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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3 가을겨울, 65호 <멀리 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오랫동안 쓰였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① 시설노동자 김정갑 씨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1. 1. 31.

2013년 가을겨울 〈멀리 하기엔 너무도 가까운〉 시설노동자 김정갑 씨가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다.

편집위원 이슬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곧 비가 올 듯 흐렸지만 거리에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학교는 제법 근사한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영신관에는 ‘응답하라 2014’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붙었고, 캠퍼스는 중앙대학교 14학번이 되기 위해 논술고사를 보러온 학생들과 학부모들로 붐볐다. 나는 인터뷰를 위해 법학관으로 향했고 지하 3층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지하 3층 버튼은 없었다. 그랬다. 엘리베이터조차 닿지 않는 그곳, 지하 3층에 시설노동자들은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7월의 절정에 오른 캠퍼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회색 기계들로 가득 채워진 기계실은 칙칙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햇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곳. 그 적막한 공간을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간간히 배관에서 떨어지는물 방울 소리만이 메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설노동자 김정갑 씨를 만났다.

 

  김정갑 씨가 처음부터 기계 설비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계엄령이 선포된 시대에 자랐다. 학창시절에는 직업 군인이 되어 장교가 되고 싶었다. 왜 직업군인이 되고 싶었냐고 물었다. “직업 군인이 힘 좀 있고 그러니까 좋아 보이드라구." 그는 대답과 함께 수줍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표현대로 ‘세월이 세월인지라’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사회도 아니 었고 가정형편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 꿈은 가슴 한 편에 묻어두었다.

  상고를 졸업하고 나서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도자기 회사를 운영해보기도 하고 조그마한 공장을 차려보기도 했다. 운이 없었던 것일까. 사업에서 거듭 쓴맛을 봤다. 1983년, 그의 나이가 마흔이 다 됐을 때 부산에서 상경했다. “밑바닥 생활 부터 안 해본 게 없어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한다는 듯 그의 손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포장마차부터 시작했다. 어느정도 기반을 갖춰 나중에는 레스토랑을 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의 인생의 고요를 깬 것은 아내의 암소식이었다. 아내의 암투병으로 운영하던 레스토랑을 정리했다.

  아내의 수술 후 그도 한동안 일을 쉬며 집에서 지냈다. 몇 십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왔기 때문일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업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기계, 시설 쪽으로 일을 찾았다. 처음에는 한 입시학원 본사에서 일했다. 그때부터 학생들에게 애착이 생겼다. 학원에서 시설 일을 하면서 전문성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에 자격증 공부를 했다. “24시 근무를 했거든요. 하루 24시간 근무를 하면 그 다음날엔 쉽니다. 그럼 그 쉬는 날에 학원을 다녔어요. 일주일에 3회씩.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자격증 따는 데 1년이 걸렸습니다." 나이 먹고 공부한다는 게 여간 쉽진 않은 일이었다. 밤에 야간 근무를 서면서 침침한 눈으로 짬짬이 책을 들여다 봤다. 그렇게 사비를 들여가며 자격증을 취득하고 2010년 겨울, 직장을 중앙대학교로 옮겼다.

시설노동자 김정갑 씨가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발언하고 있다.

  "학교에서 일하게 됐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자신이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뻤다. “여기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서 학생들이 다 자식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즐겁게 출근을 해요." 물론 일이 힘들지 않은 건 절대 아니다. 인원에 비해 과다한 업무도 업무지만 화장실 변기가 막혔을 때 뚫는 일 같은 잡무도 한다. 기사로서 자존심 상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다른 데서는 기사로서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런 일을 빨리 처리해줬을 때 학생들의 불편이 없어지니까 한다고 답했다. 원래 출근 시간도 8시이지만, 그보다 삼사십 분 일찍 와서 회의를 하고 기계를 돌린다. 9시부터 수업이 있는데 적어도 수업 1시간 전에는 기계를 돌려야 학생들이 '훈훈’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시설 배관이 터졌다든지 기계 뭐 이런 게 안 돌아가면 급히 조치를 취해서 학생들이 겨울에는 따뜻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 주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고. 그럴 때 학생들이 '고맙습니다', 교수님들이 '고맙습니다’ 할 때 가장 보람 있어요. 그런 말 한마디가 최고죠. 그 이상 더 뭐가 필요 있겠어요." 회사를 위해서가 아닌 학생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학교와 학생에게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느껴졌다.

시설노동자 김정갑 씨가 지하 기계실에서 배관을 보고 있다.

