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편집장 석기범
자유 :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상상의 닻을 올리며
우리는 현실에서 상당한 압박을 받는다. 필자만 해도 그렇다. 대학교 과제, 동아리 활동, 학점은? 진로는? 모든 것들이 바로 답을 주지 않는다. 이럴 때 다들 어떤 생각을 하는가? 다는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이 ‘다 던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유. 우리는 끊임없는 자유를 갈망한다. 나도 그래.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 근데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지는 거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자유를 좇곤 한다. 대체 언제부터 자유롭길 원했던 걸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자 했을 때? 공부를 하다가 생각보다 어려워서 접고 싶었을 때? 돌이켜보면, 자유에 대한 구속은 생각지도 못하게 개인의 삶에 찾아온다. 구속을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속이 없는 상태로 상황을 되돌리는 것이다. 구속이 사라졌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은 ‘자유롭다’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잠깐만. 앞의 문장을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다 던져버리고’라는 말 뒤에 다양한 표현이 붙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문장들을 볼까?
- 다 던져버리고 게임이나 하고 싶다.
- 다 던져버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 다 던져버리고 여행이나 가고 싶다.
세 문장 다 한 사람의 마음에서 충분히 나올 법한 생각들이다. 위 문장들이 어떻게 개인의 내면에서 생성되는 걸까? 첫 문장을 생각한 사람은 ‘여행’이라는 활동을 통해 자유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게임을 생각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를 생각한 사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행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경험들이 자유로웠기에, 우리가 경험했던 기억들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 〈자유의 포착〉을 쓴 김동현 작가와 함께 자유를 찾아나가 보자.
“당신은 언제 자유롭다고 느꼈나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유
위의 질문은 정답이 없다. 모두가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다. 상대방의 정답을 확인해 보자. 마음이 가거나 특이한 답들도 종종 보일 것이다. 무언가에 몰두할 때 자유를 느끼기도 하고,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 자유를 느끼기도 하고, 오히려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자유는 다르다. 그리고 그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도 역시 다르다.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도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꿈을 이뤄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사람들은, 그 꿈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에게 다르게 느껴지는 자유인데, 어떻게 두 글자 안에 모든 뜻을 내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제부터는 자유라는 단어 앞에 수식어를 붙이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자유들을 탐구하면서, 당신들의 삶에 부족했던 자유들을 조금씩 채워 넣으려고 한다.
배에 오르며
이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로 가는 배에 올랐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자유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수많은 자유의 섬에 도달할 것이다. 각 자유의 섬은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순간만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결핍과 외압을 내려놓고,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자. ‘이런 것도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라며 놀랄 수도 있고, ‘이건 자유가 아닌 것 같은데?’라며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자유가 다름을 잊지 마라. 이곳은 자신에게 부족했던 자유를 찾는 보물창고니까.
자유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확장성이다. 우리의 삶에서 계속해서 자유의 결핍이 일어난다. 학교 숙제라던가, 알바라던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는 식사 시간이나 잠이라던가. 이런 상황은 개인의 자유를 조금씩 앗아가며, 개인은 자유가 사라진 순간 즉시 그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어렵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의 ‘생각’은 경험에서 나오거나, 경험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던 배경지식으로부터 도출된다. 이 생각들은 우리를 먼 곳으로 인도한다. 자신이 얻고 싶은 자유를 얻은 세계로 말이다.
두 번째로, 자유는 무한하다.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다양한 활동들을 한다. 익숙해지는 것들도 있고, 첫 번째 경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자유가 스며들듯이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경험들은 당신이 사는 동안 계속해서 일어난다. 각자의 자유는 서로 다르고, 그 방향도 다르기 때문에 무한하다는 것이다.
경험들은 계속해서 축적되어 인간이 새로운 자유를 추구하게 만든다. 우리는 살아가는 그 자체로 새로운 자유를 얻을 동기를 부여받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투쟁
자유 : [법률]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우선, 국가가 개인에게 보장하는 자유가 있다. 국가의 최고법인 헌법에는 다양한 자유가 있다. 헌법에 보장된 자유는 국가가 개인에게 보장하는 ‘소극적 자유’와, 개인이 국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급부권인 ‘적극적 자유’로 나뉜다. 어떤 자유들이 명시되어 있을까?
