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갈래? '라떼' 학교?
편집위원 이조은
<들어가며>
최근 다양한 ‘교권 침해’ 사건이 잇따랐다. 2021년 의정부 호원초등학교 5학년 담임 교사가 학생들 사이의 폭력과 생활지도의 어려움, 학부모 민원 등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다른 반의 담임 교사 또한 학부모의 민원과 협박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22년 세종시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가 자녀를 특별대우하라는 무리한 요구 끝에 담임 교사를 아동학대로 고소하여 직위해제를 하게 하였으나, 해당 교사는 검찰의 수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고 복직했다. 지난해 양천구 신강초등학교 6학년 담임 교사가 남학생에게 폭행당해 전치 3주 상해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지난해 7월, 서이초등학교 교사가 교내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올해 전주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이 무단조퇴를 막아서는 학교 교감을 폭행하고, 학교를 찾은 해당 학생의 학부모는 담임 교사를 폭행하였다. |
『죽은 시인의 사회』 3라는 책을 읽고 막연하게 키운 ‘선생님’에 대한 환상. 훌륭한 교사. 본보기. 가르침과 성장의 미학. 이 모든 꿈이 그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스러질 줄 누가 알았으랴.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교사는 모두가 존경하는 꿈의 직업이었다. 누구나 교사가 하는 일을 위대하다고 여겼고 누구나 교사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교사의 입지는 멀지 않은 과거와 비교하면 충격적일 따름이다. 이전부터 학생과 교사 사이의 갈등은 늘 있었지만, 학생 사이의 학교폭력 등의 문제 등에 가려져 비교적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학생과 학생이 아닌 교사와 학생 사이의 문제로 보이는 사건들이 연달아 알려졌고,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던 갈등의 씨앗이 들춰지면서 많은 논쟁이 오가기 시작했다. 잇따라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고, 오늘날 ‘학교 속 세상’; 그중에서도 ‘교사들의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그저 멀거니 그 사건들을 바라보며 교사의 명예나 직업적 가치 따위의 것들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확연히 실추되었음을 막연히 느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배경지식이 부족한 우리는 남들의 주장에 쉽게 흔들린다. 무언가 열심히 주장하는 그들이 나보다는 무언가 더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해서 말이다. 예를 들면, “학생의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우선시되면서 교권이 땅에 떨어지고 교실 현장이 붕괴되고 있다”라는 교육부 장관의 주장처럼. 정치계에서는 ‘교권’과 ‘학생인권’의 대립 구도라는 프레임을 내세워 이를 모든 문제의 일방적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 이야기하는 ‘교권’의 개념적 다원성에 대한 설명은 추후에 할 것이니 잠시 제쳐두고, ‘학생인권’의 대립항으로서 보기 편리하도록 ‘학생으로서 교육받을 권리’에 대응하는 ‘교사로서 가르칠 권리’로 상정해 두겠다.
교권과 학생인권, 갈등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교권’의 반대 주자로 여겨지는 ‘학생인권’의 상징인 학생인권조례는 “이 조례는 학생의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모든 학생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로 시작한다. 이는 학생의 인권이 학교교육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생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0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광주, 서울, 전북, 제주 등 7개의 지역에서 제정됐다.
