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김현경
비어있는 제목에 의문이 들 것이다. 나 역시 이 비석과 마주했을 때 그랬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비석은 처음이었다. 제주 4.3 평화공원에 누워있는 이 비석의 이름은 ‘백비’로, 모습 그대로 ‘이름이 없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4.3사건이 정명되지 못해 비석에 아무것도 새기지 못한 탓이다.
‘왜 이름조차 붙이지 못했을까?’
제자리를 걷는 듯했다. 2000년 4.3 특별법 제정,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 원수로서 첫 공식적인 사과, 점점 공유되어 가는 4.3사건에 담긴 이야기 … 4.3사건의 해결이, 화해가, 치유가 진전되었다고 믿었는데 백비를 보니 나아갈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육지에서 살기 시작한 2018년, 4.3사건은 70주기를 맞이했다. 70주기여서인지, 4.3사건 영결식에 참여한 유명인 때문인지 그 해는 다른 해보다 매스컴에서 유독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제주에선 대부분이 4.3사건을 알고, 도민끼리 문제의식을 나누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육지 사람들이 4.3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실은 사건을 알고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4.3사건의 정확한 내용이 대중에게 알려진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도 4.3사건은 그저 ‘제주에서는 남한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여 4.3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한 문장으로 일축됐다. 게다가 4.3사건은 단순한 ‘이념 갈등’이라거나,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는 숱한 오해를 겪었다. 그 오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나 역시 4.3사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자연스레 망설임이 앞섰다.
그럼에도 4.3사건을 은근하게 알리고픈 마음에, 동백꽃 뱃지를 자주 들던 에코백에 끼우고 다녔다. 하루는 동아리에서 알게 된 언니가 뱃지를 가르키며 4.3사건을 의미하는 뱃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먼저 아는 체를 해줘서 기뻤다. 육지사람이 먼저 공감해주니 내 안에 있던 위축감도 사그라 들었다. 4.3사건이 오해와 낙인 속에 머물지만은 않음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백비를 마주했을 때 가졌던 무거움은 마음 한 켠에 여전히 존재했다. 4.3사건은 아직까지도 ‘사건’이라는 공허한 단어로 불렸다. 유족과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은 이뤄지지 못했으며, 진상조사가 진행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내가 타지에서 사는 동안에도 제주에선 4.3사건이 진정한 ‘해결’을 맞이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애쓰고 있었다. 결국 올해 2월 26일 제주 4.3사건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지만, 지금까지의 개정안 중 ‘화해’와 ‘회복’에 가장 가까운 이번 개정안이 반갑다.
난 동백꽃 뱃지를 보고 반가움을 표하는 이가 늘어나길 바란다. 그래서 개정안이 통과된 이 시점에 4.3사건이 어떤 일이었는지를 꼭 전하고 싶다. 지금까지 자세한 내용을 몰랐더라도 이 글을 읽으며 주변인들에게 아는 체를 해보는 건 어떨까.
항쟁, 희생, 후유증, 그 7년의 시간
※ 4.3사건의 전개 과정은 제주4.3평화재단, 4.3연구소, 4.3아카이브, 제주4.3평화공원의 자료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 정의하는 4.3사건은 다음과 같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이 글에서는 4.3사건의 전개과정을 항쟁-희생-후유증 이 세가지로 설명하려 한다. 4.3사건의 시작을 알기 위해선 당시 시대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광복 이후 제주 지역사회의 운영 기반은 제주도 인민위원회였다. 2이들은 학교를 설립해 도민에 대한 자치교육을 실시하고, 치안활동을 벌이며 도내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했다. 미군정이 들어섰을 때에는 제주의 생리를 잘 몰랐던 미군을 지원했다. 다만,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상호 보완 기구나 행정기관으로 채택하는 대신 도청과 경찰에 일제강점기 시절 관리를 그대로 배치해 인민위원회를 견제해갔다. 그렇게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시작됐다. 미군정의 강압정책에 도민은 거세게 반대했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더해져 도민의 불만은 끊이질 않았다.
