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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4 가을겨울, 67호 <모범대학>

하얀 원피스, 그녀의 담배연기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1. 2. 1.

수습위원 장재원

  누가 그랬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 자는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 서 그날 저녁에 바로 그 사람이 좋아하던 하얀 원피스를 입고 담배를 폈다. 그때 나를 발견하고 지었던 그 표정이 아직도 웃겨서. 그리고 통쾌해서 웃음이 나왔다. 미-치 배신당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 었던 그 사람은 이후로 내 손이 옷에 닿기만 해도 담배냄새가 배는 게 아니냐며 나를 비웃었고, 특히 하얀색 원피스를 입 고 온 날이면 더 심하게 나를 놀려댔다. 한 번은 이유를 물으며 화를 낸 적이 있는 데, 돌아온 대답은 생각보다 너무 간단했 다. •‘그야 너는 여잔데, 담배 피우잖아.” 이 럴 수가. 내가 여자인 것이 도대체 어떻게 그 비겁한 조롱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마침 이유를 물 어봐주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하얀 원피스 예찬론과 흡연 여성에 대한 혐오를 동시에 쏟아 냈다.

  내가 그때 얘긴 안했는데 너 진짜 싸 구려 같았어. 어떻게 여자가, 그것도 그 청순한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담배를 필 생각을 하냐?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싸구려라니. 내가 어디 진열되어 있는 상 품인가. 나는 가격을 매기고 등급을 평가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닐뿐더러 무식하지 도 용감하지도 않다. 그 흡연자가 때 마 침 여자였다는 사실과 내가 본인이 그렇게 예찬하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는 것이 그 사람이 말한 내가 욕먹기에 충분한 사유들이었다. 여자는, 그것도 청 순한 여자라면 더더욱 흡연과는 별개의 존재여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하는 말 이 진짜 싸구려인 줄도 모르는 그 사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태어날 애기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여자는 왜 담배피면 안되냐는 물음에 그 는 제일 먼저 여자는 엄마이기 때문이라 고 대답했다. 물론 여자는 아이를 잉태 하는 소중한 존재임에는 틀림없디' 그러나 아 이를 낳기 위한 도구적 존재는 아니다. 개 인의 신념에 따라 출산을 거부하는 여성도 있다고 했더니 그건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 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분노했다. 어째서 출산하지 않는 여성이 스스로 여자의 삶을 포기하는 게 되는 것일까. 이는 여성의 존 재목적을 오직 사회 구성원을 재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특 히 제도와 문화적으로 출산과 육아의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이 부담하도록 만드는 한 국사회에서 여성의 출산 거부는 더욱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흡연여성에게 서 태어날 아이의 건강을 염려했던 그 사람 역시 흡연자였다. 여성을 자웅동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닌지 실로 걱정이 되었는데 남성의 경우에도 지속적인 흡연은 임신의 과정에 있어 태아 수정을 어렵게 한다. 또한 남성들에 의한 간접흡연은 임신한 여성이 직접 흡연하는 것만큼이나 해롭지만 태아를 직접 잉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의 화살은 오직 여성만을 향하 고 있다. 물론 임신 중인 여성에게 흡연의 지속을 권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애 초에 아예 흡연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전문의들도 임산부의 금연 시 가해지는 정신적 자해와 금단 현 상으로 얻는 스트레스는 흡연만큼이나 태 아에게 해롭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흡연 사실을 토로하는 임산부들에게 금연이 아닌 적은 양의 흡연을 권유하기도 한다. 실제로 여성이 임신하기 4개월 전부터 흡연을 중단한다면 비흡연자 와 거의 동일한 상태의 신체조건이 갖춰진 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따라서 여성, 특히 나 미혼여성에게 출산과 임신을 사유로 그’ 녀들의 흡연을 비난하는 것은 더욱 적절하 지 못하다.

 

사연 있는 여자와 담배.

