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언론 『비마이너』 발행인 김도현
1. 들어가며 : 장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장애학은 아직 한국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낯선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학에 대한 영어 표기는 ‘Disability Studies’인데, 우리말로 직역을 하면 ‘장애연구’로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Culture Studies’가 ‘문화연구’로 옮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실 ‘장애’에 대해 ‘연구’를 하는 학문은 의학·재활학·심리학·사회복지학·특수교육학 등 장애학 말고도 이미 많이 존재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성의 장애 관련 학문들과 장애학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2000년대 후반부터 장애학 서적이 조금씩 번역되어 출간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 외국에서 장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관련 논문들이 학술지에 기고도 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내에서 한글로 접할 수 있는 장애학 관련 텍스트는 양적으로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장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외국의 장애학 저널이나 단행본을 뒤적이게 되곤 하는데, 그렇게 영어로 쓰인 장애학 문헌들을 보다보면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게 바로 ‘social’이다. 장애학 관련 텍스트에서 이처럼 ‘사회적’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은 기존의 장애 관련 연구들이 장애를 이와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즉 ‘개인적(personal)’ 내지 ‘개별적(individual)’ 문제로 다루어 왔음을 함의한다. 그래서 장애학이 성립하던 시기, 장애학의 개척자들은 기존의 장애 관련 연구들이 ‘개별적 장애모델(individual model of disability)’에 입각해 있다고 비판을 하면서 ‘사회적 장애모델 (social model of disability)’을 주창하게 된다.
장애학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사회적 장애모델을 정립한 영국의 장애학자들이 장애인을 표기할 때 ‘disabled people(혹은 the disabled)’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을 할 수가 있다. 사실 영어권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던 장애인에 대한 공식 용어가 ‘disabled people’ 이다. 그렇지만 이후에는 장애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소위 ‘피플 퍼스트(people first)’라는 지향에 입각해서 사람을 앞쪽에 내세운 ‘people with disabilities’가 주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부정적인 의미와 뉘앙스를 지닌 ‘disabled/disability’ 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physically[mentally] challenged people’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최근에는 ‘differently abled people’과 같은 완곡어법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 전자는 ‘신체적[정신적]으로 도전을 겪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이고, 후자는 ‘다른 능력을 가진(다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회적 모델론자들이 ‘disabled people’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것은 이 용어가 무언가를 드러내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할 수 없게 된(disabled)’이라는 수동태의 표현은 이미 그 맞은편에 ‘할 수 없게 만드는(disabling)’ 작용을 가하는 무언가를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장애인들은 그들 자체가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할 수 없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고, 이처럼 그들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disabled people’을 완전히 풀어서 표현하자면 ‘people disabled by society’가 되는 것이다. 1
‘손상’은 신체적·감각적·인지적인 것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우선 가시적으로 눈에 잘 띄는 신체적 손상부터 한번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다리에, 척수장애인이라면 척수에, 뇌병변장애인이라면 운동을 관장하는 뇌의 특정 부위에 손상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손상을 지닌 사람이 휠체어를 탄 채 일반적인 시내버스 앞에 가게 되면 그는 버스를 탈수가 없다. 즉, ‘버스를 탈 수 없음’이라는 장애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ICIDH의 설명에 따르자면 버스를 탈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일반적인 시내버스와 조금 다르게 생긴 버스, 그러니까 바닥이 낮고 계단이 없으며 뒤쪽 문에서 램프가 나오는 저상버스가 많지는 않지만 좀 돌아다닌다. 그럼 앞서 언급한 것과 똑같은 손상을 지닌 사람이 그런 저상버스 앞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버스를 탈 수가 있다. 그렇다면 한번 잘 생각해보자. 동일한 손상을 지닌 동일한 사람이, ‘버스를 탄다’라는 동일한 행위를, 어떤 경우에는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버스를 탈수 없음의 원인이 그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을까? 아니다, 그렇게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원인이란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원인인 것이니까 말이다. 그 사람의 몸에 있는 손상은 변함이 없는데 어떤 경우에는 버스를 탈 수 있다면, 버스를 탈 수 없음의 원인은 그 사람의 몸이 아니라 버스에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감각적인 영역의 손상, 이를테면 청각에 손상을 지니고 있는 농인에 대해 얘기를 한번 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흔히 농인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런 표현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농인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음’이라는 장애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경우 ICIDH를 따르자면 농인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의 청각에 존재하는 손상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자. 내가 덕수궁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저 앞쪽에서 한 영국인이 다가와 내게 영어로 말은 건다. 처음에 나는 몹시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대다가, 순간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긴 한국 땅인데, 그러니까 내 홈그라운드인데, 왜 여기서 영어를 못한다고 내가 끙끙대야하지?,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이제 좀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진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내가 그 영국인한테 그냥 한국어로 말을 한다. 아니,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로 이야기를 좀 해보세요, 제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요, 라고 하면서. 이렇게 한쪽은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한쪽은 한국어로 떠들고 있으면 우리 둘은 의사소통이 잘 안될 것이고, 그래서 그 영국인은 나에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겠지만,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다시 뒤돌아 자기 갈 길을 갈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내가 뒤돌아서 멀어져가는 영국인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아, 저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사람, 이런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우리 둘이 의사소통이 안 되기는 했지만.