  요즘 같은 겨울이 출긴 하지만 여름보다는 근무하기 낫다고 했다. 겨울에는 야간에도 보일러를 돌려야하기 때문에 추가 인원을 더 채용한다. 그러나 여름에는 추가로 인원을 채용하지 않기 때문에 낮에 일하는 사람들이 밤 10시까지 연장근무를 해야 한다. 토요일, 일요일도 그렇다.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출근한다. 그러나 여름이나 휴일이나 추가 수당이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은 일이 있으면 당연히 나와서 공짜로 일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노조 가입 이전에도 이런 부당한 대우에 목소리를 내봤다. 그때마다 학교는 학교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 노동현장은 늘 학교였다. 학교와 계약관계를 맺는 용역업체가 바뀐다 해도 기존 시설노동자들은 고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지금 회사가 들어오기 전에 있던 회사는 3년 동안 월급이 안올랐으니 이번에 학교와 재계약을 하면 월급을 인상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최저 입찰가로 지금의 회사가 들어왔다.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청소, 방호노동자들은 월급이 올랐다. 학교 총무팀장을 찾아가 이런 사정을 말했더니 자기네들 관할이 아니라며 시설팀으로 가보라고 했다. 시설팀에서는 당신들 계약에 관한 문제는 학교와는 관련 없는 일이니 용역회사에 따지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래서 학교가 야속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작업복 입고 궂은 일하니까 저거가 다 편안하게 교수님들은 학생들 가르치고, 학생들은 수업 받고, 교직원들은 업무를 보고. 그 조건은 그 밑에서 우리가 다 만들어주고 있는데, 느그들은 있으나 마나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학교 내 구성원 취급도 안해주니까 야속하다는 겁니다."

  학교 측이 미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처음에는 정년을 낮춰 용역회사에 만 56세 이하로 채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력충원이 안 되자 정년을 60세로 올렸다. 올해 계약할 때도 나이가 많다 해서 그를 비롯한 몇몇 노동자들은 재계약 대상에서 제외됐었다. "학교 측에서 찾는 젊은 사람들. 여기 있다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서 나가지, 여기 애착을 가지고 안 있어요, 절대. 왜? 급료도 적고 화장실 같은 데까지 청소 다 하고. 그런 기사들 없거든요. 그래서 다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나이든 사람들은 '괜찮다. 학생들을 위해서 하는 거다’라고 생각하니까 일하는 거예요.”

시설노동자 김정갑 씨가 창문에 달린 환풍기를 고치고 있다.

  용역회사에도 부당한 처우 개선을 요구해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회사는 돈이 한 푼도 안 남는다는 말과 ‘싫으면 그만 두든가’라는 무시였다. "당신네들이 나이 들어서 와서 소일거리로 하면서 이게 봉급이 적으면 당신네들이 나가면 될거 아니냐”는 상무의 말에 속상함과 모욕감을 느꼈다. 기술자로서 자신이 하는 일을 소일거리 취급하는 멸시에 자존심이 상했다.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학교를 하나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돌아온 차디찬 말들에 억울하기도 했다. “회사가 사정이 이러이러해서 힘드니 지금은 힘들어도 다음엔 꼭 반영시켜주마. 어떻게 반영시켜주면 좋겠느냐 뭐 이런 걸 의논을 하면 회사에 신뢰도 생기고 같이 헤쳐나가보자 이러는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도 갚는다는데." 지난 추석을 앞둔 며칠 전에는 회사 사람이 와서 "(회사에) 단돈 100원만 남아도 내가 개새끼다”라고 했다. 당신네들이 이런 요구를 하는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명절 때마다 주던 종합선물세트도 못 주겠다하고 돌아갔다. 이번 추석에 시설노동자들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최근 용역회사는 두 명의 직원을 새로 고용했다. 그 두 명 은 사장의 지인이다. 이들은 자격증이 없고 기계를 다룰 줄 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기존에 있던 시설노동자들은 업무 외로 이들을 가르쳐야한다. 시설노동자들의 업무가 가중됨에도 회사에서는 이들과 기존 시설노동자듣의 임금을 동일하게 준다. “보일러 '보'자, 기계 ‘기’자도 모르는 사람들을 데려 와서 우리한테 가르쳐주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 사람들 가르치려고 여기 들어왔습니까. 아니잖아요. 근데 회사는 늘 그런 식이에요." 또한 자격증 있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주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러 오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회사가 자격증 없는 사람을 고용하면 현장에서 일어날수 있는 사고확률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학교와 회사의 대우에 참을 수 없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두려운 미음이 컸다. 가족들도 응원하는 한편 걱정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리는 자기 자신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아야 하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야." 옆에 노동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노동자가 이에 덧붙였다. "우리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이거는 꼭 관철시키고 나가야 다음에 여기 서 일하러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도 우리처럼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자신들의 희생도 감수하겠다 말하는 그들의 눈빛이 걸연해보였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학생들이 우리들의 처지를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행정실 교직원들이 너무 자기네들 위주고 우리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안 해요. 학교가 두산으로 넘어가면서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진짜 너무 한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이 우리 노동자들 실태를 알아서 바른소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람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나에게 핸드폰 배경화면에 있는 자식과손주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다른 노동지들은 또 자랑이 시작됐다며 웃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는 그가 간간히 연주하며 배우고 있다는 기타와 악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이는 들어도 그렇잖아요. 항상 젊은 마음으로 살아야 활력소가 되지.’’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소탈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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