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장은진 수습위원 윤성빈
읽을 수 없는 사람들
이런 단일 토지세론보다 현대사회에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것은 그의 정치경제학 밑바탕에 흐르는 자연정의론적 세계관이다. 그가 정치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정치경제학에 있는 자유방임론적 요소를 상당부분 포기했을 것이다.···
경향신문 <노동 멸시 ‘탐욕 사회’ 미래는 없다> 기사 내용
다음 문장의 뜻을 유추할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썼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혹은, 문장 자체를 정확하게 해석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혹시 이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본인의 문해력을 의심하게 되는가? 부디 그러지 말길. 이 문장은 전문 용어가 몇 개씩 들어가 있어, 신문 기사라기보단 전공책에 등장하는 내용에 가깝다. 응당 신문 기사는 연령, 학력 등에 상관 없이 모두가 해당 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쓰일 필요가 있다. 신문기사는 전문 지식을 다루는 논문이 아닐 뿐더러 기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니까.
하지만 성인조차 해당 신문기사를 쉽게 해석해내지 못한다. 위와 같은 문장을 우리는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는 이런 글을 온전히 해석해내지 못하는 사람을 문해력이 부족한 자라 부른다.
최근 EBS가 게시한 ‘성인 문해력 테스트’가 화제를 모았다. 이는 작년 EBS 프로그램 <당신의 문해력+>에서 진행한, 성인들을 위한 두 번째 테스트였다. 해당 프로그램 소개말에는 해당 프로그램이 “어른들을 위한 문해력 처방으로서, 계약서나 업무 메일 등을 잘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기재돼 있다.
여기저기서 문해력 논란이라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 프로그램의 취지를 뒷받침해주는 근거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 사건들의 대표격인 ①사흘·나흘 논란부터 살펴보자. 때는 2020년 7월. 당시 광복절(8월 15일)은 토요일이었고, 이에 정부는 월요일(8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했다. 문제가 된 것은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사흘 간 연휴’라는 표현이었다. 사흘의 ‘사’를 숫자 4로 착각해 “왜 3일인데 사흘이라고 하냐”며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 것이다. 임시공휴일이 빚은 사흘과 나흘 논란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런가 하면, ②‘지대가 높다’의 ‘지대(地帶)’를 ‘매우, 엄청난’ 등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착각해 [1]무릇 ‘지대’란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한정된 일정 구역.’을 뜻한다는 열정적인 토론이 오가기도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③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에게 “너 이지적이다”라며 칭찬하자 학생이 ‘이지(理智)’를 ‘easy’로 받아들여 본인이 쉬운 사람으로 보인다는 뜻이냐며 불쾌해한 사건도 있다. 명일(明天)과 금일(今天)의 뜻을 모르는 요즘 세대에게 각박한 세상, 그 말미에는 항상 문해력이 원인으로 따라오곤 한다. “요즘 애들은 이 단어도 모르나?”, “요즘 애들은 이 정도 문장도 해석 못 하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비난의 화살을 책 안 읽는 요즘애들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우리가 십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심한 사과
그럼 과연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실제로 떨어졌는지 수치적 자료를 통해 살펴보자. 2021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전국 초중고교 교사 1천 15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4명이 "학생들의 문해력 수준이 70점대(C등급)에 불과하다” 고 답했다. 또, 2021년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21세기 독자: 디지털 세상에서의 문해력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만 15세(중3·고1) 학생의 순위는 최하위 집단으로 분류됐으며, 2018년 PISA의 비판적 문해력 부분에서 한국 학생 4명 중 1명 꼴로 정답인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바라보는 숫자의 결과, 그리고 사회의 시선이다. 방향을 좀 틀어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요즘 세대’의 시선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자. <중앙문화>는 대학생 5명을 대상으로 심층 취재를 진행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단과대학의 학생들로, 인문대, 사범대, 경영경제대(이하 경경대), 자연과학대(이하 자과대) 소속이었다. 5명에게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3명은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점에 대해 동의했다. 2명은 본인 주변에서는 문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했지만 최근 문해력 관련 논란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원인에 대해 묻자 대부분의 학생이 최근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유로 모두 인터넷의 보편화를 꼽았다. 김서연 씨(인문대, 20학번)는 “트위터나 인스타 등에서 글자 제한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점점 짧게 말하게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며 “이런 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이 짧은 글과 이미지에 익숙하게 되니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 씨(인문대, 20학번)도 SNS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이하영 씨(경경대, 21학번)도 “인터넷 때문에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졌다”며 “(그래서) 긴 호흡의 글을 읽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고 답했다. 신선은 씨(사범대, 21학번)는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한자 교육이 중점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렇듯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부족한 이유로는 모두 개인적 원인보다 환경적인 원인이 더 크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김서연 씨는 본인의 고등학교 시절 경험담을 언급하며 전자기기의 유무가 문해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설명했다.