‘오늘날의 교육 현장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이 ‘학생인권조례’라는 국민의힘 김혜영 서울시의원의 주장을 살펴보자.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들의 말은 정말 옳을까.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교권 보호와 유의미한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위 표를 참고하면 각 교육청에 신고된 교육활동 침해 건수는 유의미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또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지 않았던 부산, 대구, 인천, 대전, 울산, 강원, 충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에서도 2011~2012년 교권침해가 크게 늘었다가 감소하는 등 전국적으로 유사한 흐름이 나타났고, 전북은 학생인권조례가 제정·시행된 2013년부터 교권침해 건수가 오히려 감소했다. 전반적으로 학생인권조례와 교권 침해를 연관 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보수 진영과 기독교 단체는 학생인권조례에 포함된 ‘차별받지 않을 권리’와 관련된 내용을 문제 삼았다. 학생은 조례에 언급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통해 알 수 있듯 성별, 종교, 장애, 경제적 지위, 사상,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도한 국민의힘 김혜영 의원은 해당 조례가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 등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항목을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포함해 불필요한 논란을 양산했고, 학생들이 권리와 책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도록 유도했다’는 이유를 전면에 내세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들이 과연 전부 학생인권조례의 차별 금지와 관련된 내용 때문에 일어난 걸까? 분명히 의아하다. 사실은 아주 복잡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이를 해결하는 듯 보인다.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마법처럼 보일 만큼 편리함과 동시에 단순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가시적인 무언가에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를 ‘사회악으로 여기는 태도는 불필요할뿐더러, 옳지도 않은 ‘교권’과 ‘학생인권’의 정치적 대립 구도를 내포하기에 아주 좋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도록 만들었다. 더 큰 문제는 실제 희생은 종이 쪼가리인 학생인권조례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 움직이며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해 격렬히 찬성하는 일부 기성세대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교사와 학생 간의 갈등을 학생의 일탈로 인한 일방적 대립으로 납작하게 해석한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아동학대 개념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체벌 금지가 실시되기 전, 어릴 적 교사들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무한 재생 중이다. 이들 또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응축된 억울함과 분노의 방향은 엉뚱한 곳을 향하고 만다. 본고의 제목에서도 언급된 ‘라떼’는 기성세대, 즉 소위 말하는 ‘꼰대’들이 ‘나 때는 말이야’ 하며 과거 이야기를 통해 젊은 세대를 가르치려 하는 모습을 비하하는 말이다. 그들은 ‘라떼’ 진실로 그렇게 행복했을까? 현재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최소한의 인격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로 교사의 기분에 따라 회초리의 움직임보다 더 변덕스럽게 몸과 마음을 유린당했던 그들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옳냐는 질문에 기성세대조차 단번에 ‘그건 아니’라고 답할 것은 자명할 터. 과거와 비교하며 ‘교권’을 논하는 것은 부적절한 발상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교권’과 ‘학생인권’이 대립하고 있다고 말할까?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은 내려갈 수밖에 없는 시소 같은 관계인 걸까. 정말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갈등을 초래하는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답인 걸까. ‘학생인권조례’라는 바이러스만 약을 먹어서 쫓아내 버리면, 아픔도 설탕처럼 녹아 사라질까. 이 질문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교권’과 ‘학생인권’의 대립 구도에 대해 논하려면 우선 ‘교권’과 ‘학생인권’의 의미를 각각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교권’의 모호함: 권리인가 권한인가?
교권이라는 용어는 80년대 초 처음 법적으로 규정되었으나 현행법에는 그 개념적 정의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과거의 선생님이란 체벌하는 교육자로 상징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교권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더라도 주로 교원의 권위와 강력한 권한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곤 했다. 훌륭한 인격적 모범의 교육자로서 학생을 통제하고 때때로 호되게 가르치는 강한 선생님의 이미지가 핵심이었다. 또한 교원의 인권이나 처우와 같은 요소는 대중의 인식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교원의 지위를 보장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교원의 긍지와 사명감을 보호하고 또한 신체적 안전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법적 시행과 개정이 잇따랐다. 더 나아가 학생의 자유를 중시하는 목소리가 커짐과 맞물려 교권의 의미는 다원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교육 현장에 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앞서 이야기한 좁은 의미에서의 교권과 더불어 교원의 인권과 권리 등에 관한 고려가 있었으며, 현재에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논란의 주제가 되었다.
