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사회에는 다른 인간뿐만 아니라 많은 비인간동물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간으로 뒤덮인 곳에서 비인간동물은 생존하는 것조차 힘이 들 때가 많습니다. 종차별에서 살아남은 비인간동물로서 강력한 동물권 활동가가 되어 살아가는 돼지 새벽이와 잔디를 소개합니다. 이들이 생존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 있습니다. 국내 최초의 생추어리, 새벽이생추어리입니다. 이곳에서 새벽이와 잔디를 돕는 '새생이(새벽이 생추어리를 돌보는 사람들)' 여러분께 기고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새벽이와 잔디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신 분들은, 새벽이생추어리의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새벽이와 잔디, 새생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다면 후원을 통해 '매생이(매일 생추어리를 응원하는 이)'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
너와 나의 삶이 만나 해방을 꿈꾸다
-새벽이생추어리에서 함께 동물해방을 꿈꿔요.
새벽이생추어리 ‘새생이’
이 글은 한 명의 활동가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 모든 활동가의 경험을 취합하고 재구성하여 가상의 화자 ‘새생이’가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작성된 글이에요. 화자는 한 명이지만 그 안에 각기 다른 경험과 이야기를 가진 활동가 6인의 글을 녹여내었어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새벽이생추어리에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 새벽이와 잔디를 만나며 스스로와 사회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꿈을 꾸게 되었는지 지나온 길을 눈으로 좇아주시겠어요?
새벽이, 잔디가 생추어리에 오기까지
새벽이는 공장식축산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종돈장에서 구출, 잔디는 제약회사로 추측되는 연구실에서 탈출해 생추어리에 오게 되었어요.
‘생추어리sanctuary’는 ‘안식처’라는 뜻으로 동물들이 각자의 습성에 맞게, 본능을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에요. 인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땅 중 아주 작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무수히 많은 종차별 피해자 중 극소수가 살아가는 곳이죠. 때문에 낙원이나 천국이 아닌, 종차별적 사회를 비집고 간신히 삶을 유지하는 존재들의 안식처라고 할 수 있어요. 새벽이생추어리는 2020년 봄, 새벽이가 평생을 살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자분들의 도움으로 마련되었어요. 새벽이의 습성을 잃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진흙목욕탕, 나무기둥 등이 마련되어 있지만 새벽이의 욕구를 온전히 채우기에 충분한 공간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주어진 공간에서 새벽이가 최대한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에요. 새생이와 보듬이, 매생이의 마음과 노력으로 이곳을 유지하고 개선해나가고 있어요.
새벽이는 2019년 7월 초 종돈장의 분만사에서 태어났어요. 양돈농장에서 태어난 다른 돼지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자마자 이빨이 뽑히고 꼬리가 잘리고 거세당했어요. 농장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곰팡이성 피부질환까지 얻었어요. 생후 2주차에 디엑스이 코리아 활동가들에 의해 공개구조 되었어요. 두 달간 활동가의 집에서 실내생활을 하다가 점차 몸이 자라 충주의 동물보호소에서 야외생활을 했어요. 2020년 5월 마침내 새벽이생추어리에 발을 딛게 되었죠.
(위),(아래) 새벽이와 잔디가 봄에 새순이 돋아나는 땅을 밟고 있다.
새벽이는 몸집이 커진 지금에도 뭉툭하고 짧은 꼬리를 가지고 있어요. 꼬리가 잘리지 않았다면 긴 꼬리로 다양한 말을 건넸겠구나 싶어요.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잔디가 긴 꼬리를 양쪽으로 휙휙, 젓는 것처럼요. ‘단미’라고 부르는 아기 돼지의 꼬리를 자르는 폭력은 비밀리에 자행되는 줄 알았는데 ‘한돈 홈페이지’에 버젓이 적혀있었어요. 생후 3일 이내에 자른다는 내용이었죠. 누군가에겐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어요. 새벽이와 잔디의 삶은 사회가 인지하지 못하는 폭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이것이 우리의 진짜 삶이다, 라고요. 사회가 알고 있는(혹은 부정하고 있는) 비인간동물의 삶은 폭력으로 점철된 현실이라는 것을 새벽이와 잔디가 존재로서 증명하고 있는 거예요. 상품성을 이유로 도태되거나 평균 6개월이 되어 도축되는 운명인 사회에서 새벽이는 다가오는 7월 9일,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해요.