제12조 |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중략) |
제14조 | 모든 국민은 거주ㆍ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
제15조 |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
제16조 | 모든 국민은 주거의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
제17조 |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
제18조 |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
제19조 |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
제20조 |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중략) |
제21조 | 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
제22조 |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
헌법에 보장된 자유들은 여러분들의 삶 속에 녹아 있다. 필자도 기숙사에서 일어나(주거의 자유) 학교를 다니면서(학문의 자유) 생활한다. 동아리 활동을 운영하며 행사를 계획하고(통신의 자유ㆍ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중앙문화 출간(언론의 자유)을 위해 노력한다. 신체의 자유는 특정 상황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원할 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들이 자유다. 하지만 자유는 멈춰 있지 않다.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유마저도 영구적으로 지속된 것이 아니다. 당장 중세만 해도, 개인이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는 ‘종교의 자유’는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를 찾는 목소리들이 합쳐져 새로운 개념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자유는 계속해서 우리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 맴도는 개념들을 우리가 찾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였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최근에 와서야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이제 종교의 자유가 억압받는 상황을 오히려 상상하기 힘들다.
자유가 억압되면, 인간은 또 다시 자유를 추구한다. 하지만 억압이라는 것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한다. 외부적 요인이 없는 개인이 가지는 자유가 있다면, 이는 개인의 주관적 요소를 수반한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파생되는 자유가 있을까? 이 심오하고도 흥미로운 질문은 책의 본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생각의 자유, 의지의 자유, 행위의 자유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한다. 근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머릿속에 상상하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해서 A+을 다 맞아야겠다는 상상과, 오늘 중앙문화 끝나면 집 가서 캔맥주 따겠다는 상상.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생각들을 좁혀가고 그 중의 일부를 행위로 표현한다.
모든 생명체 중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성이다.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이를 멈출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자유이다. 모든 개인의 생각은 개인으로부터만 나오며, 나의 생각에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다. 설령 나의 생각이 타인에게 억압받을지라도, 생각을 행위로 옮기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생각의 자유를 계속해서 보존할 수 있다.
“어떠한 것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기능을 하는 생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식과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 생각을 외부로 표현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간섭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 생각은 온전히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작용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자유는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 이렇듯 생각의 자유는 (중략) 나라는 인식주체의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정신활동이다.”
- 〈자유의 포착〉 51~52p 中
우리는 하루 평균 6200번의 생각을 한다.[1]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상상이나.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지금 당장에 초점을 둔 생각들이 우리 머리를 맴돈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들이 현실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 현실에서 일어날 행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력이 머릿속의 생각으로 하여금 실천에 옮기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바로 ‘의지’다. 우리는 의지에 따라서 일정한 생각들을 행동에 옮긴다. 그리고 생각들을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가진다. 그렇다면 ‘나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 작가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외적 동기부여와 내면의 성찰을 통해 형성된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인 내적 욕구라는 의지를 갖는다. (중략) 의지의 자유는 생각이 자유가 행위의 실제적인 수행을 통해 효력을 갖도록 영향을 주고 생각의 자유를 행위의 자유로 이끌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중략) 의지의 자유는 인간의 고도의 이성 작용, 즉 지성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심사숙고하고 다듬어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행동 방식을 의미한다.”
- 〈자유의 포착〉 55-56p
칸트는 그의 저서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의지는 ‘선한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입장을 반영한 ‘동기주의 윤리학’에서는 행위의 동기가 선한 의지인지를 판단한다. 우리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 개입하게 되는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해야 하며,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의 자유에서 나쁜 생각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미리 예측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의지의 자유는 선택적으로 행위의 자유가 실현되도록 돕는 ‘심판’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 생각의 자유가 의지의 자유를 거쳤다. 의지의 자유라는 심판은 지금 당신이 생각했던 것에 대해 현실 세계에서 표현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마침내, 당신의 생각이 현실 속에서 표현되며, 제3의 누군가는 당신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일정한 생각을 바탕으로 나온다. 그러나 의지의 자유는 ‘보편타당한 의지’를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의지의 자유가 칸트가 말한 ‘선의지’의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의 행위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그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거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행동들은 주관적이며 충동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인 행위자라면 애초에 사회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행위의 자유까지 획득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지양하고, 자율적 판단에 책임을 진 행위를 지향해야 한다.
