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학기가 끝나면 학생회관과 학생문화관이 철거됩니다. 학생회관은 현 교양학관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두 건물이 있던 공간에는 공원이 들어섭니다. 때묻은 공간에는 오랜 기억이 담겨있습니다. 건물이 헐려도 남아있을 기억들을 담았습니다.
기억, 공간, 문학
문학동인회 김태영 (독일어문학전공)
문학동인회 동아리방 입구에는 「동아리방에서」라는 시가 음각되어 있다. “정겹구나, 동아리방이여” 로 시작하는 이 시는 민중가요를 목청껏 부르는 모습, 동아리방 안에서의 음주나 곯아떨어진 후배의 모습 따위를 케케묵은 동지애와 적당주의적인 권위의식이 두드러지는 어조로 묘사한다. 한 세대쯤 전에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모습들이, 한 세대쯤 전에 살아 있었을 법하지만 지금은 낡아빠진 언어로 재현되는 것이다.
물론 이 시 자체가 지금 당장 동아리 회원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는 이 시의 감수성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 시를 통해 요약되고 우리 선배들을 통해 체현되었던 가치들은 지금껏 동아리를 유지시켜온 힘이기도 했지만, 호모소셜하고 폭력적이기도 했다. “술 잘 마시고 동아리에 시간을 많이 쓰며 모두를 위해 개인적 감정은 접어둘 수 있는 남성 회원”의 전형이 매 기수마다 한둘씩 끼어 분위기를 주도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분위기는 동아리의 기준에 맞지 않는 회원들을 배제했다. 동아리가 그간 유지해온 시대착오적 감수성을 반성하는 데만도 대가가 적잖이 따랐다.
「동아리방에서」를 자랑스럽게 동아리방 문에 새겼을 선배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지 좋지도 못하고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한 시 한 편이 기억과 결부되면 세월을 이기고 현재의 동아리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다는 점이다. 두산재단 이전의 동아리들 간에 있었던, 지금보다도 훨씬 빈번하고 긴밀한 교류의 기억들,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자매 동아리’ 개념 등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하면 그 기억은 선배들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동아리 방이 기억의 초점이 될 때 우리의 활동은 기억으로부터 온전히 독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배우는 창작의 이론과 시를 읽는 방식, 정기 행사 등 동아리 도처에 우리 이전 세대의 기억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물론 과거에 뿌리박지 않은 현재는 없다. 그러나 동아리방을 매개로 할 때, 과거의 기억이 나타나는 방식은 특수하다. 예를 들어 우리의 전통 문화와 현대인의 감수성의 관계를 논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현재와 연결되거나, 시간의 흐름을 따라 최적화된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 맥락을 무시하고 과거에서 한 단면만을 뚝 떼어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낯설고 폭력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선배들의 구시대적 인간미와 낡은 전통에 죄책감을 느낄 것 없이, 학관 철거에 발맞춰 동아리방을 청산하고 기억을 극복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여전히 동아리방의 기억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기억 속에 끈질기게 살아남은 폭력성과 문제점들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기억의 내용을 구성하는 과거의 습관이 아니라 동아리방을 통해 되살아나는 시대착오적 기억의 낯설음 그 자체다. 낯설음이 문학에 현실을 뛰어넘을 힘을 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문학은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므로 문학이 역사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밝혔다. 개별적인 사실에 대한 논의보다, 가상에 대한 묘사가 정말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을까? 이 주장 자체부터 일견 시대착오적이다. 우리가 흔히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개별적 사실들의 조합은 확고한 근거 위에 서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반면 문학은 고작해야 가상 속에서 감성을 자극할 뿐이고, 그나마도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문학의 보편성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문학은 오지 않았거나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전혀 낯선 방식으로 되살려냄으로써, 견고한 현실도 현재의 특수한 시간적, 공간적 맥락을 전제할 때에만 설득력을 지닌다는 것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획득한 가상 속의 보편성은 물론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을 절대적인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변혁의 계기를 마련한다. 문학을 통해 인간은 현재의 삶이 유일한 가능성이 아니라 무수한 선택지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언제나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제시할 수 있다는 데서 문학의 보편성이 드러난다면, 우리가 갖고 있었던 동아리방의 기억, 기억을 전해준 우리의 공간인 동아리방 또한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통로이자 문학의 역할과 근거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매체인 셈이다.
