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본부에 상식을 바란다
–교지 중앙문화의 자유로운 편집권을 보장하라
노치원 전 편집위원
과거를 빠짐없이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다. 다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캠퍼스가 무려 3개가 된다던 꿈같은 얘기가 있었고, 커다란 운동장이 있었으며, 학과가 폐지된다는 사실을 하루 전에 통보받았던 학생들이 있었다. 물론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는 완공 직전인 경영경제관의 위용 앞에서 잊어지기 마련이다.
기억은 잠깐이지만 기록은 오래간다. 과거의 글들을 뒤진 후에야 기억의 전말을 살필 수 있었다. 중앙대는 서울, 하남, 인천(검단)캠퍼스, 총 3개의 캠퍼스를 가질 예정이었다. 캠퍼스 재배치라는 명분으로 학교본부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학과 폐지 사실을 전날에 통보받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가정교육과 학생들이 겪었다. 구조조정은 강행됐지만, 알다시피 현재 중앙대에는 하남과 인천캠퍼스가 없다. 구조조정의 명분이었던 신캠퍼스 사업은 실패했고 서울캠퍼스의 인구과밀은 심각했다. 학교본부는 고육지책으로 유일했던 대운동장을 파헤쳤다. 지금의 경영경제관은 대운동장이 있던 바로 그곳이다.
위의 사실은 모두 교지 중앙문화가 기록한 내용이다. 64 호의 <구조조정은 오래 지속된다>, 66호의 <신캠퍼스 연대기> 기사를 참고했다. 중앙문화는 중대신문이나 독립저널 잠망경과는 매체 특성이 다르다. 책과 유사한 형태 덕분에 길지만 심도 있는 분석을 실을 수 있어, 기록적인 측면이 강하다. 미래의 누군가 역시 2016년의 교내문제가 궁금 하다면, 중앙문화를 찾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중앙대 학우 입장에서 여러모로 고마운 매체다. 70호 역시 학교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뤘다. 구조조정의 연장선에 있는 광역모집과 프라임사업의 문제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학교본부의 비민주적인 의사결정기구를 체계적으로 파헤쳤다. 그리고 학교본부의 책임을 추궁했다.
하지만 학교본부는 매번 적반하장이다. 얼마 전 프라임 사업에서 보여준 본부의 태도는 오래전 신캠퍼스 사업 때와 다르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던 두 사업은 각각 구조조정과 광역화의 전제였다. 하지만 두 사업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전제는 무너졌지만, 10년도의 구조조정과 15년도의 광역화는 사실상 강행됐다. 사업 실패의 무능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대신 치부를 덮으려고만 했다. 여기서 중앙문화는 애꿎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전량 수거, 예산 삭감에 이어, 이제는 편집권을 빌미로 공간 문제를 건드린다. 탄압이라 봐도 무방하다.
학교본부는 더 이상 스스로의 격을 깎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읽어본 중앙문화는 본부에 대단한 걸 바라지 않는다. 잘못했으면 책임지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해 비판은 겸허히 수용하라는 상식을 바랄 뿐이다. 중앙문화의 공간과 예산, 그리고 자유로운 편집권을 보장하길 본부에 바란다. 학교의 건설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중앙문화의 기록은 계속 돼야한다.
불편하기에, 혹은 불편해야하기에
12-13 모 편집위원
첫 문장이 항상 어려웠다. 과제를 쓰든 편지를 쓰든. 하물며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상대로 쓰는 <중앙문화> 기사는 말할 것도 없다. 마법 같은 첫 문장을 꿈꾸곤 했다. 독자의 관심을 끌며 쉽게 몰입으로 이끌되 기사의 핵심을 인상깊게 전해줄 그런 아름다운 문장. 머리를 싸맸지만 곧 내 분수를 깨닫고 더 현실적인 고민을 마주해야 했다. 마법을 부릴 능력도 여유도 없었거니와 나를 지배하는 진짜 주문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자체검열’이라는 주문은 곧장 이 기사가 본부에게 트집 잡히진 않을지, 문제가 커져 다시 강제수거를 당하거나 예산 압박 같은 언론 탄압을 초래하진 않을지 스스로를 옥죄는 마법을 불러왔다. 편집위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본부의 취재 거부, 예산 집행과 같은 행정 지원의 비협조는 이 마법이 허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편집실이 자리한 학생문화관 철거 소식과 다른 매체, 동아리의 공간 협의 소식이 들려왔지만 교편위가 낄 자리는 없었다. 마침내 본부는 공간을 미끼로 자체검열을 넘어 사전검열의 가능성마저 농후한 ‘미디어 센터 운영규정’으로의 편입을 요구하고 있다.
검열의 마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는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단언컨대 검열에 굴복해 써야할 기사를 피하지 않았다고 자신한다. 그 결과가 매 학기마다 발간된 <중앙문화>다. 타협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간의 중앙대 상황을 목도하고 침묵할 수 없었다. 현장에서 마주한 구조조정 대상 학과 학생들,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들, 붙었다 미관을 해친다며 뜯긴 대자보들, 그리고 독자들의 목소리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본부가 <중앙문화>를 흔들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중앙문화>는 언론이다. 언론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너무 커다란 질문이었다. 수십 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대 기자는 되어야 한마디 보탤 자격이 있을까. 다만 2년간 <중앙문화> 활동을 하면서 세운 나름의 지침은 있다. 언론은 불편해야 한다.