김서연: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전자기기를 가지고 등교하지 못하는 규칙이 있었는데요, 휴대폰과 노트북, 태블릿PC가 없으니까 학생들이 알아서 책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고등학교 3년 간 읽은 책이 지난 인생 동안 읽었던 책을 다 합친 양과 맞먹어요. 그때 책 읽는 습관이 생겨서 대학교 가서도 책을 찾아 읽을 줄 알았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니(전자기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니까) 전공책 말고는 안 읽게 되는 것 같아요.”
한편, A씨(자과대, 18학번)는 “최근 갈등이 많은 사회가 된 것 같다”며 MZ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했다. 그는 “모르면 그냥 ‘모르는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이걸 문제 삼는 게 문제”라고 답했다. 서로 오해와 갈등이 쌓인 상태로,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빌미 삼아 비난하기 바쁘다는 것이다.
교육, 사회적 갈등, 시대의 변화… 막상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물어보니 모두가 원인을 책 한 줄 읽지 않는 젊은 세대에서 찾고 있진 않았다. 물론 그들 자신이 당사자이기에 이렇게 답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태껏 문해력 논란은 그 원인을 유희만 즐기는 개인의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그래왔기에, 우리는 그 외 다른 이유는 없는지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요즘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문제라고 혀를 끌끌 찰 수는 있지만, 그 이전에 환경적 요인을 고려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명징하게 직조하다, 무슨 뜻인지 몰라? 明澄하게 織造하다는 거지!
앞서 보았던 여러 수치적 자료에서 우리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말하고는 있다. 하지만 숫자 너머에 있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할 때가 있다. 본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 학생들의 문해력 수준이 낮은 이유는 그만큼 읽기 어려운 글이 우리 사회에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마디로, 글을 읽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글 자체가 더 잘 쓰이지 못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한때 논란이 됐던 한 영화 평론가의 <기생충>에 대한 한 줄 평이다. 이를 두고 “글쓴이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적합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며, 어려운 표현을 사용했다고 비판하는 쪽이 문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물론 “다른 단어를 쓸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썼냐”는 반대편 주장도 있었다. 여기서는 반대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는 경향신문 기고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명징’은 밝을 명(明)’자와 ‘맑을 징(澄)’ 자를 써서, ‘명료하게’나 ‘명확하게’보다 시각성이 강한 형용사다. 물이나 유리, 거울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이미지를 지닌다. 생각이 ‘명징하게 떠오른다’고 할 때 어울린다. ‘사유’나 ‘언어’와 같은 정신적인 의미를 지닌 명사를 수식할 때도 무난하다. 그러나 ‘직조(織造)하다’에는 섬유의 질감이 있다. 올과 올이 엮인 이 촉각적인 느낌은 투명하고 반짝이는 단어인 ‘명징하게’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명징하게 직조해낸’이라는 표현을 독자들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건 아니라는 거다. 그 문장 자체가 부적합하게 쓰였으니 말이다.
인문학이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를 다룬 책 <왜 읽을 수 없는가>에서 저자 지비원은 다음과 같이 꼬집는다.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글이 길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질책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오늘날 ‘뉴스’의 가독성을 생각하면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과 일정한 연령 이상의 노인은 사실상 똑같이 취급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들은 ‘독자 취급’을 받지 못한다.”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그래, 독자를 탓하지 말라는 것도 알겠고 우리 사회에 읽기 어려운 글이 많다는 것도 알겠다. “그럼 뭐 어쩌라는 거냐!”고 외치는 독자들에게 이어지는 글의 내용을 바친다. 우리는 두 가지 차원의 답변을 건네고 싶다. ①’사회 내 소통이 얼마나 부재한가’ ②’교육이 과연 문해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는가’이다.
