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위원 이진주
모순과 마트료시카 1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를 남긴 <혹성탈출> 리부트 2 버전으로 글을 시작해 볼까 한다. 이 영화는 인간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유인원에게는 지능 향상의 효과를 주는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소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치료제 임상실험에 이용된 유인원에게서 태어난 시저는 한 과학자의 손에서 길러진다. 그는 약을 먹은 어미의 지능을 물려받아 시간이 갈수록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게 된다.
그러다 과학자의 아버지가 이웃과 마찰을 겪자, 그는 이웃을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공격한다. 이후 보호소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그동안 모르고 있던 냉혹한 세계를 알게 된다. 같은 생명이지만 유인원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기는 구조적 계급을 말이다. 그는 역설적이지만 그 자체로 완전한 생명에 위계가 존재하고, 자신을 포함한 동족이 이 위계에 의해 인류와의 공존으로부터 소외된 개체군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그는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유인원들에게 퍼뜨린 후, 지능이 향상된 동족과 공존을 이루며 인간을 대상으로 전쟁을 계획한다.
이후 알츠하이머 치료제가 시미안 플루 바이러스(Simian Influenza)의 형태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된다.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해 문명이 파국을 맞이하고 인류는 소외하던 유인원들과 협력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세계를 이끌어가는 일인자의 역할을 수행하던 인류는 생존자들만이 남은 편파적 조직의 양상을 띠게 되어 범세계적 소외 속에서 함께 살아 나간다.
이제 <혹성탈출>을 벗어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소외와 공존은 우리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존재인가? 인류는 다원적인 환경에 놓인 개인이 또 다른 개인과 만나며 집단을 이루고, 집단과 또 다른 집단이 뭉쳐 사회를 이루는 확장적 크레셴도(Crescendo)의 흐름 속에 있다. 다시 말하면, 총체적 관점에서 인류는 거대한 공존 속 주체로 기능한다.
그러나 사회 속 모든 인간이 서로 돕고 공존하며 살아간다고 보는 것은 다소 유토피아(Utopia)적인 접근일 수 있다. 다채로운 사회는 그만큼 명과 암이 확실하기에, 현실에서 공존만이 존재하는 이상향의 사회를 만들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곁에는 다양한 양상의 소외가 존재하고, 우리는 소외 속 공존과 공존 속 소외를 모두 겪는다.
첫 번째로, 소외 속 공존은 범세계적 소외 속에서 나타나는 공존을 말한다. 소외가 범세계적 특징을 갖는다는 것은 국적, 연령, 성별, 경제력, 학력 등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구분하는 여러 요소에 상관없이 누구나 소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두 번째로, 공존 속 소외는 불특정 다수의 공존 속에서 도드라지는 소외를 말한다. 소외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 특이성을 지닌다. 사회에서 이 두 가지의 양상은 서로 혼합되거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소외와 공존이 우리의 일상에 어떤 모습으로 스며들어 있는지 알아보자.
소외 속 공존 : AI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Chapter 1
제2의 인간
백지상태에 놓여, 한 번의 경험에서 열 가지의 영감을 얻는 초등학생의 말랑말랑한 상상력은 규모를 추정할 수 없다. ‘50년 뒤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요?’ 호기심을 자극하는 숙제가 주어질 때면 필자는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 수 있는 자동차, 발이 달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아파트를 상상했다. 명절 때마다 겪게 되는 고질적인 교통체증 탓에 자동차 속도가 느리게 느껴지고, 익숙한 동네를 문득 벗어나고 싶어지는 초등학생이 가장 직관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미래 기술 혁신의 원형이었다.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러한 상상의 뒷면에는 혁신으로 파생된 삶의 전환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듯싶다.
한편 일상 속 기술 발전 양상을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모습을 하고 우리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또 다른 인간의 등장을 상상하기도 했다. 고도화된 지적 능력을 갖춘 인간이 이 능력을 발휘해 다른 구성체의 인간을 만든다면 친구의 범주가 더욱 넓어질 수 있겠다는 1차원적 생각이 불씨였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에도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가 출현하게 된다면 그것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생각하는 능력을 넘어서 사고(思考)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실제 인간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초등학생의 막연한 상상은 현실이 되어 우리 일상에 근접해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AI라 부른다
긴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AI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AI’는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자이며, 인간의 지능이 가지는 학습, 추리, 적응, 논증 따위의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을 말한다. 이때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기능이 인간과 같이 경험 속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탑재된 것이 아니라 입력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글에서 다룰 ‘생성형 AI’의 경우 거대 AI 분야의 하위 집합으로 이미지, 동영상, 음악 등 새로운 콘텐츠를 자체적으로 제작해 낼 수 있는 AI를 말한다. 인간은 언어, 예술, 과학 등의 여러 가지 분야에서 생성형 AI를 학습시키며, 생성형 AI는 입력된 학습 데이터를 이용1차해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를 도출한다. 생성형 AI는 인류 역사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견인체로서의 잠재력을 가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편리함의 이면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외가 자리 잡고 있다. 인류 문명의 발달, 나아가 고도의 생활 양식을 꾀할 수 있도록 고안된 생성형 AI로 인해 오히려 인류가 소외되는 아이러니한 양상을 살펴보자.