잔디는 인간의 삶에 이용하려고 실험동물로 개량된 종이에요. 비인간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 사례 중 인간들의 실제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얼마나 될까요? 개인의 업적 달성이나 기업의 부당이득을 위해 실행되는 연구가 많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에요. 유용성을 떠나, 어떤 삶을 실험이나 연구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폭력과 종차별을 행하는 것이에요.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개량된 종으로 태어난 잔디는 몸집이 작아요. 새벽이와 있을 때면 잔디가 훨씬 더 작게 느껴져요. 탈출 이후 동물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잔디는 회복이 더뎠어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자 회사 측에서 잔디의 안락사를 요구했다고 해요. 병원에서는 새벽이를 보호했던 활동가에게 연락을 주었고, 잔디는 실내생활을 하며 건강을 회복하다가 새벽이생추어리에 왔어요. 좁은 실내생활을 마치고 생추어리의 야외생활에 적응한 잔디는 흙을 코로 헤집으며 냄새를 맡거나 풀을 먹고, 볕에 따끈하게 달궈진 지푸라기 침대 위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며 지내요. 삶을 놓지 않고 이곳까지 와준 잔디가 고마워요.
지난 2월 잔디의 생일이 있었어요. 2020년 2월 초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라 봄을 맞이하는 입춘을 잔디의 생일로 정해줬어요. 생일이라는 의미와 문화가 비인간동물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지만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새벽이생추어리의 비인간동물들의 생일을 소소하게나마 챙기고 싶어요. 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들의 태어남, 존재, 삶을 이곳에선 부정당하지 않기를 바라요. 새벽이와 잔디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낄 정도로 더 좋은 삶을 살도록 해주고 싶어요. 늙어죽을 때까지 매년 꼬박 그들의 존재를 축복하고 긍정하는 날을 가지고 싶어요.
새벽이, 잔디를 처음 만나며
새벽이와 잔디를 만나기 전까지 저는 청결도나 깔끔함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어요.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던 저는 흙을 만져본 지 십 년도 더 되었을 거예요. 인간만을 고려해 만든 집과 건물에서 생활하다보니 흙이나 오물이 묻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요. 새벽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 아직도 생생해요. 흙과 침이 묻은 밥그릇을 씻고, 새벽이의 똥 치우는 일을 하고, 새벽이 집 안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지푸라기를 뒤집으면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어요.
잔디를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잔디와는 실내생활을 할 때 만났어요. 돼지와 실내에서 같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당할 게 많은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청결에 예민한 저는 또 한 번 당황했습니다. 옷과 몸에 분비물이 묻으니 거부감이 들었거든요. 잔디의 몸에서 떨어지는 각질 때문에 수시로 청소기를 돌리고 이불을 털어야 했어요. 밥을 줄 때마다 잔디가 쏟은 물과 침으로 난장판이 되는 바닥을 닦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로 방 안에 눈 대소변을 치워야 했어요. 쉴 새 없이 걸레를 빨아 널고 청소기를 돌리며 피곤함이 몰려왔어요. 끝이 없는 ‘지저분함’과 깔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잔디와 배변 문제로 씨름하면서 ‘왜 잔디는 베란다에서 누지 않을까?’ 질문이 떠올랐어요. 그러다가 ‘왜 잔디는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눌 수 없을까?’로 질문을 바꾸게 되었죠. 원래는 흙으로 돌아가야 할 똥오줌이, 인간을 위해 설계한 건물과 건물들이 밀집된 도시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었어요. 일상에서 더러움을 분리하고자 설계한 것이겠죠. 우리에겐 이 방식이 익숙하지만 잔디에게는 어색하고 낯설었을 거예요. 영문도 모른 채 인간들의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어디에 누어야 하는지 모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용변을 보는 등 생명 유지와 존엄에 관련된 가장 기본적 활동이 사회적인 것이라는 걸 몸으로 느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새벽이와 잔디가 이 사회에 합류할 수 있을까, 질문이 시작되었죠.
