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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호 <르네상스: 붕괴와 재건>/사회

AI 시대에서 낭만을 외치다

by 중앙문화 2023. 7. 9.

2023 봄여름 84호 <르네상스: 붕괴와 재건>

 

수습위원 이예린

인포그래픽 김가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혁명’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대부분 정열적으로 다투는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의 거장,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말이다. 그림 속 여성은 위엄있는 표정으로 적군의 시체더미 위에서 프랑스 국기를 들어 올리고 있다. 그 뒤로 무기를 든 수많은 시민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듯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혁명은 파괴적이고 전복적이면서도 엄숙하고 장엄하다. 기존의 가치나 체제는 붕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대가 재건된다. 하지만 그 시대가 정말 새로웠는지는 의뭉스럽다. 돌이켜보면 여태 모든 혁명도 그다지 ‘혁명적’이지 않았다. 세상은 돌고 돌며 사람 사는 것도 다 거기서 거기다. 신분제를 붕괴시킬 것처럼 보였던 봉건 사회의 폐지도 실제로는 또 다른 계급제도를 만들지 않았던가. 왕과 귀족이 사라지자 부르주아라는 자본가 계급이 나타나 세상을 장악했다. 한 특권층의 붕괴는 부의 재분배가 아닌 제2의 특권층으로의 권리 이양일 뿐이었다. 정말로 세상을 뒤바꿀 혁명은 판타지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듯하다.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자는 더 부유해진다. 이는 불변의 진리처럼 어떤 혁명으로도 타파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사실상 역사책에서 시대적 특성을 구분 짓는 도구나 다름없게 느껴진다. 4차 산업혁명 또한 전문가들의 말장난일 뿐인 듯하다.

 

 하물며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제대로 맞아떨어진 적이 별로 없다. 첨단기술이 인간의 삶을 편하게 만들 것이라는 낙관론부터 로봇이 지구를 폐허로 만들 것이라는 비관론까지. 미래를 향한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했지만 어느 것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헐크의 주먹에도 끄떡없는 아이언맨 수트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든 척척 대답하는 홀로그램 비서는? 어쩌면 SF 영화처럼 하늘에 공중도시가 떠 있고 사이보그 경찰이 활보한다고 해도 특별한 감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한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는가. 달라진 규율과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변함없이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할 뿐이다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공부하고 취업하고 노동하는 삶. 세상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는 한 이러한 삶의 방식은 고집스럽게 인간을 옭아맬 게 뻔하다.

 

“곧 전문직이 실직할 겁니다!”

 

 그런데 최근 몇 달간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 여태 실감 나지 않던 변화가 갑자기 괴물 같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댔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회적 지위로 말미암아 기득권의 특혜를 톡톡히 누리던 일명 ‘사(字)자 직업’군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니. 그간 수많은 부모가 제 아이를 전문직으로 키워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지 않았던가. 또 아이들은 그런 부모에 응하기 위해 유년 시절부터 계획된 경로를 이탈 없이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 기나긴 레이스의 끝에 나타난 것이 결승선이 아닌 느닷없는 실직 경고라니. 허망한 표정의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아이: 전문직이 무엇 때문에 실직하는데요?

        그러자 미래로부터 이런 답변이 날아왔다.

미래: 인공지능 때문이죠! 정확히는 ‘챗지피티(ChatGPT)’같은 채팅형 인공지능 말이에요.

        서 있던 곳을 잃은 아이들이 다시 물었다.

아이: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죠?

        미래는 편안하고 자비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미래: 여러분은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요.

 

 우리는 변화 앞에 낙관을 할 수도 비관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변화는 온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는 변화를 거부할 권한이 없다. 태어날 시대를 고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찌 됐든 이 변화의 흐름을 유용하게 만들어야 한다. 챗지피티가 몰고 온 변화의 새로운 파장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함께 알아보자.

 

 

대화를 해주는 기계가 변화의 발생지라고요?
: 챗지피티, 격동의 예고

챗지피티. 언스플래쉬.