Chapter 2.1
①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멀리하는 일 : 기술적 실업
기술적 실업, 그 출발선
18세기부터 인류는 여러 차례의 산업혁명을 겪으며 삶의 전반적 변화를 직면했다. 1760년,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주축으로 한 거대한 기계화 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던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효율성을 추구한 인간의 욕구는 끊임없이 기계의 혁신을 촉진했고, 산업혁명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 영국의 선진 기술이 대외적으로 팽창하면서 점차 세계에 퍼졌다. 미국과 몇몇 유럽 국가들은 기계의 도입을 통해 소비 시장의 활성화와 수요의 충족을 끌어내며 자본의 풍요를 맛보기도 했다.
이후 1914년, 전기 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생산방식이 나타나면서 기술의 진보는 더욱 가속화됐다. 소비재 산업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경공업에서 큰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중화학 공업으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고, 대량 생산을 통해 원가를 절감할 수 있게 되면서 생산성이 매우 증가했다. 이러한 흐름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과 정보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노동력에서 기계의 만연화, 전기 기술을 결합한 컨베이어 벨트에서 IT 기술을 활용한 공장 자동화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거친 변화를 거쳐 온 산업 패러다임은 인류의 삶의 질을 개선했다.
그러나 거대한 물결이 언제나 보기 좋은 결과만을 초래했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다. 기계제의 정착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제1차 산업혁명은 말 그대로 수공업의 필패를 불러왔다. 이에 1811년에 기계로 인한 실업과 빈부격차, 그리고 기계의 주력에 맞선 반(反)시대적 노동 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러다이트 운동이다. 영국의 생산자본주의가 자리 잡아 가던 시기에 노동자들이 기계에 반발하며 분노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기계가 일자리를 점차 대체하면서 상대적으로 설 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최초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기계는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는 노동시장의 맨 아래층을 차지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인간의 숙련도를 위협하는 무언가가 노동시장에서 서서히 세력과 규모를 확대해 나가는 것을 예견한 선구안이었을지 모른다.
대량 실업은 타인의 미래가 아니다
생성형 AI의 보급과 맹목적 양산으로 인해 발생하는 실업 문제는 비단 먼 훗날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 공공정책연구소(IPPR)는 ▲현재 존재하는 생성형 AI 양상과 ▲기업이 직무에 AI를 고도로 적용할 경우 나타나는 생성형 AI 양상을 나누어 연구하며, 생성형 AI의 발전이 노동시장에 잠재적으로 미칠 영향을 분석했다. IPPR은 모든 유형의 직업을 포괄하는 영국 경제의 22,000개 업무 중 11%가 이미 첫 번째 생성형 AI의 양상에 노출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생성형 AI가 발전할수록 노출도가 놀라운 속도로 커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잘 학습된 AI가 있다면 열 명의 인간이 부럽지 않다. 인간을 위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상을 ▲AI를 유치하고 인간을 감원하는 직관적 현상과 ▲기존에 근무하던 인간을 해고하진 않더라도 추가 채용을 중단하는 잠정적 현상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AI가 인간의 자리를 차지한 현상을 살펴보자. 2023년 4월, 미국의 클라우드 서비스기업인 ‘Dropbox(드롭박스)’는 전체 직원의 16%를 해고하겠다고 발표했다. 3 기업의 이러한 선언은 AI를 활용한 제품 개발을 더욱 가속하겠다는 데 목적이 있다. 미국의 대형 이동통신사인 ‘TmobileUS’ 또한 전체 인원의 7%에 해당하는 인력을 일시적으로 해고하겠다고 선언한 후, 2023년 9월부터 실행에 옮겼다. AI를 고용한 인력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목표가 하나의 원인이 됐다.
두 번째, 추가 채용이 중단된 현상을 알아보자. 미국의 기술 종합업체인 ‘IBM’은 AI가 충분히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직무에 대해 채용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IBM의 최고 경영자 ‘아르빈드 크리슈나(Arvind Krishna)’는 IBM 내에서 고객을 대면하지 않는 직무는 2만 6천여 명에 달하는 규모를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5년 동안 이 규모의 30%가 AI로 인해 자동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밝혔다. 이러한 사례는 AI로 인한 실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확대될 실업의 규모를 보여준다.
인류 친화적 적자생존의 퇴보
소외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멀리하는 일’이다. 이때 기피는 사전적으로 ‘꺼리거나 싫어하여 피함’이란 뜻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기술적 소외에서의 기피는 기존의 의미와 상이하게 해석될 수 있다.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생산하고 싶은 선호가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노동시장이 적자생존의 원칙에 기반해 작동하게 됐다. 점점 AI로 대체되고 있는 산업의 내재적 계제를 살펴보면, 인간이 싫다는 1차원적인 감정적 기호가 반영된 것이 아니다. 다만 ▲특정 분야에 닥친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신속하게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으며 ▲환경과 업무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요소를 선택하려는 기호가 관찰된다.
