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김민지
*본문에 나오는 모든 번역은 각본집을 토대로 작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뉴비 영화광이다. 이 말은 내가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뉴비 영화광의 앳된 고민일 수 있지만, 내겐 영화 평론을 읽을 때마다 들었던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어떻게 저 평가에 ‘나’가 등장하지 않을 수 있지?”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영화가 무엇인지 다르게 정의 내리고, 영화가 응당 갖춰야 할 구성 요소를 다르게 인식하고, 영화가 좋은 다채로운 이유를 지닌다. 이 여러 가지가 모여 어떤 작품이 좋고 싫은지에 대한 평가 기준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영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야, 그 평가 기준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그가 쓴 글을 균형 있게 읽을 수 있다. 영화가 좋고 싫은 이유는 그 자체에 대한 객관적 평가일 수 없다. 평론은 시대의 역사 속에서 특정 성격을 가진 내가 본 영화에 대한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논리적이고 합당하며 가장 특수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어떤 유형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왜 이 영화여야만 하는지의 정당성이 도출된다.
따라서 이 글은 조금 독특한 형식을 띤다. 나에 대한 지나친 설명과 <더 웨일>을 향한 감출 수 없는 애정이 여과 없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해당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고 재밌게 관람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 웨일>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할 준비가 안 된 분께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으리라. 서론부터 밝혀두지만, 이 글은 명백히 <더 웨일>에 보내는 나의 찬사이자 고백이며, 세레나데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과 상황들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분들을 위해 간략한 소개를 하자면, <더 웨일>은 초고도비만과 심각한 심장병을 앓는 주인공 찰리(Charlie) 일생의 마지막 일주일과, 그 기간에 찰리의 삶에 들어온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다. 연극이 원작인 이 작품은 그에 걸맞은 영화적 형식을 취한다. 주연은 찰리, 리즈(Liz), 토마스(Thomas), 엘리(Ellie) 네 명 뿐이며 조연도 기껏해야 두 명이다. 배경 역시 찰리의 집 안, 아파트 거실과 방으로 한정된다. 집 밖의 상황은 거의 설명되지 않는 이 설정은 무대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소수의 인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연극의 특성을 그대로 영화에 구현한 것이다.
영화를 본 주변인들에게 소감을 물었을 때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인물들에게서 나의 못난 모습이 겹쳐 보여 힘들었다”는 답변을 많이 들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나고 못난 모습이 많다. 사랑할 부분보다 사랑하지 않을 부분이 더 먼저 눈에 띈다. 272kg이라는 어마어마한 체구, 셔츠에 고스란히 보이는 땀자국, 스트레스를 받으면 사정 없이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찰리. 8년 만에 보는 아빠에게 “뚱뚱하다. 징그럽다”며 폭언하고 가족, 친구, 삶 모든 걸 부정하는 엘리. 그녀의 엄마 메리(Mary)조차 “걔는 악마야(She’s evil)”라 말한다. 찰리의 애인이자 자신의 오빠였던 앨런(Alan)의 죽음을 목격하며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I don't think I believe anyone can save anyone)”고 믿는 찰리의 간호사 친구 리즈. 직접적인 구원 활동을 하고 싶다며 방문 선교를 하지만 “지구는 곧 멸망할 것”이라는 이단적인 믿음에 집착하는 청년 토마스까지.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내내 관객은 사랑스럽지 않은 인물들을 바라본다. 사랑스럽지 않은 인물들은 그를 바라보는 관객의 결점을 부각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포스터를 본다면 다소 징그럽고, 심지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반드시 갖고 싶어질, 소중해질 포스터.
그땐 불편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사랑스러움, 슬픔, 다정함만 보일 것(번역가 황석희).”
