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위원 김지우
수습위원 김현경
언제 어디서든 정보의 공유가 손쉽게 이루어지는 시대지만 여전히 대학에는 대자보가 붙는다. SNS를 통한 공론화의 효과가 충분히 증명된 요즘, 대자보를 적어 벽에 붙이는 것은 너무 지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학가에 대자보가 성행하는 이유는 대자보가 가지는 특수성이 아직까지도 유의미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특히 학생 사회 내에서는 학생 민주화 운동 이후 줄곧 대자보가 주요한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회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대자보는 안정을 추구하는 권력에게 일종의 변수로 작용한다. 대자보는 권력의 통제 밖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행위이기 때문에 양측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권력 구조가 수직적이고 강압적일수록 권력과 대자보는 더욱 불화한다. 대학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할 때 ‘표현의 자유’ 문제는 학교 본부와 학내 구성원, 즉 표현을 막고자 하는 자와 표현하고 싶은 자 사이의 분명한 비대칭적 권력 관계를 특징으로 갖는다.
그러나 요즘 논의되는 대자보 훼손의 문제는 학교 본부보다는 같은 학생들에 의해 발생한다. 대자보를 직접 찢는 일에 거리낌 없으며, 에브리타임 등 온라인 상에서는 이들을 ‘의인’이라 치켜세우기도 한다. 민주화 운동 당시 군부 정권에 대항한 정치적 성격의 대자보나 학교 본부를 비판하던 대자보가 겪은 문제는 정부와 학교라는 거대 권력으로부터의 규제다. 하지만 최근 학내에서 발생하는 다수의 대자보 훼손 사건은 학내 구성원들 간의 문제로, 위에서부터의 입막음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대자보 자체는 괜찮지만 ‘몇몇’ 대자보가 문제라는데, ‘붙여도 되는’ 대자보와 ‘붙이면 안 되는’ 대자보는 누가, 어떻게, 왜 정하는 걸까? 우리는 대자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다양한 공방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자보와 홍보물 사이
대자보를 둘러싼 공방의 중심에는 ‘시행세칙’이 있다. 검인과 허가, 검열과 훼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시행세칙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이를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현재 중앙대학교는 대자보를 <교내 홍보물에 관한 시행세칙>에 근거해 관리한다. 하지만 대자보가 과연 홍보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대자보가 갖는 여러 특수성을 고려할 때, 대자보와 홍보물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학교 본부가 대자보를 <교내 홍보물에 관한 시행세칙>으로 다루는 것은 대자보를 홍보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홍보물은 말 그대로 ‘홍보’를 위한 게시물이다. 사람들에게 행사, 새로 도입하는 제도, 공모전, 기업 채용 등의 내용을 널리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홍보물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난다. 지나가는 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확인했다면 그 홍보물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자보는 다르다. 홍보물과는 구별되는 하얀 배경에 검은 글씨의 모습부터 대자보가 갖는 목적, 내용 모두 홍보물과 다르다. 대자보는 기본적으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대자보 속 내용은 그 당시 상황이 만들어낸다. 누군가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할 때, 대자보는 작성된다. 대자보의 목적에 따라 대자보 내용이 어디로 향할지, 무엇을 말할지도 다양하다. 대자보는 문제 상황을 만든 이를 규탄하거나, 대중에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도 하고, 혹은 갈등 상황 속 연대 요청 혹은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교내 홍보물 게시에 대한 시행세칙> 제2조(정의) ① 홍보물이란 본교 구성원에게 필요한 정보제공을 위하여, 관리부서의 검인을 받아 교내 옥내 • 외 장소에 게시하는 현수막, 각종 배너, 포스터, 기타 인쇄물(신문, 소책자, 팜플렛, 도서 등 포함)을 말한다. |
<교내 홍보물에 관한 시행세칙>에선 홍보물을 현수막, 배너, 포스터, 그리고 신문, 팜플렛 등 기타 인쇄물로 규정한다. 학교는 대자보의 성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대자보를 홍보물로 다룬다. 대자보를 통해 실현되는 표현의 자유와 평등한 기회를 어떻게 보호할지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벽―혹은 지정된 장소―에 부착된다는 이유만으로 대자보가 홍보물과 같이 다루어 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교내 홍보물에 관한 시행세칙>으로 대자보를 관리한다면 대자보 게시 과정이 자유롭지 못 하단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 대자보는 문제 상황이나 갈등 속 학교 내부인들의 의사를 대변한단 특징을 갖는다. 홍보물과 대자보에게 학교란 개념은 다르기에 대자보를 ‘홍보물’이란 이름 아래 일괄적으로 처리한다면 대자보만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해 시행세칙을 엄밀하게 적용하기 힘든 부분이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홍보물은 학내 사람들에게 정보를 널리 퍼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만큼 외부 기관에서 홍보물을 게시하는 경우가 생기며 학내 공론장으로 쓰이는 학교 일부를 ‘빌려’ 사용한다. 그러나 대자보는 구성원들의 당연한 표현의 권리이며, 공론장의 주인은 대학 구성원들이다. 대자보에게 게시판은 표현의 장으로 구성원들이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학교는 대자보, 홍보물 두 대상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게시되는 장소 의미 자체가 이 둘에게 다른데 어떻게 하나의 세칙으로 관리할 수 있겠는가.