항쟁
1947년 3월 1일에 열린 3.1절 행사는 4.3사건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3.1절 행사는 3.1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집회이자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시위 자리였다. 이 시위에 대비해 육지경찰 100명이 제주에 파견됐다. 이 육지경찰은 지지부진한 일제 청산을 기회 삼아 다시 경찰로 복귀한 친일파 출신이었다. 3당시 행사에서 아이가 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다쳤고, 경찰은 아무런 조치 없이 자리를 떠나려 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돌을 던지며 거세게 항의했다. 시민들의 움직임에 돌아온 건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이 아닌 총성이었다. 그 날 6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도민의 반감이 극대화되며 제주 전체 직장의 95%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은 탄압에 맞선 도민들에게 되려 ‘탄압’으로 응수했다. 제주 경찰의 75%를 육지경찰로 구성한 후 시위 주동자와 파업 참여자를 색출해 모두 형무소에 수감했다. 수감된 이들은 무자비한 고문에 시달렸다. 1947년 3월 19일 조병옥 경무부장은 3.1 발포사건이 경찰의 정당방위였으며, 당일 시위는 북한과 공모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살펴봤듯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는 냉전 체제 속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눈엣가시’이자,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찍힌다. 미군정은 3.1 시위 발포 사건을 처리하며 극우 성향의 인물들을 도내 고위관리직에 앉혔다. 4이어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 간부들을 구속하자 많은 청년들이 도외로 빠져나갔다. 외지 출신 도지사와 고위관리들의 편향적 행정 집행으로 도민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제주에 들어온 서북청년회가 도민들을 핍박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서북청년회는 북한에서 남하한 이들이 1946년 조직한 극우청년단체다. 이들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며 제주로 들어왔다. 5이들은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한 채 진압활동을 펼쳤다. ‘ 6빨갱이 사냥’이라는 명분으로 테러를 일삼기도 했다. 7일자리가 없을 때는 물건을 강매하며 도민들을 폭행했다. 8
남한의 단독선거가 확정되자 전국에서 단독선거를 막기 위한 투쟁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2.7 전국 총파업이었다. 이 2.7 총파업을 계기로 전국의 남로당원들에 대한 수감과 처형이 이어졌다. 제주도 남로당원 역시 경찰의 고문과 취조, 서북청년회의 무차별 구타로 목숨을 잃었다. 2.7 총파업 당시 제주도 여러 지역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가 진행됨에 따라 3.1 발포 사건 때와 같은 전도적인 검거가 다시 성행했다. 검거된 이들에 대한 경찰의 취조 강도는 높아져만 갔고,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고문치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민의 분노는 절정에 치달았다. 9이어서 제주도 남로당이 주도해 1948년 4월 3일 남한 단독 선거 저지를 내세운 무장 결사 운동이 펼쳐졌다. 10이 날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4.3사건’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4.3사건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제주도에 대한 탄압, 서북청년회에 의한 테러, 고문치사, 이에 대한 도민들의 항쟁, 남로당의 무장 봉기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발생한 것이다.
희생
4.3사건이 발발하자 미군정은 제주에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토벌대로 추가 파견했다. 무장대가 토벌대에 비해 열악한 전력이었음에도 토벌대는 강경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했다. 11미군정이 제주도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했으나, 9연대가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맺으며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12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이 평화협상을 무시하고 제주 오라리 마을을 불태웠다. 해당 방화사건은 협상 파기를 의미했다. 마을을 방화한 건 우익 청년들이었으나,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했다. 13
협상이 결렬되고 무장대는 5.10 단독선거 거부 투쟁을 전개했다. 많은 도민들이 투쟁에 동의해 선거를 거부했고, 제주도 선거구 세 곳 중 두 군데가 투표 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선거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도전이자 정부 수립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됐다. 그렇게 미군정의 대학살 작전이 시작됐다. 제주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됐던 브라운 대령은 공개적으로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며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쓸어버리는 무차별 검거작전을 벌였다. 14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된 1948년 11월 17일,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9연대 군수참모였던 김정무에 따르면 군 내부에선 이를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에 서북청년회와 군 병력을 추가 투입했다. 특히 서북청년회는 도민을 악랄하게 살상했다. 제주도의 행정 2인자였던 총무국장을 고문치사한 것도 이들의 소행이었다. 15한 달 후인 11월 17일에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제주 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만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낳은 결과였다. 16이 초토화작전으로 1948년 10월 말부터 다음 해 3월까지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17중산간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기도 했다.
