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첨제, 최선이었을까?
재학생 B
“이미 수강 인원이 초과된 강의입니다.”
정시에 클릭하라는 학교의 말만 믿고 정시에 눌렀는데 돌아온 건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팝업창 뿐이었다. 수강신청을 다섯 번은 넘게 해봤건만 어째 평소보다 수강신청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까? 아니다. 이전보다 수강신청할 수 있는 최종 여석이 절반으로 줄었다. 올해부터 도입된 ‘추첨제 시스템’ 때문이다. 수강신청 당일 학교 커뮤니티는 추첨제로 뒤집어졌다. 역시나 논의의 중심은 추첨제다. 아무래도 추첨제 회의론이 소수의견은 아닌 것 같다.
추첨제 시스템은 강의를 장바구니에 담은 학생 수가 여석을 초과할 때 여석의 50%만큼의 신청자를 무작위로 추첨하여 이관시키는 형태다. 한 번에 많은 접속 인원이 몰리면 시스템이 과부하된다. 추첨제의 목적은 이를 안정시켜 학생들이 적어도 서버 문제로 수강신청에 난항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학기 수강신청에서 디도스 공격으로 혼란이 초래된 이후 학교가 제시한 대안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학생들은 수강신청의 바늘구멍을 더 좁게 느끼고 있다. 단지 내가 수강신청을 실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추첨제는 탐탁치 않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1) “누가 이 제도에 동의했는가”
추첨제 시스템의 영향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추첨제 도입 이후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참여자의 81.8%가 해당 제도에 ‘불만족한다’고 대답했다. 커뮤니티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의견만 해도 절반으로 나뉘는 상황에서, 한 가지 본질적인 의문이 든다. 제도 시행에 정말로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된 게 맞을까?
사실 학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작년 10월 실시한 수강신청방식 설문조사에서 약 3500명이 추첨 이관제 도입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찬성자 중 대부분이 50% 이상의 이관비율을 희망했으며 그 중 절반가량은 100%의 이관 비율을 희망하기도 했다.[1] 사전조사에서는 여론이 나쁘지 않았고 고질적인 서버 민원도 줄일 수 있으니 제도 도입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찬성률과 응답률이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찬성한 3500명은 응답자의 52%정도에 불과했다. 사실상 절반 수준의 동의만 얻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것과 같다. 이를 학생의 동의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절반가량의, 그것도 겨우 2% 차이로 찬성이 우세한 설문조사 결과를 ‘학생들도 찬성한 제도’라고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커뮤니티 반응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 추첨 이관제 도입 이전에도 이후에도, 학생들의 찬성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전체 재학생의 22%가 참여한 설문조사라는 점에서 정확성에 의문이 든다. 전체 재학생의 22%는 6640명으로, 정규분포가 나올 수 있는 수준이지만, 전체 대비 22%는 다른 조사들에 비해 응답률이 낮다. 다만, 여기에는 학생들의 책임도 있다. 애초에 78%의 학생들이 설문조사에 참여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의견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린 것은 학생 스스로라고 할 수 있다. 학교의 행정에 더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설문조사에 성실하게 응답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미연에 방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 학생들의 참여를 충분히 유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더 많은 학생의 의견을 받으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학생들의 설문조사 참여 유도는 쉽지 않다. 학교 측은 앱 푸시 알림 또는 문자를 통해 설문조사 실시를 알리기도 하고 특정 조사들은 참여하지 않으면 포탈을 쉽게 이용할 수 없도록 하여 설문조사 참여율을 높이려 노력해왔다. 그 결과 2019학년도 1학기 재학생 교육 만족도 조사의 경우 약 96%, 2019학년도 2학기 재학생 만족도 조사의 경우 약 86%의 응답률을 보였다. 추첨제 설문조사가 두 조사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했다면 높은 참여율을 보였을 것이라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 사전조사가 시행된 때가 10월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포털 이용제한을 두고 실시하는 기간(보통 학기말)까지 기다리지는 못할 시급한 사항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포털 이용제한을 따로 둘 만큼 추첨제 설문조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걸까? 학생 입장에서는 만족도 조사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수강신청방식 변경이 더 중요할 텐데, 학교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2) “추첨제는 모두에게 타당한가?”