“행위의 자유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자연적인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자기경향성에 치우치지 않고 자율적이고 실천적인 의지를 확보하고 보편타당한 준칙에 따라 행위할 때에만 실현된다…반면 인간이 자율적이지만 당위적인 근거에 따라 행위할 때 그 행위는 비로소 객관성을 확보한 보편적 행위가 될 수 있다”.
- 〈자유의 포착〉 61p
작가의 의견을 바탕으로, 각 자유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과 이를 방해하는 결함을 표로 정리해 보았다.
자유의 종류 | 필요요건 | 결함 |
생각의 자유 | 이성/상상력 | 자기합리화의 편리성 |
의지의 자유 | 합리적이며 타당한 결정 | 내적 의지의 역량 부족 |
행위의 자유 | 용기/자신감 | 두려움/용기 부족 |
위 세 가지 결함은 생활 속 다양한 사례에서 개인의 행동을 핵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실의 삶에 안주하려 하며 새로운 것을 탐구하지 않으려 하는 행동’은 생각의 자유가 가지고 있는 결함을 이야기한다. ‘주어진 일을 바로바로 하지 않고 미루려는 행동은’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목소리를 내거나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경향’은 행위로 인해 우리에게 돌아올 부정적인 영향의 인식 때문에 행위의 자유에 결함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결함을 최소화하고 필요 요건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QnA 1
(기범) 작가님께서는 ‘개인적 자유’가 ‘생각의 자유가 의지의 자유를 통해 행위의 자유로 발현’되는 3단계의 형식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특정한 생각이 나올 수도 있는데, 모든 개인의 주관적인 자유는 ‘생각-의지-행위’의 형식을 거치는 건가요?
(김작가) 여기서의 의지라는 것은 ‘자신의 현재 상황을 더 개선시키려는 마음의 방향’을 의미하는 겁니다. 물론 개인이 그럴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면 상관없지만요. 저는 의지를 ‘본인이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상황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취미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과 의지, 행위의 자유를 모두 만족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의 생활을 되돌아보라. 생각을 하지만 의지의 자유에서 멈춰서 행위로 일어나지 않은 일만 해도 수천 가지일 것이다. 수업 시간에 교실을 뛰쳐나오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매일매일 주어진 업무를 그만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이렇듯 생각의 자유가 다양한 마음의 소리로 발현되더라도, 새롭게 탄생한 다른 마음의 소리에 의해 제한되거나(내적 갈등) 현재 개인이 처한 외부적 영향에 의해(외부 압력) 행위의 자유로 가는 의지가 침해되기 쉽다.
김동현 작가는 유일한 답이 ‘취미’라고 말한다.
“취미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취미를 즐기려는 마음먹기의 내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생각의 자유를 보증한다. 그런 다음, 하고자 마음먹은 취미의 대상을 행위로 유도하도록 자기 자신을 규정하여 마음을 굳히게 만드는 의지의 자유를 고무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규범적 자율성에 따라 취미의 대상에 몰입하여 행위의 자유를 실행한다.”
- 〈자유의 포착〉 73p 中’
중앙대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에게 언제 자유를 느끼는지 물어봤다. 누군가는 음악을 들을 때 자유롭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릴 때 자유롭다고 한다.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며 필자는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다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할 때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바둑을 두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때 자유로움을 느낀다. 한 수 한 수를 놓는 동안은 다른 어떤 걱정이나 외적 요인들이 배제되며, 나 혼자만의 시간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취미가 이 조건을 충족하지만, 꼭 취미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개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자유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적 요인, 외적 요인, 시공간적 요인
우리가 지금 보장받는다고 할 수 있는 자유들이 인간의 ‘생각의 자유’로부터 파생된다고 느꼈다면, 성공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유들은 어떻게 영향을 받을까?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자유롭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당신은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김동현 작가는 자유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요인을 설명하며 개인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생각, 의지, 행위의 자유는 한 사람에게서만 발생하는 자유다. 나의 주관적 자유가 너의 주관적 자유와 같을 수도 있다. 즉, 이 세상에 '너'라는 사람이 혼자만 존재할 경우에도 가지고 있는 자유이다. 지구에 사람이 너뿐이라도, 특별한 자유들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나와 너의 마음속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생각의 자유를 가지고 있더라도, 각 개인의 특징에 따라 각자의 성격을 가진 생각들이 마구마구 튀어나온다.