그럼 이번에는 그 영국인의 자리에 농인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농인과 내가 있을 경우, 나 같은 청인(聽人)은 입으로, 음성언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농인은 일반적인 손으로, 수화로 의사소통을 시도할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한쪽은 음성언어로, 다른 한쪽은 수화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면 둘이 의사소통이 될까? 당연히 잘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나와 농인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나, 앞의 경우에서 나와 영국인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나, 사실 매일반이다. 매일반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두 경우 모두 의사 소통이 안 되는 건 각자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전자의 경우에는 정당하게도 굳이 누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후자의 경우에 우리는 농인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까? 사실 그러한 생각이나 표현 자체가 어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이 세상이 비장애인(청인)을 중심으로 굴러가기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한국인과 영국인 둘이 있을 때, 이 둘은 언제나 의사소통이 안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세련되게 의사소통이 잘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첫 번째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언어를 배우면 된다. 그러니까 내가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나면 의사소통이 잘 될 것이 다. 그런데 한국인이 굳이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혹은 영국인이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잘 될 수 있다. 어떻게? 둘 사이에 통역이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높으신 양반들이 외국에 나가서 업무도 보고 회의 도 하고 할 때, 그 사람들이 다 외국어를 잘 해서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게 아니다. 그들은 필요할 때 언제나 통역이 하나의 서비스로 제공이 되니까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경험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청인과 농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청인과 농인도 언제나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청인이 수화를 배워서 잘 할 줄 알게 되면 청인과 농인은 의사 소통이 잘 된다. 그러나 설령 청인이 수화를 못한다고 하더라도 둘 사이에 수화통역 서비스가 제공이 된다면 의사소통이 잘 된다. 그렇다면 한번 또 잘 생각해 보자. 농인이 청각에 손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이렇게 의사소통이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 농인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다. 청각의 손상이 원인이라면, 그러한 손상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의사소통이 안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으니까. 더구나 청각에 손상이 있는 농인과 농인끼리는 언제나 의사소통이 잘 되니까.
이러한 설명은 맹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맹인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고 ICIDH 에 따르면 그들이 ‘책을 읽을 수 없음’이라는 장애를 경험하는 건 시각에 존재하는 손상 때문이겠지만, 그건 정확히 비장애인(비맹인) 중심적인 사고일 뿐이다. 그들은 묵자(墨字) 로 된 책을 읽을 수 없을 뿐, 점자(點字)로 된 책을 읽고 음성 도서를 읽으니까. 즉, 맹인의 눈에 손상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제공되는 책의 종류에 따라 그들이 책을 읽 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읽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책을 읽을 수 없는 원인을 그들의 시각에 존재하는 손상이라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슈퍼장애인이어서 자립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 그럼 신체적 손상도 얘기를 했고 감각적 손상도 다루었으니, 이번에는 인지적인 영역에 손상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 즉 발달장애인(지적장애인과 자폐성장애인) 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사회서비스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이 활동보조서비스 내지 활동지원서비스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 서비스가 전국적으로 처음 시행이 된 게 2007년이다. 그런데 2006년 하반기에 처음 보건복지부에서 활동보조서비스 제공 계획안이 발표가 되었을 때, 그 계획안에서는 발달장애인이 서비스 제공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그래서 장애인단체에서 보건 복지부로 찾아가 항의를 했더니, 정부 관료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니 당신들이 활동보조서비스는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서 필요한 서비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느냐(아시다시피 활동보조서비스는 우리나라에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 확산되면서 요구된 서비스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인지적 손상을 지닌 발달장애인은 자립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왜 그런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하는 것이냐, 서비스의 취지나 목적과 맞지 않는 것 아니냐, 라고.
