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문민기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아마 물음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분들이 계실 것이다. 대학이 추락한다니? 우리가 알던 대학은 마치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중고등학생 시절 우리는 ‘천상세계’에 들기 위해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를 마법 주문처럼 외며 참고서를 넘기기 바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인생의 모든 고민이 절로 해소되는 줄만 알았다. 그만큼 대학이라는 기관의 위상은 배치표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전반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랬던 대학이 추락하고 있다니, 믿기 어려울 것이다.
대학의 추락은 단순히 입시 결과나 서열의 하락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학문 공동체인 대학이 교육의 본질을 망각할 때, 더 이상 공동체 구성원이 공동체에 효용을 느끼지 못할 때, 그것을 추락이라 부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를 암시하는 단서를 가까이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년간 모든 학사가 온라인으로 이어졌음에도 왜 등록금은 제값을 받는지, 강의 질은 왜 도리어 나빠졌는지 학우들의 불만이 거셌다. 많은 대학은 학생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한창 선거 유세로 떠들썩해야 할 캠퍼스가 정작 성사된 선거가 없어 고요에 빠진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무엇이 대학을 추락하게 만드는가?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의 저자 김창인·이동현·고준우는 크게 대학 기업화와 학벌주의, 그리고 위기의 학생자치를 지목하고 있다. 시장 논리에 목을 매는 대학, 차별의 가늠자가 된 대학, 자치와 연대가 무너진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의 상아탑도, 지성인의 요람도, 안전한 공동체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무너지는 대학에 맞서 저항하고 의문을 던지며 가능성을 환기해왔다. 저마다의 경험 속에서 대학 현장의 위기를 날카로운 분석으로 엮어냈다. 그들의 문장 속에서 우리는 대학의 날개 없는 낙하를 엿볼 수 있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 주객전도(主客顚倒)
책의 첫 장을 쓴 김창인 씨는 2014년에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자퇴했다. 그는 영신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퇴 선언문을 낭독하고 캠퍼스를 떠났다. 선언문의 제목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 정의가 없는 대학은 대학이 아니기에>이었다. 김창인 씨의 자퇴는 당시 대학 사회에 적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그를 자퇴하게 했는가? ‘정의가 없는 대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학이란 무엇일까? 21세기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 ‘대학 기업화’ 현상을 들춰보았을 때 물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대학 기업화는 말 그대로 대학이 기업을 닮아간다는 뜻이다. 김창인 씨는 세 가지 측면에서 대학 기업화를 제시한다.1) 첫째, 대학이 기업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대학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는 ‘교육’이고 이는 공공성을 가진다. 통념상, 법률상2) 그러하다. 대학이 경영 활동으로 얻은 수익은 원활한 교육 활동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수단이 목적을 앞지르게 되는 순간, 비용 최소화·이윤 극대화를 본령으로 삼는 기업과 대학의 경계선은 모호해질 뿐이다. 둘째, 대학을 사유재산으로 소유할 수 있는 개념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대학은 비영리 기관으로 매매·인수·합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국·공립대학은 물론 민간이 세운 사립대학도 마찬가지다.3) 그런데도 대기업과 사학족벌이 편법적인 방법으로 대학을 사유화해 움켜잡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이다. 셋째, 대학을 기업이 요구하는 자본주의형 인간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학이 진리탐구의 장이 아닌 취업양성소로 전락했다는 자조적 평가는 이제 식상하게 들릴 정도다. 장기 불황과 취업난이 덮친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은 의무교육–고등교육-산업현장으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의 충성스러운 중간 부품으로 축소됐다는 해석이다.
우리가 대학을 다니며 느낀 크고 작은 불편은 대학 기업화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대싸강 시대’에 학교 다니기 편해졌다고 하지만, 정작 듣고 싶은 강의를 수강신청 하는 건 더 어려워졌다. 많은 대학에서 개설 강좌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수업 정원은 반대급부로 불어났다. 늘어난 강의 부담으로 교수자가 양질의 교육을 담보하기란 어려워졌다. 이른바 ‘강의 대형화’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름 아닌 비용 절감과 이윤 추구에 있다.4) 대학은 최근 시행된 ‘강사법’5)을 빌미 삼아 교원 감축에 열중이다. 교원 결손으로 인한 학습권 침해는 고스란히 학생에게 돌아왔다. 대학 기업화의 가장 만만한 타깃은 아이러니하게도 교육이었다.