하산한 도민들은 대규모 수용소로 변모한 주정공장으로 끌려갔다.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믿었으나 하산의 결과는 수용소에서의 갖은 고문이었다. 재판 절차도 없이 즉결 처분 당한 피해자들도 있었다. 군인들에 의해 100명 이상 총살당한 마을이 45개소에 달했다. 조사 과정과 재판이 생략된 사건 처리,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을 통보받았다는 기록, 이틀만에 내려진 300여 건의 사형선고 등 4.3사건 기간 동안 실시된 ‘4.3사건 군법회의’의 피해도 상당했다. 18수용소에 갇힌 이들과 형량도 죄명도 모른 채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친 귀순자들은 사형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이송당했다. 19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이어졌다. 초토화작전 이후 무장대는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마을을 지목해 그 마을 주민들을 살해했다. 마을의 식량을 약탈했으며 약탈 과정에서 보초를 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대규모 학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고통받았다. 토벌대에게 무차별 성고문을 당했을 뿐 아니라, 서북청년단원과 강제 결혼을 하기도 했다. 결혼이라는 족쇄에 갇혀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4.3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도 학살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
후유증
초토화작전이 어느정도 마무리된 이후에도 4.3사건은 종지부를 찍지 못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이념’에 대한 검열과 매도가 다시 고조됐기 때문이다. 중산간지대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 검속되고, 전국 형무소에 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됐다. 6.25전쟁 직후에 수감된 4.3 관련 재소자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됐다. 정부 최고위층에 의해 총살 당한 재소자들도 있었다. 21
4.3 사건은 1954년 9월 21일에 표면적으로 종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민들의 고통은 계속됐다. 불법 재판에 의한 전과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은 연좌제로 오랜 시간 유효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죄인의 가족이라는 낙인 하에 공무원 임용, 공사관학교 입학 시험과 같은 사회 진출에 제약을 받았다. 심지어 일상생활 속에서도 신분 감시를 당했다. 22희생자 가족들은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했다. 살아남았음에도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번째 4.3 특별법 개정안
유족과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
온종일 들려온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뉴스 내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4.3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였을 것이다. 이게 4.3사건에 대한 내 첫 기억이다. 어릴 적 난 내가 사는 곳에서 많은 이가 희생당했고, 국가가 사과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만 알았다. 시간이 지나며 4.3사건의 내막과 전개 과정을 자연스레 알게 됐다. 내가 유족임을 알게 된 것도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였다.
4.3사건은 1970년대에 폭로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다시 암흑 속으로 돌아갔다. 4.3사건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때는 2000년대였다. 2000년 4.3 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에 의한 폭력을 인정하며 최초로 공식 사과했다. 여전히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진상이 많았으며 유가족과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4.3 특별법이 사건의 성격과 희생자들의 요구를 완전히 반영할 리 만무했다. 도민들과 유가족들의 법안을 개정하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그렇게 2차 개정안 이후로 14년이 지난 2021년, 3차 개정안이 통과됐다.
올해 국회를 통과한 3차 개정안은 이전 개정안에 담지 못한 추가진상조사의 구체적인 과정을 명시하고, 불법 재판에 대해 피해자들이 일괄적으로 재심 신청을 요구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유족과 희생자의 배∙보상 기준이 정확하지 않다며 법안이 기각됐던 경험을 기반으로 배∙보상 기준까지 정해 놓았다. 23법안에 따르면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은 4.3사건에서 전개된 국가 주도의 폭력을 배∙보상하는 내용이다. 배∙보상의 구체적인 내용과 금액은 8월까지 정부 예산안에 반영해 22년부터 집행해야 한다.
추가진상조사
개정안으로 도민들의 오랜 숙원이던 추가 진상조사도 이뤄진다. 중앙위원회가 조사 내용에 대한 심의 및 의결을 담당하고, 실질적 조사는 4.3평화재단이 실시한다. 중앙위원회는 추가진상조사를 담당하는 분과위원회를 둔다. 국회의 추천을 받은 네 명의 위원이 분과위원회에 소속된다. 24아직까지 유골을 찾지 못한 희생자의 수가 공식적인 기록으로만 3500명에 다다른다. 25묵혀왔던 시간에 비해 본격적인 진상조사가 이뤄진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았기에 추가진상조사 내용은 반드시 필요했다. 이번 개정안으로 국가가 진상조사에 참여함으로써 사건의 해결 과정까지 본연의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가 있다.