 이제는 챗지피티란 이름이 낯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여러 분야에서 관련 논의가 뜨겁게 다뤄지고 있다. 한 철만 뜨겁게 달군 가십거리에 불과한 메타버스나 가상화폐와 달리 챗지피티는 실질적인 논의로서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논의의 진행 속도도 무척 빠르다. 이 책이 발간될 때쯤에는 완전히 새로운 정보들이 등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챗지피티가 무엇이길래 전문가들은 왜 그리도 엄포를 늘어놓는 것일까? 챗지피티는 대중이 처음 마주한 ‘소통다운 소통’이 가능한 채팅형 인공지능이다. 이전의 인공지능 모델은 끝말잇기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반면 챗지피티는 시나리오나 에세이까지 써내며 인간을 방불케 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 마디로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그의 현란한 도발에 많은 이들이 현혹되는 이유다.


 그러나 챗지피티가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인공지능은 아니다. 대중에게 먼저 알려진 것뿐이다. SF 소설의 대가 윌리엄 깁슨은 2003년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 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인공지능은 이미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챗지피티의 급부상 전, 그 이상의 성능을 지닌 인공지능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구글의 ‘스위치 트랜스포머’나 베이징인공지능연구소의 ‘우다오 2.0’은 챗지피티의 파라미터[각주:1] 수를 능가한다[각주:2]. 챗지피티는 독보적인 성능 때문이 아니라 비전문가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라는 점 때문에 대중이 인정한 인공지능이 됐다. 이 때문에 챗지피티는 채팅형 인공지능의 대명사처럼 쓰이고는 한다. 마치 최초의 굴삭기 회사 ‘포클랭’의 이름을 본떠 모든 굴삭기를 포크레인이라 칭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이유로 이어지는 글에서도 채팅형 인공지능의 총칭으로서 챗지피티를 언급하려 한다.


 챗지피티는 등장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경이와 공포를 선사했다.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 왔던 인공지능으로 인한 실업 문제가 여느 때보다도 현실성 있게 다가왔다. 놀라운 점은 실업 위기에 처한 직종이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가 아니라 화이트칼라(사무직 노동자)라는 것이다.

 

“지위가 높은 직업이 대체하기 힘들 거로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대체하기 쉬운 직업은 데이터 분석만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의사가 환자의 과거 질병 기록이나 현재 증상 같은 정보를 받아 분석하는 일만 합니다. 이런 일은 대체하기 쉽습니다. 간호사 들은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고 우는 아이에게 주사를 놔야 하죠. 이런 것은 대체하기 어렵 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공지능 간호사보다 인공지능 의사를 먼저 보게 될 것입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쉬운 직업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각주:3]. 여태까지는 AI나 기계가 단순노동을 대체하고 인간은 더 복잡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지위가 높은 직업들이 먼저 AI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예측으로 인해 이러한 믿음은 완전히 전복됐다. 사실 실업 위기에 놓인 것은 특정 직업군만의 문제가 아니다.

 

 AI 석학 스튜어트 러셀 교수[각주:4]는 올해 2월 한국경제와의 인터뷰[각주:5]에서 AI로 인한 인간 대량실업과 그로 따른 혼란을 우려했다. 그는 과거 농업의 기계화를 예로 들며 “98%에 달하던 농업 인구가 40%까지 감소한 것처럼 AI 혁명도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는 현재 경제가 운영되는 방식을 생각하면 기계가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앞으로는 노동과 경제의 개념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겉보기에는 대화에 어울려 주는 게 전부인 챗지피티에 대해 이토록 어마무시한 경고는 과장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말을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는 챗지피티가 단순히 대화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채팅형 인공지능을 통해 다양한 업무를 하는 모습. 프리픽.

 챗지피티는 일종의 플랫폼이다. 구글이 검색엔진을 통해 여러 서비스와 연결되는 것처럼 챗지피티도 채팅창을 통해 여러 정보와 접속한다. 이를테면 챗지피티에게 “내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노래를 종합해서 새로운 곡을 만들어줘”라거나 “그 곡에 어울리는 애니메이션을 카툰 그림체로 만들어줘”라거나 “최종적으로는 노래와 애니메이션을 뮤직비디오처럼 하나의 영상으로 합쳐서 내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 해줘” 라고 부탁해 본다고 치자. 이 똑똑하고도 다재다능한 인공지능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작곡 프로그램, 애니메이팅 프로그램, 유튜브를 모두 연계해 명령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계성은 앞으로 무섭도록 발전할 전망이다.