비단 강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을 닮은 대학은 수익성을 위해서라면 학과 통폐합, 입학 정원 조정, 캠퍼스 매각으로 대표되는 ‘구조조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학생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학내 노동자에게도 이런 일터는 악몽이다.6)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놀랍게도 불과 몇 년 전 중앙대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다.7) 사실 오래전까지 거슬러 갈 필요도 없다. 지난해 대학가를 휩쓴 ‘포스트코로나’, ‘뉴노멀’, ‘언택트’ 대학 담론 역시 멋들어진 미래지향적 언어로 포장돼있지만, 본질은 재난 상황을 틈탄 학문의 기업식 경영이었다.8)
이처럼 대학 기업화는 대학의 학교다움을 앗아간다. 학생은 교육받을 권리를, 교수자는 교육할 권리를, 노동자는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잃는다. 배움터 아닌 배움터에서 교육의 본질을 찾기란 난망한 법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대학이 항상 자본의 휘하에 있던 건 아니었다. 중세시대 학생들의 자생적 조합으로 시작한 대학은 근대에 들어 국가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대학은 공공 영역에 편입돼 공적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20세기 전후(戰後) 사회를 덮친 신자유주의 광풍은 대학에 시장 문법을 강요했다. 한국에서도 민주화 이후 도입된 ‘대학설립 준칙주의’9)는 대학에 무한경쟁을 부추겨 고등교육을 노골적으로 시장화했다.10) 우리가 보고 느끼는 요즘의 ‘대학’은 민영화된 고등교육의 산물이다.
물론 대학에 손해 보는 장사를 강요하는 게 아니다. 대학이 속세를 벗어나 영적(靈的) 존재로 변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포인트는, 대한민국 대학이 언제부터 본연의 임무를 잊고 이윤에 충성하는 영리조직이 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토의가 없는 대학은 추락을 면하기 힘들다. 돈과 앎의 ‘주객전도’가 일어난 대학, 이것이 김창인 씨가 말한 ‘정의가 없는 대학’이다.
[학벌론] 왜 어떤 ‘과잠’은 선망의 대상일까
길거리에서 ‘과잠’ 입은 사람을 지나칠 때 힐끗 뒤를 돌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호기심에 교명이 새겨진 자수를 응시하고 있노라면 자신이 속한 대학보다 ‘높은’ 학교일 때 뭔지 모를 기시감을, ‘낮은’ 학교라면 은연중에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개인에게 주는 효용을 따진다면 어느 대학의 점퍼이던 같은 가치를 가진다. 등에 ‘Chung-Ang University’가 새겨져 있던, ‘Seoul Nat’l University’가 적혀있던 밖에서 입었을 때 따뜻한 건 매한가지다. 그런데도 어떤 ‘과잠’은 선망을 사기도,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를 두고 ‘과잠의 사회학’이라는 개념이 생겨날 정도로 학과 점퍼는 단순한 의복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됐다. 4만 원짜리 외투에 붙은 부가가치, 바로 ‘학벌’이다.
학벌은 대개 ‘특정 학교 출신이라는 친분으로 구성된 인적 네트워크로’ 정의된다.11) 예컨대 중앙대학교를 졸업한 A 씨가 중앙대 출신의 직장상사를 만나 승진에 도움을 받는다면 이는 학벌이 작용한 케이스다. 만약 직상상사가 타 대학 출신임에도 A 씨의 승진에 힘을 실어줬다면, 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경우도 학벌이 작용했다고 으레 말하지만, A 씨와 직장상사는 서로 다른 대학을 나왔으므로 엄밀히 말해 중앙대라는 인적 네트워크가 작용할 수 없다.
[학벌론]을 집필한 이동현 씨는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학벌’과 ‘학교력’을 구분하여 제시한다.12) 학교력은 “특정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일컫되, 당해 사실이 어떠한 능력·계급·신분 또는 그 밖의 것의 상징으로서 사회적으로 통용”된다. 직장상사와 A 씨가 동문은 아니지만, A 씨가 중앙대를 졸업한 사실만으로 사회에서 ‘보다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기에 직장상사는 A 씨의 편의를 봐주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이동현 씨는 현대 한국의 학교력이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사회적 믿음”이라고 말한다.13) 사회 구성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즉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시작하면 학교력을 언제든지 걷어낼 수 있다. 하지만 대학 간판에 따른 능력주의적 분배14)가 공공연히 이뤄지는 사회에서 학교력은 정당화되고 재생산되기에 존속할 수 있다.