자체든 사전이든 검열에 철저한 언론은 편하다. 그리고 안전하다. 기존의 문제적 구조와 권력을 흔들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권력이 불편해할 지점을 도려내고 필요하다면 침묵한다. 들려주고 싶은 것만 말하는 언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언론이 불편할 리 없다. 허락된 범위 안에서만 날카로운 비판은 권력의 변명거리나 만들어 줄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불평등과 부조리, 모순을 방치하고 재생산에 동조하는 안전한 언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
언론은 불편해야 한다. 불온해야 한다. 그리고 위험해야 한다. 기계적인 중립의 강박을 넘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해야 한다. 권력이 꺼려해도 후벼 팔 수 있어야 한다. 성역 없는 비판에 날을 세워야 한다. 소외된, 때로는 은폐된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 듣기 싫고 보기 싫어도 써야할 기사는 써야한다. 불평등과 부조리, 모순의 문제적 구조에 균열을 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비록 달걀로 바위를 치더라도 언론은 마땅히 그래야한다. 그것이 단순한 정보전달을 넘어 권력을 감시하고 부조리를 고발해야할, 사회적으로 합의된 ‘언론’의 역할이다. 방종에 가득 차 펜대를 휘두르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미 교편 위를 비롯한 언론 매체들은 언론 윤리를 준수하며 보편적 가치의 훼손을 지양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편한 언론은 안전한 지위와 기반위에 서 비로소 불편해질 수 있다. 권력이 아니라 독자를 두려워 하고, 언론윤리를 준수하는 한 언론 활동에 부당한 탄압을 받지 않아야 한다. 안정적인 예산과 공간을 통해 독자가 존재하는 한 꾸준히 발간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교편위에 온전한 편집권의 독립과 안정된 공간을 본부가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이유다.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와 <녹지>는 불편한 언론이다. 그간 본부로부터 받아온 탄압과 비협조, 존재 위협의역사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일상화된 구조조정, 열악한 공간과 교육환경 문제, 권력형 비리, 본부의 잇따른 사업 실패 속에 중앙대 학생사회는 교편위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교편위를 지지한다.
이것은 당신의 싸움이다
강남규 전 편집장
빨간벽돌 203호, 중앙문화 편집실. 내 청춘이 고스란히 거기에 있다. 먹고 자고 마시던 삶의 공간이자, 읽고 쓰고 고치던 열정의 공간. 그곳 낡은 철제문을 두드린 날부터 진짜 대학생활은 시작됐다.
나는 중앙문화에서 글쓰는 법을 배웠고, 취재하는 법을 배웠고, 편집하는 법을 배웠다. 글 고치는 것도 배웠다. 덕분에 맞춤법 띄어쓰기는 어디에서도 쪽팔리지 않게 쓴다. 또, '대학'을 배웠다. 왜 지금 내가 대학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배웠다. 대학본부가 말하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역량을 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싸우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것은 중앙문화 아닌 곳에선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입부하기 직전부터 중앙문화는 문제적 대학에 맞서는 싸움의 최전선이었으니까. 2009년 12월엔 배포된 책을 모두 수거당했다. 총장을 비판했다는, 도무지 이유가 될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듬해 초엔 예산을 삭감당했다. 후원과 모금을 통해 제호 없는 '투쟁호'를 내려고 할 때 대학본부는 징계하겠다고 협박했다. 어느 정도 체제가 안정될 즈음 본부는 또 예산을 삭감했다. 편집위원들은 또 싸웠다. 그러니까, 우리의 1 년은, 책 만들기와 기자회견과 피켓시위로 꽉 차야 했다. 덕분에 대학생활 열심히 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중앙문화에 대한 본부의 지속적인 공격은 단지 중앙문화라는 매체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비판에 대한 공격이고, 모든 학생자치에 대한 공격이다. 비판이 멈추고 학생자치가 사그라든 자리에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차가 달릴 녹슨 레일만이 남는다. 회생 불가능한 절벽으로 향하는 레일. 이것을 논증하는 일은 이제 지겹다. 아니, 이미 실증되어 더 논증할 필요가 없다. 비판을 징계로 대응하고 학생자치를 탄압으로 다스린 박용성 전 이사장은 스스로 좌초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던가. 우리는, 중앙문화는 그가 그리 되리라고 수백 번 말해왔다.