어느 날은 생추어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옷에 묻은 분비물과 진드기, 지푸라기, 흙을 억지로 떼어내며 나는 왜 이리 유난일까,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까지 생존한 건 누군가 나에게 돌봄을 제공했기 때문인데 나는 돌봄이라는 단어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구나. 생존을 위해 돌봄을 필요로 했던 이들인데 다들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구나. 오물이나 분비물이란 단어로 함축하며 지저분하다고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깔끔함이나 청결도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거예요. 왜 어떤 돌봄은 당연하고 정당하게 그려지고 어떤 돌봄은 일방적인 ‘봉사’라고 불리는 걸까요? 언젠가 들었던 강연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의존적이지 않은 이가 존재하냐는 질문과, 완벽한 독립성은 불평등과 연결성을 은폐하는 허상이라고요. 새벽이와 잔디를 돌보면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 많아져요.
새벽이와 잔디를 돌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다른 비인간동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하는 것 같아요. 인지하지 못했던 사회의 폭력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죠. 저 또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적도 많아요.
고기를 멀리하는 생활은 새벽이를 만나기 약 7개월 전부터 시작했어요. 고기를 입에 넣을 때면 같이 사는 강아지 우주가 떠올라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지던 때였어요. 코딱지만 한 강아지에게 우주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주었고 어느새 ‘가족’이라는 커다란 존재가 되어 있었어요. 우주가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된 후부터 고기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이 고기는 우주와 얼마나 다른 거지? 나랑은 얼마나 다른 거지? 하면서요. 그러다가 문득 채식주의를 결심한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어요. 건강이나 동물권, 환경문제로 함축되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어요. 이렇게 다양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고기가 음식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반려동물과 함께 살다가 비거니즘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고 내가 몰랐던 세상을 알게 해준 우주에게 고마웠어요.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모든 비인간동물과의 관계를 다시 맺게 해준 것이 정말 고마워요.
새벽이답게 잔디답게
새벽이와 잔디를 알아가며 돼지의 의사표현을 배워가고 있어요. 우주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내고 전혀 다른 몸짓을 보여요. 한 인간이 모국어를 배우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듯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는 시간은 더디겠지만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걸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새벽이는 굉장히 다양한 소리를 내는데, 배가 고프다고 보챌 때와 반가운 사람을 만나 인사할 때 중저음으로 짧고 빠르게 이어지는 소리를 내요. 만족스러운 배 마사지를 받으면 낮고 짧은 소리를 간간히 내요. 무언가 불편하거나 싫을 때는 고개를 홱 돌리며 ‘컹!’ 소리를 내요. 넓게 트인 앞뜰을 내달리면서 가끔 우렁차게 포효하는 소리도 내는데 뭐랄까, ‘온 천하에 자기 존재를 드러내겠다’는 표현 같아요. 추측일 뿐이지만 개인적으로 그 포부가 마음에 들어요. 잔디는 새벽이와 또 다른 방식으로 풍부한 의사소통을 해요. 맛있는 게 먹고 싶어 졸졸 쫓아다니며 보챌 때는 애처롭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요. 잔디는 싫은 기색을 잘 표현해요. 불편한 상황에 처한 잔디는 높고 강한 목소리로 ‘꽤애액~!’ 분명한 의사표현을 해요. 잔디의 우렁찬 소리에 당황한 적도 많아요. 다른 존재들이 서로의 감정을 읽고 기분을 살피는 일이 처음부터 쉬운 건 아니에요. 아직도 새벽이나 잔디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울 때가 많죠.
새벽이 코와 얽힌 이야기도 들려드리고 싶어요. 코로 땅 이곳저곳을 파헤치는 것을 ‘루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돼지가 살아가며 꼭 필요한, 빼놓을 수 없는 본능이에요. 새벽이가 손에 루팅을 하고 싶을 때 표현하는 동작이 있어요. 새벽이와 나란히 앉아있거나 누워 있다가 갑자기 고개와 함께 코를 위아래로 씰룩씰룩할 때가 있어요. 새벽이 코는 정말 유연해요. 평소에는 코 앞부분이 정면을 향해 있다가 루팅을 하고 싶을 때 30도 정도 위를 향해요. 그렇게 위아래로 씰룩거리면서 ‘꿜꿜’소리를 함께 내요. 이때 손을 가져다 대면 코에 힘을 주고 손바닥을 밀어요. 꾹꾹 밀어내는 이 행동이, 소위 고양이들에게 ‘꾹꾹이’라고 부르는 그 행동과 비슷해서 새생이들이 ‘꾹꾹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계절마다 달라요. 겨울에는 꾹꾹이 횟수가 굉장히 적었어요. 새벽이가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 꾹꾹이를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추운 겨울에는 몸이 편안하기보다 긴장되어 있는 상태라 꾹꾹이 횟수가 적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라고요.