불합리한 시행세칙을 지적하고 이에 저항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대자보 프로젝트 1를 진행하는 <반>은 “학교 본부는 대자보를 허가의 영역으로 둠으로써 학생들의 언어를 재단하려 하고 있”으며, 또한 “학내 안티페미니스트들은 대자보 훼손을 통해 학내 페미니즘 활동에 제동을 걸고 있다”고 대자보를 둘러싼 현재 상황을 지적했다. 대자보 프로젝트의 목표는 ‘대자보 부착의 자율성 확보와 대자보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변화’로, 대자보에 관한 문제 의식을 학내에 알리고, 의제화하기 위해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교내 홍보물에 관한 시행세칙>이 정말 구성원의 표현 수단의 대표격인 대자보를 포괄할 수 있는 세칙인지, 오히려 표현에 접근성을 떨어트리는 세칙인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학내 구성원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홍보물의 범위와 대자보 성격에 대해 고민이 드는 때다.
학교 본부 역시 어느 정도 대자보를 일반 ‘홍보물’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홍콩 지지 대자보 검인 거부로 검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학생지원팀 이우학 주임은 “실제로 다수의 대자보가 신고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게시된다”고 언급했다. 게시물의 검인은 허가가 아닌허가가 아닌 신고절차에 불과하며, 실제로 다수의 대자보가 신고 절차를 걸치지 않고 게시되는 상황에서 검인 여부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대자보 게시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2 학교 본부 측에서도 검인받지 않은 대자보들이 게시되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지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학교 본부 역시 대자보를 홍보물과는 다르게 취급함을 의미한다. 대자보의 차별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시행세칙을 개정하지 않는 것은 학생들의 대자보 훼손을 방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대학과 지성史, 도장과 죄송史
도장 받은 자만 말할 수 있다
<교내 홍보물 게시에 대한 시행세칙> 제4조 ③ 홍보물에 다음 각 호의 내용을 포함한 경우 관리 부서는 검인을 거부할 수 있다. 제7조 ① 허가를 받고 게시한 홍보물을 고의로 훼손한 자는 학칙과 규정에 의거하여 징계할 수 있다. |
시행세칙에는 직접적으로 ‘허가’라는 말이 등장한다. 허가 기준은 ‘내용에 따라’ 정해진다. 문제시되는 내용을 삭제하고 다시 검인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면 안 된다고 낙인 찍힌 내용을 게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게시할 수 있는지 없는지 결국 핵심은 '내용'에 있다는 의미다. 학교 본부와 학생이라는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학생들은 ‘검인 불가’라는 학교 본부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결정하고, 아래로 통보하는 식의 과정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학교 본부는 학생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직접 결정하는 곳이 아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은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만 한다. 대학이 지성의 공간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는 물론이고 그 당위성을 판단하는 것도 학생들의 몫이어야 한다. 당연히 그 중에서 무엇이 옳은지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주체도 학생들이어야 한다.
실제로 대자보가 주로 이야기하는 다양한 주제는 학생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당연히 학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학생의 말을 ‘허가’하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논의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시행세칙에서 분명히 하고 있는 '허가제'는 그 자체로 구성원 간 숙의 과정을 막는다. 그러나 학생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할 수 없다면 대체 누가 대신 이야기해 줄 것인가.