당시 보건복지부가 폈던 논리는 사실 한국의 현실을 현상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전체 장애인구 중 발달장애인의 비율은 약 7% 정도인데, 장애인이 수용되어 있는 시설에 가보면 그곳에서는 70% 이상이 발달장애인이다. 장애인구의 7%에 불과한 발달장애인 이 시설에서는 70%를 차지한다는 건, 그들 중 대다수가 자립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요즘 내 주변의 동료 활동가들 중 기회가 닿아서 외국에 연수를 다녀온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쪽 동네에서는 발달장애인들이 우리나라처럼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 지역사회에 통합이 되어 잘 자립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들어보고 또 확인했던 내용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노르웨이의 사례이다. 서구의 다른 국가들과 비슷하게 노르웨이에서도 1970년대부터 탈시설 운동이 활성화되는 데, 이러한 운동의 영향을 받아 1985년에 발간된 노르웨이 정부 공식위원회 보고서(NOU) 2『발달장애인의 생활 여건 (Levek·r for psykisk utviklingshemmede)』은 “시설에서 발달장애인이 처해 있는 생활 여건은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활동의 재조직화나 자원 공급의 증가에 의해 실질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3그리고 이 보고서의 내용과 입장에 따라 노르웨이에서는 이미 약 30년 전인 1988 년에 일종의 시설 폐쇄법인 「노르웨이 개혁법(Norwegian Reform Act)」이 제정되었다.
그 법은 발달장애인의 신규 시설 입소는 1991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종료되고, 기존의 시설 생활인들도 1995년 12월 31일까지 모두 지역사회에 있는 자신의 주거 공간에서 거주를 해야 하며, 이에 따른 비용은 모두 중앙 정부가 각 자치구에 지원을 해야 한다고 명시를 하였다. 4그리고 시설에서 나온 발달장애인에게는 국가주거은행(National Housing Banks)의 규정에 따라 그룹홈이든 개별 주택 형태이든 개인당 50제곱미터(약 17평) 이상의 독립적인 주거 공간이 보장되었다. 현재 노르웨이에서는 「사회보장법(Act on Social Security)」에 따라 26세 이전에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발 달장애인은 그 정의상 모두 여기에 포함됨―의 경우 연간 최소 173,500 노르웨이 크로네(한화 약 2,400만 원) 이상의 장애급여를 보장받고 있고, 「사회서비스법(Act on Social Services)」에 의거하여 시간의 제한 없이 필요한 만큼 활동 보조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발달장애인들도 지역사회에서 잘 자립을 하고 있다고 한다. 5노르웨이의 이웃 국가인 스웨덴 역시 1990년부터 본격적인 탈시설 작업이 시작되었고 1997년에 제정된 「시설폐지법(Abolition of Institutions Act)」을 통해 1999년 12월 31일까지 모든 장애인 시설을 폐쇄시켰으며, 이후 이루어진 실태조사 결과 시설 에서 나온 지적장애인의 80%는 탈시설 이후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6 7
자, 그럼 한번 또 생각을 해보자. 우리 동네에도 발달장애인이 있고 그쪽 동네에도 발달장애인이 있다. 우리 동네의 발달장애인은 자립을 할 수 없고, 그쪽 동네의 발달장애인은 자립을 한다. 이렇게 대동소이한 손상을 지니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이 A라는 동네에서는 자립을 할 수 있고 B라는 동네 에서는 자립을 할 수 없다면, 발달장애인들이 ‘자립을 할 수 없음’이라는 장애를 경험하는 원인이 그들의 인지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손상이라고 얘기를 할 수가 있을까? ICIDH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그게 원인이라면 A라는 동네뿐만 아니라 B라는 동네의 발달장애인도 자립을 할 수 없어야 하니까 말이다.