지금 중앙문화는 다시 최전선에 서려고 한다. 그 계기는 또 다시, 중앙문화에 대한 본부의 공격이다. 편집권 침해도 예산 삭감도 막지 못한 비판의 목소리를 막기 위해 본부는 이제 공간을 빼앗으려 든다. 대학 들어온 해에 싸움을 시작한 중앙문화가, 대학 나가는 해에까지 싸우고 있을 줄은 정말 예상 못했다. 본부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중앙문화를 공격하는 이유가 뭘까. 자신들이 실패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리라. 본부의 반복돼 온 실패를 들춰내고 분석해 명료한 언어로 학우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중앙문화를 하루 빨리 없애버리고 싶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중앙문화를 지켜내는 싸움은 중앙문화만을 지켜내는 싸움이 아니다. 학생자치를 짓밟아도 되고, 실 패할 것이 뻔한 방향의 정책을 맘대로 펼쳐도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저 대학본부의 오만함에 철퇴를 놓는 싸움이다. 중앙문화가 사라지기엔, 아직 이 대학은 너무나 문제적이다. 그러니까, 강제수거와 예산삭감에 맞서던 중앙문화 편에서 함께 싸워 중앙문화를 지켜냈던 그 학우들처럼, 지 금 중앙대학교를 다니는 학우 여러분이 중앙문화의 공간을 지켜내는 싸움에 함께 해주기를 바란다.
<중앙문화>만이 아닌 중앙대를 위한 공간이다
홍주환 (경제학부 4)
현재 <중앙문화> 사태를 지켜보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 학내언론에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말을 하지 않을 순 없다. 또한 내가 대학본부가 말한 ‘제도권 안’에 있었던 자였기도 하니 더더욱 말을 아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대학본부는 <중앙문화>에 미디어센터 내 학내언론과 동등한 선상의 요건을 요구한다. 타 학보사의 주간 교수와 같은 미디어센터장이 ‘편집지도권’을 가지며 발행권을 총장이 갖는다는 등의 미디어센터 규정 상 요건이다. 만약 <중앙문화>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앞으로 안정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취재비 등의 명목으로 사비를 사용 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문화>는 이를 거부한다. 규정은 규정일 뿐이다. 우리는 숱하게 권력에 의해 규정이 무시되는 현상을 목격해 왔다. 특히 ‘편집지도권’ 등 정확히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규정일 시 권력은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규정을 지켰다고 변명할 틈이 생기니 더욱 그렇다.
학내언론의 기자로서 생활해 왔던 점을 미뤄봐, 현재로썬 학내언론에 대한 편집권 침해는 없다. 기사 작성, 편집 등의 과정에서 미디어센터장은 단 한 순간도 기사의 삭제나 수정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는 한 명의 독자로서 독자의 이해를 저해할 수 있는 긴 문장과 용어 등에 대해 기자와 민주적으로 토론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현 미디어센터의 시스템이 올바르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현재 학내언론의 편집권이 학생 기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것은 현 미디어센터장의 언론관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중앙문화>의 의심은 매우 합리적이다. 미래의 미디어센터장은 미지의 인물이다. 그가 현 미디어센터장처럼 학생 기자의 판단을 존중해줄지 아니면 편집지도권이라는 이름으로 기사의 삭제를 요구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는 대학본부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는 정치적 무뇌아의 선택이다.
대학본부가 <중앙문화>에 공간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명목상 ‘명분의 부족’이다. 가뜩이나 공간 부족으로 시달리는 서울캠퍼스에서 대학본부 내 정식기구도 아니며 학생회 소속 기구나 정식 동아리도 아닌 <중앙문화>에 공간을 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본부엔 또한 <중앙문화>의 의심을 기우로 치부할 명분도 없다. 또한 반세기 이상을 중앙대의 교지로서 활동해온 <중앙문화>가 공간조차 배정받지 못하도록 방치할 명분도 없다. 그렇다면 선택은 당연히 어떤 명분이 더욱 가치 있는 것인가를 따지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중앙문화>에 공간을 주지 않을 명분은 행정적인 층위의 가치일 뿐이다. 그러나 <중앙문화>에 공간을 배정하는 명분은 그보다 깊다.
대학본부는 학내 구성원 중 하나의 주체로서 학내언론에 활로를 터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고려해야 한다. 대학 본부의 반경에 학내 민주주의라는 화두가 존재한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앙문화>에 대한 공간 배정은 학내 민주주의의 성숙을 지지할 의지가 조금이나마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대학본부는 정작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놓치고 있으며 <중앙문화>의 의심을 기우로만 치부하고 그들에게 현재의 규정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수년 동안 규정 밖에 있었던 <중앙문화>에 모호한 규정을 제시하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공간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소통인가. <중앙문화>가 독자적인 편집권을 요구하는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재한다. <중앙문화>와 같은 진보언론을 위한 새로운 규정을 만들려는 시도도 없어 보인다. 공간을 줄 의지가 최소한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대학본부는 <중앙문화>에 공간을 주지 않아 작은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 대학본부를 따갑게 비판하는 목소리 중 하나를 떨쳐낼 수 있어 각종 정책을 순탄히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학본부가 치룰 대가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이익일 뿐이다.
학생문화관이 헐리고 갈 곳을 잃은 <중앙문화>가 중앙대의 화두로 떠올랐을 때, 대학본부는 더 큰 비판의 목소리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언론이 죽도록 방치했으며 학내 민주 주의의 성숙을 거부했다는, 과거보다 더 심한 오명이 대학본부에 덧씌워지지 않겠나. 대학본부에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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