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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호 80호 <끝말잇기>/대학

웬만해선 능력주의를 막을 수 없다

by 중앙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중앙문화 2021. 6. 22.

2021 봄여름, 끝말잇기

편집위원 김아영 

 

   개강과 동시에 관례처럼 학생들 사이에서는 ‘안성캠퍼스’ 논쟁에 불이 붙는다. 심지어 올해는 진학사에서 중앙대학교 안성캠을 ‘분캠’으로 잘못 표기해 학생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진학사는 이를 정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논쟁은 이어졌다. 개선되지 않는 교육 환경, 행정부처의 불균형 등은 안성캠의 고질적인 문제다. 중앙문화는 작년 78호에서 안성캠의 문제점과 본부의 기만에 관한 글을 싣기도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학생들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학생사회에서 일어나는 ‘안성캠에 관한 논쟁’은 안성캠 학생들이 본부의 태도를 규탄하는 것에서 서울캠 학생들과 안성캠 학생 간의 소모적인 다툼으로 변모할 때가 많다.  그럴까?

 

   중앙대는 서울과 안성  곳에 교지를  ‘이원화캠퍼스’로 운영된다. 교육부에서 새롭게 정원을 인가해야하는 분교와 달리,  캠퍼스가 기존 정원을 나눠운영하는 동일한 대학인 것이다. 그러나 내부 사정은 조금 다르다. 몇몇 학생들은 ‘입결’이라는 기준으로 서울캠과 안성캠 사이에 선을 긋는다. 같은 학교지만성적에서 차이가 나고, 외부 인식도 다르니, 결과적으로 같은 취급을 받긴 ‘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안성캠의 문제가  년째 지속되더라도 그건 ‘우리 학교’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안성캠 학생들이 서울캠과 안성캠을 비교하며 대우가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한다. 서울캠의 좋은 시설과 대우를 누리고 싶었다면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사정도 다를  없다. 이원화 캠퍼스 체제인 한국외대 역시 ‘글로벌 캠퍼스의 외부 인식은 어떤가요?’나 ‘학생  차별이 있나요?’라고 물어보는글을 입시 관련 커뮤니티에서 쉽게 찾아볼  있다. 이원화 체제라고 하는 대학도 이런 분위기인데, 분교로 분류되는 학교들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지난 4 고려대학교 학생 커뮤니티 고파스 에브리타임에서는 세종캠 재학생이 안암캠 비상대책위원회 교육자치국장으로 인준받자 그를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세상 말세다. 예전 같으면 말도  섞었을 세종 천민이 고파스에 올라와서 xx 있네 같은 글이 이어졌고, 결국 그의 인준은 취소됐다.[1] 입학 성적은  대학의 정체성이 되고, 대학서열화의 기준이 된다. 같은 학교라도 이를 피할  없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같은 학교 아래 동등한 학생이다. 차이는 대학 입시에서 상이한 성적을 가졌고, 다른 학과를 선택했다는 . 하지만 누군가는 ‘성적’을 이유로원색적인 비난을 감내해야 하고, 불편한 시설을 항의해도 실질적인 개선을 기대할  없다. 몇몇 서울캠퍼스 학생들은 ‘억울하면 전과해라’라는 조롱 섞인 말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성적은  능력의 결과물이고, 환경과 대우의 차이는 능력에 따른 ‘정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적에 따른 차별과 그의 기준 ‘능력’, 이는 ‘능력주의’와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능력주의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리도 고질적인 캠퍼스 차별을 문제를 낳았을까. 이것이 대학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능력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능력주의의 등장

마이클 영

 

    혈통에 따라 부와 권력을 세습하던 귀족주의가 지배적이던 시대에 능력주의의 등장은 혁명과도 같았다. 1958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처음으로 제시한 능력주의(meritocracy)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인정 시스템을 말한다.[2] , 현대사회에서 해석되는 능력주의에 따르면 총명한 머리와 개인의 노오력 있다면 누구나 특권층이   있고, ‘개천에서   수도 있다 것이다. 영은 당시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불러올 재앙을예견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제시했다. 하지만 능력주의라는 단어로 개념화된 능력에 따른 배분' 오히려 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널리, 아주 빠르게 퍼져나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 능력주의는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이 되어버렸다. 