위 도표는 학교력의 믿음 체계를 보여준다.15) 개인의 능력은 대학 입학시험으로 정량화되고, 각자의 성취도가 모여 ‘입결’을 형성한다. 입결의 높고 낮음은 특정 대학의 학교력을 증명하는 척도가 되며, 사회적 자원을 차별적으로 배분하는 능력주의 기제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믿음은 개개인을 다시 높은 학벌로의 경쟁으로 몰아가 학교력을 재생산한다.
그림이 그려지는가? 한국 사회에 대한 학벌, 학교력의 지배는 스스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위세를 뽐내고 있다. 이들의 폐해는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모두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학벌주의를 대하는 많은 이들의 자세는 ‘차별은 나빠’와 ‘잘난 체하지 마라’ 사이 어딘가 즈음에 있다. 하지만 학벌주의는 개인 간의 ‘도토리 키 재기’에만 그치지 않기에 심각성은 배가 된다. 학벌주의에서 시작한 고민은 대학의 본질은 물론 입시, 초중고 교육, 청년·청소년 정책을 거쳐 사회 전반으로 퍼질 수밖에 없다. 허나 이들에 대한 논의는 간데없고 오직 간판만 남아버린 대학은 머지않아 내리막길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학생회의 위기를 넘어] 무너지는 자치, 사라지는 공동체
흔히들 ‘정치는 삶’이라 한다. 일상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정치 과정에 주권자로서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가 TV에 나와 투표를 독려하고 인증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반면 학생사회의 정치인 ‘학생자치’는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학생자치가 학생들과 무관해서가 아니다. 학교 바깥의 정치처럼 학생사회에도 유권자가 있고, 그들의 총의를 대표할 정치기구와 투표 절차가 보장돼 있다. 그런데도 학생자치가 전례 없는 위기 앞에 놓인 까닭이 무엇일까.
OO대학교 총학생회는 요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학기 등록이 끝났지만 학생회비가 충분히 납부되지 않은 까닭이다. 저조한 학생회비 납부율에는 1학기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과 불만이 반영된 것 같다. 총학생회 깃발을 들고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것도 문제가 됐다. OO대학교 학생들을 대표한다는 총학생회가 (...) 대학 안의 문제에만 신경 쓰면 되지 왜 사회문제에도 자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는 일각의 비난이 거세졌다. 이래서는 당장 이번 선거가 걱정스럽다. (...) 학생들의 총학생회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이 심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논란이 불거진 올해에는 (...) 비상대책위원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상대책위원회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사라졌다는 과/반 학생회들을 생각하며 총학생회장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119쪽~122쪽. |
위 이야기는 저자 고준우 씨가 상정한 어느 가상 대학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허구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OO대학교의 학생자치는 현실과 닮아 있다. 당장 중앙대학교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해 서울과 안성캠퍼스의 총학생회 선거는 파행을 면치 못했다. 서울캠퍼스는 입후보한 예비 선거운동본부(선본)가 자격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16) 선거가 무산됐다. 안성캠퍼스는 <라이트> 선본의 등록으로 선거가 진행됐으나 빈약한 공약과 주먹구구식 공청회, 후보자 자질 논란17)으로 에브리타임발 ‘낙선 운동’이 힘을 얻기도 했다. 이미 기층 단위에서는 선거 무산과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구성이 일상이다.
고준우 씨는 현재 학생회의 위기를 “대표성과 효용성의 약화가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면서 학생들의 탈주체화(탈정치화)를 부추기는 상황”으로 진단했다.18) 학생자치의 중심에는 학생회가 있다. 학생회는 대학사회의 공론을 이끌고 대변하는 대표성, 주권자(학생)의 의사를 실행으로 옮기는 효용성을 갖춘 정치적 주체다. 실제로 이 두 영역은 밀접히 연결돼있다. 학생들이 학생회가 자신을 대표할 수 없다고 믿는 순간 학생회의 효용은 의미 없는 게 돼버린다. 마찬가지로 학생회에 효용을 느끼지 못한다면 대표성 역시 위태로워진다. 대표성과 효용성을 모두 잃은 학생회는 ‘팥 없는 찐빵’이라 감히 비유할 수 있겠다.