  ''솔직히 말해 서 담배 피는 여자들은 다 들 과거에 좀 놀아본 거 아니 이:? 너도 알 만 하네:’

  실제로 내 주변엔 적지 않은 흡연 여성 들이 있다. 그중엔 정말 그 사람 말처럼 청소년 비행 시절에 흡연을 접한, 말 그대로 소위 좀 ■놀았던’ 여성들도 있다. 반면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있었고, 사소한 반 항 하나 없이 공부만 하던 전교 1등도 있었다. 사실 첫 번째의 경우에도, 흡연 자체 가 방황의 결과라고 이야기할 수 없디ᅵ. 흡 연은 그저 비행이라는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경험일 뿐이기 때문이다. 흡연 여성에게 붙는 ■놀았다’라는 수식은 사실 유년시절의 단순한 비행만을 뜻하는 것은 이-니다. 학 교를 잘 나가지 않고, 공부를 멀리 했던 어 린 날의 방황과 더불어 성胜)적으로 방탕 한 시절을 보냈다는 확인되지 않은 추측이 그 바탕에 있다. 이러한 왜곡된 편견이 흡 연 여성을 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인식하 게 한다.

그렇다면 왜 다른 이유도 아닌 여성의 성 을 그 기조로 두려고 하는 것일까. 성은 개 인의 삶에 있어서 신념과 선택의 영역이다. 그러나 사회는 여성에게만큼은 이처럼 당 연한 권리를 허용하려 히*지 않는다. 다양 한 시대적 변화를 통해 한국은 과거에 비해 개방된 사회를 맞이했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남녀사이를 양극화시키는 차별적 시선이 존재한다 여전히 여성의 성적인 순 결을 미덕으로 여기며, 특히 그 비약은 여 성 흡연을 비난하는 근거로 시용될 때 더 욱 심화된다. 순결한 여자가 곧 진짜 여자라는 차별적 시선이 여성이 누며야 하는 권 리를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시선에서도 비교적 자유로 운 여성들이 있다면, 노인과 술집여자가 그 예외이다. 사람들은 그녀들이 이미 여성이라는 삶의 벼랑에서 떨어졌다고 여기는 것이다. 노인인 여성은 여자로서의 삶이 끝났 고. 술집 여자는 이미 성적으로 타락한 존 재라고 단정 짓는다.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에 위협을 가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로 인 식 하기 때문에 두려워 힘*, 비난해야 할 필요 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젊거나 똑똑 한 여자는 다르다. 사회의 불평등을 바로 잡고 권리의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합리적인 존재로서 힘이 있는 그녀들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다가올 현실이 된 다. 따라서 성적 타락이나 모성애 같은 태 생적 본능을 부시한 비윤리적인 여성으로 라도 전락하게 해야 하는 것이 그 비약의 숨은 전제이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흡연 여성이 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는 실로 날 좀 ■놀았던’ 여자로 정의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박차고 나간 그 사람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남자 들은 종종 너도 나도 하얀 원피스 예찬론 같이, 여린 꽃과 같은 여자에 대한 로망을 이야기한다. 그 사람이 바랐던 하얀 원피 스는 안개꽃이었지만 담배 피우는 여자가 입 은 흰색 원피스는 한순간에 남자들을 홀 려 간을 빼먹는 구미호의 소복이 되는 것 이디-. 나는 그와 지인으로 만나기 전에도 흡연자였고. 지금도 여전히 흡연자이다. 그 러나 나는 그 사람이 흡연 여성에게 기대했던 섹슈얼한 사연의 여자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날 발견한 그 날에라도 나는 사연 있는 여자가 되어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멍하니 서 있던 그 사람을 뒤로한 채 도서관에 들려 책을 읽다 일찍 귀가했고, 연락 문제로 서운해하던 남자 친구를 전화로 달래며 잠이 들었다. 그 누가 20대 여성의 독서와 연애를 음란하고 어두운 사 연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담배에 대 한 애정 말고는 나에겐 흡연을 위한 그 어 떤 사연도 필요하지 않다..