학생인권 또한 21세기에 들어서며 크게 주목받으며 학생의 권리와 다양성, 상대성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발맞추어 다양한 논쟁이 이루어졌다. 2010년 이후 ‘차별과 체벌의 금지, 용모의 자유화, 보충학습의 비강제화, 휴대전화 소지 허용’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학생인권조례가 각 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되기 시작했으나, 우려와 반대에 부딪히며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는 없었다. 기존 관습에 반대되는 조항을 포함하는 학생인권조례의 확산과 함께 학생인권의 개념이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이쯤에서 우리의 머릿속에는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그래서 ‘교권’은 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 학생인권의 ‘인권’은 권리(right)를 나타내는 말로 꽤 명확하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 하지만 교권의 ‘인권’의 의미는 이와 다른 차원이다. ‘권리’란 ‘교사’와 같은 특수 직분이 아닌 시민, 노동자, 아동, 장애인 등과 같은 일반 지위에서 나온다. ‘교권’을 ‘교사’의 권리라고 두어도, 교사의 ‘권리’라고 두어도 어색한 말이 된다. 권리(right)를 말하는 것인지, 노동권(labor right)를 말하는 것인지, 교사의 권한(privilege)를 의미하는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우리는 알기가 어렵다. 교원의 권위, 교원의 권리, 교원의 교육권, 교원의 인권 등을 포괄하는 모호한 개념을 우리는 ‘교권’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퉁’치고 모든 문제점의 원인을 이 ‘교권 추락’에서 찾는다. 교사의 인권 추락? 학생의 인권이 지켜지면 교사의 인권이 보장받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학생인권’과 마찬가지로 ‘교사인권’이라고 부르면 금세 이상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사인권’이 아닌, 모호하지만, 포괄적인 ‘교권’을 ‘학생인권’과 대비하면 인권의 충돌처럼 보이는 면이 덜하다는 점에서 대립 구도를 주장하기 용이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문제들은 교육활동을 총괄하는 ‘교사의 권한’, ‘교사의 권위’에서 나오는 교사의 ‘제재권’과 더욱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관점일테다. 교사가 필요할 때에 적절히 학생을 지도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관점 또한 ‘권한’과 ‘권리’를 기이하게 충돌시키고, 교육 활동에 교사의 역할만을 중시한다는 점 등에서 한계를 갖는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알아보자.
교사의 고통,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 관계자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학생인권과 교권이 상충한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학생 인권은 헌법적 가치 위에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라는 것이다. “다만 그동안 학생 인권 보장이 개선된 것에 비해 교권의 개선이 부족했다”, “학생인권조례에 학생 의무와 책임 조항을 강조해서 균형을 맞춰달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2018년 발표된 논문, '관계적권리에서 본 교권의 재검토'(하윤수) "> 8
이는 교원의 정당한 교육활동이 법적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법적 지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과 대비되는 씁쓸함을 보여준다. ‘정당한 교육활동’이란 ‘정당한 생활지도’의 의미를 포괄한다. 언급된 미국의 교원보호법은 이 ‘정당한 생활지도’가 무분별한 아동학대로 여겨지는 것을 막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해당 교원보호법은 ‘정당한 생활지도’와 ‘아동의 권리 보장’이라는 어려운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정반대다. 그 기저에는 우리나라는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이 작금에 들어서야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있다.
4살 미만의 아동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몇 년 전의 어린이집 사건. 최근 한 방송을 통해 공개된 유치원 폭행 사건. 덩치가 산만한 성인이 작고 연약한 아이를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뒤늦게 본 전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는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신체적 학대가 아닌 정서적 학대에서도 예전보다 인식이 발전하고 있음은 긍정적인 신호이다.
이 긍정적인 신호가 시작된 데에는 미디어에서 부모보다 아이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살피려는 궁극적 시도인 <금쪽같은 내 새끼>가 예전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10를 대신하고 있는 배경도 일조를 할 터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금쪽같은 내 새끼>와는 달리 프로그램 이름부터 부모를 위해 ‘악마’와 같은 아이를 순종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취지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금쪽같은 내 새끼>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보호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만큼 아동의 정서가 매우 연약하고 보호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얼마나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 기반이 되는 우리나라 아동복지법은 이러한 아동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학교에서는 학생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교사들이, 이 아동복지법을 들고 일어섰다. 아동복지법의 조항을 살펴보자.