특정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만 손상은 장애가 된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일정한 손상을 지닌 사람들이 ‘버스를 탈수 없음’,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음’, ‘책을 읽을 수 없음’, ‘자립을 할 수 없음’이라는 장애를 경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러한 ‘무언가 할 수 없음’의 원인이 그들의 몸에 있는 손상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마치 검은 피부를 지닌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원인이 검은 피부가 아니라 차별과 억압인 것처럼, 일정한 손상을 지닌 사람들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는 원인도 손상이 아니라 바로 차별과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손상―[차별과 억압]→장애’인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칼 맑스(Karl Marx)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흑인은 흑인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흑인은 노예가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손상은 손상일 뿐이다. 특정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만 손상은 장애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의 특정한 상황과 관계란 바로 ‘차별적인’ 상황과 ‘억압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손상을 지닌 무능력한 사람이어서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받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실 앞서 살펴본 ICIDH의 3단계 도식을 따르자면 장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러니까 어떤 장애인을 사회적 불리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손상을 뜯어고치는 것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 불리함을 발생시키는 장애의 원인이 궁극적으로 손상이니까. 그리고 문제의 해결의 답은 그 원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것이 바로 장애학에서 비판하는 의료적 장애모델(medical model of disability)이다. 그러나 ‘손상―[차별과 억압]→장애’의 도식에서 장애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있다. 따라서 장애문제 해결의 방법도 차별과 억압을 변화시키는 것에서 구해진다. 이것이 바로 장애해방운동이 가능해지는 출발점이고, 다름 아닌 사회적 장애모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니까 이런 얘기가 오히려 조금 허무 맹랑하거나 황당무계하게 느껴지는가? 뭐,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다. 사실 1980년대에 장애인들이 이런 주장을 전개하자 당시 서구의 주류사회도 그건 ‘빅 아이디어 (big idea)’라고 이야기를 했다. ‘빅 아이디어’란 주로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속어로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니까 결코 좋은 말이 아니라 비꼬고 조롱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손상은 장애의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은 사실 그다지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고 것도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성차별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기본적으로 섹스(sex)와 젠더 (gender)를 구분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둘 다 그냥 ‘성(별)’이 라고도 번역될 수도 있지만, 주지하다시피 둘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섹스가 어떤 염색체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성기를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구별되는 생물학적 차원의 성이라면, 젠더는 사회적 차원의 성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남자아이는 파란색을 좋아하고, 여자아이는 빨간색을 좋아하고, 남자는 씩씩하고 용감하고, 여자는 다소곳하고 얌전하고, 남자는 밖에 나가서 돈을 잘 벌어야 하고, 여자는 요리 잘하고 집안일 잘해야 하고, 뭐 이런 식의 성적 구별이 바로 젠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후자의 젠더가 전자의 섹스 때문 인가? 그러니까 빨간색을 좋아하고 얌전하고 집안일 잘하는 여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염색체 때문이고 그렇게 타고난 건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젠더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억압과 차별적인 문화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ior)가 『제2의 성』에서 제출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는 여성학의 고전적 명제는 바로 이 지점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손상은 장애의 원인이 아니라는 장애인들의 주장이 빅 아이디어라고 한다면, 방금 언급한 섹스가 젠더의 원인이 아니라는 상식도 빅 아이디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둘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검은 피부, 손상, 섹스 등의 생물학적 차원의 속성과 노예, 장애, 젠더 등의 사회문화적 차원의 구성물은 결코 인과관계로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고, 사회적 장애모델은 손상과 장애의 관계를 이러한 일반성 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일 뿐인 것이다.
