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서울 SF 아카이브 대표)
코로나19에 SF적 상상력이 결합하면 다음과 같은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물리적 거리두기가 극단화되면서 모두들 대면 접촉을 꺼리게 되고, 결국 사람들은 죄다 혼자 산다. AI로봇들이 극진하게 시중을 드는 덕분에 일상생활은 불편이 없다. 타인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일을 죽음만큼 두려워해서 부부관계도 사라지지만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어 인류의 대는 이어진다.
사실 이건 이미 60년도 더 전에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낸 소설 <벌거벗은 태양The Naked Sun>(1957)에 나오는 설정이다. 과연 이런 세상이 정말 올까?
SF가 제시하는 다양한 미래 전망들의 출발점은 개연성이 아니라 성찰이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과학적 상상력보다는 윤리적 상상력의 빈곤인 것이다.
종말을 꿈꾸는 은밀한 욕망
SF에는 왜 그렇게 디스토피아가 많냐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는다. SF작가가 다들 비관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회피해야 할 미래를 반어법으로 묘사하는 것일 뿐이라고 답하곤 했다. 반면교사[1]로 삼을 가상의 어두운 미래들이라는 맥락이다.
세상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로 칼로 자른 듯 나뉘지 않는다. 둘을 양 극단에 둔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일 뿐이다. 그런데 완전한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 세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늘 디스토피아적인 면모를 지니게 마련이다. 항상 누군가에게는 더 힘든, 혹은 상대적으로 덜 힘든 세상.
그런데 SF는 때로 파국적인 종말을 꿈꾼다. 기존 세계질서의 한계에서 벗어날 가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차라리 세상이 망하고 나서 새로운 판을 짜기를 갈망한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그런 내밀한 원념의 공감대가 크다.
카와구치 카이지의 만화 <태양의 묵시록>은 엄청난 대지진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하고 일본이 붕괴한 상황 이후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드디어 내 미래가 열렸구나. 난……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기회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헬조선이란 말이 진부할 만큼 지금 한국의 청년들은 온갖 좌절에 직면해 있다. 초중고에서부터 입시 지옥을 거쳐 대학에 진학해도 사회 진출이라는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다. 등록금 대출을 갚느라 대학 생활조차 맘껏 누리지 못하는 이도 상당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세대 간의 갈등이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젠더 평등, 사회적 공정성, 친환경 감수성 등등에서 완고한 틀에 갇힌 채 벗어날 줄을 모른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한 상황이다. 왜 20세기 세대는 산업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이나 기후 위기, 환경오염 등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그늘을 뻔히 목도하면서도 그걸 극복하려는 노력에 소극적일까?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아 온 20세기 세대들은 거대한 타성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당연히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전망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거에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새로운 낙원 건설을 꿈꾸는 SF들이 계속 선을 보이는 것이다. 욕망의 대리 충족을 원하는 독자들에 호응해서.
새로운 세계는 운명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인들은 좀비에 익숙해졌다. 그전까지는 소수의 장르 팬들만이 즐기던 마이너 설정이었다면, 영화 <부산행>을 시작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까지 흥행에 성공하면서 인지도가 급속히 올라갔다. 그 밖에 <워킹 데드>나 <창궐>, <세계대전Z>, <반도> 등 좀비물로서 일정한 관심을 끈 작품들의 리스트는 짧지 않다. 나는 그중에서 하나자와 켄고의 <아이 앰 어 히어로>를 유심히 보았다.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가 문명의 종말로 내몰리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전형적인 좀비물로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좀비들이 합체하여 어떤 새로운 존재를 이루려 한다는 점이다. 좀비들이 건설하려는 새로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뭔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구를 뛰어넘어 기대까지 갖게 하는 맥락이 느껴졌다. 종말 이후의 세계는 기존 인류에게는 그저 황폐한 불모지로 남았지만, 이 작품 속의 좀비들은 전혀 다른 독자적인 가치관과 질서를 암시하고 있었다. 세계의 종말을 다룬 일본 만화들은 유럽이나 북미 등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과는 달리 생동감의 밀도가 유난히 높은 화려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종말을 갈망한다는 본심이 넘쳐나서 텍스트 표면으로 비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무튼 이러한 재앙 서사들이 언뜻 내비치는 ‘재앙 이후에 달라진 세상’이란 어떤 것일까. 물론 기존 가치관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이나 이질적이겠지만 어쩌면 그건 우리에게 새로운 유토피아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 후보 중의 하나는 우선 ‘재난의 적극적 수용’이라는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 현실로 닥친, 피할 수 없는 재앙 중 하나인 기후 위기와 해수면 상승을 예로 살펴 보자.