도장 받은 자만 배울 수 있다
인쇄물 부착을 위해서는 형식적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시행세칙 제4조 ②에 따르면 “게시 기관, 주관 단체 및 부착자 성명 등이 기재되어 있어야” 하고, 관리 부서는 검인 시 해당 내용 기재 여부를 “검토하고 홍보물 게시 관리 대장을 작성 및 관리”한다. 그러나 형식적 요건을 충족했음에도 검인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행세칙은 학교 본부가 “특정인 비방 등 기타 면학 분위기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은 검인을 거부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제4 ③) 그러나 ‘면학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기준이 어떤 내용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범위가 모호하다. 학교 본부의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학생 사회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홍콩 민주주주의를 지지하며 중국 정부의 시위 탄압을 규탄하는 연대 자보가 면학 분위기 저해를 이유로 검인 거부당했다. 학교 본부는 대자보의 내용이 특정인 비방에 해당하고, 학내 구성원 간 갈등 심화가 우려된다며 검인 거부 이유를 설명했다. 3 이우학 주임은 중앙문화와의 인터뷰에서 추후에도 학내 구성원 사이 갈등 심화가 예견되는 사안의 경우 또다시 검인 거부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갈등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대자보 검인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변명에 불과하다. 첫째, 학생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그에 따른 요구는 다양하다. 각자의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갈등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 의견을 나누고, 고민하며, 문제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움을 얻는다. 대학은 단순히 강의와 학점으로 이어지는 성취 중심의 교육 기관이 아니다. 오히려 지성 발전의 발판으로서 마땅히 학생들에게 다양한 배움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그 역할을 소홀히 하는 일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된다. 학교가 갈등 발생을 우려하며 대자보 검인을 거부한 것은 학생들을 배움의 과정에서 쫓아내는 행위다.
둘째, 대자보는 학내 구성원 간 의견 충돌 과정에서 자신의 요구를 피력하기 위한 표현의 수단이다. 갈등 상황에서야 비로소 대자보가 등장하고, 이 대자보를 통해 문제가 의제화되거나 문제 해결의 새로운 국면이 제시될 수 있다. 따라서 검인을 받기 위해서는 ‘갈등 없는 대자보’여야 한다는 학교 본부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 중에서 학교가 '허가'하는 갈등과 '허가'하지 않는 갈등은 무엇인가. 학교가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검인 거부한 사실이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결국 이 질문의 답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물 안 시행세칙, 우물 밖에서 살펴보기
<중앙대학교 학칙> 제65조(활동 및 간행물) ① 학생은 다음의 활동에 대하여 주무부서에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한다. 1. 교내·외 50인 이상의 집회 2. 교내광고, 인쇄물의 부착 또는 배부 3. 각 기관 또는 개인에 대한 학생활동 후원 요청 및 시상의뢰 4. 외부인사의 학내초청 ② 대학 내에서의 활동은 면학 분위기를 해치거나 타인의 권리와 명예를 침해하는 등 각종 법령 및 학칙과 규정을 위반하여서는 아니 된다. <개정 2014.4.24.> |
시행세칙의 문제는 시행세칙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중앙대학교 학칙 제65조에서는 인쇄물 부착 활동에 대해 ‘사전 신고’가 필요함을 명시하고 있다. 상위 규범인 학칙은 신고제를, 하위 규범인 시행세칙은 허가제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하위 규범은 상위 규범보다 더 큰 강제권을 가질 수 없으며, 상위 규범을 위배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이 시행세칙이 학칙에만 위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총학생회 win:D는 후보 당시 선거 후보자 합동 공청회에서 대자보 관련 질문에 “학지처에서 (무단 게시물) 스티커를 부착하는 이유는 검열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홍콩 대자보 검인 거부의 사례에서 학교가 검인을 거부한 이유는 평등한 발언권이 아닌 학내 갈등 회피에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어 win:D는 “헌법 혹은 대한민국에서 규정하고 있는 법에 위배되는 경우에는 허가를 해주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학칙상 ‘신고제’가 ‘허가제’처럼 운영되는 것이지 허가제가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내용에 따라 검인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시행세칙의 내용 자체가 헌법에 위배된다.
