과 내가 쓸 돈이면 괜찮다’며 임금은 낮지만 자신이 원하는 진로를 선택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인터뷰 참여자들은 다른 저소득층 대학생들과 달리 ‘명문대생’이라는 위치에 놓여있었고, 이는 지위불일치 혹은 정체성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외부인들이 ‘명문대생’에 방점을 찍는 것과 달리 당사자들은 ‘저소득층’에 훨씬 더 무게를 두었지만, 모순적인 정체성의 결합은 그 어떤 집단에 도 온전히 귀속될 수 없게 만들었다. 저소득층 대학생으로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학벌’이 주는 유무형의 이익을 어떤 형태로든 획득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학벌’의 이익과 저소득층으로서의 문제의식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저는 운이 좋은 편”(성준)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검열하기도 했다.
본 작업이 드러낸 공통적 특징과 서사는 다른 저소득층 ‘명문대생’들에게도 공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인원을 대상으로 진행된 작업이기에 다른 이들에게는 공유되지 않는 사실이나 이 연구에서 나타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가 존재할 수도 있다.
이 작업의 한계는 명백하게도 그 대상이 저소득층 ‘명문대생’으로 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저소득층 ‘명문대생’이 저소득층 대학생으로서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지배된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명문대’라는 특수한 위치에 존재한다. 이들의 경험은 엄기호(2010)에서도 부분적으로 비교해볼 수 있듯이 비‘명문대’ 저소득층 학생들의 경험과는 분명히 구별될 것이다.
그럼에도 저소득층 ‘명문대생’의 대학생활에 관한 작업이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계층 이동의 주요한 수단으로 여겨지며 특히 빈곤층에게는 그 의미가 더 크다. ‘계층상승’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는 ‘명문대’ 학생임에도 저소득층이라는 한계가 결합하는 순간 전망을 상실하고 좌절한다면, 이 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평등이나 계층 상승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으며, 빈곤층에게는 도대체 ‘나아질’ 희망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묻게 된다. 이 작업이 한국사회에서 사회 불평등과 교육 불평등이 강력히 연결되는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지점이다.
사회 불평등이 대학생활과 생애기획, 전망을 구별 짓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빈곤 청년이라는 위치의 한 결로서 저소득층 대학생이 대학생활에 적응하고 학업성취를 지속함으로써 탄력성을 높여나가기 위해서는 대학과 사회에서 교육 과정과 조건, 결과가 평등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쏟아야 한다. 이는 대학교육의 공공성과 민주성 강화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이 작업은 저소득층 ‘명문대생’이라는 하나의 결을 드러냄으로써 이질적인 대학생의 결을 구체적이고 세심하게 탐색할 필요를 제기하고자 했다. 중산층 ‘명문대’ 학생들이 20대 혹은 청년 담론을 독식하고 과잉 대표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작업이 비서울 대학생 혹은 비대학생 청년을 은폐하는데 기여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저소득층 ‘명문대생’ 내지는 저소득층 대학생이 일반화되고 동질화되지 않았으면 한다.
참고문헌 김미란(2014). “대학생들은 부모의 사회계층에 따라 어떻게 다른 대학생활을 경험하고 있는가?”. 『교육사회학연구』 제24 권 제2호. 25-65. 홈페이지 중앙일보 대학평가(http://univ.joongang.co.kr) |
- 본 원고는 제13회 청년사회학도상 수상작 “저소득층 ‘명문대생’의 대학생활에 관한 연구” 에서 대학생활 부분을 중심으로 편집한 글입니다. 게재를 허락해주신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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