 

 이 때문에 구글이 ‘코드 레드[각주:6]’를 발동하기도 했다. 책 ‘챗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의 저자 김대식 교수는 이를 두고 “검색의 시대가 끝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구글 대신 챗지피티를 찾는 세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것. 김 교수의 말에 따르면 현존하는 포털사이트들은 더 이상 광고 시장의 수요를 충족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구글은 인간의 질문에 수백 개의 링크로 답하며 사용자의 클릭을 요한다. 클릭을 할 때마다 그의 성향과 선호도에 대한 정보는 광고주에게 넘어간다. 덕분에 구글은 오랜 시간 광고로 연명할 수 있었다. 반면 챗지피티는 구체적인 언어로 답한다. 클릭 수가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광고 매출까지도. 앞으로 우리는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링크의 바다를 헤맬 필요 없다. 챗지피티라는 네비게이션에 닿고 싶은 정보를 질문만 하면 최적의 결괏값을 안내받을 수 있다.

 

 게다가 챗지피티의 무한한 확장성은 구글이 갖지 못하는 최대 이점이다. 구글은 플랫폼 안에 사용자를 가두는 폐쇄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챗지피티는 확장을 전제로 하는 개방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각주:7]. 예를 들어 웹툰을 보려 할 때, 네이버는 자회사 콘텐츠로 유도하지만 챗지피티는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다양한 웹툰 플랫폼으로 인도한다. 다시 말해 일종의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앞서 말한 연계성까지 자동으로 이뤄진다. 연계성의 자동화를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이 목표만 설정하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완성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어떤 개입도 필요하지 않다. 이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다. 지난 3월 30일, 챗지피티를 개발한 오픈에이아이(OpenAI)는 자동화 능력을 강화한 ‘오토지피티(AutoGPT)’의 데모 버전을 공개했다. 다만, 오토지피티는 사용법이 어렵고 접근성이 낮아 대중적으로 상용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편화되지 않았을 뿐, 인간의 상상은 이미 현실이 됐다.


 인공지능이 알잘딱깔센[각주:8]하는 세상이 왔다니. 믿기 힘든 현실이다. 이러한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인류의 삶은 편리하다 못해 간단해질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우리는 모두의 실업을 위해 그토록 기술을 발전시켰던 것인가?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할까? 노동을 상실한 시대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여전히 우리는 변화에 대한 불안을 거둘 수가 없다. 불안에 대한 해답을 역사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인간과 기계가 처음으로 대면했던 제 1차 산업혁명으로 가보자.

 

 

인간이 처음 기계와 조우한 그날
: 영국의 제 1차 산업혁명과 낭만주의

인간 노동자가 기계와 함께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 언스플래쉬.

 첫 번째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1860년대 영국은 여러모로 현 상황과 비슷하다. 기계의 등장으로 인간의 일자리와 본질적인 가치를 고민했다. 하지만 인류는 좌절하지 않고 다음으로 나아갔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답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역사를 해답지 삼아 우리만의 답을 찾아내면 된다.

 

 18세기 영국에서는 기계화 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이 발발한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옷감으로 쓰이는 솜 때문이었다. 옷감 재료로 목화솜이 유행하자 영국의 자본가들은 솜 판매에 나섰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산 솜과 경쟁하기란 쉽지 않았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인건비를 낮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고민의 결론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방적기(솜에서 실을 자동으로 생산하는 기계)였다.

 

 문제는 인간소외였다. 방적기의 개발로 많은 노동자가 생산력에서 밀려 실직했다. 먹고 살기 어려워진 서민들은 공장의 기계를 파괴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주도한 최초의 계급투쟁,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총리였던 스펜서 퍼시벌이 노동자들을 탄압하면서 러다이트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퍼시벌의 이러한 처사는 인간보다 기계의 지위가 높다고 국가가 나서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인간소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낭만주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인간의 이성보다 감정을 더 중시하는 문예사조로, 19세기 초 유럽에서 부흥했다. 낭만주의 이전의 예술은 다소 형식적이고 고리타분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감성적인 시는 낭만주의 이후에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고귀하다는 인식의 등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란 단순한 기분이나 느낌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포함한다.