보다 근본적으로 학생회가 대표성과 효용성을 상실하는 경로는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학생회는 반독재 투쟁 속에서 다져진 학생운동의 산물이다.19) 학생자치는 운동의 방법론 속에서 틀을 잡아갔고, 민주화·민족통일과 같은 대의를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의 퇴조 속에서 더 이상 학생조직이 사회운동 전면에 나설 수도, 나설 필요도 없어지자 학생회는 방향성을 잃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불어 학생운동의 퇴조는 학생들의 상이한 이념을 대변하던 ‘정파’의 쇠퇴를 알렸다. 정파는 현실정치의 정당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학생사회의 대립 구도를 선거에 반영시키고 선본 간 상호견제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정파가 사라지자 이와 같은 역동성이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요즘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문구인 ‘모두의 학생회’처럼 학생자치는 포괄적이고 모호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총학-단과대-전공단위로 분화되는 단계적 위계구조와 단선 선거의 일상화, 잦은 권력 교체 주기(1년)에서 오는 실무적 부담도 학생회 역량 저하를 가속하고 있다.20)
다시 말하지만, 학생자치는 학생사회의 정치다. 공동체의 규약을 정하고 숙의를 이끄는 정치는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을 되짚어 봤을 때 학생자치는 퇴보 중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내·외부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어 어디부터 손을 데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학생자치의 몰락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 공동체가 없는 대학은 교육의 수요·공급에 따른 거래만 이뤄지는 건조한 공간이다. 그런 대학은 학교라기보다 시장에 가깝다.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를 달려면
벌써 독자 여러분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필자 역시 이 책을 완독하고 “나의 공동체가 이럴 순 없어!”라 외쳤다. 소위 ‘괴물’이 된 대학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대학 공공성 회복, 국가학사제도21) 도입, 학생회 조직 개혁 등의 처방전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대학은 이미 한국 사회의 기득권으로 자리 잡았고, 현상(status-quo)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 역시 강하다. 그렇다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권이나 정부 정책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굳어질 수 있도록 방조한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여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힘은 당사자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대학의 위기에는 학생이 당사자로 적극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기층 학생을 잇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학생자치의 복원이 시급하다. 다만 진정으로 학생사회를 대표하고 효용을 줄 수 있는 학생자치로의 전환이 선행돼야 한다. 그게 어떤 모습일지는 당연히 모두의 지혜와 고민이 필요하다.
2022년, 큰 이변이 없다면 우리는 컴퓨터 화면을 벗어나 캠퍼스로 돌아갈 것이다. 기왕이면 다시 만난 학교가 대학다운 대학, ‘다시 뛰는’ 대학이어야 좋지 않을까.
