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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20 가을겨울, 79호 <비가역: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편집위원 주거생활기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0. 12. 23.

2020 가을겨울 79호 <비가역: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중앙문화 김시원 김현경 채효석

 

#1

경력: 기숙사 입주 1, 자취방으로 이사 1, 쉐어하우스 입주 1, 기숙사 탈락 2, 망한 자취방 대회 우승 1

경력이 중요한 시대라는데, 나는 주거와 관련해 꽤나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내 경력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서울에서 사는 2년간 이사를 크게 세 번 했고, 학교 기숙사는 학점 커트라인 미달로 2회 탈락했으며, 현재 살고 있는 쉐어하우스가 망한 자취방 대회애서 우승해 상품으로 에어프라이어를 받기도 했다.

대학을 합격하고 서울에서 처음 살게 된 곳은 블루미르홀 309관이었다. 실은 어릴 때부터 독립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서울에 오게 된 것도 내가 살던 지역에서 탈출해 나만의 공간에서 서울 라이프를 즐기겠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자취방 혹은 친구와의 투룸 생활을 강력 주장했으나, 가족들은 기숙사를 완강하게 밀어붙였다. 월세가 저렴하고, 학교 내부에 위치해 치안이 좋다는 게 이유였다. 블루미르홀 2인실은 매달 30만원을 조금 넘게 내는데, 절대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온전히 주거비30만원이 넘는 데다 개인 공간은 턱도 없다. 다른 학교 기숙사에 비해 가격이 높은 편이기도 하다. 다만 50만원을 웃도는 주변 원룸 월세를 들으면 갑자기 가격이 착하게 느껴진다. 자취방을 구하겠다고 계속 떼를 쓰자 아빠는 효도가 어려운 게 아니다. 네가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효도다.”라며 나를 기숙사로 떠밀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신청한 기숙사는 눈치 없이 내게 합격을 통보했다. 그렇게 서울 라이프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채 기숙사에 살게 됐다.

기숙사는 건조대 하나만 펼치면 침대에서 화장실에 가기까지도 비좁았다. 사적 공간은 룸메가 본가에 갔을 때만 생겼다. 취사를 할 수 없어 모든 음식을 사먹어야 했다. 덕분에 식비가 꽤나 많이 나왔다. 종종 강의가 끝나고 친구들에게 이제 집 가야해라며 기숙사를 으로 잘못 칭할 때가 있었는데, 이 때 자존심이 죽을 만큼 상했다. 기숙사 같은 환경을 집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항상 뻗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숙사에서 쌓인 벌점과 낮은 학점으로 기숙사 생활은 한 학기만에 막을 내렸다. 학교는 보내야겠고, 살 곳은 없으니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자취방에 사는 것을 허락했다. 나는 상도역 근처에 위치한 신축 건물에서 1년 반 동안 살았다. 원룸을 구하려 학교 근처를 돌아다닐 때서야 서울의 집값을 체감했던 것 같다. 주로 후문 쪽에서 수업을 듣는 나는 상도를 중심으로 원룸을 찾아다녔는데, 방값이 저렴한 편일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살 만하다고 생각 드는 방은 보증금 천만원은 기본에 월세 50만원은 당연히 넘었다. 공인중개사분은 대학가이기도 하고, 상도는 원룸들이 이제야 생기는 추세라 수요보다 공급이 적어 월세가 높은 편에 해당한다고 말해주셨다. 아빠의 효도 발언이 절절하게 공감됐다.

나는 여러 방들 사이에서 월세가 가장 높은 원룸을 계약했다. 비용은 부담됐지만 그 방을 한번 본 이후로 다른 방들이 성에 차질 않았다.(그만큼 구린 곳이 많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내 방은 꽤나 고급 원룸에 속했다. 자취방 주인은 보증금으로 이천만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천만원을 희망한다고 하자, 흔쾌히 가격을 낮춰주셨다. 감사하면서도 뭔가 마음이 찝찝했다. 난 그 천만원에 생계가 달려있는데, 방 주인은 100원 깎아주듯 천만원을 낮추는 데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누군가에겐 삶의 질을 좌우하는 집 하나가 자취방 주인에게는 이익을 위해 내놓은 상품, 조금 덜 비싸게 팔아도 큰 타격 없는 상품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으로 이 비수평적인 관계를 맞이하며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내 자취방은 옷장, 책상, 에어컨 등 기본적인 옵션을 두루 갖춘 방이었다. 앞서 말했듯 원룸은 정말 좋은 편에 속했으나, 가구들을 좁은 공간에 욱여넣은 듯한 느낌은 떨칠 수 없었다. 최대한 많은 자취생을 수용하기 위해 방을 일정 면적 이상 넓히지 않는 동시에, 그 좁은 방에 많은 가구들을 배치하려니 괴랄한 구조가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부엌에 화구는 휴대용 하이라이트 1구뿐으로 사실상 부엌의 의미가 없었다. 냉장고는 신발장 위에 겨우 자리하고 있었다. 신발 정리를 안하거나, 놀러 온 친구들이 많아 신발장에 신발이 넘쳐날 때는 냉장고 문을 열지 못했다. 가끔 친구랑 통화를 하며 냉장고 문이 신발에 걸려 앓는 소리를 내면 친구가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신발때문에 냉장고 문을 못 열어라고 답하면 열이면 열 모두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발때문에 문을 못 연다는 인과관계가 전혀 안 맞는 듯한 이 문장이 내 자취방에선 말이 됐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살던 자취방은 객관적으로 정말 좋은 원룸에 속했다.