해수면 상승은 단기간에 파국적으로 들이닥치진 않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앞으로 오랜 세월 우리의 일상 세계를 잠식할 것이 틀림없는 위협이다. 이에 대해 일찍이 헐리우드에서는 <워터월드>라는 영화를 내놓았는데, 꽤나 먼 미래를 배경으로 문명의 붕괴에다 인간의 적응 진화까지 다루어서 흥미를 끌었지만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은 떨어졌다. 반면에 아시나노 히토시의 만화 <카페 알파>는 AI로봇 기술의 미래상과 병치하여 한결 생생한 전망을 펼쳐 보인다.
지금과 사회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은 근미래. 기존의 해안 도시들이 상당 부분 물에 잠겨버린 세상에서 로봇과 인간들은 잔잔하게, 그야말로 목가적으로 느긋하게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작품 끝까지 가도록 캐릭터들 간의 변변한 갈등 하나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고 담담하고 나른한, 즉 평화로운 일상만이 이어진다. 흔히 ‘치유계’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열성 팬들이 꽤 많다.
누군가는 이런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무기력한 패배자들의 체념 일기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기존의 문명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으면, 기존의 가치관을 고수할 수 없다면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것일까?
포스트휴먼에 답이 있다
다나 해러웨이는 1985년에 발표한 기념비적인 에세이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에서 인류 문명 전체가 기계와 융합되는 ‘사이보그 문명’으로 진행해가고 있다고 설파했다. (오시이 마모루는 <공각기동대>의 후편인 <이노센스>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여성 범죄학자에게 해러웨이라는 이름을 붙여 오마주한바 있다.) 즉, SF작가들이 전망하는 인류의 미래상은 더 이상 인간중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을뿐더러 인공생명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종 생물들까지 유기적으로 결합된 새로운 지적 문명의 탄생을 하나의 필연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기획은 이렇듯 그 확장의 폭이 넓다.
앞에서 <아이 앰 어 히어로>의 예를 들긴 했지만, 이러한 SF의 확장성을 좀비물에서 찾아보자는 것은 아니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언캐니 밸리[2]라는 한계는 무시하기 힘들다. 이와 달리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십분 발휘한 놀라운 작품들을 연달아 내놓는 작가로 니헤이 츠토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에 컬트 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헐리우드에서도 초빙할 정도의 내공을 지닌 니헤이 츠토무는 진입장벽이 꽤 느껴지는 뚜렷한 독보적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다. 깨알같은 감상을 요구하는 그림체에다 극도의 절제 미학을 구사한 설정 및 스토리는 한 번에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다. 하지만 프레임 하나하나마다 아이디어와 영감의 자극으로 넘쳐나는 놀라운 아트워크를 구사해서 열광적인 추종자가 많다. 그의 포스트휴먼에 대한 전망은 <바이오메가>라는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난다.
생물공학의 발달 등으로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선 존재로 전이해가는 미래. 우주에서 유입된 바이러스가 세계를 급격한 팬데믹 위기로 몰아넣는다. 세계를 움직이는 슈퍼파워는 기업, 또는 재단의 형태로 군림하고 있는데, 혼란스런 위기 상황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권력 집단들의 갈등이 불거진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활약하는 주인공은 인류의 희망적 미래를 수호하고자 과격한 신체 변이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
이 작품을 포함해서 니헤이 츠토무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스타일이 하드보일드 테크노 액션인데, 잠시 SF에서 ‘하드보일드’라는 스타일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짚어보기를 제안한다. 하드보일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과 매우 끈끈하게 연결된 유기적 정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즉, 기존 체제에 대한 전복적 상상, 혹은 욕망을 품은 이라면 그에 반하는 현실의 지루함에는 무심하고 냉정하게 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SF에서 하드보일드라는 미학의 일부는 이런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바이오메가>의 설정은 재앙의 중첩 상황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이미 호모 사피엔스가 종말을 맞고 다른 이질적인 인간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상황에서 다시금 새로운 재앙이 닥치는 것이다. 이것은 재앙의 역사적 항상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윤리적 상상력으로 여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은 SF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자 미덕이기도 하다. 기존의 사회 질서, 가치관이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성찰로 이끄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SF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창작에 공통적으로 적용되겠지만, SF는 단순히 시적 차원의 포착이 아닌 실질적 설계의 단계까지 나아간다는 차이가 있다. 실질적 설계란 그 세계가 판타지처럼 과학적,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구체성을 가진 것처럼 설득력을 준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윤리적 상상력이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과학기술로 인해 이전까지는 결코 직면해 본 적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유전자 맞춤 아기를 전면 수용할 것인가? 원자력을 언제까지 끌어안고 갈 것인가? 미세먼지를 계속 뒤집어쓰고 살아갈 것인가? 두뇌에 반도체 칩을 심어 넣고 신세계를 경험할 것인가? 생태계 파괴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블록체인에 기반한 새로운 전자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AI로봇들에게 인간의 자리를 어디까지 내어 줄 것인가? 기계세는 언제 도입될 것인가? ... 리스트는 끝이 없다.
