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취재 편집위원 김서윤
취재 객원편집위원 김여훈
“학생 한 분 한 분께 총학의 존재를 알리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총학을 만들고자 출마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학생들이 총학생회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총학생회의 행보에 더 많은 학생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길 바란다.’
‘응답하는’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이하 총학)가 선출되기 이전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2015년 겨울 경선으로 치러진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한쪽 선거운동본부(이하 선본)가 후보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일부 학생들은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투표 보이콧을 벌였다. 선거는 결국 무산됐다. 총학의 공백은 프라임 사업 탈락, 광역화 대책 부재 등의 기존 문제와 맞물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새로운 대표자의 필요성은 날로 커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응답하는’ 선본이 탄생했다. ‘응답하는 총학생회’라는 기치부터 그랬다. 그간 전대 총학이 쌓아온 불통과 불신의 대표자 이미지를 상쇄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정후보였던 박상익 씨는 “단 한 명의 의견이라도 경청하고 그것에 응답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3
하지만 응답하는 선본은 임기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표자 신분이 아님에도 차기 학생대표들이 참여하는 리더스 포럼*에 참여했다는 문제가 불거졌다. 그들은 줄곧 자신을 둘러싼 학내 여론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4
임기 내내 총학은 학내 분위기를 두루 살피며 상명하복식의 행보를 했다. ‘명령할 때만’ 응답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발 늦은 시국선언과 의견을 수렴하고 전달하는 데 그친 광역화 대응은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었다.
33개의 방대한 공약이 내걸린 한 해였다. 광역화 피해를 손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고 전국에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목소리가 울리던 순간이었다. 그러한 시간을 “항상 곁에 있겠다”는 말과 함께 시작한 이들이었다. 그간의 행보가 쇼윈도에 비친 허상은 아니었는지, 응답하는 총학의 자취를 돌이켜봤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성서, 마태복음 7장 7절
강구를 해야, 해도……
‘응답’한다는 이름에 걸맞게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한 총학의 모습을 자주 목도할 수 있었다. 중앙대가 올해 입시에서 시행한 정시 광역모집은 본부의 독단적인 태도와 부족한 계획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낳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당선이 된 이들은 임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광역화 대응에 착수했다. 광역모집 실태조사와 대토론회를 진행했다. 1학기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선 광역모집 폐지 요구 안건을 상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상 광역화 대응은 의견을 수렴하고, 수렴된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광역화에 대한 세부 방안 – 특히 본 전공 진입 가능 인원 기준 – 을 마련하는 일을 단과대에 위임하는 것으로 사안은 일단락되었다. 이로 인해 각 단과대 학생회와 학과·부(이하 학과) 학생회가 실무를 도맡아 하게 되었고, 당사자들의 의존 대상 역시 이쪽으로 옮겨갔다.
총학생회장은 “각 단과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총학생회 차원에서 본부에 독단적으로 특정 사항을 요구하긴 어려웠다”고 입장을 밝히며 “단과대별로 최대한 학생들이 피해 받지 않도록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겪어야만 하는 피해의 상황은 여전하다. 과별 진입기준이 상향조정되어 정원보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희망학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예견된 특정 전공으로의 쏠림현상으로 인해 원하는 학과로 옮겨가지 못하거나 이미 소속된 학과에 잔류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이하 미컴) 16학번 윤인우 씨는 “대응과정에 사실상 우리들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과 학생회에서 (공청회, 총회를) 개최했을 때 대부분의 참가학생들이 (희망학과) 전원 수용을 원하고 있었으나 결국엔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역사학과 16학번 정다훈 씨는 “과연 학생들 의견부터 충분히 듣고 (본부와) 타협을 시작한 것인지 의아하다”며 “총학으로 부터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광역화 대응을 공약으로 내걸며 문제해결을 약속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총학이 주도한 바는 없다”는 것이다. 경영학과 16학번 L씨 역시 임기 내내 총학은 “태도가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며 “한 차례 의견수렴을 한 것 외에 총학이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문제는 ‘대부분’이라는 이름하에 묵인되는 이들 소수의 입장이다. 다수의 피해를 줄이려 했다고 하지만 정작 문제를 앓고 있던 쪽은 발견하기 어려운 일부 학생들이었다. 커트라인에 잘려나갈 성적 미달자, 공청회에 참여하지 못한 휴학생과 재학생이 바로 그들이었다. 사실상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란 부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이라 해도 제약이 많았다.