 

   현대사회는 능력주의에 필요한 체제를 갖추어 나가는  했다.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복지국가의 중요성이 대두되며 국가 차원의 무상교육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각종 시험을 마주했다. 모두가 같은 교육과정을 밟고, 동등한 조건에서 동일한 시험을 치렀다. 사회는 기회의 평등 보장됐으니, 이는 공정한 경쟁이고 결과는 개인이 감수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과 대니얼 마코비치  저명한 학자들은 점차 이를 비판하기에 나섰다. 능력주의는 사실 불공정한 체제라는 것이다. 

 

   믿기 힘들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현대 사회를 다시 보자. 우리는 한번쯤 'ㅇ수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타고난 '수저'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역시 모두가 알고 있다. 능력주의가 창궐한 세상에서 엘리트는 부와 명예를 세습하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는 것이다. 보다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능력주의 작용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대중들은 공정 논하고 갈등과 혐오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과연 이것이 능력주의가 그리던 유토피아인가? 

 

능력주의의 근본적 병폐

 

저는 참된 능력주의가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저는 불평등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있다고 모든 사람이 믿을 있기를 니다.” 

2016 대선 힐러리클린턴 연설 일부[3]

 

   일각에서는 현대사회의 병폐들, 가령 부의 양극화, 엘리트 세습, 갈등과 혐오의 심화와 같은 부작용 능력주의가 오작동한 탓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틀렸다. 능력주의  자체 결함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하나씩 짚어보자.

 

   능력주의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문장이 있다. ‘우리의 성공은 우리의 [4]이란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점이 있다. 바로 이다. 나의 재능은 온전한 노력 산물이 맞는가? 《능력주의 허구다에서 저자는 타이밍이라는 요소를 외면할  없다고 말한다. 재능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발견’돼야 하고, 체계적으로 ‘계발’돼야 하고,  단계  ‘발전’돼야 한다[5]. 일련의 과정에는  타이밍 개입한다는 것이다. 재능을 발견할 기회와 이를 성장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배경이  시기에 알맞게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린 다시 성공의 갈림길 앞에서  재능 사회가 인정하는 재능인가라는질문에 맞닥뜨린다. 세계적인 화가 빈센트  고흐를 보자. 고흐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그가 죽고 나서야 재능을 인정받고 성공  있었다. 반대로 빌게이츠가 현대가 아닌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의 재능이 발현될  있었을까? 이렇듯 개인의 성공에는 행운의 영역 개입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의 성공은 우리 이라는 문장은 공허하기만 하다.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공의 요인은 대개 좋은 성적이나 실적, 학벌이다. 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개인의 온전한 능력적 요인만으로 여겨지면서 말이다. 허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실제로 비능력적 요인 완전히 배제하는 평가는 있을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부모의 경제적 지원, 계층배경, 특권의 대물림, 사회적 자본, 시대적 상황과 같은 요인들이 존재하니 말이다. 개인의 능력과  결과에 비능력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려워졌다. 모두가 동일한 선에서 출발했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상 다른 시작점에서 저마다의 속도로 달리고 있던 것이다. 과연 기회의 평등만을 제공한 결과를두고 공정한 시험이란 말을 앞세워 개인의 으로 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있을까? 

 

© THE Washington Post

 

   아무튼 능력에 따라 배분했다고 치자.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아주 공정한 방법으로 능력의 차이 구별하고 매우 공평하게 말이다. 그렇다면 능력있는소수가 천문학적인 자산을 독점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의 재산은  2,000 달러다. 한화로  200조를 훨씬 웃도는 값으로, 미국의 모든 홈리스에게 집을 제공하고도  140 달러가 남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탁월한 재능과 노력에 따른 부의 축적은 논리적으로는 당연하다. 노동의 투입에 따른 이윤 획득은 응당 이뤄져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의 빈부격차는 너무나 기형적이다. 한국의 상위 10% 가구가 전체 순자산의 42.1% 소유[6]하고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능력주의를 내면화 해온 현대인들은 이에 쉽게 수긍한다. ‘능력 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자. 재화는 한정되어 있기에 가치를 지닌다고 하지만, 홈리스들은 당장  집이 없어 생존이 급박하고 누군가는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축적한다.  양보해 능력에 따른 분배가 공정하다고 할지언정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라고  수는 없다.  