불편함은 불편한대로 참으며 살다가 1년 반이 지났다. 하루는 누워서 지금까지 지출한 월세를 계산해 봤는데, 관리비를 빼더라도 3학기정도의 등록금을 낼 수 있는 금액이 나왔다. 월세를 모으기만 했어도 추가 학기로 3학기를 더 다닐 수 있었다.(물론 다닐 생각은 없다.) 주거비의 심각성을 급히 깨닫고 지금에라도 늦은 효도를 하기 위해 학교 기숙사와 쉐어하우스를 신청했다. 이번엔 학점도 꽤나 자신 있었건만, 블루미르홀의 학점 커트라인은 내 성적으로 들어가기엔 턱도 없었다. 그러다 기대도 안 했던 쉐어하우스에 선발되며 올해 2, 쉐어하우스에 입주하게 됐다.

쉐어하우스는 1인실 하나와 2인실 두 개로 방 3개의 일반 가정집 구조였다. 부엌도 세 명이 동시에 이용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꽤나 넓었다. 내가 사는 쉐어하우스는 지역개발공사에서 주거비를 일정 지원해줘 보통 쉐어하우스 월세의 절반 정도만 지불하면 됐다. 돈도 아끼고 월세 대비 주거 환경도 쾌적하니 쉐어하우스 입주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슴 한편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24시간 내내 존재하던 자취방의 개인 공간이 벌써 그리웠다. TV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에서는 쉐어하우스를 대학생들의 새로운 문화이자 로망으로 포장하곤 했다. 하지만 쉐어하우스를 알아볼 때 그런 설렘은 없었다. 자취방보다 가격 메리트가 있는지, ‘쉐어하우스지만 쉐어하지 않는공간이 확보됐는지를 살펴보기 급급했다.

쉐어하우스는 원룸보다 공간이 넉넉하다는 것 말고는 문제가 많았다. 입주 때 전혀 청소가 돼있지 않아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이전 거주자의 흔적들, 에어컨 3대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 잘못된 창문 설계로 완전히 닫히지 않는 방충망, 그 덕에 밤마다 열리는 벌레 파티, 주기적으로 막히는 설거지 배수구 등 도무지 셀 수가 없었다.

하이라이트는 여름철 물이 새는 천장이었다. 올해는 비가 꽤 많이 왔다. 여느 때처럼 비가 오던 날, 하메가 외출하며 거실 천장이 젖어 있다고 알려줬다. 반신반의하며 거실로 나왔는데, 거실 천장과 그로부터 흐른 물줄기가 벽지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떨어지는 물의 양은 점점 늘어나 물을 담던 10L짜리 쓰레기통을 하루에 몇 번이고 갈아줘야 했다. 발코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천장에 물이 고여 하루 아침에 곰팡이가 천장을 잠식했다. 나와 하메들은 매일 쓰레기통에 담긴 물을 버리고,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고, 걸레로 몇 번이고 집을 닦아야 했다. 쉐어하우스의 문제들을 사진에 담아 망한 자취방 대회에 출품했다. 웬만하면 다른 곳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는데,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 달 우리는 수도량 급증 경고 고지서를 받았다.