노동의 양상에 따라 철저히 구획되어 왔던 인류는 여러 차례 산업혁명을 거치며 많은 실업 위기에 처했다. 험하고 장기적인 과정에는 노동자들의 치열한 밥그릇 쟁취가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생성형 AI가 발전하면서 파생되는 노동력의 변혁기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오히려 산업 부문에서 혁신과 도태라는 두 가지 속성을 띤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노동력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했으며, 이러한 노동력의 순응성을 발판 삼아 인류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더욱 혁신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인류가 History of Malleability(노동력이 지닌 유연성의 역사) 4 속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의 생성형 AI는 그동안 대체될 수 없었던 범위에 있던 인간의 고유 능력인 지능 영역을 모방하기에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살펴봐야 한다. 학습하고 사고하는 속성은 과거 산업혁명에서 대체재로 기능했던 요소들이 가진 성질과 상이하다. 점점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기존에 교체될 위기에 처했던 단순노동 부문을 넘어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분야의 직군도 생성형 AI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이는 기계를 비롯한 또 다른 제2의 인간이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영역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얘기와도 같다. 실업이라는 짙은 범세계적 소외 속에서 인류는 공존을 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Chapter 2.2
②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 : 기술 윤리는 낭떠러지 앞
예술의 지평을 넓히다
록(Rock)을 좋아하는 필자의 유튜브 알고리즘엔 밴드의 연주 영상으로 가득하다. 침대에 누워 알고리즘 속을 유영하던 중, 밴드 ‘Queen(퀸)’의 프론트맨인 ‘Freddie Mercury(프레디 머큐리)’가 아이유의 ‘내 손을 잡아’를 부른 영상을 접하게 됐다. 정말 프레디 머큐리가 환생이라도 한 것일까? 프레디 머큐리의 시원한 가창력과 한국어가 만난 기묘한 순간이었다. 나와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댓글 창을 봤다. 조금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그리워했던 많은 이들은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어 감격하는 한편, 어떤 이들은 그가 정말 이 노래를 불렀다면 들렸을 법한 창법을 AI가 고스란히 구현했다는 점에서 AI 생성물의 완성도에 감탄하기도 했다.
목소리의 귀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재하가 부른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어리숙한 목소리를 가진 델리스파이스의 고백과는 달리, 유재하의 고백에는 유재하 특유의 담백함이 담겨 있다. 소중한 이에게 쓴 편지를 읽는 듯한 목소리 말이다. 맥이 끊긴 공급이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생성형 AI에 직접 듣고 싶은 가수의 특징과 창법을 학습시킨 후 또 다른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이제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수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니! ‘AI 커버(Cover)’는 기존에 볼 수 없던 예술의 새로운 꼭짓점으로 나타난다.
딥페이크의 동전 뒤집기
한편 생성형 AI로 인해 창작의 생태계에 경보음이 울리기도 한다. ‘Deep Fake(딥페이크)’는 AI 기술의 일부인 ‘Deep Learning(딥 러닝)’과 가짜를 뜻하는 ‘Fake(페이크)’가 결합한 합성어다. 포착한 얼굴과 목소리의 특징을 바탕으로 삼아 또 다른 얼굴과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분명 획기적인 기술이지만, 목소리를 교묘하게 편집하고 위조해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에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점점 수법을 달리하는 보이스피싱에 진위를 판별할 수 없는 AI가 결합했을 경우 디지털 기기에 친숙하지 않은 노년층이 피해의 주력 대상이 된다. 하지만 노년층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40~50대, 더불어 20~30대까지도 이러한 범죄에 얼마든지 노출될 수 있다. 이는 결국 생성형 AI 발전의 부작용에서 그 누구도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의 품질이 의심할 여지 없이 완벽할 경우,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가 조작됐다는 걸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로 작용한다.
고도화된 디지털 시대에서 우리는 끝도 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더미 속에 파묻힌다. 이 말은즉슨 정보를 식별하고 취사선택해 받아들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식별 능력 덕분에 인간은 광범위한 정보의 늪에서도 지금껏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골라 습득하며 지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AI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허위 콘텐츠가 무작위로 보급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됐다. 소외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이다. AI로부터 파생된 부작용은 고유한 인간의 능력을 교란한다. 즉, 인간이 인간의 본질에서 기인한 능력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환경을 만든다.
AI는 창작물을 먹고 자란다
생성형 AI는 인간이 원하는 다양한 영역의 산출물을 제공하지만, AI가 지닌 생산 능력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생성형 AI의 생산물은 수많은 학습을 거쳐 탄생했다. 탄생의 과정에는 생성형 AI 자체의 딥 러닝이 활용된다. 사람이 생각하는 메커니즘을 모방해 주어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훈련하는 과정 말이다. 마치 인간이 존경하는 스승을 두고, 스승이 알려주는 정진법을 따라 하며 학문에 몰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하나의 스승만을 두지 않는다. 왜 하나의 스승만을 두어야 하는가? 생성형 AI가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의 창작물이 그의 스승이 된다. 특히 예술 중 그림 분야에서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진다. 창작물이 지닌 개성을 그대로 학습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생성형 AI는 여러 대가(大家)들이 지닌 고유의 특징을 그대로 표현하는 하이브리드 예술가(Hybrid Artist)로 거듭난다. 생성형 AI의 다질적인 예술성은 분명 인류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성형 AI의 특성은 역설적이게도 인간 개인이 가진 예술성을 기성화한다. 다양한 소스를 학습한 생성형 AI의 작품에서는 여러 작가의 고유성이 혼재된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지만, 이를 뒤집어 해석한다면 무방비한 상태에 처한 여러 작가의 고유성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서 다룬 AI 커버를 기억하는가? 프레디 머큐리와 유재하의 목소리를 변형해 다른 음악에 입히는 AI의 순기능도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명백한 역기능이 된다. AI는 다시 들을 수 없는 추억의 목소리를 구현해 내기도 하지만, 현재 들을 수 있는 가수의 목소리를 재창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히트곡 ‘어머나’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윤정씨는 AI로 현역 연예인의 목소리를 모방한 영상을 시청한 후 “이럴 거면 AI를 사용해 음원을 내지, 가수가 리코딩을 왜 하느냐”며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가수에게 목소리는 생명줄이며, 노래를 부르며 익혀 온 음색과 창법은 소중한 노하우다. AI 커버의 완성도가 좋다는 말은, 생성형 AI가 가수의 정체성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말과 같다. 여러 경험을 통해 창출된 가수의 무형적 재산이 고스란히 AI가 성장하는 재료로 활용되는 셈이다.