5. 나가며: 장애문제는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다
질문을 하나 던져 보도록 하자. 장애문제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많이 이야기되어 왔던 근거는 크게 보자면 다음의 2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이동권의 문제, 혹은 보편적 디자인(universal design)을 얘기하며,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이 단지 장애인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노약자·임산부·어린이 등 사회 전체 구성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 둘째, 장애인의 열 명 중 아홉 명은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사실 속에서, 비장애인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the potentially disable bodied) 내지는 일시적 비장애인(the temporarily ablebodied, TAB)이라는 근거 말이다.
필자는 이것이 틀렸다고 얘기할 생각은 없지만, 근본적인 지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러한 근거가 ‘보험’의 논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가 부추기고 강화하는 이기심에 부박하게 편승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러한 논리로 우리 모두가 장애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여성이 될 가능성이 없는 남성은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동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흑인이 될 가능성이 없는 백인 역시 인종 문 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장애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야 하는 이유, 혹은 장애문제가 우리의 문제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기본적으로 장애문제가, 즉 장애인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과 억압이,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과 효율성의 논리에 병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애인 문제라는 표현보다는 장애문제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리고 여성문제가 여성 일방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를 매개로 한 여성-남성간의 관계의 문제이며, 노동문제가 노동자 일방의 문제가 아닌 노동력의 상품화를 매개로 한 노동자-자본가간의 관계의 문제인 것처럼, 장애문제는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매개로 한 장애인-비장애인간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남성이 여성문제의 한 일방이며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이 바뀌어야 여성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비장애인 역시 장애문제의 한 일방이며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과 비장애인 중심 사회가 바뀌어야 장애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장애문제는 언제나 우리 모두의 문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와 관련해서는 Lisa Egan, xoJane, “I’m Not A “Person With a Disability”: I’m a Disabled Person”, Nov. 9, 2012, http://www.xojane.com/issues/i-am-not-aperson-with-a-disability-i-am-a-disabled-person(최종 접속일 2016. 11. 6.)을 참조하라.[footnote] 결국 사회적 모델론자들이 ‘disabled people’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은 ‘disabling society’를 염두에 둔 것이고, 장애학에서 연구의 초점이 되는 것은 ‘장애인’이 아니라 이처럼 장애인이 무언가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오픈 유니버시티(Open University)에서 1975년에 최초로 개설되었던 장애학 과정은 1994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두 번에 걸쳐 프로그램이 갱신되는데, ‘disabling society’는 바로 그 최종 프로그램의 타이틀이기도 했다. 물론 장애학이 오로지 사회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며, 장애인도 다룬다. 그렇지만 이 때의 장애인은 개별화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장애인이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 속에서 파악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장애인이다. 요컨대 장애학은 장애인이 무언가를 할 수 없도록 만들어내는 ‘사회’를 다루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장애인을 다룬다.
2. 장애인이라는 범주, 그 자체에 내재된 권력관계
페미니스트 정희진이 자신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교양 인, 2013)에서 적절하게 비유했듯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에서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존재한다면, 인간의 세계에서는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존재한다. ‘극동아시아’라는 표현은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서 번성했던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규정된 명칭이다. 아마도 20세기 들어 경도가 그어졌다면 미국의 워싱턴 정도를 기준으로 했을 테니, 한국은 ‘극서아시아’ 지방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대륙이라는 표현도 유럽을 기준으로 한 말이며, 유색인종이라는 표현 역시 백인종을 기준으로 하여 나머지 인종을 깡그리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버린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일 흑인종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유색인종이라는 범주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흑인종을 빼고 나머지 인종들을 하나로 묶는 범주, 예를 들자면 ‘희끄무리죽죽한 인종’이나 ‘허여멀건한 인종’이라는 범주가 존재했을지언정 말이다.