즉, 개인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정도는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노래를 들으면서 신이 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자유로워 보이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성격이나 성향이 자신의 자유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유는 무한하며, 계속해서 확장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다르다. 우리. 이전까지는 인간 한 명에게 집중했다면 이제는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 세상은 ‘나’라는 인간 혼자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대화하고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도우려는 마음이 있다. 누구든지 친구와, 직장 생활에서 알게 된 동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뒷담화’가 협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함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는 개인으로 하여금 ‘어떤 대상으로부터’ 구속이나 속박을 느끼게 만든다. 그 대상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상관없다. 이전 상황과 달리,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외적 요인에서 살펴보면, 자유란 타인의 압박으로부터 개인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외부적 요인은 사회구조 상에서 개인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지의 정도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시공간적 요인이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자유들은 특정 시간대와 공간대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필자는 문과이기에 윤리와 사상을 고등학교 때 수강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이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해 논하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부터, 자유의지에 대해 다루었던 중세, 그리고 다수의 행복을 논하는 근대까지, 자유라는 개념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던 개인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자유를 논했다.
한편, 동시간대에 있더라도 공간에 따라 추구하는 자유가 달라질 수도 있다. 현대 사회를 보자. 수백 개가 되는 각 국가에서 화두가 되는 자유의 개념은 서로 다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참정권의 자유와, 특정 권리들에 대한 문제들은 계속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 내에서 마약이 허용되는 주와 마약이 허용되지 않는 주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세 가지 요인을 판단하기 위해 던질 수 있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봤다.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자.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자유롭고, 누군가로부터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자유로운가.
내적 요인 |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
외적 요인 | ‘나는 어떤 대상의 구속이나 속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움을 느끼는가? |
시공간적 요인 | ‘나의 권리는 보편적 권리로 보장받고 있는가?’ |
QnA 2
(기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들이 서로 다른데, 시공간적 자유는 인간이 동시에 추구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의견들이 모이면 인간이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김작가) 좋은 의견이에요. 하지만 개인들의 의견을 모두 합치는 것은 쉽지 않아요. 현재 미국에서 얘기하는 것과 한국에서 얘기하는 자유 완전히 다르잖아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은 내가 원하는 것과 외부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해요. 그리고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규정하는 자유의 개념은 시공간, 즉 역사적 맥락에서 규정하는 자유의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주관적 자유와 객관적 자유
, 보편적 자유가 도대체 어떤 자유를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시작이 생각의 자유인데, 각각의 개인의 생각들이 어떻게 보편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개인의 주관적 자유가 사회에서 용인되면 객관적 자유로 변화할 기회를 갖추게 된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확고하고 타당한 결정’에 따라서 행위로 표현된다면, 주관적 자유가 객관적 자유로 나아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이 모든 것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개인적 자유에 생긴 결함들은, 주관적 자유가 객관적 자유로 가는 길을 막는다. 더불어 개인의 ‘내적 요인’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칸트가 계속 언급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 작가는 의지가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선한 마음’이길 바란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자. 충동적인 의지로 발생하는 행동이 있는 반면(충동구매나, 일을 미루는 것 등), 선뜻 생각을 해본 후에 행해지는 일들도 있다(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지각을 하지 않으려는 행동). 독자 여러분들도 본인의 경험을 살려 잊고 있었던 자유를 떠올려 보자. 어떤가, 그토록 들어왔던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참 어렵게 참 느껴지지 않은가?