일괄 재심 청구
4.3사건에서 많은 희생자를 낳은 대목 중 하나는 불법 재판이었다. 불법 재판으로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희생자와 그 유족들은 명예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재심을 청구해왔다. 본래 재심 청구는 원판결을 내린 대법원 혹은 군사법원이 관할한다. 그러나 4.3 특별법 개정안은 특별재심 조항에 따라 4.3사건 불법재판 재심 청구를 제주 지방법원에서 이행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26희생자와 유족들의 일괄 재심도 가능해졌다. 지금까지는 군사재판 희생자가 개인적으로 재심을 청구해야만 했다. 27올해 제주를 방문한 박범계 법무부장관은 "진상규명 명예회복 위원회 활동 권고가 이뤄지면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검찰청과 협의해 일괄재심이 가능하도록 노력하겠다"며 일괄 재심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28 재심이 온전히 개인 몫이었던 과거와 달리 남아있는 자들의 부담을 덜고, 재심 처리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아쉬움으로 기억될 순간
‘위자’와 ‘배∙보상’
3차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던 ‘유족에 대한 배∙보상‘은 명칭에서부터 여러 의견이 오갔다. 오랜 시간 개정안을 바라왔기에 사건을 드러내는 글자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이번 개정안이 선택한 ‘위자료‘라는 명칭은 그래서 아쉬웠다. 법률에서 배∙보상 관련 내용은 제16조 ‘희생자에 대한 위자료 등'이라는 조항으로 담겨있다. "국가는 희생자에 대하여 위자료 등의 특별한 지원을 강구하며, 필요한 기준을 마련한다."며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위자료’라고 명시한 것이다. 29
배∙보상은 손해를 가한 측이 재산적∙신체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타당한 책임을 이행하는 것으로, 4.3사건에서의 배∙보상은 국가의 폭력을 인정하고 그 해결과 책임의 몫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반면 위자료의 ‘위자’는 사전 정의상 ‘위로하고 도와준다’는 뜻을 가진다. 국가가 ‘지원‘해주는 듯한 시혜적 성격으로 이해하기 쉽다. 개정안 초안이 발표되었을 때 유족회에서 ‘위자료’ 표현에 의문을 제기했으나, 합의를 통해 현 개정안 내용이 확정됐다. 배∙보상과 위자료 사이 용어의 선택은 2월부터 시작된 4.3사건 연구용역을 마친 후에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30연구 용역이 진행되고 난 후엔 후세가 4.3사건을 곡해없이 전해들을 수 있는, 유족들의 설움이 해소될 수 있는 적확한 표현이 사용되기를 바라 본다.
책임지지 않는 미군정
4.3사건에 국가에 의한 폭력이 있었음을 인정한 이래로 4.3 특별법 세 번째 개정안까지 분명 거족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음은 틀림없다. 변하지 않은 하나, 미군정은 여전히 4.3사건에서 빠져있다.
미군정이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라고 정의내린 근거는 도민들의 항쟁이었다. 미군정은 3.1절 행사와 도민 총파업을 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발표했으나, 당시 미군정 관리였던 검찰총장은 근본적 원인으로 미군정 관공리들의 부패를 지목했다. 이들이 주장하던 ‘이념’은 도민의 움직임을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다. 설사 미군정이 주장한 이념 갈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를 탄압할 이유는 될 수 없다. 미군정은 그저 냉전 체제 속 소련을 견제할 최후의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 색출이란 이름으로 대학살을 행했다. 무장대와 제주 군대가 평화 협상을 진행했으나, 이 협상을 무산시키고 무력 진압을 결정한 것 역시 미군정이었다. 평화롭고 자체적으로 4.3사건을 해결할 수 있던 기회를 앗아간 셈이다. 그 평화 협상이 제대로 타결됐더라면, 미군정이 무력 진압을 명하지만 않았더라면, 이승만 정부가 미국의 원조를 명분으로 서북청년회를 입도시키지 않았더라면.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고 하나, 수많은 희생자들을 떠올리면 ‘만약’을 자꾸 상상하게 된다. 이 ‘만약’에 미군정이 있는 것부터 이들은 4.3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역사를 뒤로하고 현재를 살아간다. 과거의 해결이 없는 현재는 위태롭다. 4.3사건 역시 미군정의 책임 없이는 완전한 해결을 맞이하지 못한다.