사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이라고 규정한 범주 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차이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있어 장애인 내부의 차이는 비장애인과 장애인간의 차이보다도 크다. 개인적인 경험 두 가지를 통해 설명해보기로 하자. 이야기 하나. 언젠가 여러 장애인 단체들이 모이는 회의에 실무자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약속시간 보다 한 30분쯤 일찍 회의 장소에 가게 되었는데, 시각장애인 한 명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고, 곧이어 청각장애인 단체에서 일하는 농인 한 명이 도착했다. 심심하기도 하고 멀뚱멀뚱 앉아 있기도 뭐해서 나는 통성명을 청했고, 두 사람 과 각각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별생각 없이 “두 분도 서로 인사도 나누고 이야기도 좀 나누시죠”라고 얘기를 했는데, 순간 매우 싸~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말았다. 비장애인인 나는 시각장애인과는 음성언어로, 농인과는 수화 혹은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두 장애인은 직접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 KTX 개통 뒤 장애인 동료들과 지방 출장을 갈 일이 있으면 나도 대개 KTX를 이용하곤 한다. 일단 무궁화호는 열차가 거의 없고, 희한하게 무궁화호보다 한 등급 위인 새마을호는 휠체어이용 장애인을 위한 좌석이 없다. 아마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더 심했던 시절에, 최고급 열차는 장애인이 이용할 리도 없고 이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혼자서는 KTX 요금이 만만치 않아 망설여지지만,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이용하면 동반 할인이 되어서 요금 부담도 감수할 만하다. 언젠가 한 번은 전동휠체어이용 장애인 한 명, 목발이용 장애인 한 명, 나 이렇게 셋이 서 함께 대구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올 때 목발이용 장애인과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지만, 전동휠체어이용 장애인 한 명은 같은 열차를 이용했던 또 다른 휠체어이용 장애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역사 밖으로 나왔다. 무슨 얘기인가 하니, 나와 목발이용 장애인에게는 에스컬레이터가 일종의 편의시설이 되어주지만, 휠체어이용 장애인에게는 편의시설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농인, 나, 시각장애인이라는 3명의 집단 내에서 두 명의 장애인 간의 차이는 나와 다른 두 명의 장애인간의 차이보다 더 크다. 몸 자체의 차이도 그렇고, 구체적인 생활 장면 속에서 겪게 되는 차이도 그렇다. 이는 목발이용 장애인, 나, 전동휠체어이용 장애인이라는 3명의 집단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하나의 집단(장애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바로 나(비장애인)의 몸이 표준이라는 전제 아래,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인간을 분류했기 때문이다. 즉 장애인은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따른 임의적인 범주인 것이다.
다시 한 번 정희진의 말을 빌리자면, 장애인이 가진 다양한 차이들, 인간이 지닌 다중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장애인으로 환원하는 것이 바로 장애인차별 주의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한 인간을 이해하고 파악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와 그녀가 지닌 여러 가지 정체성 중에서 장애라는 것으로 한 사람의 전부가 빨려 들어가는 것. 또한 공공장소에 설치된 비장애인용 화장실은 남녀 구분은 물론, 요즘은 아동용 소변기와 대변기까지 따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장애인용 화장실은? 아예 없는 곳도 부지기수지만, 설령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녀 구분이 안 된 곳이 대부분이다. 그와 그녀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차이와 정체성은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 남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마저 사라지고 오로지 ‘장애인’으로서만 남는 것이다.
3. 장애에 대한 주류 사회의 정의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적인 장애의 정의는 세계보건기구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 의해 제시되고 있으며, 이는 손상(impairment), 장애(disability), 사회적 불리(handicap)이라는 삼단계의 구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세 가지 단어가 우리나라 말로는 모두 장애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영어식 표현은 The impaired, The disabled, The handicapped가 모두 가능하고, 실제로 쓰이고 있다. 사실 영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을 하다 보면 그 단어에 부여된 본래적 의미가 온전히 살아나지 못하고 사회적인 맥락도 모두 제거되어 버리고 만다. 또한 영어권에서도 장애와 관련해 impairment와 disability의 의미 자체가 다양하게 규정 될 수 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굳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임페어먼트와 디스어빌리티라고 옮겨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쨌든 WHO는 이러한 구분에 기초하여 국제질병분류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를 근간으로 1980년에 국제손상장애핸디캡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Impairments, Disabilities, and Handicaps, ICIDH)를 제시하게 된다. 이를 간략하게 그림을 통해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이러한 ICIDH는 이후 사회적인 요인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다는 내외적인 비판에 직면하여 1997년에 ICIDH-2로, 그리고 2001년에는 국제기능장애건강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Functioning, Disability and Health, ICF) 로 변화·발전되었다. ICIDH-2는 용어를 긍정적 표현으로 변경하고(기능적 제약→활동, 사회적 불리→참여) 상황적 요인(contextual factors)을 추가하였으며, ICF는 ICIDH-2 를 대부분 수용하면서 용어를 다시 한 번 수정하고(손상→신체 기능과 구조) 상황적 요인과의 역동성을 보다 강조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굉장히 복잡해지면서 헷갈리고 머리만 아프게 했지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의 법률에서는 장애인 내지 장애를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모두 WHO의 ICIDH 도식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장애인복지법, 1999):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