추첨제의 공정성은 학교측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바다. 학교가 추첨제에서 내세웠던 것은 공정성이었다. 고의로 시스템을 조작하지 않는 이상 추첨확률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운에 의해 수강 기회가 결정되는데 추첨 확률이 모두 같다고 해서 공정성이 보장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추첨제가 ‘수강신청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인을 고려할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해, 기존 수강신청에서 주어졌던 개개인의 특성들을 반영하여 모두에게 ‘타당한’ 제도인지 불확실하다.
추첨 이관제의 궁극적인 문제는 학생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수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수강신청 과정에는 학생 개개인마다 수업에 대한 '우선순위'가 있다. 기존의 수강신청 방식은 학생이 스스로 수업의 필요성에 따라 신청순서를 정해 둘 수 있었다. 이를테면 같은 A, B, C의 수업을 희망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는 B를 가장 먼저 신청하고, 누구는 A를 가장 먼저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추첨제에서는 해당 수업을 3순위로 원하는 학생이 이관되고, 1순위로 계획했던 학생이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학생들의 수강신청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서버의 안전성과 빠른 클릭뿐만이 아니다. 개인마다 수업 중요도 및 선호도에 따라 어떤 수업을 더 먼저 신청할 것인지도 중요하다. 강의에 대한 선호도의 절대적인 양적 논의만 진행하고 그 내부의 질적 수요는 고려하지 않는 추첨제가 ‘모두에게 타당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수강신청 시스템 변경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수업료를 내고 수강하는 학생들의 이익반영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번 추첨 이관제로 학생 모두가 얻은 이익은 무엇일까? 서버 안정화가 전부다. 대신 학생들은 세부적인 선호에 따라 보다 옳은 경쟁을 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학교는 추첨제가 학생에게 미칠 영향들을 다뤄보고, 학생들의 입장까지 상세하게 고려 했어야 했다. 추첨 이관제 도입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 단 1건. 이후 한달만에 추첨제 도입 공지가 올라왔다. 학생들에게 추첨제가 가져다 줄 이익과 불이익을 미리 판별할 수 있는 기회는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학교의 일방적인 추첨제 도입은 본 목적과 달리 학생들을 더 힘들게 하고 짐을 지우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3)“추첨제가 유일한 대안이었을까?”
수강신청 기간엔 학생만큼이나 학교 측도 긴장한다. 서버가 언제 터질지 모르고 관련 민원을 처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번 추첨제로 인해 ‘수강신청 당일 평소보다 민원이 줄어들었다’는 학사팀 의견이 있기도 했다.[2] 그러나 학생입장에서는 여전히 아쉬운 대안이다.. 시스템 과부하도 없애고 실질적인 수요도 반영하는 대안은 없었을까?
수강신청 방식은 여러가지로 나뉜다. 기본적으로 모든 재학생이 같은 날짜에 한꺼번에 수강신청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경우에는 시스템 과부하 문제가 심각해져 각 대학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다른 방식들을 취한다. 예컨대 중앙대처럼 홀수학번과 짝수학번으로 나누어 실시하는 ‘홀짝제’, 이화여대처럼 학년별로 수강신청하는 방식, 또는 전공과 교양 과목을 각각 다른 날에 수강신청하는 방식 등이 있다. 아무래도 학년별 수강신청이나 전공 및 교양과목을 분리하면 학교의업무가 많아지고 혼잡해질 수 있다.. 꾸준히 서버 안정화를 위해 노력해왔지만 제대로 해결되지 않자 중앙대는 다른 방법보다는 수강신청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시스템 과부하를 줄일 수 있는 추첨제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선순위 기반 추첨제를 선택하는 방식이 있었다. 고려대가 작년 여름 계절학기부터 해당 방식을 채택하였다. 수강희망과목을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정할 수 있으며, 해당 과목 수강희망 인원이 정원을 초과할 경우 전체 정원의 20%는 우선순위가 높은 순으로 추첨하여 우선 선발된다.[3] 물론 여기서도 공정성 우려가 제시될 가능성이 있겠지만, 올해 본 학교가 도입한 추첨제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이미 비슷한 제도를 개선해서 도입한 학교가 있었다는 점에서, 학교가 얼마나 제도 도입에 있어 학생 입장을 신경 쓰지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추첨제가 아닌 다른 대안도 있었다. 바로 마일리지 제도다. 연세대가 해당 시스템을 개발하여 활용 중이다. 학생들은 부여받은 마일리지를 선호도에 따라 배분해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게 된다. 이후 특수교육대상자, 전공생, 신청 과목수, 졸업 신청여부 등으로 세부적인 요소를 고려한다. 실제로 2015년 도입 이후 수강신청 시도 횟수는 전년도 동일학기 200만회에서 14만 7천회가량으로 줄었다.[4] 학교는 서버 부담을 덜고 학생은 수강신청 부담을 덜 수 있는 것이다.