아동복지법 제3조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이 (...) 아이의 건강 또는 복지를 해치거나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이나 가혹행위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유기 혹은 방임하는 행위”라는 조항이 있다. 이는 어떠한 생활지도도 “가혹행위”나 “복지를 해친다”로 폭넓게 해석될 수 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아동복지법 제17조 5호였다.
아동복지법 제17조 5호 아동의 정신건강 및 발달에 해를 끼치는 정서적 학대행위(「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제1호에 따른 가정폭력에 아동을 노출시키는 행위로 인한 경우를 포함한다) |
교사들이 생활지도를 할 때, 아동의 정서적 측면을 고려하여 아동학대를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위 조항의 ‘정서학대’의 범위가 다소 포괄적으로 서술되어 발생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상황에서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정서학대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고 설명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아동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행위”란 아동의 기분을 망치는 행위와 같은 말인가?
대부분의 학부모 ‘악성 민원’과 교원 권리 침해에 고통받는다고 호소한 교사들은 이 아동복지법에서 출발한 ‘무분별한 학부모의 아동학대 신고’와 관련되어 있었다. 교사들은 학생이 폭력을 행사할 경우, 다른 학생들의 권리의 상당히 침해하는 경우에도 학부모의 아동학대 신고가 두려워 학생을 적절히 제지할 수 없다는 점을 가장 힘든 점으로 손꼽아 말했다. 이와 관련된 사례는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 장애인 학생을 비하하는 학생을 제지하고 사과를 시켰더니 정서학대를 주장.
- 친구의 뺨을 때린 학생을 교장실로 보냈다가 “학교 가는 것을 무서워해서” 정서학대를 주장.
- 농구하다가 싸운 학생들을 제지하니 정서학대 주장. 학교폭력으로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을 분리하려고 가해 학생을 교장실로 보내니 아동학대 주장.
이들 학부모는 “악성 민원이 아니라 학부모 자격으로 할 수 있는 정당한 요구다”라는 입장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5학년 학부모 2명이 2022년부터 자녀의 담임교사 등을 상대로 형사고소 7회, 행정소송 3회, 민사소송 2회, 정보공개 16건 등을 청구했다.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에 이들 자녀의 담임교사는 무려 6번 교체됐다.
학부모들은 학교장을 찾아가는 일을 일삼고, 학교장과 학교관리자의 압력에 교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아동학대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신고자에게는 무고죄와 같은 불이익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사는 100만 원 벌금형을 받는 즉시 해고된다. 악성 학부모들은 교사에게 생계와 인생이 달린 문제를 인질 삼아 ‘아동복지법’의 독소조항을 무기를 쥐고 마구 흔든다.
많은 취약점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해 나름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아동복지법 제17조’의 독소조항인 5호가 오랜 교사들의 염원 끝에 2023년 12월 “교원의 학생 생활지도와 정당한 교육활동은 아동학대로 보지 않는다”로 마침내 개정되었다. “정당한 교육활동”의 기준은 교육청의 교육감 의견서로, 학칙 및 생활 규정에 속하는 훈계나 생활지도는 정당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적절한 ‘생활지도’와 ‘아동학대’의 구분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그 기저에는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발달하고 점점 더 넓은 범위가 아동학대, 정서학대로 인정될 수 있다는 사실의 확산이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아동학대의 개념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다. 체벌금지법이 제정된 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현재, 아직도 정서학대의 전반적 개념을 아동학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정당한 훈계’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따라 진짜 ‘정당한 훈계’는 무엇인지는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결국 교원과 아동 모두 제대로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겉핥기식 법률 개정에 앞서 보다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아동학대와 교원의 생활지도권 보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알리는 것과 더불어 무엇이 인권침해이고 교원 침해인지 그 모호성을 해소함이 급선무다.
“네가 갈래? 라떼 학교?”