 

'말레나'의 첫사랑과 김혜수

  의자에 앉은 여자가 담배를 문 순간, 주 변의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그녀의 담배에 라이터를 갖다 댄다. 여자 는 매춘부였고 남자들은 그녀와 자고 싶어 한다. 이는 프랑스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인 영화 ‘말레나’의 유명한 한 장면이 다. 이는 실제로 옛 유럽에서 흔히 보여졌 던 풍경으로 여성 매춘부들이 자신의 성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유래되었다. 이렇듯 오 래전부터 미디어는 여성의 흡연을 퇴폐적이고 성적인 모습에 기대어 표현해왔다. 이렇게 조장된 흡연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여 성들을 접점 더 좁은 밀실에서 흡연하게 했다. 좀 더 가까운 한국의 경우에 흡연 여 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우리는 타짜의 '정 마담’ 김혜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녀가 맡 은 역할 때문이었을까. 영화의 흥행 이후 여성의 담배는 가슴이 다 드러난 채 빨간 립스틱 바른 여자의 전유물이 되어있었다. 실제로 당시 ‘이대 나온 여자’를 명대사로 만들 정도로 그녀는 고학력자였고, 관능적인 만큼 똑똑했지만 미디어와 이을 받아들인 대중은 그런 그녀의 당당함과 영리함만 큼은 흡연과 연관 짓는 것을 거부하는 것 처럼 보였다. 사람들에게 담배 피우는 김혜수의 모습은 그저 섹시히기만 해야 했다.

  그렇다면 미디어 속 남성의 흡연은 어떻 게 묘사되고 있을까. 남성의 경우에는 범죄 자도, 그를 쫓는 형사도, 심지어 명문대 학 생과 청소년도 흡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마주하는 우리는 흡연하는 인물에게서 성적 타락이라는 특정 한 이질감을 얻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같은 현상이 관객이 밟아야 하는 당연한 수순 일 지도 모른다. 미디어는 흡연 남성에 대 한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종종 남성의 강인함이나 지적 고뇌를 표현하는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 담배라는 동일한 대상이 여성에겐 성적 타락을, 남성은 강인함과 주 체성에 대한 상징이 되도록 한다. 미디어는 어쩌면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적인 식의 이면이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중이 원하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묘 사하는 미디어에게 우리는 그저 일방적인 수용자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미 디어가 생산해내는 흡연에 대한 성 불평등 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이 다. 이를 표현의 자유의 영역이라고 인정 하기에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편견 이 이 조그만 매체 상자 안에서 끝나지 않 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남녀 차별적인 문화적 단정은 남성이 권력관계의 우위를 독점하는 것을 미화하고 이를 당연한 이치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결국 여성에게 담 배라는 단순한 기호품을 선택하는 것 마저 도덕성의 부재로 여기도록 만든다.

 

청춘을 생각하고, 담배는 나의 선택이 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담배는 언제나 몸에 해롭다. 폐와 기관지를 상하게 하고 중독 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에 자신을 가두게 한 다. 누구에게는 필요의 악처럼 존재하지만 그 마저도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라기보단 주변의 시선에 의한 강제적 금연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여성들에겐 흡연은 자기혐오와 주위의 시선을 견디기 위한 애증이 되기도 한다. 

  흡연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특히 여성에 게는 더욱,흡연 사실을 개인의 삶에 있어 불행의 지표로 여기게 한다. 때로는 비흡연 자가 흡연자보다 더 지독하고 아득한 인생 을 경험할 수도 있다. 각자의 아득하지만 찬란한 삶에서 우리는 20대라는 이유만으로 상처의 아픔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견뎌야 한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쏟아지 는 그 수많은 청춘들을 버티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는 것처럼 담배를 피운다. 개인이 기호품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여자들은 섹시해 보이기 위 해 담배를 선택하지도 않았a, 우리는 그런 그녀들을 섹시하게 바라볼 필요도 없다. 담배를 통해 관능적으로 보이기 위한 연기 (演技)는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런 그 녀를 조롱하는 당신은 더욱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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