 

능력주의는  다른 세습주의

   아무리 그래도 능력주의가 귀족사회보단 낫지 않냐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상은 다를  없다.  다른 귀족주의이자 세습주의의 형태로 변모하고 있는것을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대니얼 마코비츠의 < 세습>에서 저자는 능력주의는 지속적 왕조를 지탱했던 세습 특권을 폐지하는 동안에도 교육에 새로운 왕조적 기법을 접목한다 했다. 과거 자동으로 신분이 세습되던 귀족주의와 달리 태생적 특권을 타파하였으나, 다른 형태의 신분 세습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엘리트 계층은 그들간 혼인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자녀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며,  다른 엘리트 특권층을 공고히 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대 학생의 70% 고소득층 자녀다.[7] 소수의 엘리트가 부를 독점하며, 계층  불평등은 심화된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이제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대중들은 귀족주의의 불합리함을 인식했고 체제에 반발했다. 반면, 현재 능력주의가 만든 불평등은 공정한 결과라며 순순히 수긍했다. 능력주의가 내세우는능력에 따른 보상 개인이 처한 상황을 노력이 부족했다 본인의 탓으로 돌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있어!’라는 가능성의 담론은 그들의처지를 쉽게 순응하게 한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를 보자. 1930년대에는 국민의 50%, 1960년대에는 30% 국가의 부를 통제했지만, 최근에는 국민의10% 국부를 좌지우지한다.[8] 시간이 흐를수록 소수가 부를 독점한다는 의미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갈수록 교육의 질은 좋아졌을 것이며, 교육 환경또한 개선됐을 테다. 능력주의는 사회적 계층 이동의 기회라고 하는데, 어째 부의 분배가 고르게 이뤄지기는커녕  격차가  벌어지기만 했다. 평등을 이룩했다는 능력주의가  불공정을 공고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엘리트 세습을 부정하기엔  결과가 너무 적나라하다. 

 

능력주의의 부작용

© unsplash

 

    출생에 따라 필연적으로 주어지던 계급이 있는 과거 귀족주의 사회와는 달리, 현대사회는 기회의 평등과 무상교육, 삶의 주권이 주어져 모든 것이 가능한 긍정의 사회 비춰진다. 결과적으로 부와 특권을 가진 자들에겐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쟁취한 것이라는 인식을,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겐 자신의 노력이부족했던 탓이라는 인식을 내면화한다. 능력주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사회에서는 자신의 지위의 책임이 스스로에게 돌아간다.

 

시대마다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한병철, 《피로사회》, p.11

 

    능력주의의 부작용은 우리 시대가 마주한 주요 질병이 됐다. 《피로사회》에 따르면 능력과 성과로 평가되는 사회에서 자기 착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로 작동한다고 한다. ‘하면 된다라는 긍정성의 과잉은 자기계발에 대한 강박과 지속적인 자기 착취로 이어지고, 결국 소진과 우울로 이어져 패배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청소년이  대학 입학이라는 일념 하에 최선 노력을 다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서열화된 대학 중에 보다  높은   이고, 그에 상응하는 노력 사회로부터 강요당하면 말이다. 능력주의 지배적인 사회에서 입시를 위해 개인의 신념이나 삶의 가치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밖에 없다. 지속적으로 시험을 통해 평가받고, 등수를 나눈다. 학생들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하면서 대학입시 기계마냥 입시를 위한공부에 몰두하고 부모님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결국 자신으로부터 착취당한다. 

 

   흔한 사례를  가지 들어보겠다. 인천의  등학교에선 성적에 따라 기숙사에 입관할 기회 부여받고 특별 관리를 약속한다. 울산의  고등학교는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공부방 제공하고 자소서컨설팅 생기부 관리 진행해준다.   번쯤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그렇게 들어간 분반, 학원, 동아리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특권을 누린 학생들과만 어울리며, 특권에 둔감해지고 계급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학창 시절 당해온 착취는 특권 더욱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일찍이 노력을 착취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시험에 절망을 경험하고, 성적에 따른 차별이 공정 것으로 체화해온 것이다.