본고에서는 앞서 학생의 권리를 보장함과 동시에 의무 또한 강제한 외국의 여러 사례를 살펴보았다. 다만, 우리는 이런 사례를 참고하되,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공통적인 원인 외에 문화권별로 다른 요인이 작용한다는 것을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앞서 말한 교사의 ‘가르칠 권리’는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 와 상충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이 관점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교권’ 개념의 중대한 오류가 등장한다. 이는 교사를 ‘교육하는 대상’, 학생이라는 ‘교육받는 대상’이라는 전제를 안고 있다. 이때, ‘교권’은 교육의 모든 것들을 전담하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권한을 암시하고, 교사에게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다. 자신만 ‘교사의 역할’을 잘 해내면 이상적인 지식을 전부 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다. 이를 방해하거나 거부하는 학생들은 ‘교권을 침해’한 학생이 된다. “입 벌려, 지식 들어간다”하면 군말 없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선생님이 떠먹여 주는 지식이란 밥을 모두 받아먹어야 하는 것이 교권을 존중하는 학생의 유일한 방법이자 교내의 질서를 수호하는 길이 된다. 얌전히 ‘교육받는 대상’이 되어주면, 학교는 제 기능을 하며 작동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정말 교육의 대상에 불과할까?
교육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지려면 교육의 주체인 학생의 자발적 참여가 필수적인데, 타율적 교육, 떠먹여 주는 교육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바람직한 교육일까? 어디서 오는지, 왜 존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전지전능한 권한을 학생들이 무조건적으로 존중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학생들이 본인들이 ‘교육받는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교육자에게 ‘순종’할 것을 기대하는 기이한 사고방식은 다름 아닌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나이적 권위주의에서부터 기인한다. 이는 과거로부터 여전히 변하지 않는 고질적 교권 담론 중 주가 되는 관점이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에서 뿌리를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조희연 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라고 말한 바 있다. 즉 ‘교권’을 ‘교사의 권력’으로 보는 관점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교사의 위계적 우월성과 교사-학생 간의 상하 관계를 강조하는 교권은 군사적이고 연령에 따른 위계를 중시하는 학교 질서, ‘교사 성직자론’, 그리고 유교적 문화가 결합한 권위와 권력의 형태였다. 이들에게 교권이란 교육자라는 특수 직분의 권한이 아니라 아동에게 향하는 성인의 전지전능한 권력으로 비춘다는 것이다.
유교적 위계질서에 입각한 상하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태도와 ‘교사의 역할’에 입각한 잘못된 사고방식이 교육의 본질과 결합하면 후자의 의미는 다소 흐려진다. Hofstede 11는 문화 차원 이론에서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는 대표적 요소(cultural dimension)로 네 가지 모델을 제시했는데, 그 중 Power Distance(권력 거리)는 특정 문화가 불평등과 권력의 차이를 얼마나 받아들이는지 나타내는 척도이다. 권력 거리가 높은 문화에서 사람들은 권위와 지위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녀가 의심 없이 부모에게 순종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네 가지 모델 중 특히 이 Power Distance(권력 거리)가 유의미하게 높으며, 이는 교육 현장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컨대, 학생은 교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도 반박할 수 없다. 교사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까 봐. 다른 문화권에서 공개적으로 교사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전혀 ‘도전적’이지도, ‘모욕적’이지도, ‘예의 없고 당돌’하지도 않다. 이는 오히려 동등한 교육 주체의 원활한 소통으로써 권장되는 교육 형태로 여겨진다. 비판적 사고력, 창의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이라 여기고 토론식 교육을 추구하면서 정작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방식으로는 교육적 성장을 이뤄낼 수 없다.
학생이 공개적으로 교사의 의견을 비판하면 당연히 인간이기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교사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 말고는 진실 탐구에 가까워진다는 점에서도, 교육의 본질에 가까워진다는 점에서도 유익한 게 사실이다. ‘교권’과 ‘권위주의’를 방패로 교사의 ‘기분이 나쁘다’, ‘예의 없다고 느껴졌다’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있어도, 만연하게 교육 현장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어 경각심이 필요하다.