인간과 AI는 창작물을 먹고 자란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인간의 학습과 AI의 학습의 차이가 궁금해질 법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인간 또한 타인의 말이나 행동, 심지어는 창작물로부터 영감을 얻고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든 후 그것으로 명성을 얻거나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했다. 인간의 학습이 AI의 모방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면, 이 글을 읽으며 인간의 학습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AI의 학습은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는 의문이 생길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인간과 AI가 학습해서 산출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존중의 유무다. 존중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이 글은 창작자의 창작 과정과 창작물에 대한 존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은 경험을 하고, 감정을 느끼며, 사회에 비판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비가시적 요소들은 한데 어우러져 인간의 독특성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의 형태로 작품에 녹아든다. 타인의 작품을 학습한다 한들 인간은 작품을 만들 때 독특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차별점을 마련한다. 즉, 똑같은 창작물을 보더라도 인간은 각자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고, 영감을 받아 만든 창작물에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생각이 투영된다는 의미다. 반면 AI는 그 자체로 독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은 백지상태에서 시작해 수많은 창작물을 학습한 또 다른 흉내의 결과일 뿐이다. 앞에서 AI를 나타낼 때, ‘AI는 인간의 지능을 모방할 뿐, AI의 데이터는 인간과 같이 경험 속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탑재된 것이 아니라 주입된 것에 불과하다는 특징’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결국 인간과 AI의 학습 메커니즘은 비슷할 수 있으나, 이러한 학습의 결과로 파생되는 산출물의 본질은 엄연히 다르다.
Chapter 3
효율성보다 중요한 가치
생성형 AI의 발전은 산업의 생산성을 효과적으로 견인하지만, 이로 예상되는 실업이 인간의 인간성을 위협한다는 데 문제점이 존재한다. 이때 인간성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을 말한다. 노동은 ▲생계 수단과 ▲자아실현의 형태로 인간이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한다. 일자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인류는 인간으로서 영위해야 하는 안정적인 삶을 놓치고 만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소득과 여가, 안정적인 주거 환경은 근본적으로 노동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량 실업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인간성 실현이 가로막힌다면 AI를 통해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한 인간에게는 말 그대로 주객전도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생성형 AI의 범람으로 새로 유치되는 직무가 존재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소멸하는 직무가 더 많을 것으로 유추되기에 대량 실업의 현실화에 앞서 정부의 규제 조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기업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주체이므로 기업이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생산성 향상을 목적으로 사람을 대신해 생성형 AI를 유치하는 기업의 행위는 자본주의의 질서에 입각한다면 사실상 순리라는 의미다. 시장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정부의 규제가 필요한 까닭은, 노동이 인간에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강도와 환경 속에서의 노동은 개인의 사회적 행위로서 인간에게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으로 여겨진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정부는 개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바탕으로 명확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이는 누구 하나 자유롭지 못한 대규모의 노동자 소외 속에서 공존을 지키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 되리라.
기술 윤리의 공백
노동 속 인간성 실현을 넘어, 생성형 AI가 인간의 인지 능력 및 예술 능력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여러 디지털 자료를 사용할 때의 윤리는 이미 익숙하지만, 생성형 AI라는 신규 콘텐츠의 등장에 따라 기존에 있던 규제와 윤리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게 됐다.
이는 기술의 발전을 윤리의 정립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대의 문제점을 포괄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슷한 결의 사례로 자율주행 자동차를 들 수 있다. 자율주행 기술 연구가 진전되지만 자율주행 자동차의 사고에서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다. 윤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일방향으로 주어지는 사전적 성격이 아닌, 특정한 사안에 대해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바를 주축으로 형성되는 사후적 성격을 띤다.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은 가시적으로 명확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넓은 범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힘들다. 하나의 기술이 인류의 삶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겪게 되는 부작용 또한 예측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이미 인류의 일상생활에 긴밀하게 다가왔다. 우리에겐 새로운 기술 윤리가 필요하다. 이에 첫 번째로, 인간의 식별 능력을 지키기 위한 방침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과 EU는 AI 생성 콘텐츠에 워터마크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누구나 특정 오디오나 영상이 AI로 생성됐다는 것을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이 골자다. AI 5로 재구성된 정보에 붙은 워터마크는 정보를 판별할 시 한층 더 유의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생성형 AI가 지금보다 더 만연해진다면, 이러한 법안은 인간이 인간 고유의 식별 능력을 원활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경로로 기능할 것이다.