일본(장애인기본법, 1993): 신체장애, 정신박약, 또는 정신장애가 있음으로써 장기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한을 받는 자
미국(ADA, 1990): 개인의 일상생활 활동 중 한 가지 이상을 현저히 제한하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기능장애를 지닌 자, 이러한 기능장애의 기록이 있는 자, 이러한 기능장애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자
영국(DDA, 1992):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기 위한 개인의 능력에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불리한 영향을 주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손상
독일(장애인평등에관한법, 2000): 신체적 기능, 정신적 능력, 또는 심적 건강이 6개월 이상 그 연령의 전형적 상태와 상당히 다르고 이로 인하여 사회에서의 생활참여에 제한을 받게 되는 자이에 반하여, 한국의 장애인단체들이 오랫동안의 토론과 논의를 거쳐 지난 2005년 9월 20일 입법 발의했던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장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었다. 2007년 3월에 법안이 실제로 국회를 통과할 때는, 정부의 입장에 의해 기존의 「장애인복지법」과 유사한 내용으로 수정되었지만 말이다.
• 제2조(장애)
① “장애”라 함은 장·단기간 혹은 일시적으로 발생한 신체적·정신적 손상, 기능상실, 질병 등이 사회적 태도나 문화적, 물리적 장벽으로 인하여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가져오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정의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들 자체는 앞서 제시된 주류적 정의와 엇비슷한 것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 인하여’ 앞에 무엇이 위치해 있는가, 즉 장애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정의가 도출되는 관점과 그 의미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4.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손상 때문에 버스를 탈수 없고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사람들?[footnote] 강혜민, 「‘휠체어가 씽씽 달리는 도시’에 대한 발칙한 상상」, 『비마이너』, 2014. 8. 1. http:// beminor.com/detail.php?number=7174(최종 접속일 2016. 11. 6.)에 첨부된 동영상도 이 절의 내용과 유사한 관점에서 제작된 것이니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 NOU는 Norges offentlige utredninger(Norwegian Official Report)의 약자로, 노르웨 이 정부에 의해 지정된 위원회 또는 위원단에 의해 발간되는 공식 보고서를 말한다. 노르웨 이 의회는 정부에 그러한 위원회의 설립을 요청할 수 있다. [본문으로]
- Jan Tøssebro, “Deinstitutionalization in the Norwegian welfare state”, eds. Jim Mansell and Kent Ericsson, Deinstitutionalization and Community Living: Intellectual Disability Services in Britain, Scandinavia and the USA , London: Chapman & Hall, 1996, p. 65. [본문으로]
- Jan Meyer, “A Non-Institutional Society for People with Developmental Disability in Norway”, Journal of Intellectual & Developmental Disability 28(3), 2003, p. 307. [본문으로]
- Jan Tøssebro, “Report on the social inclusion and social protection of disabled people in European countries: Norway”, Academic Network of European Disability experts(ANED), 2009; Jan Tøssebro, “ANED Country Report on the Implementation of Policies Supporting Independent Living for Disabled People: Norway”, Academic Network of European Disability experts(ANED), 2009. [본문으로]
- Andrew Power, Janet E. Lord and Allison S. deFarnco, Active Citizenship and Disability: Implementing the Personalisation of Suppor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p. 269. [본문으로]
-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 정부가 공식적인 장애인구 통계를 국제기구에 제출하지 않는 유이한 국가들이기도 하다. 이는 그 나라들에서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장애모델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즉 장애란 어떤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특질이 아니며 물리적·사회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장애인구의 수를 산정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박선민, 『스웨덴을 가다』, 후마니타스, 2012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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