비인간동물들이 저마다 다른 의사표현과 개성을 가지면서도 모든 존재는 닮아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인간동물도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정해져있고 입맛이 바뀌는데 비인간동물도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얼마 전 보듬이님이 쑥을 가지고 오셨어요. 새벽이와 잔디 모두 쑥을 처음 먹어보는 날이었죠. 새벽이는 쑥을 잘 먹었어요. 잔디는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잘 먹었어요. 잔디는 새벽이에 비해 입맛이 조금 까다로운 편인데 잔디가 주키니를 먹지 않아서 주키니를 대신할 채소로 오이를 더 주고 있어요. 예전엔 좋아했던 당근을 남기기도 했어요. 새벽이는 고구마보다 감자를 좋아해요. 곡물, 상추, 우엉뿌리, 돼지감자를 먹지 않았는데 요즘엔 곡물도 돼지감자도 잘 먹는 편이에요. 간식을 먹을 때 가까이 다가가면 무서울 정도로 큰 반응을 보여요. 새벽이도 잔디도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방해받을 때 짜증낼 수 있는 존재예요.
비인간동물이 ‘고깃집’의 간판이나 ‘먹거리’로 소비되는 지역의 명물로 대상화되어 그려진 것을 쉽게 볼 수 있어요. 보고 싶은대로 보려는 인간들의 심리가 반영된 거예요. 새벽이와 잔디, 그리고 비인간동물들은 앞치마를 두르거나 두 발로 서서 미소짓지 않아요.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공간 앞에서 누가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요? 비인간동물들은 땅과 흙을 가까이하는 자세를 취해요. 그것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외면하려 했던 이들의 원래 삶이에요. 조만간 수박철이 오면 센 힘으로 수박을 부숴먹는 새벽이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새벽이와 잔디는 계절이 바뀌며 겉모습도 달라졌어요. 해가 길어지고 뜨거워지면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몸에 황토흙을 바르고 있어요. 여름은 진흙목욕의 계절이기도 해요. 진흙에서 뒹구는 것을 그저 지저분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들의 삶엔 꼭 필요한 행동이에요. 진흙이 없다면 새벽이와 잔디는 몸에 화상을 입거나 열을 배출하지 못할 거예요. 잔디가 실내생활을 할 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인데 황토흙을 몸에 바른 채 새벽이생추어리 앞뜰을 누비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 어딘가가 저릿하기도 해요. 잔디가 실내생활을 할 때에는 다리 힘이 약해서 조심조심 다리를 떨면서 걸었거든요.
새벽이와 잔디는 새벽이생추어리에서 살아가며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삶을 도전하고 있지만 이 사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아요. 앞으로 더 다양한 것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제가 새벽이생추어리를 떠나는 것보다 새벽이와 잔디가 먼저 새벽이생추어리를 떠났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어요.
새생이들의 바람
새벽이와 잔디의 삶을 돌보며 이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새벽이생추어리의 역할인 것 같아요. 새벽이와 잔디의 존재가 평범한 일상을 균열 낼 수 있다고 믿어요. 사람들이 돼지로서 돼지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가졌으면 좋겠고 왠지 모르게 불편해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의문을 가지고 불편해하다 보면 돼지는 물론 다른 비인간동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자신을 발견할지도 몰라요. 처음엔 조금 어색하게 들리던 ‘돼지답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날도 올 거예요. 비인간동물이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차별과 억압은 설 자리를 잃게 되지 않을까요? 가장 낮은 곳에 놓인 존재들을 환대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눈앞에 마주치는 동물 한 명 한 명을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지금 처한 상황이 고통스럽지 않을지, 원하는 만큼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면서요.
새생이들 또한 특이하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끼셨을 거예요. 저희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어요. 불완전한 사람들이 변화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새벽이생추어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변화를 기대하고 더 많은 생추어리가 생겨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생추어리를 운영하고 이 안에서 새벽이와 잔디의 삶을 돌보고 있지만, 생추어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생추어리가 없어도 이들이 습성을 잃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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