두 번째로, 생성형 AI에 활용되는 인간의 창작물 기준을 뚜렷하게 설정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이 깊은 거시적 범주의 권리로 저작권을 들 수 있다. 저작권은 저작물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골자로 하는 권리인데, 저작권자는 저작권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저작권을 보호하는 것도 좋지만, AI를 활용하는 인간에게 일부 면책 규정을 적용해 AI가 유용한 도구로 기능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6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논리적이지 않다. 인류의 창작물에 대한 가치보다 AI의 생산성이 우선된다면, 오히려 인간의 창작물은 그 자체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고 AI의 학습에 사용되는 수단이 된다. AI의 생산성을 향상하는 것은 인간의 창작물이 가치를 인정받은 뒤 이뤄져야 할 부차적 사항이다. 창작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AI에 무분별하게 학습시키는 행위를 엄격하게 규제해 인간의 예술성을 보존해야 한다.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타파하고 인간을 위한 AI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다.
공존 속 소외 : 쉬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나요
Chapter 1
공간은 소리 없이 변한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움직이는 반경이 좁은데도 동네 지리에 나름 빠삭하다. 비록 동네 곳곳을 누비고 다니던 초등학생 시절보다야 덜하겠지만, 여전히 머리보다 발이 먼저 기억하는 익숙한 길이다. 어느 하루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여러 가게를 살펴보는데, 한 골목에 들어서고 나갈 때까지 카페가 다섯 군데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가 커피 프랜차이즈 두 군데, 개인 카페 세 군데였다. 일주일에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 곳의 변화를 이제야 자각했다는 점으로부터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한편으로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배운 경제학도임에도 좁은 동네 골목에 카페가 이렇게나 많을 필요가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니 직관적으로 와닿는 개념의 카페뿐만 아니라, 익숙한 카페의 개념과 결이 다른 곳도 찾아볼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스터디카페다. 당신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스터디카페에 가는가? 곳곳의 스터디카페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여러 음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회원들을 위한 별도의 서비스에 불과할 뿐 분명 스터디카페를 가는 회원들은 모두 공부가 목적일 테다. 그렇다면 왜 스터디카페는 스터디 ‘카페’라는 명칭을 사용할까? 이는 카페가 점진적으로 커피를 판매하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1차원적 공간에서 벗어나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됐다.
카페에서 눈을 돌려 집으로 향하는데, 예전에 자주 갔던 놀이터를 보니 분명 초등학생이었던 2010년대보다 놀이기구의 수가 확연히 적어진 걸 느꼈다. 친구들과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던 공원이 눈에 띄게 작아졌다. 마침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 놀이터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경로당을 들인다는 뉴스가 생각나면서, 아파트 단지에 놀이터가 없으면 과연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놀이터와 공원이 자취를 감추는 와중에도 어딜 가나 카페는 존재한다. 아이들은 집 앞 놀이터 대신 부모님과 키즈카페로 간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점차 축소되는 놀이터와 공원 대신 카페로 향하는 변화가 정말 긍정적인지 되짚어보고 싶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음에도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지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Chapter 2.1
①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멀리하는 일: 경제적 바리케이드
카페의 번성
카페는 길거리의 대장이다. 점차 카페의 수가 늘어나면서 시장경제 내에 카페 레드오션(Red Ocean)이 조성됐다. 2021년 8만여 개로 추산되던 국내 카페 점포 수는 2023년 10만 개에 근접했다. 이는 20.3%가 증가한 추세다. 특히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음료를 제공하는 저가 커피 프랜차이즈 매장이 날이 갈수록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카페의 성장을 한국 노동시장 특유의 업무 문화와 관련짓는다. 사회에서 빠른 업무 해결 속도와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기에 현대인들의 커피 섭취가 점점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7물론 이러한 접근이 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커피를 생명수라 부르기도 하는 만큼, 현대인에게 커피란 ‘자고 일어나니 돌아온 일상의 시작’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보편적 삶의 양식은 포화 상태인 카페 시장이 성공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커피 프랜차이즈뿐만 아니라 비 프랜차이즈, 즉 개인 카페가 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개인 카페의 기하급수적 성장에는 카페가 가지는 정체성의 변화가 드러난다. 카페가 행하는 미시적 사업 부문은 단순한 식음료 판매에서 공간 판매로 확대됐다. 점차 SNS가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카페로 향한다. 서울의 망원, 연남 그리고 성수 일대는 동네 자체가 거대한 카페가 됐다. 각종 카페가 선보이는 독특한 컨셉을 감상하며 유명한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한 후, 예쁘게 담겨 나온 메뉴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 각자의 삶을 전시할 수 있는 한 공간이 채워진다. 이를 통해 본다면 사람들은 점차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에 목적을 두고 카페에 가지 않는다. 다만 카페의 독특한 개성이 투영된 메뉴를 맛보거나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구경하고, 시대의 유행에 발을 담그고자 하는 일종의 경험에 목적을 둔다.