작주에 송부한 편지글은 MZ세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세대’의 문해력 문제를 탓하기엔 문해력을 중시하던 시대보다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다. 글을 쓰는 플랫폼이지만 140자 글자 길이 제한을 두고 있는 SNS, 60초가 최대인 숏츠의 등장 등.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짧게 변화해 왔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긴 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짧막한 정보의 호수 속이다. 이미 우리는 이런 세계에 익숙하다. 무언가를 읽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익숙한 지금.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었다.
지금의 문해력 논란은 ‘아날로그’ 기성 세대가 ‘디지털’ 젊은 세대에게, 문해력이라는 구시대의 가치를 강요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디지털 환경을 잘 활용하고 해석해내는 능력은 젊은 세대가 더 뛰어나다. 특히 한자어를 모르는 디지털 세대를 질책하는 것은 두 세대 간 소통의 단절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중앙대학교 국어국문과 이경수 교수는 “한자어의 경우, 세대에 따라 사용 빈도에 차이가 있어 젊은 세대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이어, “다른 세대의 언어에도 익숙해질 수 있게 서로 소통이 잘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문해력 관련 논란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며 소통의 부재를 문해력 논란의 원인으로 짚었다. 다른 세대끼리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낯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해결책은 서로의 언어를 들여다보고 소통함으로서 각자의 언어에만 갇혀있지 않는 것이다.
지대 높은 곳에 답이 있는 게 아니야, 소통이 답이지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자들은은, 비단 ‘한자어가 익숙하고 책을 읽으며 자라온 윗세대’만이 아니다. 문해력 논란으로 비판 받고 있는 MZ세대들 중에서도 본인이 쓴 글을 의도한대로 해석해주지 않으면 그에 대해 문해력이 떨어진다며 비판, 심지어는 조롱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엘리트주의[2]와도 맞닿아 있다. 본인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는 오만함과 우월감이 조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독자가 모르는 단어를 글에 사용하거나 독자의 입장에서 문맥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왜 이리 어렵게 썼냐”며 글쓴이를 비판하기 일쑤다. 중앙대학교 다빈치 교양대학 최유숙 교수는 “어종과 무관하게 일상에서 사용 빈도가 높지 않은 어휘를 젊은 세대가 모를 수는 있다”면서도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이나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런 태도는 본인이 알고 있는 단어나 문장이 다른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여지를 아예 제거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단절이라 볼 수 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쁜 현대 사회에서 남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소통의 부재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본인의 기준으로 확정짓고, 규단하는 것. 소통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표현인 것이다.
문해력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에 따라 디지털 문해력(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이 중요해졌다.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는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미디어가 전달하고 있는 정보를 읽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며, 평가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3]을 말한다. 하지만 결국 디지털 리터러시의 기본이 되는 것 역시 언어를 읽고 이해하는 ‘일반 문해력’이다. 미디어 속에 숨겨진 텍스트를 찾아내고 이미지와 엮어내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적 측면에서 청년층의 문해력 저하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청소년기에 받은 교육을 짚어보아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청소년의 문해력은 잘 길러지고 있을까? 아니 애초에 문해력을 기를 시간이 제공되기는 했을까?
문해력의 정의를 먼저 내려야 할 것 같다. 문해력은 영단어 ‘literacy’의 번역어인데, 그 의미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며, 포괄적이다. 굳이 따지자면 문해력은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 개념을 넘어 글을 읽고 맥락을 파악해 단순한 활자 이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복잡한 사회적 환경과 상황 속에서 그 본질을 알아낼 수 있는 것[4]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해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 독서와 글쓰기 교육 등이 국어과에서 다루어진다는 것 때문에 문해력 교육은 국어 과목에 한정된다는 오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해력을 기르기 위한 과목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무엇이 틀렸는지 판단하는 능력, 배경 지식과 글을 연결하는 능력 등도 문해력의 구성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5]
고등학교 생활을 돌이켜보자. 대부분의 학교는 아침 9시가 되면 1교시를 시작해 오후 4시 정도가 되면 수업이 끝난다. 만약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면 저녁 9시(혹은 10시)가 돼서야 하교를 했을 것이다. 적어도 7시간, 많게는 1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학교에서 무엇을 했느냐 묻는다면, 어렵지 않게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를 했노라 할 수 있다. 으레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추는 그런 공부 말이다.