- 다리가 아파서 짝다리를 짚었다고 욕설을 퍼붓는다.
- 화장을 했다고 저주와 인신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다.
- 과도한 용의 복장 규제를 폐지하기 위해 대자보를 붙이고 서명 운동을 했다가 학생들을 선동한다고 생활기록부로 협박한다.
- 수업 시간에 잔다고 책상을 걷어찬다.
이는 모두 필자와 주변인들이 겪은 사례로만 구성한 것이다.
교사의 기분이 나쁜 것을 어떤 명목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면 그 연장선으로 어떠한 것도 가능해질 수 있다. 체벌이 금지되기 이전 아주 옛날의 그때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교권’을 교사의 ‘인권’이 아닌 ‘교사’의 인권에 방점을 지나치게 두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존 교사와 학생 사이의 한국적 위계질서를 초월한 교사를 둘러싼 교육 활동 자체에 순수한 존경심을 품은 학생마저 의문을 품고 등을 돌리게 만든다. 시대가 흐르고 발전하여 인권 의식이 발달한 학생들의 권위주의에 대한 의문을 “요즘 애들이 유난히 싸가지가 없다”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질려버린 학생들의 반발심 이외에 아무것도 일으키지 못한다.
학생을 동등한 교육 주체로 본다면, 학생에게는 다른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수업을 거부할 수 있다. 원하는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원하는 대로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 교사의 기분이 언짢거나 나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바로 학생인권의 본질인 것이고, 학생을 ‘어린애’가 아닌 동등한 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다. 교육자로서의 권한을 존중받으려면 학생의 권리부터 존중해야 한다. 학생의 인권에 대한 인식/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오히려 교권에 대한 존중도 높다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과 상통한다. 2014년 논문 '학생의 인권보장 정도와 교권 존중과의 관련성'(구정화)[9]에서 광주 지역 초·중·고등학생 1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질문지 조사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인권보장 수준이 높고 인권교육을 많이 받은 학생일수록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교사의 권위 인정과 교육권 존중에 적극적이라는 결과를 알 수 있다. 전제상 공주교육대학교 교수는 '교육활동 보호 국회포럼' 주제발표에서 교사들이 교육활동 중에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 학생들 역시 교사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 결과는 학생들이 권리가 보장된다고 해서 교사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같은 맥락에서 학생인권조례는 사실상 헌법에 있는 기본적인 내용이 교육 현장에서 침해될 것을 염려하여 인권 보장의 마지노선처럼 다시 한번 명시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학생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진정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가 맞다.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부 독소조항을 수정하는 것이 맞다. ‘교사의 권한’만 보장된다고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모두 마법처럼 해결된다고 믿는 것은 이뤄지지 않는 꿈이다. 이는 교사를 위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교사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한다. 이는 개인적 희생과 헌신을 만병통치약처럼 요구하고 지나친 짐을 안겨줄뿐더러 교사가 겪는 실제 문제와 권리 침해 등을 보이지 않게 만들 뿐이다.
교내에서 교사들은 많은 고통을 겪어왔고, 이는 겉으로는 교권과 학생 인권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반대편에 서 있는 전쟁터의 국가들처럼, 교사와 학생은 인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척점에 서서 대립하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인권 투쟁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매개로 한 긍정적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인권은 누구 한 쪽만 싸워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당연히 인간이라면 모두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이다. 교권을 계속해서 ‘권리’라는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학생과 교사 그 누구의 권리도 지킬 수 없다.