대자보는 “의사형성적 작용을 하는 한 의사의 표현·전파의 형식의 하나로 인정되며, 결국 언론·출판의 자유에 의해서 보호되는 의사표현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언론·출판의 자유의 보호 대상이 된다. 의사표현의 매개체로서 대자보가 보호받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야 하고, 소극적인 측면에서는 전달 과정에 있어 검열의 단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때, 검열은 "사상이나 의견 등이 발표되기 이전에 예방적 조치로서 그 내용을 심사, 선별하여 발표를 사전에 억제하는, 즉 허가받지 아니한 것의 발표를 금지하는 제도"를 말한다. 대자보를 붙이기도 전에 학내 갈등을 막기 위한 "예방적 조치"로서 검인할 수 없다고 말한 학교 본부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판례 1. 가.언론·출판의 자유의 보호대상이 되는 의사표현 또는 전파의 매개체는 어떠한 형태이건 가능하므로, (...) 모든 형상의 의사표현 또는 의사전파의 매개체를 포함한다. 나.헌법 제21조 제2항의 검열은 그 명칭이나 형식과 관계없이 실질적으로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사상이나 의견 등이 발표되기 이전에 예방적 조치로서 그 내용을 심사, 선별하여 발표를 사전에 억제하는, 즉 허가받지 아니한 것의 발표를 금지하는 제도를 뜻하고, 이러한 사전검열은 법률로써도 불가능한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금지된다. 라.일반적으로 허가를 받기 위한 표현물의 제출의무, 행정권이 주체가 된 사전심사절차, 허가를 받지 아니한 의사표현의 금지 및 심사절차를 관철할 수 있는 강제수단 등의 요건을 갖춘 경우에만 헌법에 의하여 금지되는 검열에 해당된다. <헌법재판소 2001. 8. 30. 선고 2000헌가9>
판례 2. 검열을 행정기관이 아닌 독립적인 위원회에서 행한다고 하더라도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검열절차를 형성하고 검열기관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라면 실질적으로 검열기관은 행정기관이라고 보아야 한다. <헌재 1996. 10. 4. 93헌가13등> |
판례에서 규정하는 검열의 조건은 △ 허가를 받기 위한 표현물의 제출 의무 및 사전 심사 절차 △ 내용에 대한 심사 △허가를 받지 아니한 의사표현의 금지할 수 있는 강제 수단의 존재 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시행세칙을 검토해 보았다.
<교내 홍보물 게시에 관한 시행세칙> 제2조(정의) ③무단게시물이란 검인을 받지 않거나 게시 장소가 아닌 곳에 게시한 일체의 게시물을 말한다. 제7조(홍보물의 보호 및 게시장소) ④검인을 받지 않은 무단 게시물은 총무팀장이 지체 없이 회수 및 철거할 수 있다. |
우선, 시행세칙 제7조 ① "허가를 받고 게시한 홍보물을 고의로 훼손한 자는 학칙과 규정에 의거하여 징계할 수 있다"에 따라 검인 여부는 명시적으로 ‘허가’를 의미한다. 이때, 검인은 ‘내용’(제4조③)에 따라 거부될 수 있으며, 관련 내용을 수정하지 않는 한 무단 게시물로 남게 된다. 검인받지 않은 것은 ‘무단 게시물’(제2조③)로 규정되어 지체 없이 회수 및 철거될 수 있으므로 이는 발표 금지에 준한다고 볼 수 있다.
학교 본부는 ‘검인 거부’라는 소극적인 행보를 넘어 시행세칙을 검인받지 않은 게시물의 부착을 금지하는 적극적인 사전 검열에 활용하고 있다. 무단 게시물을 회수 및 철거하는 규정에 대해 2019년 1월, 리더스포럼 총장단과의 대회에서 중앙대학교 김창수 총장은 “대학에 질서 없이 대자보가 오랜 기간 방치되는, 캠퍼스가 지저분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게시물 부착에 대한 규정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4그러나 이는 ‘강사법’과 관련하여 학교 본부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검열했다는 당시 논란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캠퍼스의 미관과 내용에 따라 검인 여부가 결정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검열 논란은 결코 이례적인 상황이 아니다. 2015년, 중앙대 구조조정의 흐름 속에서 학생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의 대자보에도 역시 무단 게시물 경고장이 붙었다. 공대위는 “본부의 일방적인 대자보 철거”라며 학교 본부의 사과를 요청했다. 공대위 소속 사회학과 김재경 당시 학생회장은 “그동안 대학본부를 비판하는 대자보의 경우 대부분 검인절차를 통과하지 못했다”며 “학생 공대위의 대자보 역시 검인받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무단으로 게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5 자, 다시 질문해 보자. 학교 본부는 무엇을 ‘검열’하고 있고, 우리는 무엇을 ‘허가’받을 수 있는가?
피할 수 없으면 뜯어라?
