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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22 가을겨울, 83호<현현; 사람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이 글이 전보가 된다면, 당신의 안녕을 묻고 싶다

by 중앙문화 2022. 12. 26.

허태준

의도적으로 분리되는 가치

 

최근 ‘MZ 세대의 직장 생활이라는 제목의 영상 콘텐츠에서 출근 시간에 딱 맞춰 회사에 오는 신입사원 이야기를 봤다. 출근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는 신입사원에게 대리급 직원이 핀잔을 주는 식의 내용이었는데, 대리급 직원이 일찍 와서 일할 준비도 하고 주변 정리도 하는 게 어떠냐?’고 하면 신입사원이 능글맞게 일찍 출근하면 일찍 가도 되냐?’고 맞받아치는 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우습게 상황을 묘사한 영상과는 달리, 댓글에는 제법 진지한 토론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찍 출근한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아무 문제없다는 의견부터 그래도 불편한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꿋꿋하게 맞춰서 출근할 이유가 있느냐는 중립적인 의견도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달랐지만, 대부분은 정시 출근 자체는 문제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 저 상황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는 정시를 맞춰 출근하는 신입사원의 태도가 아니라 업무 준비 시간을 업무로 여기지 않는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와 업무 준비는 분명 연결되어 있음에도 이를 의도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행위 말이다. 이를 통해 업무 준비라는 과정은 월급을 받지 않아도 되고, 적당히 눈치껏 해야 하는 가치 없는 시간으로 쉽게 규정됐다. 업무 준비 시간만 그럴까. 의도적으로 분리되고 제외되는 가치는 우리의 삶과 정말 무관할까.

 

 

안전을 논외취급하는 사회

 

나의 첫 직장은 황동 밸브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맞은편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던 나와 몇몇 직원들은 매일 업무시간보다 15분 일찍 출근했다. 우리가 유달리 근면성실한 직원이라 그랬던 건 아니고, 정해진 시간에 체조 방송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학교 체육 시간에나 들을 법한 국민체조 방송이 나오면 미리 출근해있던 직원들이 각자 맡은 기계 앞으로 나와 이리저리 몸을 돌렸다.

간혹 늦잠을 자서 미리 자리에 있지 못하면 반장님들이 눈치를 주거나 따로 불러서 한소리를 하기도 했다. 래퍼토리는 대개 비슷했다. 우리는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미리 몸을 풀어놓아야 한다거나, 덜 깬 잠을 쫓아내고 정신을 차릴 수 있으니 꼭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중에서 유독 강조하는 건 체조를 해야 다치지 않는다는 거였다.

공장이라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자주 위험에 노출됐다. 다루는 기계도 금속을 가공하는 것이니 크기부터 달랐다. (chip)이라고 부르는 날카로운 가공 부속물이 공장 바닥 곳곳에 흩어져 작업화 밑창에 박히기도 했다. 기계에 들어가는 원자재나 기름 등을 옮기는 작업도 자주 했는데, 아무리 전용 대차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상당한 무게를 버텨야 했다.

반장님들이 체조를 중요시 여기는 이유도 마냥 그들이 틀딱이라서나 괜한 꼰대 짓은 아니었다. 많게는 10년 넘게 현장에 있던 반장님들은 안전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배웠을 것이었다. 크고 작은 사고를 겪으며 몸을 충분히 풀고 잠을 깨우며 업무를 준비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체조는 혹시 모를 사고에 대해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유용한 대응책 중 하나였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고, 괜히 눈칫밥을 먹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매일 착실하게 15분 일찍 출근해 체조를 했다. 하지만 해소되지 않는 불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건 단순히 급여를 받지 못하는 15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작업자의 안전과 능률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는 과정이 업무로 인정받지 못한 채, 자꾸만 논외로 분리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안전이 분리된 자리에 남은 얼룩

 

내가 다녔던 회사가 유독 열악했던 게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안전에 충분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기는커녕, 그것을 급여를 지급할 가치 없는 일로 취급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안전 관리를 위해 시행되는 수리·점검 과정은 불필요하거나 최소화해야 했고,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조치·교육은 존재 자체가 손해인 시간으로 여겨졌다. 업무의 밖으로 밀려날수록 안전은 점점 모호한 것이 됐다. 누군가 책임질 필요도 없고, 관리할 필요도 없는, 적당히 눈치껏, 개개인이 알아서 챙겨야 하는 무언가가 됐다.

문제는 안전이 논외가 될수록,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사고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산업재해라고 부르는 사고의 정의는 근로자가 업무에 관계되는 건설물·설비·원재료·가스·증기·분진 등에 의하거나 작업 또는 그 밖의 업무로 인하여 사망 또는 부상하거나 질병에 걸리는 것을 뜻했다. 설명에서도 명시하고 있지만 산업재해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업무 연관성이었다.

10월 평택 SPL 제빵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숨졌을 때, 그는 21조로 해야 할 소스 교반 작업을 혼자하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재료를 가져와 교반기에 넣는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구분하지 않으면 일을 마무리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 구조에서 작업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체조를 열심히 하거나 정신을 바짝 차리는 정도였을 것이다.