확대되는 카페의 의미
공간 사업을 하는 카페는 더 나아가 콘텐츠 사업을 진행한다. 인테리어와 분위기 감상은 물론이거니와 더 많은 활동을 제공하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앞서 언급한 스터디카페가 그 예시다. 기존의 꽉 막힌 독서실이 아니라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이들의 수요가 반영됐다.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칸막이만 두었을 뿐 카페처럼 넓은 책상과 탁 트인 공간을 조성해 공부의 몰입도와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스터디카페 이외에도 책과 만화를 볼 수 있는 북카페와 만화카페가 있다. 각종 책과 만화를 구비해두고 편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프라이빗 룸(Private Room)을 구성하는 한편, 몰입하다 출출해질 것을 대비해 각종 먹거리를 팔기도 한다. 이는 카페의 의미가 제한되지 않고 뻗어나가게 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카페와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반려동물카페 등 특정 활동이 결합한 새로운 분야의 카페는 무궁무진하게 발전하고 있다.
공공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주축으로 하던 곳에서 ▲카페의 개성을 구경하고 대세를 좇기 위한 곳, 그리고 ▲특수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카페의 의미는 확장되어 왔다. 그러나 원래 확장된 카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공공공간은 카페의 추세와 대조되는 양상을 보인다. 8도서관, 공원, 놀이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우선 도서관을 살펴보자. 도서관이라는 공공공간에서 우리는 책을 읽거나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도서관이 점차 철거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도서관, 독서, 출판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정책을 내놓게 되면서 열려 있던 문화의 접근성이 축소됐다. 사립의 작은 도서관에 지원비로 지급되던 2억 3740만원이 1억 8280만원으로 약 5460만원이 줄어들었다. 9특히, 구청이 사립의 작은 도서관에 지원하던 도서구입비 및 운영비 또한 9천만원에서 약 3천만원이 삭감되어 6천만원이 할당됐다. 희망 도서를 신청할 수 있던 시민들은 도서 구입 예산이 줄어들게 되면서, ▲도서관을 이용하는 주체인 동시에 ▲도서관에 놓이는 책들을 선정하며 도서관을 구성하는 주체로 기능할 수 있었던 양방향적 특성을 잃어버렸다.
다음은 공원이다. 2018년, 부산 시민들 5명 중 4명 이상은 살고 있는 지역에 공원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매입비를 마련하기 위해 20년간 매달 3800 원을 부담할 수 있냐는 물음에 4명 중 3명 이상이 그러겠다고 대답한 것은 꽤 놀라운 일이다. 10
2019년, 서울연구원이 시민 1천 명을 상대로 서울의 생태 자산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7.5%가 서울에 산책할 수 있는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답했다. 11또 시가지 내에서 녹지가 부족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71.7%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23년, 여전히 시민들은 공원에 대한 접근성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특히 주거밀집 지역에 사는 경우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12서울 동대문구는 여러 대학들이 인접해 있기에 회기역 근처에는 대학생들이 입주한 값싼 원룸과 오피스텔이 많다. 그런데 회기역에서 가장 가까운 공원은 1.1km나 떨어져 있다. 이는 공원에서 간단하게라도 산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주거지역의 현실을 보여준다.
놀이터의 경우는 어떠한가? 위의 그래프를 참고해 보자. 1995년에서 2014년까지 주택단지와 공원에 설치된 놀이터의 수는 증가했다. 이때 2004년에서 2006년으로 넘어오는 시기는 그야말로 폭발적 추세를 보인다. 그러나 2015년에 접어들면서 야외 어린이놀이시설의 수가 감소한다. 그리고 2020년에서 2022년에 접어드니 1999년까지의 놀이터 설치율보다 더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아이를 위한 공간이 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카페는 해가 갈수록 점포 수가 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비단 1차원적 의미의 카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의 그래프를 보면 전국의 키즈카페 매장 수 또한 증가하고 있다. 아이들은 줄어든 야외 놀이터 대신 실내에 놓인 키즈카페로 간다. 줄어든 야외 놀이터의 역할을 또 하나의 카페의 양상인 키즈카페가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공공공간이 축소되거나 부족해지면서 공공공간에 할당됐던 역할에 공백이 생기게 되고, 남겨진 역할을 카페가 대신 수행하게 됐다. 카페의 점포 수가 증가하고 의미가 확대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공공공간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카페는 샘솟는 우물과 같은 곳일지 모른다.
공공공간의 부재는 소외를 부르고
표면적으로 카페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다. 이러한 접근성과 맞물려 공공공간이 축소되면서 사람들이 카페로 가게 되는 현상이 왜 문제냐고 보는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 놀이터가 사라지는 것은 저출생에 따른 사회의 변화에 불과하고, 공원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도시의 발전을 견인하는 또 다른 혁신적 건물을 위한 희생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터, 공원과 같은 공공공간의 부재는 단순히 존재하지 않거나 그 규모가 작다는 의미를 떠나 여러 가지 사회적 장벽을 낳는다는 점에서 결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직관적으로 말하면 카페에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 바리케이드(Economic Barricade)가 세워진 셈이다. 돈을 지불해야 비로소 바리케이드를 넘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단지 쉴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을 뿐인데 어찌 된 일인지 경제적 부담이 점점 커진다. 그 내막을 살펴보니, 3고(高) 시대에 원가가 상승하자 저가 커피 브랜드들마저 너나 할 것 없이 커피 가격을 인상한다 13. 공익을 위하는 공공공간과 사익을 취하는 카페는 운영의 기반이 되는 자본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결국 휴식을 누리기 위해선 경제적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악순환이 조성됐다. 한편 이러한 구조에서 자유로워지기를 택한 카페 브랜드가 있다. 바로 스타벅스(Starbucks)다. 스타벅스는 제품을 구매하지 않은 사람들도 화장실 등 매장 내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타벅스의 매장 방침은 카페에서 경제적 바리케이드가 사라지게 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스타벅스의 방향성을 대다수의 카페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아울러 카페가 스타벅스와 같이 공공 친화적 방향성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 카페는 엄연히 개인의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공공공간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여유를 즐길 목적으로 카페를 이용하는 경향이 늘어난다는 점, 경제적 능력이 휴식을 향유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점은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부정적인 소외의 측면을 꼬집어 보여준다. 소외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멀리하는 일’이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돈의 유무가 출입 자격 요건이 되고, 이러한 구조에 부담을 느낀 사람들은 갈 곳을 잃은 이방인이 됐다.