사회학과 16학번 K씨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이 되지 않아서 (참석이) 불가했다”며 “(공청회 같은 자리들이) 단기성이었다”고 지적했다. 미컴 윤인우 씨는 “총학에서 이런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도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문자나 메일, 설문조사와 같은 수단을 최대한 동원해 지속적으로 대책을 마련했어야 한다”며 비판했다. 또 학생회들이 개최한 일련의 행사가 “본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며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의논 중’이라는 식으로 답변을 보류하거나 회피했다”고 하였다.
광역화 피해 조사는 임기 초, 단 한차례 단기에 걸쳐 이뤄졌다. 그마저도 토론회에서 참고자료로 쓰기 위함이어서 학생들의 모든 입장을 반영하긴 어려웠다. 또 페이스북을 통해 이를 공지하였으나, 모든 당사자들에게 관련 사실을 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토론회는 1학기에, 두 차례 실시됐다. 그러나 실상 토론회라기보단 설명회에 가까웠다. 본부는 제시된 의견이나 문제에 대해 상황설명과 사과로 시종일관했다. 대책에 관련해서는 “(특정 방안을) 고민 중”이라는 식의 막연한 말만을 남긴 채였다. 강구하지 않으면, 그리고 설령 강구를 하더라도 학생들은 응답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다렸으나……
학외 정치 사안들에 관한 총학의 대응방식 역시 논란이 되었다.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발생한 한 해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특히 고 백남기 농민 추모에 관한 총학의 미온적 태도가 문제였다. 이들은 서울대병원 분향소를 찾기도 했으나, 이와 대조적으로 학내 분향소를 마련하는 데는 관여한 바가 전혀 없었다.
이와 관련해 총학생회장은 “원래 중앙운영위원회(이하 중운위) 차원에서 분향소를 설치하려 했으나 이미 다른 단체에서 준비해놓은 상태였다”고 해명하였다. “그 쪽에서 이미 마련해놨는데 이와 별개로 다시 차릴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왜 ‘그 쪽’과 연대해보지 않았느냐는 물음에는 “(중운위는) 학우들이 뽑은 대표단이라 다른 단체이므로 연대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여기서 ‘다른 단체’란 ‘중앙대 백남기 선배 추모 연대체’를 가리킨다. 이는 학내 구성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형성한 집단이라는 점에서 중운위 존립 기반인 ‘학우들’과 다르다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중앙대 백남기 선배 추모 연대체 측 관계자는 “굳이 중운위에서 주도할 필요는 없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였다. 또 “거듭 (총학생회에) 연대요청을 하였으나 답변을 번번이 미뤘다”며 ”중운위가 신속하게 결단내리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서도 총학의 대응은 미흡했다. 이 역시 신속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질타를 받았다. 타 대학의 시국선언이 연이어 일고 학내여론이 총학의 움직임을 재촉하는 가운데 10월 27일, 학내 첫 시국선언이 단행됐다. 그러나 그 주최는 총학이 아니라 학내 운동단체였다.
총학이 주도적으로 나선 것은 그 다음, 11월 3일의 릴레이 시국선언이었다. 첫 선언이 있고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이와 관련해 총학생회장은 “타 대학에서 한다고 무작정 따라가면 안 된다”며 “(타 대학들보다) 더 준비된 시국선언을 하려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릴레이 시국선언에 앞서, 10월 26일에 내놓은 자신들의 첫 번째 시국선언문에 관련해서는 이와 상반된 입장을 내놓았다. 당시 SNS상에는 해당 선언문을 비판하는 글이 쇄도했다. 그중에는 선언문이 ‘공허하다’며 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비정치적으로 다루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글도 있었다.