학교 본부로부터의 검열이 ‘권력과의 불화’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이해된다면, 학내 구성원 간의 대자보 훼손은 ‘공론장 내의 불화’라는 수평적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스마트폰의 발달로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원하는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이때 휴대폰으로 수집되는 정보들은 오로지 ‘어떻게 손가락을 움직일 것인가’를 통해 결정된다. 넓고 깊은 정보의 바다에서 정보 탐색자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 편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정보 플랫폼 역시 적극적으로 ‘차단’, ‘숨기기’, ‘앞으로 추천하지 않기’ 등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며 정보 탐색자들이 그들이 원하는 정보만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상황에서 빅데이터를 통한 추천 알고리즘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일이 반갑지만은 않다.
이제 인터넷의 정보들은 더 이상 우연히 마주친 낯선 것이 아니다. 개인의 선택이든 추천 알고리즘 때문이든 우리에게 노출되는 정보들은 관심사와 취향을 관통하는 내용들로 재구성된 결과다. 그러나 대자보는 다르다. 대자보는 개방된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함으로써 방문자의 시야에 ‘우연히’ 등장한다. 대자보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의사 표현으로 ‘선별되지 않음’에 그 목적과 의의가 있다. 대학가의 대자보는 ‘캠퍼스’라는 한정된 공간이 대자보의 비선별성과 결합해 있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대학에서 대자보는 약자의 목소리와 주목받지 못한 정보들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디지털 창구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온라인 공론장에서는 사용자가 원치 않는 정보를 거부하더라도 아무도 책망하지 않고, 사회는 이들에게 어떤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추천 알고리즘은 이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사용자가 더 좋아할 만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렇게 오늘날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데 익숙해진다. 그러나 대자보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차단 버튼도, 숨김 버튼도 없다. 대자보는 그저 눈앞에 놓일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시물을 손쉽게 피해갔던 온라인에서의 습관은 오프라인 공론장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이들이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정보를 피하는 방법은 치워 버리기이므로, 잡아뜯는 순간 대자보는 간단히 이들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최근 주목받는 학내 대자보 훼손 문제 역시 이러한 맥락에 놓여 있다.
학교가 허락했습니다!
대자보를 훼손한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학교 본부다. 시행세칙은 대자보 훼손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시행세칙은 대자보에 ‘검인 도장’을 요구한다. <교내 홍보물 게시에 관한 시행세칙>에 따라 검인받지 않은 게시물은 ‘무단 게시물’로 분류되며(제2조 ③), 제7조 ①에 따라 “허가를 받고 게시한 홍보물을 고의로 훼손한 자는 학칙과 규정에 의거하여 징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말하면 허가받지 않고 게시한 홍보물에 대해서는 고의로 훼손해도 징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올해 당선된 제62대 총학생회 win:D 역시 선거 후보자 합동 공청회에서 “교내 게시판에는 학칙상 학생처의 허가를 받은 후 부착이 가능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즉, 허가받지 않은 대자보는 학칙상 게시판에 게시가 불가하다”며 ‘허가제’를 직접 언급했다. 이어 win:D는 “하지만 만일 학교 승인을 받은 대자보에 대해 훼손이 됐을 시에는, 총학생회 측에서 같이 목소리를 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학생의 권익을 위해 힘써야 하는 학생 대표자조차 문제 의식 없이 시행세칙의 논리를 되풀이한다. 결국 학교뿐만 아니라 총학생회까지 이들 뒤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시행회칙은 제7조 ④에서 검인받지 않은 무단 게시물은 학교에 의해 지체없이 회수 및 철거 가능함을 명시한다. 물론 학교 본부는 ‘대자보의 특수성을 인정해 검인받지 않은 대자보에 대해서도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해명하지만, 훼손 당사자들은 검인받지 않은 대자보를 ‘어차피 학교에 의해 철거될 ‘불법’ 게시물’로 받아들인다.
'대자보 허가제’에서 검인 도장은 곧 ‘허가됨’을 의미하고, 대자보의 ‘허가’ 여부를 식별 가능하게끔 만든다. 학생들은 도장을 통해 손쉽게 ‘허가받은 대자보’와 그렇지 않은 대자보를 구분할 수 있다. 검인 도장과 시행세칙은 무엇이 ‘허가’받은 것인지, 그래서 무엇을 훼손해도 괜찮은 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만든다. 학생들은 ‘도장이 있는’ 대자보를 훼손하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도장이 없는’ 대자보는 훼손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다는 것 역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무단 게시물 훼손에 대해 학교가 발벗고 나서 제재를 가하거나, 표현의 자유 침해에 우려를 표명하거나 훼손을 삼가라는 권고가 이뤄진 적도 없다.