Chapter 2.2
②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 인간성의 상실
공간에게 선택된 자
공공공간은 인간성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때 공공공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여가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공공공간은 향유하는 데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큰 핵심이다. 무료로 열려있는 만큼 경제적 여유와 세대에 제약 없이 누구나 모여서 누릴 수 있는 비배타적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공공공간은 각자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든 그 자체로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이 모여 꾸리는 사회의 특징은 그 사회가 자리 잡은 지역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썩 내키는 표현은 아니지만, 흔히 ‘부자 동네’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지 않는가? 이 지역은 고소득층이 모여 산다는 특징을 갖는다. 한 지역을 다른 지역과 구별하는 모습은 거시적 의미의 지역뿐만 아니라 지역 내 공간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지역을 구획할 때의 기준과는 다르게, 공간을 구획하는 기준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에도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끼는지의 여부로 나타난다. 공간이 사유재산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산물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는 휴식에 대한 장벽으로 변모하게 된다면 큰 문제가 된다.
타인과의 단절은 공간으로부터
현대 사회는 사회적 양극화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다.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의 확산과 알고리즘(Algorithm) 체제의 소통이 양극화의 증폭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필터 버블(Filter Bubble)’은 알고리즘과 양극화 사이를 연결하는 현상으로 주목된다. 검색 엔진과 소셜 미디어가 선별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인간은 그 정보에 갇혀 균형적인 정보 습득이 어려워진다. 자신의 의견과 상이한 의견을 접하지 못해 점차 맹목적 관점을 취하게 된다. 이 현상은 편 가르기와 배척이 난무하고 포용을 찾기 힘들어지는 사회 현상의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여유가 사라지는 사회의 모습은 비단 소셜 미디어의 확산만이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 글은 또 다른 원인을 공간에서 찾고자 한다. 공공공간의 부재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누구나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의 접근성을 제한하고, 이 장벽이 사람 간의 단절로 귀결되는 연결고리 말이다. 곳곳에 첨단과 심미를 겨냥한 크고 높은 건물이 들어서지만 정작 모두에게 열려있는 장소는 없다. 이는 자연스럽게도 인간에게 하나의 공간, 나아가 하나의 땅에 모두가 같이 살고 있다는 의식이 부재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일상에서 같은 학교, 같은 직장, 같은 취미, 같은 경제적 여건 등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교류한다. 공통점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상당히 적은데, 이는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가 한정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점차 공감과 이해의 폭이 좁아지는 대신 갈등과 마찰의 폭이 넓어지는 사회적 추세는 어쩌면 예견된 결과일지 모른다.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을 마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외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이다. 공간으로 인한 단절은 인간이 본질을 실현하는 데 어려움을 가져온다.
Chapter 3
국가가 만드는 지속 가능한 도시
공공공간은 단순히 특정 활동을 할 수 있는 수단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공간에 할당된 여가의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기도 하지만, 기능적 요소를 뛰어넘어 모두의 공존을 도모하는 사회적 역할도 수행한다. 그리고 국가는 사회적 역할을 성취할 수 있는 장소를 보급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시민들을 위한 궁극적인 복지이자 도시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정치국제학과에는 <글로벌시대의도시정치>라는 전공 강의가 있다. 도시 정치라니, 정치학도가 아니라면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분석의 단위를 도시로 상정하고 도시 내에서 일어나는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를 총체적으로 배우는 강의다. 도시가 단순히 국경 내에 존재하던 소극적 행위자에서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적극적 행위자로 변모함에 따라 중요하게 대두되는 도시의 역할에 대해 익히기도 한다.
강의에는 지속 가능성이란 용어가 녹아있다. 지속 가능성이란 특정한 과정이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지속 가능성을 도모한다는 건, 미래 세대를 위한 몫을 생각하면서 현세대의 수요를 충족하는 것이다. UN과 국제사회가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기 위해 표명한 17가지 목표인 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14에는 ‘SDG 11: 지속 가능한 도시와 공동체(Sustainable of Cities and Communities)’가 포함된다. 우리 함께 고민해 보자. 도시와 도시 속 공동체가 지속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선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가?