지워진 여성들
시간이 지남에 따라 4.3사건의 세세한 이야기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나 ‘여성’은 배제되어 왔다. 역사의 참극 속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는 축소되거나 주목받지 못하는 때가 많다. 여성들의 피해는 성차별적인 구조와 맥락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를 고려한 독자적인 분석이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4.3사건 시기에 여성을 상대로 벌어진 성폭력과 학살은 아직까지 ‘개인적인 피해 사례’로만 다뤄진다. 4.3사건을 알더라도 그 속에서 일어난 여성 인권 말살에 대한 내용은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기록이 제대로 수집되질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4.3사건 이후 제주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앞장섰던 여성의 활약도 찾아보기 힘들다. 4.3문학세미나 기조 강연을 진행했던 한림화 작가는 4.3사건 속 여성의 이야기들을 언급하며 “이제는 그때 국가권력과 공권력으로 무장하고 제주여성사회에 가했던 인권말살을 복원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 몫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일 수도 있다”고 전했다. 4.3 31사건이 침묵 당하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게 있다면 그를 꺼내고 회복시키는 게 우리의 역할이다. 지금에라도 4.3사건 여성들의 피해 사실을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조사해야 한다.
73년간 갖지 못한 이름
4.3사건이 가장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름‘이다. 4.3사건은 73년동안 정명되지 못한 채 그저 ’사건’으로 불려왔다. 이름이 없다는 건 사건이 내포한 이야기를 전혀 전할 수 없음을 뜻한다. 4.3사건의 정의에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라는 설명이 있는 이유도 4월 3일에 발생한 무장 봉기만으로 4.3사건을 전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4.3사건’이라는 명칭은 그가 갖고 있는 복합적인 성격을 드러내지 못한다. 섬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도민의 항쟁, 국가에 의한 폭력, 통일 정부를 향한 열망. 이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이름을 위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어쩌면 미래에 ‘4.3’이라는 날짜 대신 새로운 이름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4.3을 자꾸 호명해야 되고, 얘기를 해야 합니다. 일반 평범한 제주도민 여기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람들, 평범한 시민들이 4.3을 이해하고 4.3의 정명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열린 공간들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논의의 구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제주 4.3 평화재단 양정심 실장 발언)
3차 개정안을 통과시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논의하는 것이다. 함께 고민하고, 논쟁하는 것이 4.3사건을 가장 잘 표현하며 후세까지 전할 수 있는 이름에 다다르는 과정이다.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나처럼 4.3사건이 지나온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는 3차 개정안이 통과된 2021년을 특별한 한 해로 바라보고 있겠다. 4.3 특별법 개정안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들도 떠오를 것이다. 먼 미래에는 이 지점들까지 해결되어, 아쉬웠던 이 순간들을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다른 과거사들에게
우리나라엔 여전히 해결의 첫걸음조차 내딛지 못한 과거사들이 존재한다. 4.3 특별법 개정안은 국가 폭력에 의해 발생한 여러 과거사에 해결 가능성을 제시했다. 과거사에 대한 은폐와 변색을 이겨내고, 국가의 실책을 인정받고, 국가와 희생자가 함께 해결 과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개정안을 발의한 오영훈 의원 역시 ‘이번 개정안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과거사 전체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그런 좋은 사례를 만들어 냈다‘며 개정안이 다른 과거사들에게 희망적인 선례가 됐음을 전했다 32.
이번 개정안은 미래 세대에게 자성과 경고의 메시지까지 전한다. 역사는 흘러 미래에도 유효하며, 지금 이 순간마저도 역사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고통과 희생에 무감각해져선 안되는 이유다. 개정안은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경계해야 할지 고민하도록 이끌 것이다. 또 다른 아픈 역사가 반복되더라도 치유와 회복에 다다르는 과정은 이전과 다르리라 믿는다.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것
올해에도 4.3 평화공원에 들렀다.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걸 하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위패봉안실 방명록을 남겼다. 4.3사건이 발생한 지 73년이 지난 이 시대에 와서야 세 번째 개정안이 입법됐고, 4.3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이를 고민하는 것은 끊임없는 재기억을 전제로 한다. 잊지 않아야만 우리의 역할을 고민하고 해결을 이어갈 수 있다.