지친 나를 이끌어준
손짓사랑 이규원 (간호학과)
저는 ‘수화봉사 동아리’인 '손짓사랑'의 부원입니다. 손짓사랑은 저의 ‘첫 번째 동아리’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듯 동아리 부원 모두가 어색했고 이분들과 어떻게 적응을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수화봉사 동아리’인 만큼 사람들도 모두 좋았고 동아리의 분위기도 화목했습니다.
'손짓사랑 동아리방'이라는 공간은 대학에서의 유일한 '마음의 쉼터'입니다. 전공 공부에 찌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동아리 활동에 자주 참여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동아리 방에서 하루의 반을 상주하게 되었습니다. 정기모임에 계속 참여하고 수화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저는 자연스레 ‘동아리의 일부’가 되었으며 지금은 동아리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 부원이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동아리 임원이 되어 신입부원들의 적응을 돕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어색한 공간’일 수 있기에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저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면 해서 그분들께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아리 방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고 함께 웃는 자체가 지금 제 생활의 ‘원동력’입니다. 동아리 방에서 부원들의 웃는 모습과 저 자신의 웃는 모습을 보며 대학에 온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농아원에서 청각장애인 학생들을 교육하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청음회관 봉사를 하면서 저 스스로를 성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이해타산적인 태도로 다가가진 않았는지, 항상 그들에게 친절했는지, 솔직한 태도로 다가섰는지에 대한 성찰을 하며 반성을 했습니다. 봉사를 하고나면 뿌듯한 마음과 함께 스트레스 해소가 되었습니다. ‘손짓사랑’으로 인해 봉사는 스트레스 해소의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이 공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평온한 대학생활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공 공부 때문에 항상 매우 힘들지만 동아리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항상 행복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면 합니다. 매 순간 감사하고 뿌듯한 이 공간에서의 생활을 당신들도 즐긴다면 더욱 윤택한 청춘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지금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벅차다면 이 공간에서의 생활을 당신과도 공유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음 해면 205관인 학관이 사라집니다. 약 9개월 동안 익숙했던, 마음의 안식처였던 그 공간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5층에 정수기가 없어서 동기들과 웃으며 4층까지 내려가야 했던 일도,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5층까지 숨차게 올라가 동방에서 쓰러지는 일도, 난방이 안되어 동기와 옹기종기 이불을 덮고 있던 일도 이제 사라집니다. 이 일들을 당신과도 공유할 수 없게 됩니다.
새로운 곳에 다시 동방이 생길 것입니다. 그 곳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새내기 시절 1년을 모두 담은 곳이기에 이곳이 사라진다는 게 너무나도 아쉽기만 합니다.
내게 있어 동아리방은 여전히 학생회관 3층
RCY 윤수민 (간호학과)
사실 이 기고를 부탁받았을 때 고민을 좀 했었다. 요즘에는 동아리방에 잘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1학년 때 만해도 그렇게 자주 갔던 동아리방이었는데 2학년이 되니까 생활이 바빠지다 보니 학관 쪽에는 통 가지 못했다. 그래도 내게 있어 동아리방은 1학년 대학생활의 전부였기에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1학년 때에는 거의 동방에 붙어있어서 ‘동방소품’, ‘동방 지박령’ 등과 같은 별명이 있었다. 1학년 1학기 때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시험기간에 동방에 앉아 억지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동방은 도서관 칸막이 열람실과 달리 개방되어 있는 장소이고 친구들과의 대화도 자유로워서 공부하기에 부적절한 장소이다. 그렇지만 도서관에 가도 공부를 안할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시험기간마다 항상 동아리방에 갔다. 동아리방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공부만 하지 않았다. ‘카우버거’를 사와서 먹기도 했고 과자와 음료수 등 간식을 사와서 먹기도 하고 먹으면서 수다를 떤 시간이 더 많았다. 그 때 어색했던 동아리 친구들과도 친해지기도 하였고 서로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당연히 시험은 못 봤다. 그래도 재밌는 추억을 많이 만들었기에 후회스럽지는 않다.