 

 어쩌면 상상력은 인간만 가지고 있는 능력일지 모른다. 상상력은 회고하고 구상하는 능력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무언가를 상상한다는 것은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떠올리거나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은지금그리고여기에 관한 말밖에 하지 못한다. 반면 인간의 언어에는 시제가 있다. 덕분에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건설하는데 탁월하다. 물론, 인공지능도 과거를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상상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과는 차이가 있다.

 

 

챗지피티가 인간과 AI의 상상력이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다.

 챗지피티에게 상상력의 유무와 인간의 상상력과 다른 점을 질문해 봤다. 그의 답변을 정리해 보자면 이러하다. 인공지능은 입력된 데이터 내에서만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반면 인간은 주관적 경험과 직관을 통해 개별적인 창의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여타 동물이나 기계와 비교했을 때 독보적이다.

 

 낭만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상상력과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줬다. 작품을 통해 하층민의 불행과 세상의 부조리를 널리 알렸다. 대중이 군집해 정치적 만행을 규탄하고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던 것은 그 기저에 낭만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가 쓴 ‘1819년의 영국(England in 1819)’을 들 수 있다. 시는 1819년 영국 맨체스터 세인트 피터 광장에서 일어난피털루 대학살(Peterloo Massacre)’을 배경으로 한다. 국회법 개정을 요구하기 위해 모인 서민들이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한 사건이다. 희생자들은 기계 파괴 행위 처벌법과 곡물 관세법을 비판했다. 당시 귀족 지주들은 수입 곡물에 관세를 부과해 배를 불렸다. 이로 인해 가난한 서민들은 수입된 쌀을 사 먹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셸리는 시를 통해 서민들을 방치하는 왕정, 지배층, 군대, 종교, 의회 등을 지적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언젠가 찾아올 희망찬 미래를 기다리겠다는 암시를 통해 서민들의 고통을 위로했다. 이처럼 낭만주의는 감정에 기대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사람들을 계몽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점차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감정에 주목한 건 비단 과거의 낭만주의자만이 아니었다. 현시대 명망 높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오고 있다. 이광현 카이스트 총장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각주:9]. 그는 인문학의 위기는 곧 인류의 위기라며 인문학이 없는 사회에서는 기계들이 주인 노릇을 한다고 말했다. 인간성을 보호하고 새로운 도구와 공존하는 평화의 사상으로서디지털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21세기 인류가 스스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반드시 찾아내서 정착시킬 것이라며그것이 인공지능과는 다른 인간만의 우월함이자 지혜라고 설명했다.

 

 , 그는 인류가 인문학을 통해 인공지능 시대에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인간’이다. 앞서 나열한 모든 단어를 하나로 뭉치면 인본주의(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중심적 기치)’. 다가올 혁명은 인공지능이나 챗지피티 같은 기계가 아닌 인간 중심의 혁신이 돼야 한다.

 

 

노동의 죽음은 곧 새 시대의 탄생
: 인간과 기계가 가야 하는 길

인간 중심의 혁신이란 무엇일까? 쉽게 말해 사람을 위하는 것이다. 기계가 지적 노동까지도 대신하는 세상에서 인류는 드디어먹고 사는 문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은 여태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돈 버는 사람 따로 있다는 불일치를 조화시키기 위해 애써왔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이 불일치의 조화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만약 이 문제가 영원히 해결 못 할 난제라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노동자 역할을 자처하고 싶지 않다면 그 역할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찾으면 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기계다. 기계는 인간의 대역이 되기 위해 탄생했다. 인간은 기계를 대신 노동시킴으로써 노동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바로 그 점에서 인공지능 혁명이 다른 혁명들보다 더 유의미할지도 모른다고 본다.  전방위적인 노동의 영역에 인간이 아닌 기계를 세우는 최초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된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이다. 우선 노동, 경제, 교육 등의 개념이 전부 바뀔 것이다. 노동의 종말에 따르면 노동이 기계의 몫이 되면 노동의 개념은 단지 효용을 생산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인간은 내재적 가치 창출, 사회 공동체 의식 활성화 등 다른 역할을 맡는다. 그렇게 인간의 노동이 감소하면서 세계 시장의 흐름도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뇌과학자 장동선은 인공지능 시대에는 교육의 개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각주:10]. 예전에는 어떤 직업을 목표로 두고 계획적으로 공부를 했다면, 이제는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무엇을 배우는지부터 달라질 것이다. 현재의 교육은 존재하는 답을 찾도록 만든다. 이는 인간보다 인공지능이 훨씬 더 잘하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미래의 교육은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직접 찾아 나서도록 만드는 교육이어야 한다. 장 교수는 미래의 인간이 스스로 답을 발굴하는 개척자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인공지능 혁명은 세상에 다양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 혁명이 틀림없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업이나 인간 소외 문제가 반복될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복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중심축에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①기계의 방향성