하지만 <더 웨일>을 번역한 황석희의 말대로 처음 봤을 때 거부감을 일으키는 찰리의 얼굴은 관람 후 따스한 위로로 다가온다. 그럴 때가 있다. 힘들다는 말에 “괜찮아, 잘하고 있어”보다 “맞아, 사실 나도 그래”라는 말이 더 도움 되는 경우 말이다.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긴 상대가 나를 내려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줄 때보다 망가진 우상이 더 큰 위로가 될 때, 우린 매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가장 강인해 보이는 사람도 때로 무너진다는 사실을, 힘든 일을 겪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확신을, 늘 위로받기만 했던 나도 누군가에게 손 내밀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해피 엔딩도 새드 엔딩도 아닌, 그저 누군가의 삶의 마지막 일부에 대한 이야기다. 그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 한 명 한 명의 삶에 다가가 제각기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다정해야 해(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재난을 막아야 해(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와 달리 <더 웨일>이 내세우는 하나의 메시지란 없다. 누군가는 이 영화로부터 일생일대의 위로를 받았을 것이며, 누군가는 가장 우울하고 지루한 두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좋고 나쁨 중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은 채 관객들을 영화관 밖으로 밀쳐낸 마지막까지 참 <더 웨일>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잠시, 나의 영화관(觀)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를 내용과 형식, 두 차원에서 설명하겠다. 우선 내용적으로, 영화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적이라는 것은 가상의 내용 없이 다큐멘터리 같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은 복잡다단하고, 한 사람에 여러 좋고 나쁜 면이 공존하며, 시간과 관점에 따라 진실도 변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길흉화복, 희로애락의 역동성이 없는 오직 기쁘거나 오직 슬프기만 한 내용을 싫어한다. 악을 물리치고 정의가 승리하거나, 사랑이 모든 걸 구하리라는 식의 맹목적 선(善)에 거부감을 느낀다. 또 형식적으로, 영화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같은 내용도 새롭게 다가올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하며, 무엇보다 대사가 아닌 스토리로 이야기해야 한다. 나의 고집스런 취향이긴 하다만, 대사로 교훈을 전하는 영화를 싫어한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세계관을 꾸리고, 배우를 섭외하고, 두세 시간동안 관객을 한 자리에 앉혀두었으면서 결말에 가 “사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잘 들어”하는 대사를 만나면 찬물을 된통 맞은 기분이다. 나는 몇 초만에 지나가는 대사 한 줄이 아닌 영화를 통해 느낀 경험의 총체로 그 의미를 전달받고 싶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새드 혹은 해피 엔딩으로 귀결할 수 없는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더 웨일>이 내용적으로 훌륭히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결말에 이르러 주요 대사가 쏟아지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규정할 수 없기에 창의적이라 여긴다. “그 누구도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없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 인물들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소통했으므로, “인간은 위대한 존재야”라고 믿기엔 인물들조차 사랑스럽지 않은 면이 많았으므로.
아버지와 딸
인물과 스토리 모두 사랑스럽게 여겼지만, 내게도 사랑스럽게만 보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었다. 특히 찰리와 엘리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들이 그랬다. 찰리를 좋은 아빠라 포장하기엔 그는 너무 무책임하게 가족을 떠났고, 엘리가 어린 시절 받은 상처를 이해하기에 그는 너무 모진 딸이었다. 마지막 장면까지도 “(너를 통해) 내가 인생에서 잘한 일이 단 하나라도 있단 걸 알아야겠어(I need to know I did one thing right in my life)”라는 찰리와 “빨리 죽어버리기나 해”라 말하는 엘리는 관객을 불편에서 구원해 주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처음 엘리가 찰리 집에 온 날과, 엔딩 직전 둘이 함께 있는 마지막 순간 사이엔 변화가 있다. 일어서보라는 딸의 요구에 못하겠다며 주저앉은 아빠와 그런 아빠를 두고 집을 떠난 딸에서, 박차고 나가려던 문을 등진 채 에세이를 읽는 딸과 그런 딸을 향해 한 발 한 발 어렵게 발을 내딛는 아빠의 투샷으로 둘의 관계는 진전한다.
그 변화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나는 어쩌면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엘리의 한 대사에서 처음으로 찰리를 향한 애정을 엿보았다. 그 대사는 영화의 중반부에 등장한다. 학교에 제출할 에세이를 받기 위해 찰리의 집을 찾은 엘리는 찰리가 자신이 왜 어린 엘리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해명하자 화를 내며 “우리한테 돈이라도 보내줄 수 있었잖아”라고 말한다. 양육비보다 더 보낼 수 있지 않았냐고, 그렇게 내 인생의 일부가 되고 싶었으면 전화라도 하지 그랬느냐고. 엘리가 찰리에게 또 화를 내는 진부한 장면이라 여길 수 있지만 난 분노 이상의 것이 함축되었음을 느꼈다. 새 연인과의 사랑을 이유로 딸을 떠났던 아빠에 대한 설움, 그 뒤로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신에게 손내밀지 않은 찰리에 대한 원망, 여느 아이처럼 사랑받고 싶었던 엘리의 어리광이 묻어 있다.
