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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6 가을겨울, 71호 <방빼!>

시위하다―편집위원 시위 참가기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0. 8. 4.

71호, 2016 가을겨울

  다사다난한 한 학기였습니다. 그만큼 집회와 시위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중앙문화> 편집위원들은 함께 또 따로 다양한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부당한 정리해고와 노동조합 탄압을 비판하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통령 탄핵을 말하는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편집위원 중엔 전부터 시위에 자주 참석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처음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함께 시위에 나섰다 돌아가는 길. 각자의 생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현장”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느낌을 공유했습니다. 편집위원들의 에세이로 그것들을 일부 전하고자 합니다. 

 

더 크게, 더 가까이

수습위원 강동용

  지난 9월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 농민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돌아가셨다는 속보가 포탈의 메인을 도배했다. 고인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알려진 시점부터 경찰이 병원 주변을 에워쌌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많은 시민들이 밤샘 농성을 이어갔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자 부검을 위한 경찰이 부검을 위해 시신을 강제로 탈취할 우려가 커져 더 많은 시민들이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상황 변화를 주시하고 있던 나도 백남기 농민이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에 부모님과 함께 나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백남기 농민의 빈소에 가는 것은 나 스스로가 정치적 사안에 부당함을 느껴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저항하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 첫 사례가 되었다. 나의 고향인 보성에서 상경해 정당한 쌀값 보장을 요구했던 백남기 농민은 평생 농사를 지으시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이는 다른 사안들과는 달리 나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빈소에서의 연이은 밤샘 농성은 나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언론인을 꿈꿔왔다. 내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짧지 않은 기간이고, 꿈에 대한 열망 또한 나름 간절했다. 언론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중립성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적 쟁점에 대한 나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백남기 농민의 빈소에서 여러 밤을 보내며 만난 사람들은 기존의 내 생각과 태도를 뒤바꾸어 놓았다.


  빈소에는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 현 정권에 의해 희생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겪고 있는 부당함을 토로했다.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약자들은 그들의 높은 삶의 질을 위해 엄청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상식적인 처우를 요구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들은 그들의 목소리는 매체를 통해 전해들은 것보다 훨씬 절박하고 호소력 짙게 느껴졌다. 이는 내가 언론인이라는 장래희망에 다가서기 위해서 지켜온 같잖은 신조에 대해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문제 사안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은 채 객관성을 가장한 이른바 ‘기계적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애써 외면해왔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꿈을 이루기 위해 지켜온 같잖은 신조는 나 자신을 약자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되게 했다. 그곳에서 느낀 부끄러움은 지난날의 나를 반성하며, 새로운 변화를 다짐하게 했다. 사회의 다양한 불의에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게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느낀 분노를 표출할 용기를 가지게 됐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학교에도 고인의 분향소가 차려졌다. 나는 추모 공간이 마련됐다는 사실을 동기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단체 카톡방에 알렸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이 사안과 관련해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불과 며칠 전의 나였다면 정치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분향소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조차 꺼렸을 것이다. 비록 작은 행동 변화이지만, 변화를 위한 다짐이 나 자신은 물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최근에는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이 모이는 집회에 거의 매주 동기들과 함께하고 있다. 이처럼 앞으로는 약자의 어려움에 더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사회의 부조리에 더 적극적으로 분노할 것이다.

 

다시 광화문에서

편집위원 최찬욱

  작년 민중총궐기가 광화문 한복판에서 열렸을 즈음에 나는 서초구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민중총궐기는 미디어로부터 폭력시위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나는 시위 참가여부로 ‘진보를 표방하는' 친구 A와 격렬히 논쟁했었다. A는 시위 참가가 “정무적 판단”에 비추어볼 때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없으며, 현재의 시위는 폭력적이고 불법적으로 진행되어 진보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나쁘게 할 용의가 크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강조했던 것은, 정치는 체스와 같기 때문에 지켜야 할 규칙이 있으며 미리 수를 내다보아야하기 때문에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라는 것이었다. 감정보다는 논리를 앞세워야 한다는 A의 주장에는 시위가 폭력적, 감정적인 서투른 의사표현방식이라는 편견과, 일선에서 제도권 외의 투쟁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경멸이 뒤섞여있었다. 당시에는 운동노선에 대한 소위 ‘강남좌파’와의 입장차이로 여기며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은 채 논쟁을 마무리했지만, 전면에서 집회참가를 주장한 나는 결국 총궐기에 나가지 못했다.


  해당 논쟁 이전에도 나는 시위참가에 대한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언론에서 조명하는 시위는 국가권력과 시위참여자 간의 폭력적 대치였고 진압봉과 쇠파이프가 날아다니는 위험한 현장이었다. 2000년대 후반이 되어 문화제로써의 성격이 가미된 현재의 촛불집회가 대두되었으나, 나는 여전히 시위를 어렵게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시위에 나갔다. 성인이 되면 좀 더 활발히 관련 활동에 참가해보자는 다짐의 결과였다. 광화문은 집에서 버스 한 번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었다. 전에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매스컴의 게이트키퍼가 선별한 정보만 받아들였지만, 직접 나가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보였다. 부끄럽게도 학업 핑계를 대며 외면하던 이슈들. 가령 세월호 유가족이 보였고, 다니던 회사에서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 그 외에도 국가권력이나 사회적 편견에 희생된 사람들의 주장을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비극은 언제나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고, 이는 그들의 호소를 정치공학적 술수나 선거 승리를 위한 포석정도로 여기던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기적으로 몇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투표와 달리, 집회와 시위는 언제나 주도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이다. 선거라는 숫자놀음에서 나 하나는 그저 특정 후보자나 당을 지지하는 유권자 1인에 불과하지만, 시위는 한 명이나 백 명이나 백만 명이 모이나 제약 없이 나의 주장을 즉각적으로 공론화시킬 수 있다. 파리 코뮌, 5월의 광주, 68혁명과 같은 반정부적이고도 자치적인 공동체에 대한 로망 또한 집회 참가를 자극한다. 시위 곳곳 얼핏 드러나는 인본주의적 해프닝은 (과도기의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더라도) 공권력이 배제된 상황이 창작물에서 흔히 연출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만은 아님을 환기한다.


  이번 주 토요일도 나는 집회에 나갈 것이다. 많은 A들이 참가하여 내가 느꼈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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