 

   지속되는 구분짓기 집단  갈등의 양상으로 발현된다. 갈등은  공정성의 담론으로 귀결되는데, 체화된 능력주의적 사고와 능력주의를 대체할 사상의부재는 능력주의를 공정으로 인식하게 하는 논리 사용된다. 현대사회, 특히 우리나라에선 수치로 드러나는 점수나 시험 결과를 능력에 대한 객관적 지표 여긴다.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은 명확하고,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능력이 뒤떨어짐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을 찾기는 쉬우며[9] 그런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자신의 지분을 지키는 일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능력자에 대한 우대라는 차원보다 주로 탈락자, 소수자,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형태로 발현된다.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 상승시키고 그에 따른 특권을 유지하고자, 혹은 자신의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받고싶어 한다. 이때 능력주의는 아주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 공정을 내세우며 혐오담론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한다. 

 

대학생의 능력주의

 

 

   능력주의 교육의 잔재는 대학생들의 발화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소위 명문대 불리우는 대학에서도 몇몇 학생들은 학벌주의가 공정하다고 외치고 있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명문대생이라는 타이틀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고 싶으며,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어딘가 익숙한 논리 같지 않은가? 반복해서 언급해온 능력주의의 전형적인 예시다. 

 

   중앙대 역시 다를  없다. 앞서 언급했듯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의 입결 차이는 양캠 갈등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안성캠퍼스의 문제 제기에 계속 입결을운운하며 소모적인 논쟁을 부추길 ,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논의만 이어지는 것이다. 부당하거나 차별적인 대우에도 꼬우면 너네도 여기 오든가 식의 언사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조롱성 발화를 지속한다. 

 

   캠퍼스 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단과대별로, 학과별로 성적  혹은 아웃풋 두고  나누기를 반복하고 있다. 특정 단과대학을  단과대라고 칭하며조롱하는 등의  역시 에타에서 자주 보이는 글이다. 입결 차이를 두고 특정 과의 급을 나누며 가치를 판단하는 식의 발화도 끊이지 않는다. 오늘의 대학생들은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가려진 차별을 발견하지 못한다. 혹은,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능력주의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

 

© 한국일보

 

    특목고자사고 폐지,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의사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조국사태까지. 최근 모든 세대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정한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갔다. 문제는 매번  논의들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완벽하게 능력주의를 구현하고 있냐’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논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능력주의의 병폐는 물론이고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식 없이 능력주의를 답습한다면 어떨까.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린다면 대한민국은 어떠한 사회로 변모할까.  다른 세습귀족주의 사회를 형성해나가는 디스토피아 우리에게남지 않을까?

 

   사실 대다수의 국민에게 능력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생경하다.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의 체제 아래 능력에 따른 배분을 주창하고, 공정을 외치는 사회가 아니던가. 이미 오랜 시간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 해온 현재의 대학생들, 혹은 대다수의 대중에게 능력주의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 들릴 것이다.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10]지금  시대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2021년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반성은커녕 인식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능력주의로부터 헤쳐 나갈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우리는  평등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고자 능력주의라는 항로를 선택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점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않[11]다는 점이다. 평등한 기회 조차 허구이며,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글에서 살펴보았듯 결국 우리 사회는능력주의로 인한 고초를 겪고 있다. 이제 항로를  때다. 불평등을 향해 가는 능력주의라는 항로에서 벗어나 다시금 민주주의를 향한 항로를 향해 항해할 때다. 능력주의라는 패러다임을 반성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 그것이 우리의 핸들을 돌릴  번째 움직임이  것이다.  

 

 


[1] 장필수, “어디서 고대생 흉내야?” 세종캠 학우에 도넘은 사이버 폭력’, <한겨레 신문>, 2021.05.19.

[2] 성열관(2015), <메리토크라시에서 데모크라시로: 마이클영의 논의를 중심으로>, 《교육학연구》, 53(2)

[3] 마이클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122

[4] 마이클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201  

[5] 스티븐 J. 맥나미, 로버트 K. 밀러 주니어, 「능력주의는 허구다」, 사이, 2015, 199

[6] 윤덕룡ㆍ이동은ㆍ이진희, 자산가격 변화가 경제적 불평등과 대외경제 변수에 미치는 영향 분석(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9), 4.

[7] 김동혁, “서울대 학생 70% 고소득층 자녀”, <동아일보>, 2017.07.13

[8] 김호기, 능력주의  세습주의, <한국일보>, 2016.07.14.

[9] 박권일, 홍세화, 채효정, 정용주, 이유림   5,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벗, 2020, 145

[10] 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0, 13

[11] 마이클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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