영화 '아이언맨'에서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기계가 추구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평등이다. 고성능 인공지능에 대한 권리가 배타적인 소수의 몫이 돼서는 안 된다. 현 자유주의 시장에서도 독과점은 위험하다. 하나의 기업이 통제가 어려울 만큼 거대해지면 신규중소기업은 낙오되고 시장의 경쟁 구조는 파괴되며 소비자는 피해를 입는다. 인공지능 시대에서는 독과점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단일한 인공지능 기업이 세계 시장을 압도하면 지금의 빅테크 기업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그러니 기계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서 기계를 통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업은 전례 없는 막중한 책임을 가진다. 그 책임에는 인공지능을 설계에 사용된 개인정보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부터 거짓 정보로 대중을 현혹하거나 선동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된다. 챗지피티의 아버지 샘 알트먼[각주:11]은 인공지능이 지닌 잠재적 위험성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고 고백했다. 그는 인공지능이 대규모 허위 정보나 사이버 공격 등에 취약한 점을 인정했다. 최악의 경우, 자유시장은 파괴되고 모든 인간은 글로벌 대기업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다. SF 영화의 흔한 디스토피아적 광경이 단지 스크린 속 이야기로 그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이러한 재앙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개인이 비판적 사고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공지능의 통제 주체인 기업이 정의와 정직함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나서 이들을 규제해야 한다. 최우선적으로 좇아야 할 가치는 평등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기계가 일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아닐 때 인공지능 시대의 유토피아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의 신기술은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한편 정보 소외계층, 정보격차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패스트푸드 매장에 가면 키오스크 앞에서 방황하는 노년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바일 티켓 발권 서비스는 표를 빠르게 매진시켜 현장 매표소가 더 익숙한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이 도리어 평등의 퇴보를 초래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공지능 기술의 속성 자체는 평등을 지향한다.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적으로 영화아이언맨에 나오는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 (J.A.R.V.I.S)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자비스는 주인공 토니 스타크를 대신해 저택을 관리하고 전투를 보조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한다. 만약 그만한 고성능 인공지능이 모두에게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모두에게 고른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이를 테면 몇몇 학원 사이트가 폐쇄적으로 제공하던 대학 입시 정보도 앞으로는 모든 학생에게 제공될 수 있을지 모른다.

 

 모든 사람이 자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더 공평한 세상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공지능 접근권이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챗지피티는 아주 훌륭하다. 오픈에이아이 사의 웹사이트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나 쉽게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용법도 복잡하지 않다. 채팅창에 질문만 입력하면 된다. 향후 음성 인식 기술이 더 발달한다면 타자를 치기 어려운 사람들까지도 챗지피티를 사용할 수 있으리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리터러시 교육의 기회도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②인간의 방향성

건강보험료 분위별 (초)고도비만율. 국민건강보험 ‘2017 비만백서’

 농경사회와 비교했을 때먹고 사는 문제는 예전만큼 생과 사의 문제로 직결되지 않는다. 지금 세상은 양적팽창의 세상이다. 중요한 것은 양보다 질이다. 가난할수록 비만율이 높은 이유다. 하위 욕구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과거부터 꾸준히 이뤄져왔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정 부분 충족됐다.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

 이제는 상위욕구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가 이뤄질 차례다. 인간의 삶은 자아존중과 자아실현의 차원에서 설계돼야 한다. 앞서 인공지능 시대의 의의는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된다는 점에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의 긍정적인 속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은 사회적 욕구에 해당하는 소속감, 자아존중의 욕구에 해당하는 성취감, 자아실현의 욕구에 해당하는 삶의 보람을 한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행위다. 그런데 인공지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노동에서 멀어진다고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상위욕구를 해결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주변에 물었다.