그런 엘리를 보며 찰리는 슬픈 눈으로 답한다. “나를 봐, 어느 누가 내가 그들 인생의 일부이길 바라겠어(Ellie, look at me. Who would want me to be a part of their life)?”라고. 자기 비하. 찰리를 자기 스스로의 몸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 괴리시킨 주범은 다름 아닌 자신을 바라보는 찰리의 그릇된 시선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도 존중하지도 못하는 태도. 이는 아픈 자신을 간호해 주는 리즈에게 끊임없이 “미안해(I’m sorry)”라며 사과하는 모습과, 토마스에게 “내가 징그러워(Do you find me disgusting)?”라 묻는 모습에서도 이 모난 태도가 드러난다.
스스로에게 진실되지 못한 찰리와 달리, 엘리는 그런 찰리의 모습을 보며 조금씩 자신의 진심에 다가간다. 이 해설은 <더 웨일> 각본집에도 적혀 있다.
“찰리는 엘리를 바라본다. 엘리도 그를 응시한다. 여태껏 그들이 함께 있던 순간 중 가장 가깝다. 엘리는 조금씩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한다(Charlie looks at her, Ellie stares back at him. It’s the closest they’ve been to one another yet. Ellie is starting to crack a bit).”
‘진실됨’은 이 영화가 내세우는 덕목 중 하나다. 진실, 거짓이나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 찰리는 온라인 수업에서 카메라를 켜지 않으며, 앨런의 방문을 잠가두며, “나는 일어설 수 없어”라 말하며 주변인으로부터, 과거의 사랑으로부터, 자신의 몸으로부터 스스로를 괴리시킨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지 않고 최대한 숨기려, 잊으려,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고 자기 삶에 들어온 여러 사람을 마주하며 찰리는 진실되게 변한다. 학생들이 적은 솔직한 글을 읽은 뒤 카메라를 켜 처음으로 자신의 퉁퉁 부은 몸을 낱낱이 보여주고, 토마스의 도움으로 사랑했던 연인 앨런의 방문을 다시 열며 마지막 순간 엘리를 향해 그 어떤 도구의 도움 없이 직접 두 발로 걸어간다.
찰리와 엘리가 마주 서있는 엔딩 장면은 상징적이다. 죽어가는 찰리를 놔두고 집을 나서려는 엘리는 문을 열자 얼굴에 쏟아진 햇볕 아래서 “아빠, 제발...”이라 말하며 다시 한번 진심을 꺼낸다. 이어 뒤를 돌아 찰리의 부탁대로 자신이 어렸을 적 쓴 에세이를 읽기 시작한다. 자존심을 세웠더라면, 미운 마음에 박차고 나갔더라면 실현하지 못했을 진실됨이다. 그런 엘리의 진심에 찰리도 최선을 다해 답한다. 보행기 없이 고래 같은 몸을 힘겹게 일으켜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발, 두 발 엘리에게 나아간다. 엘리가 읽은 에세이는 영화 전반에 걸쳐 몇 번이고 인용되지만, 관객은 한 번도 그 에세이를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모비 딕’에서 고래에 대한 지루한 서술이 나오는 부분이 가장 슬펐는데, 그건 작가가 자신의 슬픈 이야기로부터 우리를 아주 잠시 구원해 주려는 의도였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 삶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기쁘게 했다. 나의…(This book made me think about my own life, and then it made me feel glad for my…)” 이후 줄임표(…)에 나오는 말이 무엇인지, 관객은 마지막 장면에서야 해답의 실마리를 얻는다. 마지막 대사 이후, 엘리는 찰리를 바라본다. 찰리는 웃는다. 시선 안에 답이 있다. 줄임표 안에 들어갈 말은 “아빠를 위해(dad)”다.
모든 순간 오르고 내리다
우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주일을 모으면 수백 번도 넘게 추락할 것이다. 갓 태어났다고 해도, 죽기 직전이라 해도 자비(mercy)란 없다. 영화 속 찰리의 삶도 그랬다. 이 영화의 시퀀스는 요일마다 전환된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화면 아래 ‘MONDAY’, ‘TUESDAY’ … 라는 문구가 적히고, 그 요일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꼭 다섯 번이 나온다. 그 하루하루엔 각각의 시련과 고통, 기쁨과 웃음이 있다.