‘고려대를 그대로 따라하자!’거나 ‘우리도 연세대처럼 시스템 개발해서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하자!’는 게 아니다. 충분히 도입한 추첨제 말고 다른 대안들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고려대나 연세대의 제도들을 차용하거나, 학년별 혹은 전공 교양으로 나누어서 실시하기는 힘들어도 적어도 단과대학별로 시행해보는 등의 방식들도 충분히 있었을 테다. 수요를 제대로 반영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단행한 추첨제 도입이 많이 아쉬울 뿐이다.
최선이 아니었던 추첨제, 그래서 앞으로는?
이제 막 도입한 추첨제를 바로 철회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구체적인 의사와 추첨제를 더 개선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을 더 넓혀보자는 이야기다. 현재의 추첨제는 ‘서버 안정화’만을 위해 지나치게 성급하게 도입한 것 같다. 실질적인 수요도 고려하지 못하는 추첨제가 학생과의 제대로 된 소통도 없이 갑작스럽게 도입돼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번 추첨제 도입으로 얻은 교훈은 두 가지이다. 우선, 학교는 학생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이 원한 것은 서버 안정화이지 그를 위해 수강신청을 운에 맡기고 실질적인 수요를 무시당한 것을 감당하고자 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의견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소통방식 창출이 필요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의 참여가 필요한데, 두번째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학생들에게 중요한 관심사인 수강신청방식 설문조사마저 참여율이 22%가량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홍보 부족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학생 스스로의 관심 부족 문제에 해당하기도 한다. Push 알림이나 문자 메세지 같이 학생들이 설문조사 진행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학교가 시행하는 설문조사에 관심을 가지고, 22%의 적은 참여율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번과 같은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통의 부재로 인한 미흡한 결정과 불만족스러운 결과. 결국 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할 것은 학교가 아닌 학생 스스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학교는 학생과의 소통에 있어 게으른 태도를 보였고 다소 일방적으로 수강신청 시스템을 바꿨다. 도입 전 실시한 설문조사는 거의 겉치레 식이었다. 학생들의 원활한 수강신청을 위해 시스템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해야하는 학교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보였으나, 정작 당사자인 학생만 쏙 빼놓고 추진한 셈이다. ‘일단 서버 안정화를 시켜보자’라는 학교의 일차원적인 문제해결 방식은 지나치게 가벼워 보인다. 번거롭더라도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쌍방향의 소통방식을 고집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장바구니 추첨 이관제, 이상적인 해결책인가”, 중대신문, 2021.03.01.
[2] “장바구니 추첨 이관제, 이상적인 해결책인가”, 중대신문, 2021.03.01.
[3] “20년 만의 수강신청제 개편, 우선순위 추첨제 도입”,고대신문,2020.05.31.
[4] “연세대, 수강신청 마일리지 제도 시행”,아주경제,2015.08.18.
'지난호보기 > 2021 봄여름, 80호 <끝말잇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후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에요" 〈대학생 기후행동 중앙대지부〉를 만나다 (0) | 2021.06.23 |
---|---|
너와 나의 삶이 만나 해방을 꿈꾸다―새벽이생추어리에서 함께 동물해방을 꿈꿔요 (0) | 2021.06.23 |
닫힌 학교를 여는 열쇠, 정보공개청구! (0) | 2021.06.23 |
'그럴 만한' 이유는 없다 - 노인혐오 제대로 마주하기 (2) | 2021.06.22 |
일상에 대하여―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나 있다, 3일간의 기록 (0) | 2021.06.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