 

“만약 평생 일을 안 하고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면 여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놀고 먹겠다는 답변을 들려줬다. 

그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정말 놀기만 하면서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하물며 게임을 할 때조차도 퀘스트를 찾아 나서잖아. 할일이 주어지지 않은 삶은 지루하고 괴롭지 않을까?"

그러자 몇몇이 인상 깊은 대답을 내놓았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에 동호회에 갈 수도 있고 취미를 즐길 수도 있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기계발을 할 수도 있어. 뭐가 됐든 할일을 찾아서 하고 있겠지. 그게 노동이 아닐 뿐.”

 

그의 말마따나 인간은 노동하지 않아도 다른 일을 통해 충분히 소속감, 성취감, 삶의 보람을 찾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의 목적이 달라진다는 점이 유의미하다. 앞으로의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보다 고차원적인 일을 할 것이다. 미래학자 짐 데이토는 새로운 시대의 인간을유희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으로 표현했다[각주:12]. 그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완전실업 시대가 도래하면, 인간은 자신과 타인에게 의미있는 활동을 하며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로사회에 따르면, 성과사회의 인간은 매일을 너무 바쁘게 살고 한번에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한다. 현재 인간은과잉에 놓여있다. 저자는 사색의 힘을 강조하며, 활동과잉의 인간은 사색할 여유가 없다고 비판한다. 사색은 문화와 예술을 낳는 황금 오리다. 인류의 문화적 업적 기저에는 사색이 있었고, 앞으로의 문화 역시 사색에서 탄생할 것이다.

 

 미래의 인간은 문화적 가치 창출에 더 적합할 것이다. 챗지피티 같은 대화형 플랫폼은 많은 클릭을 요하지 않는다. 이는 과잉주의의 산만함을 해소한다. 게다가 인공지능으로 인한 노동의 해방은 인간을 활동과잉에서 벗어나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색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지난 낭만주의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것은 인본주의다. 우리는 여백으로 남은 시간을 인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2의 낭만주의. 기계와 인간이 합쳐진 낭만적 인본주의. 인간만의 고유능력인 감정, 상상력, 지혜를 잘 활용하여 인류를 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의 종말은 문명화에 사형 선고를 내릴 수도 있다. 동시에 노동의 종말은 새로운 사회 변혁과 인간 정신의 재탄생의 신호일 수도 있다.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 제레미 리프킨

 

 인공지능 혁명으로의 격변을 겪고 있는 우리는 이와 같은 경고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미래를 유토피아로 만들지, 디스토피아로 만들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구글 드라이브를 통해 PDF 판형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mPZrgk_cFt1-dgWyvUr4FvXVMWZas3NO/view?usp=sharing

 

2023 - 84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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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값이 변하는 매개변수 형태의 데이터 [본문으로]
  2. 이시한, 『GPT 제너레이션: 챗GPT가 바꿀 우리 인류의 미래』, 2023. [본문으로]
  3. EBS. <위대한 수업>. [본문으로]
  4. UC버클리 전기공학 및 컴퓨터과학과 교수 [본문으로]
  5. https://www.hankyung.com/finance/article/202304251331i [본문으로]
  6. 응급한 위기상황을 나타내는 경고. [본문으로]
  7. 이시한, 『GPT 제너레이션: 챗GPT가 바꿀 우리 인류의 미래』, 2023. [본문으로]
  8.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센스있게’의 줄임말 [본문으로]
  9. KBS 교양 프로그램 <AI혁명- 다음이 온다> [본문으로]
  10. CBS 교양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15분>의 유튜브 채널 ‘세바시 인생질문’ [본문으로]
  11. 오픈에이아이(openAI) 사의 최고경영자 [본문으로]
  12. [로봇 미래예측 2030 대담회] - ‘로봇과 완전실업 시대’, 2021년 12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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