고민에 빠진 당신을 위해, 함께 읽으면 좋은 텍스트 글은 낙관적으로 마무리 지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 없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학을 정녕 다시 뛰게 할 수 있을까? ‘학생자치의 전환’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다행히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무너지는 대학을 연구하고 학생자치의 대안을 제시한 책과 논문을 소개한다. 『대학과 권력』 김정인 著 휴머니스트(2018) 한국의 대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책은 한국 현대사 최초로 대학 형성되기 시작했던 식민지 시기부터 1990년대까지 대학권력-국가권력-시장권력이라는 키워드로 한국 대학의 역사를 보여준다. 현재 대학의 현실과 대학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대학사 100년을 돌아보며 한국 대학의 문제점과 해결점을 살펴본다. 에필로그에는 김영삼 정부 이후 신자유주의, 그리고 자본과 결탁한 대학의 현 상황을 돌아보며 어떻게 하면 ‘위기의 대학’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대안을 모색한다. (출처: 출판사 책 소개) 「차세대 시민성 관점에 근거한 차세대 대학 학생회 학생자치 모델을 위한 기초연구」 신민준·박주현·송기영·이상현·이유나·김재상 著 예술대학생네트워크(2020) 본 연구는 학생회라는 자치 기구가 당면한 위기를 조명하며, 위기 극복의 다양한 방안들을 탐구하는 연구이다. 학생회는 80년대 처음 등장한 이후 체제 변혁적 사회운동을 주목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나, 시대변화에 따라 최근에는 역할이 혼재되기 시작하는 문제가 나타나면서 위기를 겪고 있다. 또한 현재의 학생회 모델과 운영은 다양성의 관점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의제들을 포괄하기 어려우며 학생들의 권익 입장에서만 사고하는 한계도 발생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새로운 학생자치 활동은 운동 중심 학생회의 민중 운동의 ‘체제변혁’도, 복지-민원 중심 학생회의 ‘포퓰리즘’도 아닌 ‘시민성’ 관점의 고려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방법을 통해 현 학생회 쟁점을 도출하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학생자치의 맥락을 탐구하고 변화된 양상에 따른 학생자치 활동 전환의 필요성을 정리하였다. 끝으로 시민성과 학생자치 활동의 관계를 분석하여 지속 가능하며 발전적인 학생자치 활동을 위한 내외부 과제를 제시한다. (출처: 서울시 청년허브 연구개요) |
1) 김창인 외,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들녘, 2019. 25쪽.
2) 「교육기본법」 제9조.
3) 사립대학의 학교법인은 「사립학교법」 제2조에 따른 비영리법인으로 분류된다.
4) <중앙문화> 79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대학 교육,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참고.
5) 2019년 8월부터 시행된 「고등교육법」 개정안으로, 강사의 임용절차와 교수시간 등을 규정함으로써 고용 안정성 및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한다. 대학들은 강사법 실행을 전후해 교원 관련 비용의 증대를 우려하여 강사를 대거 해고한 바 있다. (출처: 중앙문화)
6) <중앙문화> 65호, “일은 시키는데 직원은 아니라니?―최저가로 낙찰된 그들의 노동조건” 참고.
7) 당시 상황을 담은 학내언론 기사는 참고자료를 하나로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궁금한 독자는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는 물론, <중앙문화> 홈페이지에서 ‘구조조정’을 검색해 연관 기사를 읽어보길 권한다. 검색 결과의 개수를 보더라도 구조조정 논란이 단지 한 차례에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8) <중앙문화> 79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대학 교육,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참고.
9) 교원, 교지, 교사, 수익용 기본재산 등 4가지 최소 기본요건만 충족하면 대학 설립을 허용하는 제도로 1995년 5.31 교육개혁조치에 의해 도입돼 1996년 7월부터 17년간 시행돼왔다. 준칙주의에 앞서 시행됐던 인가제는 학생 정원 5,000명 이상 규모에 맞는 시설기준을 확보해야만 대학 설립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출처: 한국대학신문)
10) 김창인 외,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들녘, 2019. 18쪽~30쪽.
11) 전은희, 「학벌 정체성에 대한 내러티브적 이해: 서울대생의 사례를 중심으로」 『교육인류학 연구』 제20권 제3호, 2017.
12) 이동현 외,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들녘, 2019. 67쪽.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일본의 교육사회학계에서는 ‘학벌’과 ‘학교력’을 구별한다.”
13) 이동현 외,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들녘, 2019. 87쪽.
14) 단 이동현 씨는 학교력이 개인 능력의 척도로 기능할 때가 아니라 “학교력이 학벌과 결부”될 때에는 능력주의와 상의해진다고 보았다. (92쪽) 학벌은 인적 네트워크를 토대로 한 일종의 유대 관계로, 온전히 개인의 능력만으로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15) 이동현 외,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들녘, 2019. 88쪽.
16) 등록된 예비 선본은 한 팀이며 500명 이상 추천을 받지 않아 자격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출처: 중대신문)
17) <중대신문>, “가벼운 빛이 돼서는 안 된다”, 21.11.22.
18) 고준우 외,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들녘, 2019. 125쪽.
19) 독재정권의 학내 어용단체였던 학도호국단이 학생자치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 고준우 외, 『추락하는 대학에 날개가 있을까』, 들녘, 2019. 130쪽~141쪽.
21) 대학 학위와 별개로, 정해진 절차를 거치면 국가가 학위 증명을 해주는 제도.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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