자유의지와 결정론
자유 : 「철학」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
“중세의 자유 개념은 신의 초월적 의지에 따라 모든 일이 완벽하게 계획된 결정론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자유는 한낱 이상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중세 후반 들어 자유 개념에 대한 획기적인 사고 전환이 시도되었다. 신학자들은 이성으로 무장한 과학의 위용에 대응하기 위해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동시에 인정하고 양립주의를 표방하는 사고의 유연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중략) 종교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들어오며 인과론적 결정론에 근거한 과학의 이성적 지식의 법칙성은 신앙의 예정론적 결정론을 걷어 냄으로서 새로운 자유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한다.”
- 〈자유의 포착〉 61p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끝없는 논의는 중세부터 시작되었다. 중세에는 자유의지보다 결정론의 개념이 강했다. ‘신이 정한 결말’이 있으므로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의 통제 아래 개인이 삶을 변화한다는 이야기는 허울 좋은 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공간적 요인의 변화는 신학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다임 변화가 눈엣가시였지만, 마땅히 그것이 ‘틀리다’라고 주장하기도 어려웠다.
독자들은 두 개념 중 어디에 마음이 가는가? 개인의 상상에 맡기겠지만, 필자는 자유의지 쪽으로 마음이 더 간다. 비록 ‘신’의 영향력이 현대 사회에서 무시할 만큼 작지 않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결정되었다고 말하긴 힘들다.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학기가 운영될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글을 읽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한편,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개념에 모두 동의하는 사람들은 두 개념을 적절히 혼합하여, 양립 가능한 이론을 만든다. 양립론은 양 극단의 두 개념을 적절히 절충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절충의 뜻을 생각해 보자. “서로 상반되는 양쪽의 견해나 입장을 취하여 알맞게 조절하려는 주장.’ 서로가 싸우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양립론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사이가 멀어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극단적인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새로운 생각들이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것을 잊지 말자.
QnA 3
(기범) 저는 법조인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이 꿈을 가지게 되는 건 자유의지에 의해서겠지만, 결정 이후에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들은 결정론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쿨에 가야 하는데, 이런 과정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요?
(김작가) 보통 철학 이론을 설명할 때, 양 측에 있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인이 중요하냐, 공동체가 중요하냐’와 같이 말이죠. 하지만 시대가 지나가며 발전할 때, 새로운 개념들은 양 극단에서 나오게 됩니다. 선구자들의 생각들은 모두 극단에 있었습니다. 서양에서 두 개념을 혼합하여 새로운 이론을 만든 사람은 플라톤과 칸트밖에 없습니다. 방금 로스쿨로의 진로를 결정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본인이 하셨잖아요? 그러니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로운 항해가 끝나는 곳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의 결핍은, 우리의 머리로 하여금 더 많은 상상력과 새로운 자유로 나아가게 만든다. 작가는 그것을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를 충분히 보장받는 곳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유토피아에 대해 낙관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곳에 가기 위해서, 이 꿈을 현실 세계에서 찾기 위해 노력한다.
토마스 무어는 유토피아를 모든 사람의 이상적인 공간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개념은 사뭇 다르다. 필자는 유토피아를 개인의 상상에 맡겨진 아주 독특한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생각이 담긴 이상적인 공간이기에, 그 특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특징들은 각자의 경험에서 나온다.
QnA 4
(기범) 교수님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토마스 무어가 말하는 ‘유토피아’의 개념과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개념을 차용하여 사용하게 되었나요?,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요?
(김작가) 토마스 무어는 유토피아를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이라고 말했어요. 이 이상적인 공간이 현실에 있나요? 아마 없겠죠. 제가 자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자유가 한 가지의 개념만 가지고 있다면 그 자유를 충족하는 것이 이상으로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위험한 주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생각의 자유와 선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선구자들의 이야기가 점점 객관적으로 변하며 우리는 새로운 자유를 찾아나서고, 또 계속해서 이 과정이 반복되며 유토피아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QnA 5
(기범) 그렇다면 유토피아도 무한히 확장되고 쌓일 수 있겠군요.
(김작가) 당연합니다.