RCY 동아리에 애착이 많이 있었기에 1학년 2학기 때 동아리 임원에 지원을 하게 되었고 나는 동아리 임원이 되었다. 1학기에 비해 동아리방을 많이 가진 않았지만 ‘RCY 동아리’로서 이런저런 추억을 많이 만든 건 2학기 때였다. ‘동아리 임원’이라는 자리를 처음 맡아봤고 여러 가지 모르는 부분도 많았기에 서툰 부분이 많았다. 특히 동아리방에서 한 첫 번째 임원회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회의 때 다른 임원 친구들과 오해가 생겼고 그 오해를 푸는 데에 회의 시간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이다. 오해를 풀기 위해 전에 임원이었던 선배들이 와서 많이 도와줬다. 다행히 오해는 잘 풀렸고 그 때 선배가 열심히 하라고 사주신 치킨은 정말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동아리 주점을 준비하기 위해 홍보피켓을 만드느라 2 주간 동방에 박혀있었던 기억도 난다. 그 때 조금씩도 와주던 동기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이 글을 통해 다시 전하고 싶다. RCY 창립제 준비를 위해 조를 짜서 춤 연습을 했던 기억도 있다. 시험 기간에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다가 새벽에 동아리방에서 친구들과 시켜먹던 치킨은 정말 잊히지 않는다.
내게 있어 동아리방은 내 1학년 대학생활의 전부였다. 거기서 뭔가를 특별하게 한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었던 기억도 많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가능하게 해준 의미있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학관에 있는 동아리 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전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공간이 바뀐다고 해서 동아리의 의미가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 동아리방은 여전히 학생회관 3층이 될 것 같다. 단순히 ‘학관 3층 RCY 동아리방’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가 담겨있는 소중한 공간’이기에.
안녕. 내 마음의 집
날파람 조성호 (융합공학부)
학우들마다 다양한 학교생활을 하겠지만 나의 학교 생활은 ‘과 생활’ 과 ‘동아리 생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입생이던 학기 초, 내가 속한 과 특유의 문화가 점점 자리잡혀가자 나는 동아리로 눈을 돌렸다. 새내기라 모든 것이 낯설었던 나는, 직접 동아리 홍보 책자를 찾아보기도 하고, 학생회관 3층부터 5층까지 괜히 기웃거리기도 하면서 어디를 가야할지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던 중 오래 전 태권도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태권도부 날파람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7평 남짓한 이 공간에서 이렇게 많은 인연을 만나고 오랜 시간을 보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색한 선배, 동기들과 같이 운동하고 친해지기 위해서 ‘시간을 내서’ 찾아가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수업이 있거나 약속이 있을 때만 동아리 방을 비울 정도로 동방요정의 삶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허름한 컴퓨터 한 대로 돌아가면서 게임을 하기도 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하다가 기숙사 통금시간이 지나 구석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동아리 방에서 밥을 먹은 기억도 많은데, 동아리방 은 당시 혼자 밥을 잘 못 먹던 내가, 어쩌다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면 내 집 마냥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또 시험기간이 되면 외롭고 치열하게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다가 선배들이 사주는 치킨이나 피자 같은 야식을 얻어먹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밥을 먹을 때는 시간, 공간, 인간 세 가지의 간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동아리 방에서 항상 무언가를 먹었던 기억들은 모두 이 세 가지의 간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짧았던 1학년을 보내고 제대 후 복학을 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학교에서 가장 익숙한 공간이 자 내 마음의 집과도 같은 학생회관 동아리 방이었다. 새내기 시절,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었던 몇몇 선배들은 졸업을 하고 떠나셨지만, 동아리 방만큼은 2년 동안 시간이 멈췄던 것 마냥 소파, 컴퓨터, 책상, 의자들과 특유의 냄새까지 그 자리 그대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입대하기 전에 붙여놨던, 일학년 때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여전히 벽면에 붙어있는 걸 봤을 때는, 이곳이 마치 군대에 다녀온 나를 잊지 않고 기다려준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문에 그려져 있는 20년 된 그림의 칠이 다 벗겨지고, 방 안쪽의 탈의실 바닥은 낡아서 다 뜯겨져 나가고, 소파가 낡고 바래도 나는 그 특유의 정겨운 느낌이 좋다. 동아리 회장을 맡은지 1년이 되어가는 지금, 어색한 표정으로 동아리 방의 문을 두드리는 신입생들을 보면 내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이제는 내가 선배가 되어 신입생들에게, 비 오는 날에 동아리 방에서 시켜먹는 짬뽕의 맛을 알려주기도 하고, 문을 잠근 채 속닥이며 연애 상담을 해주기도 하고, 운동이 끝난 후에 치킨이나 피자 같은 야식을 사주기도 한다. 내가 선배들에게 받았던 것처럼, 나 또한 후배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이 공간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비록 넓고 좋은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지만, 학생회관 철거 후에도 나의 대학생활을 함께 했던 그 추억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포근함과 따뜻함을 학교에서 느낄 수 있는 대학생이 몇이나 될까. 나에게 그런 행운이 있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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