총학생회장은 이런 비판에 어느 정도 수긍한다며 “일단 준비된 시국선언을 해야 하는 건 맞지만, 중앙대도 주요 대학 중 하나인 만큼 서둘러 언론에 힘을 실어줘야 했었다”고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
부실하다는 비판에는 ‘신속한 대처’를, 신속하지 않다는 비판에는 ‘철저한 준비’를 면피용 근거로 들며 총학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졌다. 당장의 위기상황을 모면하려는 이들의 임기응변식 태도는 결국 주체성과 지속성이 결여되는 문제로 이어졌다.
릴레이 시국선언 이후, 총학은 더 이상의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각 단과대·학과 학생회가 가두행진을 주도하고있는 모습과 대비된다. 총학이 더 주도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듭 일었으나 이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총학생회장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선거를 바로잡는 일이 우선이었다”고 관련 논란을 일축했다.
광역화 문제는 단과대에 떠넘겨진 채 사실상 그들로부터 방치되었다. 학내 분향소를 마련하고 적시에 시국선언을 하는 일 모두 그들이 말한 ‘다른 단체’에 일임됐다. 그 이후의 일들도 비슷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응답하라, 총학
응답하는 총학생회가 이끈 지난 한 해는 전대 온에어 총학의 임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나아진 듯했다. <중대신문>은 이들이 33개의 공약 가운데 20개를 이행했다고 평가했다. 6 24개의 공약 중 단 5개만을 이행한 전대와 견줄 때, 발전한 바는 분명히 있어 보인다. 7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학생회칙 가운데 논란이 많았던 선거시행세 칙을 개정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같은 맥락에서 오랜 숙제였던 화장실 몰래카메라 전수조사를 실시한바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하지만 아직 지켜지지 않은 13개의 공약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교양과목 체계 안정화’는 단순히 수요가 많은 교양과목을 추가 개설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수강신청 시스템 개선’은 제대로 된 시도 없이 “다음 총학에 제대로 인수인계 하겠다”는 말과 함께 묻히고 말았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일련의 행보가 면피용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총학생회장은 “학우 분들의 의견과 생각이 각기 달라서, (특정한) 어떤 것에 치우칠 수는 없었다”며 “중간지점을 찾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그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처럼 비난의 여론을 우려해 ‘어떤 것’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지 못한 것이 지난 한 해 동안 응답하는 총학이 보인 일관된 모습이었다.
‘일부’의 학생들에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무언가, 하나를 오랫동안 잡고 있을 여유 또한 없었다. 정치색은 되도록 빼는 것이 좋았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중요했다.
‘소통’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난무하는 형국이다. 현 응답하는 총학과 차기 스케치업 총학이 들고 나온 기치들 역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현 정권의 작태에서 살펴볼 수 있는 ‘불통의 정치’라든가, 미개한 국민들의 말 따위 듣지 않는 식의 ‘엘리트주의’를 배격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때 필요한 ‘소통’이란 단순히 눈치를 재고 여론에 휩쓸리는 것은 아닐 테다. 총학생회의 정당성은 당선과 함께 부여된다. 대표자는 여론의 질타와 강구가 있기에 앞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쇼윈도’, 보여주기 식 총학생회의 한계는 뚜렷하다
- “학생들이 꾸는 꿈에 응답하겠다”, <중대신문>, 2016년 3월 20일. [본문으로]
-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중대신문>, 2016년 10월 2일. [본문으로]
- “학생들이 꾸는 꿈에 응답하겠다”, <중대신문>, 2016년 3월 20일. [본문으로]
- “반쪽자리 리더스 포럼”, <중대신문>, 2016년 3월 28일 [본문으로]
- “리더스 포럼, 취지에 어긋나게 진행돼”, <중대신문>, 2016년 3월 27일. [본문으로]
- ON-AIR’, 저조한 시청률로 종영하다, <중대신문>, 2015년 11월 08일, 참고. [본문으로]
- '응답하는’, 공약 이행률로 ‘응답했다’, <중대신문>, 2016년 11월 13일,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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