우리들의 유토피아는 어디에
유토피아 :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
나와 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은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상인 유토피아도 서로 다르다. 우리들의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을까? 그토록 무언가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새로운 것들을 찾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할까?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자유를 찾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방유진(공연영상창작학부 공간연출과 4) 학생은 ‘그림을 그릴 때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무언가를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을 때 자유로우며, 누군가 나를 통제하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도 아무도 나에게 제약을 걸지 못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 길에서 찾고자 하는 본질적인 목표는 다들 비슷할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개인이 유지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가끔 컨디션이 좋은 날이 있고, 무엇이든 잘 되는 날이 있지 않은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원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날, 개인은 잃어버렸던 자유를 되찾았던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들은 유토피아를 향하여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다.
배에서 내리며
지금까지 배를 타고 자유의 바다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자유들을 보았다. 아니, 보고 받아들였다. 어떤가? 자신에게 결핍되었던 자유가 다시 채워졌는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개념인 자유에 대한 긴 항해를 갔다왔음을 이야기하자. 자유는 '자유' 한 단어에 귀속되기에는 담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크다. 하지만 이 많은 자유들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해도 자유는 존재하고 있었단 거다.
존재의 자유에서, 생성의 자유로.
“새로운 자유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서 이전에 없었던 권리를 요청하면, 인간은 비로소 기존에는 몰랐던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난다. (중략) 생성의 자유는 이성의 가능성을 믿고 구체적인 사안과 연관된 자유가 충족될 때까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 이렇듯 자유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상을 확대하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인간의 권리를 자유로 치환하여 인간의 권리와 관계로 연결된 권리 영역을 확장하고 보장하려 한다.”
새롭게 만났던 자유들을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두 개의 자유를 마주할 시간이다. 바로 존재의 자유와 생성의 자유이다. 존재의 자유는 동일성에 주목하는 자유이다. 그러니 보편적이면서도, 제도적으로 고착화된 상황에만 존재한다. 특정 사회 제도 안에서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는 자유나, 일반적인 인간의 생활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하지만 생성의 자유는 나와 너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자유이고, 우리가 각각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권리가 새롭게 자유로 생성되는 것이다. 그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새로운 자유를 갈망했다면, 이는 생성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QnA 6
(기범) 존재의 자유가 생성의 자유에 의해서 바뀐다면, 생성의 자유는 다시 존재의 자유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 것인가요?
(김작가) 좋은 질문이에요.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생성의 자유는 존재의 자유가 자리잡고 있는 사회에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워 보입니다. 현안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존중받지 못할 거에요. 하지만 그런 생각에 대해 사람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점점 익숙해지다 보면 그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생각해 볼까요? 천동설이 주인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묵살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고착화는 없다고 할까요. 새로운 자유가 생성되기 때문에,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또, 개인정보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국가의 문명이 뒤쳐진다면 개인정보의 중요성을 잘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시공간에 따라 바뀌고, 존재의 자유가 계속되는 곳에서 우리는 낯선 자유의 가능성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자유를 찾는 것은 생성의 자유이며, 이 생성의 자유는 오직 인간 개인이 각자 이룰 수 있는 아주 숭고한 목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성의 자유를 찾아서 그것을 이뤄나갈 때, 그 순간을 바로 '자유의 포착'이라고 부른다. 김동현 작가는 우리가 더 많은 자유를 포착하여, 유토피아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랐던 것이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이상을 찾아, 자신의 자유를 찾아 나가길 바란다.
… 그리고 필자도 다시 새로운 자유를 포착하려 떠나려 한다.
(글을 쓰면서 꼭 이야기하고 싶은 추억이 있다. 중앙대학교에서 후문 방향으로 쭉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작은 밀크티 집이 있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풍겨오는 진한 차향이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시간이 없어 다시 방문하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그곳에 가서 결핍되었던 자유를 되찾을 시간이다.)
[1] 한겨레, “사람은 하루에 6천번 생각한다”, 곽노필, 2024.6.29.
'최신호 87호 <내일로> >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퍼스널 스페이스는 (1) | 2024.12.29 |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