월요일에 찰리는 급성 심장 발작으로 죽을 고비를 맞지만 때마침 선교하러 문을 두드린 토마스와 현관문을 잠그길 깜빡한 리즈 덕택에 안정을 찾는다. 화요일의 찰리는 8년 만에 자신을 찾아온 반가운 딸 엘리를 만나 기뻐하지만, 이내 엘리가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뚱뚱하고 한심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떠나려는 엘리를, 찰리는 자신이 과제를 대신 써 정학을 막아주고 돈도 주겠다고 겨우 설득한다. 수요일에 찰리의 전 연인이 종교적 이유와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목숨을 끊었단 사실이 밝혀진다. 그제서야 관객은 그가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둔 이유를 알게 된다. 목요일에 찰리는 전 부인 메리와 오랜만에 재회한다. 여전히 엘리가 좋은 사람일 거라 믿는 찰리와 그의 희망을 모질게 깨뜨린 메리는 여전한 간극을 느끼며 다시 멀어진다. 금요일에 엘리는 여느 때처럼 찰리의 집을 박차고 나가려는 마지막 순간 뒤를 돌아본다. 마침내 둘은 마주 선 채 서로를 향해 웃는다. 오직 행복하기만 한 날도, 슬픔에만 침잠된 채 빛조차 들지 않는 날도 없다. ‘무조건’적인 건 어디에도 없다.
찰리의 삶처럼, 창문 밖 오고 가는 새처럼, 흐렸다 밝아지는 날씨처럼- 인생은 파도와 같아서, 기분이 높아지고 낮아지고 상황이 좋다가 나쁘고 나쁘다 좋아진다. 파도가 물결치는 원리는 유체의 바다 위로 바람이 지나가며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 바다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깊은 심연을 품고 있는 바다일지라도, 그 외부에 부는 바람결로 인해 오르고 내리는 파랑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내가 아무리 고요한 마음, 긍정적인 태도,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도 거스를 수 없는 어떠한 요인으로 슬프고, 화나고, 힘든 일이 생긴다.
한동안 삶이 가져다주는 끊이지 않는 고통에 “왜 내 삶은 이리도 고통스럽기만 할까!”라며 좌절한 적이 있다. 철학도로서 불교의 정신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생(生)은 고(苦)다’라는 기본 전제가 가장 인상적이다. 윤회나 업이나 집착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말하기 이전, 불교는 삶은 원래 고통이라는 진단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는 “삶의 궁극적 목표는 (윤리적 실천을 통한) 행복”이라 말하는 칸트와는 다른 접근법이다. 삶에 대해, 우리는 이와 같은 입장을 자주 취한다.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고, 힘듦은 나중에 올 기쁨을 배로 증가시키기 위해 찾아온다는 설명 말이다. 하지만 삶을 좀 살아본 분들은 알겠지만, 고통의 힘듦은 행복의 기쁨보다 치명적이다. 행복만에 기대어 고통 가득한 인생을 살기엔 자주 힘에 부친다.
행복에 대한 집착과 다가올 고통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준 건 지나친 긍정도 회의도 아닌 직시와 진실에 기반한 하나의 생각, “생생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라보고, 현재적인 순간 순간을 살아가자는 것. 행복은 내 삶의 궁극 목표가 아니며, 고통도 나중의 행복을 증대해 줄 촉매제가 아니라는 담담한 인식이다. 행복은 행복이고, 고통은 고통이다. 생생한 지금을 사는 것만이 나의 목적이다. 순간순간들이 모여 완성될 나의 인생이란 흐름을, 그때의 내가 애정할 수 있길 희망할 뿐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내 삶이 너무 별 볼 일 없는 무언가가 되진 않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윤슬’이라는 단어가 있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의미한다. 콕 집어 그 양태(모양)를 가리키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물결치는 파도에 빛이 반사되는 모습은 경이롭고 아름답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빛이 반사되는 표면인 바다가 한시도 빠짐없이 출렁출렁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기 때문에 그토록 반짝이는 빛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파도치지 않는 바다는 반짝이지 않는다.
고래는 바닷속에서 일생을 사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아가미가 아닌 폐로 호흡하는 고래는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보통 8분, 길게는 1시간 반에 한 번씩 푸우- 하고 공기를 내뱉는다. 바다사자, 물개 등 고래 이외에도 바다에 사는 포유동물이 있으나, 이들은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살 수 있지만 고래는 물에서만 산다. 고래가 물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몸집이 가장 큰 포유류로서 육지의 중력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포유류지만 물속에 살고, 중력의 무게로 인해 육지에 머무르지 못한 채 바다에 빠져야만 하는 운명의 고래. 이 운명을 가엾게만 여길 필요는 없다. <더 웨일>로 2022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브랜든 프레이저가 수상 소감에서 말했듯, “고래만이 깊은 곳까지 가서 헤엄칠 수 있”으니까. 파도치는 바다에 윤슬이 반짝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우린 언제든, 얼마 동안이든 깊은 심연에 사는 고래가 되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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