백비의 허전한 표면이 더 이상 공허하게만은 보이지 않는다. 이전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씁쓸함이 전부였다면 이젠 백비를 글자로 채우는 미래를 조금씩 상상한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남아있지만, 그 길은 어느 방향으로 틀지 모를 두려운 길이 아니다. 기억을 살피며 길을 따라가다 보면 화해와 치유라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을까. 언젠가 이 글의 비어있는 제목을 채울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 이번 개정안은 3차 개정안이며, 2020년에 제주 4.3사건 특별법 개정이 국회에 상정됐으나 당시에 발의한 특별법은 무산됐었다. [본문으로]
- 자주적 독립 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가 출범했다. 제주에서도 제주도 건준위가 조직됐고, 중앙의 건준위가 인민위원회로 재편되며 제주도 건준위 역시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당시 동아일보의 ‘제주도 시찰기’ 기사에 따르면 ‘제주 인민위원회는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 없이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고 제주 지역 사회를 설명했다. 출처: 4.3평화재단 [본문으로]
- 아이엠피터뉴스, ‘'서청 경찰’ 하루에 한 명 이상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 2016.02.13. [본문으로]
- 제주경찰감찰청장에는 김영배를, 도지사에는 유해진을 임명했다. 출처: 4.3 평화재단 [본문으로]
- 프레시안, 역사로 보는 서북청년단, 대체 어땠길래?, 2014.09.29. [본문으로]
- 제주 4.3 연구소 [본문으로]
- 제주 4.3 평화공원 [본문으로]
- 아이엠피터뉴스, ‘'서청 경찰’ 하루에 한 명 이상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 2016.02.13. [본문으로]
- 제주일보, ‘4·3사건 진상보고-⑤ 2·7사건과 고문치사사건’, 2003.04.16. [본문으로]
-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4·3사건 전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제주 4.3 아카이브, 제주 4.3 평화재단 [본문으로]
- 제주 4.3 평화공원 [본문으로]
- 19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이윤락 중위가 무장대 측 김달삼 등과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출처: 제주 4.3 평화재단 [본문으로]
- 제주 4.3 평화재단 [본문으로]
- 제주의 소리, ‘”원인엔 흥미가 없다. 사명은 진압뿐”, 2015.04.16. [본문으로]
- 아이엠피터뉴스, ‘'서청 경찰’ 하루에 한 명 이상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 2016.02.13. [본문으로]
-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했다. 출처: 제주 4.3 아카이브 [본문으로]
- 4.3 전 기간 동안 희생자 수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하는데, 이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이다. 출처: 제주 4.3 평화재단 [본문으로]
- 4.3 아카이브 [본문으로]
- 제주 4.3평화재단 [본문으로]
- 제주의 소리, 살아남았기에 더 고통스러웠던 4.3 제주여성, 2018.04.28. [본문으로]
- 대구형무소에 있던 제주 출신 수형인 142명도 군·경에 인계되어 대구 달성군 가창골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 총살은 정부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출처: 제주 4.3평화재단 [본문으로]
-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출처: 제주 4.3 아카이브 [본문으로]
- 2020년에 발의한 개정안이 해당 내용을 이유로 기각됐다. [본문으로]
-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5조 [본문으로]
- 제주 4.3 아카이브 [본문으로]
-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14조 [본문으로]
- 제주일보, 억울한 4·3 수형인, 검사의 일괄 재심 청구로 명예회복 길 열린다, 2020.11.25. [본문으로]
- 제주도민일보, 제주 찾은 박범계 장관 "4.3 일괄재심 노력", 2021.04.02. [본문으로]
- 헤드라인제주,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안, 국회 통과...'드디어 해냈다', 2021.02.26. [본문으로]
- 헤드라인제주,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안, 국회 통과...'드디어 해냈다', 2021.02.26. [본문으로]
- 제주의 소리, 살아남았기에 더 고통스러웠던 4.3 제주여성, 2018.04.28. [본문으로]
- 노컷뉴스, 오영훈 의원 말하는 제주 4.3 특별법 전부개정안과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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