쉐어하우스 업체는 나와 하메들이 문제점을 얘기하면 집을 방문해 사후 처리하는 방식으로 하우스를 운영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 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연락을 넣은 채 업체의 방문을 그저 기다려야만 했다. 누수 방지 공사는 물이 샌 지 2달여만에야 시작됐다. 물론 비가 그친 후에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공사가 진행되기 이전 누수로 인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업체 측에서 취한 조치는 없었다. 방치에 가까웠다. 집에 문제가 생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마다 내 집이 아니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업체 입장에서 나는 기업의 특정 상품을 쓰다가 A/S를 요청한 소비자일 뿐이었다. 문제는 그 상품이 내 삶의 질이 달려있는 이라는 것이다. 업체와 나 사이 집에 대한 인식에 큰 간극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집은 쉽게 구할 수 없기에 무작정 버텼다. 그리고 제 값 못하는 주거 환경에 대해 보상을 요구했다. 이래야 억울함이 좀 풀릴 것 같았다. 업체는 6만원을 돌려줬다. 6만원은 나와 하메들 4명으로 다시 나눠 한 명당 12,5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가끔씩 서울에 상경했을 때 가졌던 꿈을 떠올린다.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집에 대한 꿈의 크기가 너무 다르다. 이젠 그저 내가 살 수 있을 정도의 집이라면 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이 집도 2월이면 끝이 난다. 앞에서 싫은 기색을 냈지만, 내가 지냈던 자취방이나 지금의 쉐어하우스 정도라면 감사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집에 대한 큰 로망은 버린 채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LHSH의 주택 목록들을 살피며 하루를 시작한다.

 

#2

 

내 집은 멀다. 얼마나 머냐면. 지하철 노선도 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스트레스끼리의 총합을 비교할 수 있다면, 통학시간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합이 내 20대 전반에서 가장 클 것이다. 매일 학교와 집을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내가 왜 매일 이 지하세계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할까생각했다. 학교에서 수업 듣는 시간보다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때도 많았다. 특히 시험기간에 50분 시험 보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달려와, 다시 집에 갈 때 그 허탈감.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먼 거리의 통학러라면 공감할 거다. 대학 친구들이 노는 데서도 항상 11시면 막차 때문에 일어나야 했고, 중앙문화 회의에서도 먼저 일어나버리기 일쑤였다. “저 막차 때문에...”라고 하면서 자리를 떠야할 때 느끼는 그 소외감. 지금은 어쩌다 편집장을 하고 있는데, 편집장이 먼저 일어나버릴 순 없으니까 요즘은 회의가 끝나고 밤을 새우거나 학교 근처에서 자는 게 그냥 일상이 됐다.

 

그래서 도시와 공간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서울 집중화, 그에 따른 팽창에 대해 생각했다. 왜 우리는 직주근접, 학주근접한 공간에 살 수 없는지 고민했다. 그 고민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게 난 도시덕후가 됐고, 지금은 도시에 대해 고민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아무튼 난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지금 자취를 하고 있더라면,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물론 자취생들도 그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나도 참 고충이 많았다. 이 지면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분은 많이 쌓여 있다. 기숙사는 거리 기준 때문에 지원을 못 했기 때문에, 부모님께 자취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몇 번 드렸다. 그리고 어느 날, 투쟁 끝에 자취를 하게 됐다. 고시원에.

 

난 흑석에 있는 두 곳의 고시원에 살았다. 난 경제적으로 무력했고, 부모님이 내게 쥐어 준 돈은 많지 않았다. 첫 번째 고시원은, 내 동기가 살던 곳으로, 오래되고 낡은 공간이었다. 내 방은 층의 정중앙에 있었다. 그러니까, 내 주변으로는 통로와 방만 있었다. 주변이 방으로 이루어진 이었다. 방음이 안 되는 고시원 특성상, 난 사방팔방의 모두와 함께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이 없어 환기가 되지 않았다. 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했다.

 

다음으로 향한 고시원은, 전보다는 비싼 곳이었다. 창문이 있었고, 외관도 그나마 괜찮았고, 공간도 단순히 살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계약을 하게 됐다. 이사간 지 하루 만에, 난 여기가 뭔가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았는데, 방음 수준이 정말 심각했다. 건물은 당연히 불법으로 증·개축했겠고, 방 쪼개기를 하면서 거의 판자때기 수준의 가벽을 설치한 것 같았다. 옆방 사람이 지금 일어서 있는지, 앉아있는지, 누워있는지, 지금 화장실을 가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거의 영혼이 이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그리 오랜 시간을 나와 살았던 건 아니지만, ‘살지 못할 만한 집을 거치며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렇게 난 지하철 끝에서부터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도시와 공간에 대해 고민도 다시 시작했다. 끝낼 수 있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어느새 내 미래 목표는 직장 옆의,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에 살기가 돼버렸다.

 

#3

 

자취하세요, 통학하세요?”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듣는 질문이다. 나 역시 대학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으레 이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나는 둘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자취를 하는 건 맞으니 자취를 한다고 답한다. 이어지는 질문은 어디에서요?”. 상대방이 예상한 답은 상도, 흑석, 더 해봐야 장승배기나 대방 부근일 거다. 내 답은 예상 밖인 건대 근처요. 이렇게 답하면, 열이면 열 이유를 묻는다. 난 구구절절 설명을 시작한다. “본가는 지방인데, 친언니도 서울로 대학을 와서 그 중간 지점을 찾다 보니...”