1차원적으로 생각한다면 도시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선 인구가 유출되지 않아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이 빠져나가는 도시는 활성화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을 유인할 수 있을까? 적어도 현재 도시에 자리 잡은 사람들에게 이 도시가 살 만하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할 테다. 사람들은 도시가 자신을 이방인으로 소외하지 않고 반겨줄 때 도시에 애착을 가진다. 즉,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도시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는 의미다. 내가 이 도시 어디에 있더라도, 길을 가다 다리가 아플 때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안도감을 준다. 결국 공공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현세대의 수요를 충족하는 목적만을 달성하지는 않는다. 도시의 지속 가능성을 도모하고, 도시 속 공동체가 건강하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토대로 기능한다.
재충전을 위한 모두의 공간
앞서 설명한 <글로벌시대의도시정치> 강의를 듣다 보면 도시라는 공간이 가지는 방향성에 따라 인간의 삶의 형태도 천차만별 달라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깊은 뜻 없이 누렸던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잘 조성된 공간과 환경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이 일상의 만족도를 매기는 데 큰 역할을 차지한다고 느낀다. 도시는 거주공간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거주 공간이라는 직관적 역할에서 확장된 또 다른 고차원적 기능을 담당하며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제고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잘 만들어진 도시에는 사람의 정체성이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공공간의 축소를 제물 삼은 도시의 발전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카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커피 한 잔을 즐긴 후 휴식을 즐기기 위해 카페를 벗어나 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 아침이 되면 노인들이 산책을 나오고 하교 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평범한 모습을 보면서, 벤치에 앉아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그런 일상을 원한다. 길을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높은 건물에 의해 숨이 턱 막혀도, 눈을 돌리면 잘 가꿔진 공원의 초록색 잎사귀가 나를 반겨주는 도시 말이다.
소외와 공존 속 우리의 발걸음
모든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다시 <혹성탈출>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에는 유인원과 유인원, 인간과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유인원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외와 공존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으로부터 소외됐음에도 인간과의 공존과 전쟁 사이의 선택에 있어 집단적 마찰이 일어나는 유인원의 모습, 범세계적 바이러스로 인해 소외하던 유인원들과 공존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우리의 사회도 <혹성탈출>만큼이나 입체적이다. 직접적인 대상이 되지는 않아도 국경 내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삶과 연계된다.
어쩌면 소외 속 공존과 공존 속 소외는 사라지지 않고 인류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이때 재생된다는 건, 특정 사안이 해결되어 자취를 감춘 것 같아도 머지않아 다른 사안으로 인해 다시금 나타난다는 의미다. 만일 이 가설이 맞다면 우리는 끝없는 범세계적 소외와 공존의 굴레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셈이다. 인류의 발전을 위한 기술의 진보가 역설적으로 인류의 자리를 위협하고, 새로운 사회를 기대하는 인류의 욕망에 부응한 도시의 발전이 정작 휴식의 여유를 앗아가 버린 현실 속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생을 도모할 수 있는 존재이며, 상생을 도모하고자 노력하는 존재다. 공존(公存)의 첫 번째 의미는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이 함께 존재하는 일’이지만, 두 번째 의미는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하는 일’이다. 단순히 한 공간에 함께 머물러 있는 병존(竝存)과는 다르게 서로서로 북돋고 잘살 방안을 꾀하는 것. 그것이 필연적인 소외를 겪는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감이지 않을까.
-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는 오뚝이의 형상을 한 러시아의 전통 인형이다.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들어 있고, 작은 인형 안에 더 작은 인형이 든 것이 특징이다. [본문으로]
- 리부트(Reboot)는 시리즈의 연속성을 버리고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글에 제시된 <혹성탈출> 리부트 버전은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 연합뉴스, “클라우드업체 드롭박스, 직원 16% 줄여… IT 업체 감원 지속”, 2023.04.28, 차병섭. [본문으로]
- CNBC, “Recent data shows AI jobs losses are rising, but the numbers don’t tell the full story”, 2023.12.16, Rachel Curry. [본문으로]
- 한겨레, “위조지폐 막는 워터마크, AI 가짜 이미지도 예방할 수 있을까”, 2024.02.19, 구본권. [본문으로]
- 한국경제, “내 만화 베꼈어요 …AI의 ‘데이터 탐욕’ 어디까지 갈까”, 2023.12.29. 고은이. [본문으로]
- 이데일리, “1년만 1542개 매장 늘린 저가커피 톱 4… 올해도 출점은 공격적”, 2024.01.18. 남궁민관. [본문으로]
- 건축기본법에 따르면 공공공간은 ‘가로·공원·광장 등의 공간과 그 안에 부속되어 공중(公衆)이 이용하는 시설물’을 말한다. [본문으로]
- 오마이뉴스, “예산 삭감, 1년에 신간 100권도 못 산다니… 문 닫으라는 건가”. 2024.03.15. 정민구. [본문으로]
- 부산일보, “녹지세 내더라도 부산 공원 지키자”. 2018.11.22. 이대진. [본문으로]
- 연합뉴스, “서울시민 67% 숲·산림 부족… 서초·노원 생태환경 우수”. 2019.05.13. 김지헌. [본문으로]
- 쿠키뉴스, “산책 준비만 걸어서 40분… 공원 없어 불편한 청년들”. 2023.06.12. 박은지. [본문으로]
- 3고(高) 시대란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시대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 SDGs는 2030년까지 인류의 보편적 문제(빈곤, 질병, 난민)와 환경 문제(기후 변화, 환경 오염, 생물 다양성 축소), 사회 문제(주거 환경, 고용)를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국제사회 공동 목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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