대학 입시에서 문해력을 평가는 방법으로는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과 논술시험이 있다. 이경수 교수는 “비문학과 논술시험은 가능한 한 문해력을 잘 평가해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일회성으로 치르는 시험이다 보니, 글을 읽고 생각하고 이를 정리해 공유하는 일련의 과정을 평가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비문학과 논술을 가르치고 이를 공부하는 것이 문해력을 높이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은 될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청소년이 충분한 문해력을 갖추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실제 교육 현장은 읽고 쓰는 것 보다 보기를 읽고 정답에 가까운 대답을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해력 향상은 누구의 과제?
청소년의 문해력 저하, 문해력 교육 부족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문해력 향상을 위한 노력에 시간을 쏟지 않는 청소년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교육 현장에서 문해력 교육을 뒷전으로 하는 교사의 잘못일까? 교육과정 상에 전반적인 문해력 교육에 대한 내용을 넣지 않은 정부의 잘못이라 볼 수도 있겠다.
청소년 스스로 문해력의 필요성을 느낄지라도 교육의 도움 없이 문해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이하영 씨는 “스스로의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나,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학창시절을 회상했다. 수행평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대학수학능력시험 등 당장 눈앞에 중요한 일들이 가득인데, 어디 책을 읽고 감상에 젖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겠는가? 청소년들에게 스스로 시간을 내 다양한 글을 읽고 문해력을 갖추도록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의 잔소리이다.
그럼 교육 현장의 교사들을 살펴보자. 교사들이 문해력의 중요성을 모르고, 가르치고 싶지 않아서 문해력 교육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야말로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를 직접 체험하며 느끼고 있다. 과목과 관계 없이 현장에서 문해력 교육에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저서가 출판되고 있고, 특히 국어과에서 문해력을 향상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6]. 다만 현행 교육 과정을 잘 지도하는 것 역시 그들의 책임 하에 있고, 교과서 밖에서 읽기나 작문 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적 가이드 라인이 부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워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정부다. 문해력 교육을 위해 정부는 어떤 교육 정책을 만들고 있는지 살펴보자. 최근 교육부에서는 2022 개정 교육 과정에 대한 토의가 진행됐다. 여기서 정부는 문해력 교육 강화를 위해 초등학교 1,2학년의 국어교육 시수를 늘려 기초 문해력 교육을 강화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참여소통채널’에 올려진 2022 개정 교육과정 국어과 관련 내용에는 “한 권의 책을 완독”하는 현행 교육과정의 ‘한권 읽기’와 관련된 내용이 빠져있다. 문해력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관련된 교육과정을 추가하지는 못할망정, 문해력 학습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독서를 교육 과정에서 제외한 것이다.(심지어 ‘한 권 읽기’는 교사들 사이에서 호응이 좋았던 교육 정책이기도 하다[7]) 2019년 발표한 ‘제3차 학교도서관진흥기본계획’에서 사서교사 배치율을 2030년까지 50%로 확대하겠다고 했으나, 2023년의 사서교사 정원 확대 계획도 없다. 교육과정에서 문해력 관련 활동을 제외하고, 교육환경에서 문해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사 확대에 대한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서 단순히 국어과의 시수만 늘리며 문해력 교육에 힘쓰고 있다고 말하는 행보는 관련 교육정책의 발전이 아니라 퇴보에 가깝다.
이경수 교수는 “시험을 보는 기술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읽고 생각하고 쓸 수 있게 하는 교육,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 소통하고 토론하고 생각과 재능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고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문해력 교육 과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글을 읽고, 사유하고, 쓰면서 토론으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뻔하지만 필요한.
앞서 우리는 문해력 논란의 본질과 그 원인에 대해 소통의 부재, 교육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각 측면의 해결방안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어떤 결정이건 우리 스스로 내릴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며, 만약 누군가가 우리의 틀린 점을 바로잡아 주거나, 틀렸다고 말하거나, 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면, 부지불식간에 그 사람에게 짜증을 내고 만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들이 개인들끼리 주고 받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특성이 돼버린다면 그 사회는 위험해진다.