학생은 움직이고 생동하며 자유롭게 행동하는 주체성 있는 존재임을 우리는 가끔은 잊는 것 같다. 법률 개정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인식 변화라는 올바른 인식 변화라는 출발점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 뉴시스, “학생인권과 교권…한쪽이 약해져야만 한쪽이 보장 받는다?”, 2023.12.15, 김진아. [본문으로]
- 뉴시스, “학생인권과 교권…한쪽이 약해져야만 한쪽이 보장 받는다?”, 2023.12.15, 김진아. [본문으로]
- 1959년 버몬트, 권위주의적인 입시명문사립학교 웰튼 아카데미에 독특한 수업 방식의 ‘키팅’선생님이 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본문으로]
- 연합뉴스, [팩트체크]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침해가 늘어났다?”, 2023.8.1., 이웅. [본문으로]
- 연합뉴스, [팩트체크]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침해가 늘어났다?”, 2023.8.1., 이웅. [본문으로]
- 민들레,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면 교권이 살아날까”, 2024.11.9. [본문으로]
- 민들레,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면 교권이 살아날까”, 2024.11.9. [본문으로]
- 하윤수, 『관계적권리에서 본 교권의 재검토』, 2018, 교육법학연구, 30권(2호), p.187. [footnote에 따르면, 5·31 교육개혁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와 요구가 확대됐지만 교사는 책임과 의무만 늘리고 달라진 교육환경에서 학생을 지도할 법적 권한을 주지 않는 제도상의 불균형이 교권침해로 이르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가령, 학부모의 교육활동에 대한 과도한 개입, 즉 ‘악성 민원’에 대응할 수 있는 교원의 제도적 힘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발생하지만 알려지지 않는 교권 침해 사례들에 대해서는 설문조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2018년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활동 침해 실태 분석 결과보고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원들은 교육활동을 침해하는 가장 주된 주체에 대해 ▲ 학부모(51.8%) ▲ 학생(41.2%) ▲ 기타(2.6%) ▲ 학교 관리자(2.3%) 등의 순서로 응답했다. 교육활동에 있어 자유를 침해를 받았을 때 그 사실을 타인 혹은 외부에 알렸는지를 묻는 질문에서는 ‘알렸다’는 응답이 47.8%, ‘알리지 않았다’는 응답이 52.2%로 집계되었다. 교육활동 침해를 받았을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유로는 ▲ 어차피 혼자서 해결해야 해서(43.8%) ▲ ‘일이 커지는 게 싫어서(26.5%) ▲ 사안 처리를 위한 학교 행정절차가 번거로워서(24.8%)의 순서로 응답했다. 교육활동 침해를 받았을 때 본인의 치유를 위해 취한 조치에 관한 질문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함’이라는 응답 비율(55.5%)이 가장 높았다.
조사 결과로 미루어보아 학생에게 못지않은 빈도로 학부모 또한 교육활동 침해를 일으키며, 대체로 이에 대응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다소간의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잇따라 보도되며 화제를 일으킨 사건사고와 교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종합하면, 상당수의 교권 침해는 학생의 폭력과 학부모의 무리한 개입, 괴롭힘에 의해 일어나며, 교원은 이러한 피해에 대응하고 본인을 치료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생이 제재가 필요할 정도로 난동을 피울 경우, 교사로서 권한을 발휘해 효과적으로 제재할 수 있어야 해당 학생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할 수 있을뿐더러, 교육할 권리와 교육받을 권리가 모두 실현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사의 가르칠 교육권과 학생의 학습권은 대립적 관계가 아닌 보완적 관계에 있다. 교사가 가르칠 권리를 통해 학생을 적절히 제재하여 학생을 교육함과 동시에 타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학생이 가르침을 받을 권리를 통해 교사의 권리를 존중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교사의 ‘제재권’ 이 적절히 발현될 수 없도록 하여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학교 내외의 장애물로부터 보호·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의 개입 허용 범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고, 또 학생에게 권리와 더불어 교육받을 때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 또한 적절히 고지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미국 뉴욕시의 ‘학생권리장전은 학생의 권리뿐 아니라 책임과 의무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학생권리장전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에 영향을 주었지만, 마지막 5절에서 학생의 책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5절을 제외하고 학생권리장전은 ▲무료로 공립학교에서 교육받을 권리 ▲표현과 인격의 자유에 대한 권리 ▲정당한 절차에 대한 권리 ▲18세 이상 학생의 추가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도입부에 학생의 책임 있는 행동만이 이 권리장전에 나온 권리의 전제임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는 “이 책임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학교별 훈육 규정에 따른 지도 조치가 이뤄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학생과 교직원에게 예의 바르고 진실하며 협조적인 태도로 행동한다는 내용 또한 명시되어 있다. 학교에 제 때 출석해야 하고, 다른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갈등을 해결할 때는 위협적이지 않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등 구체적인 책임을 부여했다. 버지니아주의 ‘학생의 권리와 의무 안내서’ 또한 “학생들이 자신의 의무 준수와 권리 표현 간의 균형을 유지할 것을 전제로 학생의 권리와 의무를 각각 1페이지씩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학생에게 구체적인 11개 의무를 제시했다.