 

나의 본가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다. 서울에 오려면 4시간 동안 고속버스를 타야 한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학교 근처의 원룸에서 살았다. 내가 중앙대에 합격한 후, 언니와 나의 거주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 우리 가족은 고민에 빠졌다. 언니가 다니는 대학과 중앙대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각자 집을 얻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우였다. 각 학교의 기숙사에 살 거나, 지역에서 제공하는 기숙사를 알아보거나, 두 대학의 중간 지점에 같이 살거나. 셋 중 하나였다. 기숙사는 한 학기 단위로 퇴출이 결정되므로, 만약 한 명이 기숙사에 살지 못하게 되는 경우 어차피 또 집을 구해야 했다. 기숙사비가 특별히 저렴하지도 않았다. 결국 건대역 근처의 원룸을 구했고, 3년째 자취와 통학을 겸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주변 친구들이 에 대한 불평불만을 해도, 나에겐 모두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 대부분은 통학이 너무 힘들다아니면 집이 너무 좁고 허술하다는 것인데, 난 그걸 둘 다 겪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두 명이 원룸에 살다 보니, 자취의 가장 좋은 점이라는 사적 공간 보장마저 누릴 수 없다. 통학과 자취의 단점들만 남은 것 같다. 하지만 제일 스트레스인 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사실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원룸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nn만원이다. 월세를 부모님께서 내주시긴 하지만, 월세는 월세대로, 관리비는 관리비대로, 교통비는 교통비대로 빠져나가니 난 돈을 언제 모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렇게 돈을 땅바닥에 버릴 거면 왜 대학을 서울로 왔나, 하는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네모난 원룸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가끔 그 현실이 너무 억울하게 느껴지곤 했다.

 

비대면 시대가 도래하며 통학에 대한 스트레스는 줄었지만, ‘개인 공간의 부재문제가 크게 떠올랐다. 새내기 때 선배들과 얘기를 하다가 언니와 원룸에 산다고 했을 때, 한 선배가 어떻게 둘이 원룸에 살아?”라고 물었다. 그 선배는 남동생과 쓰리룸에서 함께 산다고 했다. 생각보다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어릴 때부터 언니와 같은 방을 써왔고, 가끔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같이 사는 재미도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ZOOM을 이용한 화상 회의나 수업이 일반화되면서 두 명이 한 공간에 지낸다는 사실은 나를 가장 답답하게 했다. 수업을 듣는 경우까지는 괜찮지만, 마이크를 켜고 말을 해야 하는 회의는 영 불편했다. 결국 한 명이 화상 회의를 해야 하는 시간이면 다른 한 명은 카페에 갔다. 나의 경우에는 중앙문화 편집실에 와서 ZOOM을 켤 때도 있었다.

 

내년이면 이사를 해야 한다. 몇 달 전까진 가끔 심심할 때 직방이나 다방같은 어플에서 집 구경을 했다. 처음엔 원룸이 아닌 1+1, 투룸을 본다. 사실 언니와 내가 각각의 개인 공간을 보장받으려면 쓰리룸을 구해야 하지만, 1+1룸이나 투룸도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게 하는 가격이라 쓰리룸은 보고 싶지도 않다. 결국 조금이라도 두 명이 살기 좋은 원룸이 없는지 보다가, 한숨을 쉬며 어플을 종료한다. 최근엔 어플을 켜보지도 않았다. 보면 힘만 빠질 게 뻔하다.

 

지방 학생들은 그런 것 다 감수하고 서울에 오는 거 아니냐기말고사를 대면으로 진행하면 지방 학생들은 시험기간 동안 어디에 있어야 하냐는 이슈가 한창 뜨거울 때, 에브리타임의 한 익명이 쓴 글이다. 이 글은 내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다. 나도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그냥 집 근처에 있는 대학을 다녔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억 단위로 돈을 아꼈을 텐데. 굳이 서울로 올라와 불편함을 겪으며 지내는 이유는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이겠지, 생각하며 분함을 삼킨다. 하지만 꼬리의 꼬리를 물고 생각에 빠지다 보면, 난 대체 무엇을 쫓아 여기에 왔는지 의문이 든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상황에서 언젠가 내 집 마련이 가능하기나 한 건지 끝없이 아득하다. 그래도 고시원보단 나으니까, 네 시간 동안 통학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체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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