따지고 보면 SF작가가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일단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셈이다. 따라서 SF에서 묘사되는 세계의 파국은 결코 암울하고 비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다. 관건은 얼마나 과감한 윤리적 상상력을 구사하느냐이다. 기존 체제의 가치관에 충실해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우리 스스로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현대 산업기술문명이라는 현실은 과연 극복의 대상인가? 적어도 많은 SF작가들이 파악하기로는 현대 문명의 핵심에 거대한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다. 바로 21세기 들어 더더욱 가속도가 붙고 있는 과학기술과 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휴머니티간의 불균형이라는 부조리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문제점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이 부조리에서 기인한다. 아마 인류는 이 부조리를 해결하려고 21세기 내내 허덕거릴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부조리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낳고, 그 갈등이 결국 파국에의 열망이라는 하나의 수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21세기의 한국 SF
최근 한국 창작 SF의 약진은 눈부실 정도이다. 21세기 들어서도 한동안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러 있었으나, 최근 5년여 사이에 신인 작가의 배출은 물론이고 출판, 영상을 비롯한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었다. 이는 외부적으로 SF의 수요가 늘어난 상황에서 한국SF계 내부적으로도 창작 역량이 성장하여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외부적으로 SF의 수요가 늘어났다는 것은 이 글에서 계속 논한 것처럼 과학기술이 야기한 여러 사회문화적 이슈들을 SF라는 틀로 이해하고 전망하려는 각계의 시도를 의미한다.
한국은 흔히 ‘압축성장’으로 상징되는, 매우 역동성이 높은 사회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SF 역시 빠르게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20세기까지 한국 창작 SF의 스펙트럼은 그리 넓다고 할 수 없었고 복거일이나 듀나 정도를 제외하면 SF작가로 내세울 만한 인물도 드물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등단한 김보영, 김창규, 박성환, 배명훈 등의 작가들은 한국SF의 새 지평을 열었고 그들이 십수 년간 굳건히 버티며 다져 온 기반 위에 등장한 김초엽은 SF를 넘어 전체 소설출판 시장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르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이 땅에서는 더 많은 창작 SF들이 계속 생산되어 우리의 현실을 은유하고 미래를 그릴 것이다. 왜냐면 그런 창작 욕구를 부추기는 현실의 부조리와 갈등들이 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압력은 SF라는 스토리텔링으로 표현하지 않고는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본다. 과학기술의 변화(발전이라는 말보다 변화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로 인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야기되는 문제들은 SF가 언제까지나 직면하고 소화해야 할 과제이다. 한국의 SF작가들에게 그 잔은 이미 찼지만 차고도 또 넘친다.
우리의 미래는 조금이라도 디스토피아로부터 더 멀어질 수 있을까? 희망은 21세기 세대들에게 있다고 본다. 성찰이 없는 20세기 과학기술의 시대와는 달리 성찰하는 21세기 과학기술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는 세대는 변화와 다양성에 더 유연하기를 기대한다. 부와 행복의 기준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 21세기 세대는 여러 SF에서 묘사해왔던 다양한 대안적 미래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지금의 기성세대는 상상하기 힘든 과감한 결정들을 연달아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설령 그로 인해 기성세대들이 소외되거나 깊은 상처를 입더라도, 그건 자초한 일이기에 마땅히 감수해야만 할 일이다.
[1] 사람이나 사물 따위의 부정적인 면에서 얻는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주는 대상을 이르는 말.
[2] 인간과 비슷해 보이는 로봇을 보면 생기는 불안감, 혐오감, 및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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