이처럼 미국의 학생들은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받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행동들에 대한 결과적 책임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또한 교육 활동을 원활히 하고 다른 학생들의 권리와 교원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학생들은 주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학부모의 과한 개입으로 인한 교권침해는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다. 2000년대 후반, 홍콩에서는 교사에게 악성 민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학부모들이 '괴물 부모'로 불리며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권의 내용과 범위를 제도의 차원에서 정리함으로써 교원의 책무와 권한을 명확히 했다. 이와 동시에, 교권침해의 사전적 예방 및 사후적 회복의 과정들을 구체적으로 제도화한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핀란드, 독일, 영국 등은 교사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체계를 매우 철저하게 갖추는 방식으로 교원을 보호하고 있다. 루이지애나 주의 교원권리법(Teacher Bill of Rights)은 교사가 교육 전문직으로서의 판단과 재량을 존중받을 권리(제4항),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제5항), 존중받을 권리(제6항), 학부모와 학생과의 의사소통 및 학부모의 학생 훈육 참여를 요구할 권리(제7항), 과도한 서류 작업에서 벗어날 권리(제8항) 등을 보장한다. 특히 미국의 교원보호법(the Teacher Protection Act of 2001)을 자세히 알아보자. 해당 법의상의 면책특권 조항에 따르면, ①정규의 자격을 갖춘 교원이 ②정당한 교육활동을 ③적법하게 수행하는 과정(자동차 운전은 제외)에서 발생한 손해로, ④교원의 고의 또는 범죄행위, 명백한 과실, 중과실(reckless misconduct) 등에 의해 발생하거나 안전에 대한 교원의 의식적이고 노골적인 무지나 무관심으로 야기된 것이 아닐 때에는 교원은 그 책임이 면제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권리들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어 교사들이 학교 내외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당한 간섭이나 권익 침해에 대해 당당히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학부모나 학교 관리자의 부당한 간섭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되며, 교사는 이에 대해 언제든지 이의를 제기하고 대응할 수 있다. 불이익을 받는 처분이 있을 경우 교사는 학교 관리자 등과 대등한 지위에서 대응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법적 해결을 추구할 수 있음을 명확히 한다. 이 점을 모든 이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린다는 점에서 의의와 기대효과가 충분하다. 특히, 교육 활동과 관련한 교원의 법적 책임 면제 및 소송 지원과 관련된 부분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아동복지법’ 누구를 위한 법인가
- 여성경제신문, “교권 침해 신고하니 아동학대자 됐다”...여전히 고통받는 교사들, 2024.6.20., 김정수. [본문으로]
-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는 SBS에서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방영되었던 이상 행동을 보이는 유아와 어린이의 문제점을 고쳐주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는 베테랑 육아 전문가들이 모여 부모들에게 요즘 육아 트렌드가 반영된 육아법을 코칭하는 프로그램으로, 2020년부터 현재까지 방송중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사 오은영이 제공하는 맞춤형 솔루션 및 육아 코칭이 주를 이룬다. [본문으로]
- 네덜란드의 심리학자이다. 문화 차원 이론(cultural dimension theory)에서 문화적 가치관을 분석한 네 가지 모델을 제시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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