-톰 니콜스, 『전문가와 강적들 (나도 너만큼 알아)』
문해력을 빙자한 조롱과 비난이 난무하는 사회. 소통이 부족한 사회. 이를 해결할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그 답은, 소통을 하는 것에 있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은 어떤지도 귀 기울여 들을 준비를 하는 것. 서로의 언어가 다름을 인정하고 인지할 것.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할 것. 모두 소통을 위한 준비 운동이다. 또 다른 해결책으로는 최유숙 교수가 제시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①무엇에게서든 누구로부터든 배운다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것.
②쟁점이 있는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보는 것.
“문해력을 본인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조롱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거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수용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수용의 자세가 없다는 것은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부끄러움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내가 그걸 모르는 게 어때서!’가 아니라 무엇에게서든 누구로부터든 배운다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면 어떨까 합니다. ··· 상대의 입장이 돼 보는 방법 중 하나는 쟁점이 있는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보는 것입니다. 흔히 ‘논증’이라고 알려진 이 방법은 항상 반론을 고려해야 하므로 어떤 사안에 있어 나와는 다른 입장을 검토하고 종합적으로 사고할 기회를 줍니다. 이것이 ‘논증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말이 있는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최유숙 교수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우리 모두 한 번씩만 다시 생각해보는 것. 뻔하지만 이게 정답이다. 문해력을 평가하기 전에 상대방의 의도를 살펴보자.
이처럼 문해력 부족은 소통의 부족과도 맞닿아 있다. 이는 문해력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소통하기 위한 능력이라는 증거이다. 그래서 교육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브라질의 비판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리터러시를 정의할 때 늘 ‘단어 읽기와 세상 읽기(reading the word and reading the world)’라는 대구적 표현을 사용했다고 한다[8]. 글을 읽는 것의 목적은 세상을 읽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남이 정한 정답을 찾아내는 교육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하고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 과정은 청소년에게 단순한 글을 넘어 세상을 읽을 방법을 습득할 수 있는 문해력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글을 읽는 것’은 문해력 향상의 첫번째 단계이고, ‘글을 쓰는 것’은 두번째 단계이며, ‘글을 나누는 것’은 높은 문해력을 향한 마지막 단계이자 함께 살아가는 것의 시작이 될 것이다. 다양한 글을 읽을 수 있는 시간.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글로 써낼 수 있는 시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학교에서 주어질 때, 청소년은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문해력을 지닌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문해력 교육은 여유 없는 사회에서 소통의 의지를 갖게 하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 소통의 의지가 상대방의 마음 한 켠에 따뜻함과 여유를 가져다줄 수 있다.
[1]본인이 “지대가 높아서”라고 하자 상대방이 “아무리 그래도 선배에게 지대는 좀..”이라 답한 카카오톡 채팅방 캡처본을 SNS에 올린 사건을 말한다.
[2]소수에 의해 다수가 지배를 받는 것. 네이버 지식백과.
[3]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 공식 블로그, “핀란드의 사례로 보는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요성”, 2022.12.04.
[4] 네이버 지식백과, “리터러시”, 2022.12.07.
[5] EBS 클래스e, 조병영의 <당신의 문해력, 리터러시>
[6]한 학기에 책 한 권을 다 읽고 의견을 교환하는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업이 많은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서울특별시교육청은 교과 기반 독서 기반 프로젝트 수업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다. 최근 초등교사들 사이에서는 그림책을 활용해 문해력을 높이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다. - 지금 서울교육, “교육 현장에서 바라본 디지털 시대의 문해력”, 2022.10.
[7]국어교사 김진영 씨는 개인블로그에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교육 현장에서 주제 수업을 할 수 있게 했으며, 프로젝트 수업이 학교 현장에 정착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국어 교사 이현주 씨 역시 개인블로그를 통해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통한 책 깊이 읽기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이해할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외에도 ‘한 학기 한 권 읽기’의 현장 유용성을 말하며 2022 교육과정에서 이가 제외되는 것을 반대하는 많은 국어교사의 글을 찾을 수 있다.
[8]조병영, 『읽는 인간 리터러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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