SPL은 사고가 난 기계를 헝겊으로 덮어두고 공장을 계속 가동해 국민적인 분노를 샀다. 노동부가 9대의 기계 중 7대에만 작업중지명령을 내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어쩌면,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기업에게 노동자의 죽음은 얼룩에 지나지 않으니까. 빨리 닦아버리고 작업을 이어가는 게 효율적이니까.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하는 안전은 그저 급여를 지급할 가치 없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치지 않고 일하는 것은 눈치껏 알아서 챙기는 무언가가 아니라 노동자가 정당하게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였다. 그 권리가 지켜지지 않을 때 사고는 일어났다. 21조 작업 수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안전 장구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을 때, 작업자의 수리 요청을 거부하거나 무시했을 때, 선임자가 부재했을 때, 처음부터 자격이 없거나 작업을 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무리한 작업지시를 했을 때. 그 모든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업무와 안전을 강제로 분리하기를 강요받았다. 정해진 매뉴얼과 규칙이 부재한 업무에 투입되었고, 그로 인해 위험에 노출됐다.

하지만 개인의 책임은 업무와 안전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그 말은 마치 노동자가 체조를 하지 않아서 죽었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결코 죽을 리 없는 공간에서 죽을만한 짓을 했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업무와 분리되고, 환경과 분리되고, 직장 내 분위기나 관계와 분리되고, 업무 시간과 노동 강도와 분리된 죽음은 멀끔한 백지 위에 엎어졌다.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한 채 버려진 안전이란 단어는 사어(死語)였다.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죽음과 나란한 얼룩이었다.

 

 

죽은 단어가 만드는 세상

 

2022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안전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가장 중요한 건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는 일이었다. 중대재해에 대한 경영자의 책임을 명문화하며 경영과 안전이 분리되지 않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전히 안전은 죽은 단어로 남아있다. 공사장 현판에 적힌 안전제일이란 단어를 보며 누구도 안전을 제 1로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안전은 (노동)’에 포함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초기부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해 경영 의지를 위축시키는 강한 메시지를 주는 법이라며 고쳐야 한다고주장하기도 했다. 622일 원전산업 협력업체 간담회에서는 전시엔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현재의 원전 업계가 전쟁터와 같다는 점을 강조하며 언급된 말이었다. 안전은 관료적인 것이며, ‘버려야 하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메시지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모든 게 개인의 책임이 되는 세상에는 죽어도 되는 이유가 널려 있다. 작업자가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처음 하는 일이 서툴고 실수가 잦아서 죽어도 된다고 말했다. 때로는 공부를 못한 게, 좋은 직장에 가지 못한 게, 대학을 가지 않은 게, 현장에서 일하는 게,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게 그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가 15분 일찍 출근하지 않았거나 체조를 게을리했다면, 그것도 충분히 죽어도 되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단어가 만드는 세상이라는 건, 비단 산업현장이나 공사장, 원전 업계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전이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되는 세상은 당장 우리의 주변에도 있을지 모른다. 그건 운전하기로 선택한 도로일 수도 있고, 계약하기로 선택한 전셋집일 수도 있고, 자신이 들어가겠다고 선택한 대학이나 직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밤거리일 수도 있다.

1029일 이태원 밤거리에서 158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국가의 책임과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 반대편에는 개인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가 있었다. 그들은 마치 죽어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듯이 말했다. 치기 어린 젊은이들이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외래문화를 즐기고, 밤늦게 술이나 마시며 놀고 싶어서, 뻔히 사람 많은 곳으로 기어 나온 것이 모두 죽어도 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 모습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어디선가 지켜지지 못하고 죽어버린 단어가, 이제는 우리 모두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안전개인의 책임으로 바뀌더니, 금방 죽어도 되는 이유가 되어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의 일상은 이미 전시와 다름이 없을지도 몰랐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안전은 각자가 담보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협박하는 사람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칼을 들어야 했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를 섣불리 악마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삶을 죽음과 완전히 분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당장 나의 마음과 현실의 평화를 원하는 유약한 개인일 것이다. 어쩌면 정시 출근에 문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편한 시선을 감내하고 싶지 않아 일찍 회사에 도착하는 평범한 청년일지 모른다.

하지만 분리는 잠시의 평화를 줄 수는 있어도 결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로 인해 생겨난 죽은 단어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 것이다. '죽어도 되는 이유'을 인정하는 건, 어떤 삶을 돌보거나 지킬 필요가 없다는 선언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사랑하는 삶을 평생 동안 기준 미달의 공포로 채우게 될 것이다.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조롱당하지 않기 위해 남은 삶의 전부를 소비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전쟁은 멈추지 않고, 이 사회는 영원히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연결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이 경영자의 업무와 안전관리 책임을 연결한 것처럼, ‘10.29 참사(또는 이태원 참사)’가 사회 지도층의 책임과 국민의 안전을 연결한 것처럼, ‘spc 불매 운동이 노동자의 안전과 소비자의 윤리를 연결한 것처럼, 폭력적으로 분리되어 오던 단어를 본래의 의미로 회복해야만 한다. 노동이나 인권, 평등이나 자유 같은 단어도 이러한 방식을 통해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어떤 단어들은 존재 자체로 우리의 삶을 지켜낸다. 그건 조건 없이 삶을 보호하고 돌보고자 하는 합의였다. 왜냐면 살면서 개인이 온전히 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건 사실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고 끌려가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15분 일찍 출근할지에 대한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결정조차도 주변의 분위기와 눈치를 살펴야 하는 구조가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모든 게 '선택'이 되고, '죽어도 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

그러니 이 글이 전보가 된다면, 나는 당신의 안녕을 묻고 싶다. 당신이 서 있는 일상은 정말 안전한지, 어떤 폭력과 강압으로 안전이 분리된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 당신의 삶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어떤 종류의 삶이 그 자체로 지켜지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죽어도 되는 사람 같은 건 없다. 마지막 합의가 무너진 자리에 얼룩처럼 남은, 철저하게 분리되고 배제된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낙인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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