학교 본부가 대자보 훼손에 대해 안일한 태도를 취하는 동안 많은 대자보가 찢겼으나 훼손 당사자들은 법적 처벌을 면했다. <반>은 올해 상반기 게시한 대자보가 여러 차례 훼손돼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훼손한 이들은 관련 글을 에브리타임에 게시하며 ‘역시 행동하는 지성인이다’, ‘멋있다’ 등 많은 학생들의 동조를 받았다. 훼손된 대자보가 검열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검인 도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훼손 당사자들에게는 그 의도가 뭐든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것은 일단 시행세칙이 규정하는 ‘무단 게시물’이기 때문이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법과 제도는 행동의 옳고 그름을 규정하고, 사람들이 행동을 옮기는 데에 근거가 된다. 법치주의 사회 속 특정 집단 구성원은 소속 집단의 규범에 기반해 허용되는 행동 범위를 스스로 인식한다. 대자보를 훼손한 사람은 있지만 이 문제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학교측의 징계도, 법적 처벌도 없다. 사람들은 무단 게시물 훼손이 어떤 규정으로도 제재되지 않는 행위임을 확인했다. 결국 이들이 대자보 훼손을 위법하지 않은 행위로 인식하는 것은 또 다른 대자보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오프라인 공론장에서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정보를 눈앞에서 손쉽게 치워 버리되 이 행위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간편한 방법인가.
비어가는 공론장
대학은 거대한 공론장이다. 대학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 숫자만큼이나 각자 요구하는 바도 다르다. 사실상 모든 구성원들 간의 직접적인 대화가 현실적으로 불가한 상황이다. 대자보는 이 한계를 효과적으로 극복한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원하는 소리만 들리는 ‘반향실의 공간’으로, 어떤 소리를 내든 같은 소리가 되돌아온다. 이와 달리 수많은 의견이 오가는 와중에 대자보는 의도적으로 ‘광장’을 점유한다. 학내 구성원들은 자신의 의견을 직접 이야기하고, 이들은 의제화 되어 다시 학생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의제화할지, 혹은 의제가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학내 구성원의 몫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학내 상황은 학교 본부에 의해 학생들이 공론장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학교 본부는 ‘대자보 허가제’를 근거로 학내 대자보를 소극적·적극적으로 규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대자보 훼손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 시행세칙이 대자보를 훼손하는 근거가 됨에도 불구하고 개정 의지가 없다. 심지어 훼손된 대자보가 그들이 원하는 ‘허가’를 받은 경우조차 학교 본부는 자신들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며 회피했다.
공론장은 점점 비어간다. 대학에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공간이 부재하다. 갈등을 이야기할 수도 없고, 갈등에 대해 고민할 기회도 없으니 우리는 스스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도달할 수 없다. 갈등을 회피하는 일이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처럼 우리 안에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이를 항상 경계하며 학교가 구성원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학내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학내 정치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론장에서 자유롭고 활발하게 토론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대학 안에 건강한 공론장이 마련되어야만 학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된다.
건강한 공론장과 표현의 자유는 단지 인식 개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가제’와 ‘검열’을 정당화하는 시행세칙의 개정을 깊이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대학은 학내 일원이 자유로이 의견을 개시할 수 있는 공론장이어야 한다.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마땅한 대책을 마련할 때다.
- 중앙대 반성폭력반성매매 모임 <반>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학내 만연한 여성혐오 문화를 지적하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학내 에브리타임의 안티페미니즘적, 반인권적 언어들에 대한 대자보를 게시하는 활동이다. [본문으로]
- <중앙문화>, “학생지원팀, 홍콩지지 대자보 검인 거부 ... 위헌적 검열기준 문제 제기 잇따라”, 2019.11.26. [본문으로]
- <중앙문화>, “학생지원팀, 홍콩지지 대자보 검인 거부 ... 위헌적 검열기준 문제 제기 잇따라” , 2019.11.26 [본문으로]
- 2018년 12월 18일, 학교에는 강사법 개정 후 학교에서 이뤄진 강사 구조조정에 대한 대자보가 검인 없이 게시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학교 본부를 비판하는 해당 대자보에만 ‘무단 게시물 경고장’이 붙었다. [본문으로]
- 신예솔, “검인받지 못한 게시물 철거돼”, 중대신문, 2015.04.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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