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김한솔
줄거리
화자 '수민'은 암에 걸린 아버지를 돌본다. 아버지를 '태수 씨'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는 수민은 동생 '수진'과 함께 그의 장례식을 준비한다. 태수 씨는 자신의 장례식에 키우던 개 '유자'를 데려오길 바랐다. 이에 수민과 수진은, 과거 태수 씨와 학생운동을 하다 갈라선 '성식이 형'을 설득해 '마지막 훼방'을 도모한다. 성식이 형은 태수 씨가 타고 다니던 휠체어에 유자를 태워 오고, 케이지에서 나온 유자는 장례식장을 엉망으로 만든다. 화를 내는 엄마에게, 수민은 수첩에 적힌 태수 씨의 마지막 지령을 읽어준다. 생전 그의 목소리를 따라 하며, 활짝 웃는 영정사진에 시선을 둔 채.
"공 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전문은 단행본 『사랑과 결함』과 『그 개와 혁명(제 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5년)』 또는 ‘문장웹진’ 웹사이트를 통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1
🐾 소설을 읽는 세 가지 키워드
「그 개와 혁명」은 80년대 학생 운동의 선두에 섰던 58세 ‘태수 씨’의 삶이 그려온 궤적을 훑는다.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과 대치하며 삐라를 뿌리던 사학과 85학번 ‘형주’는, 아내가 ‘수민’을 임신한 이후 성식이 형에게 “우리는 그만해야 될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의 역사를 독자에게 전하는 것은 중소기업을 전전하면서 “환경 운동이니 페미 운동이니 그런 배지들”을 가방에 달고 다니는 30대 딸 수민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지하철에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평범하다고 해서 미적지근하게 산 것은 아니다. 가장 근엄해야 할 장례식을 말 그대로 ‘개판’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2대가 협력해 이뤄낸 혁명이다.
동시대를 다루는 한국 소설은 우리 가까이에 있을 법한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 거리감을 불편하게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 비해 배경과 인물, 사건이 우리 삶과 너무나 밀접하기에 독자로서의 냉정함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소설’이 갖는 효용은 바로 그 불편함에 있다. 때때로 시대가 직면한 문제는 논픽션보다도 픽션에서 첨예하게 재현되고, 독자는 그 가상세계 바깥의 관점에서 문제를 직시한다. 2024년 1월 1일 공개된 이 소설은 본 기사가 공개될 시점과 약 1년 반의 시차를 갖는다. 시간이 만들어낸 여백을 저마다의 의미로 채우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독자의 몫이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소설을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첫 번째는 키워드는 태수 씨라는 인물에서 뽑아낸 것으로, 가족을 인간으로 조명하는 계기로서의 ‘호명’이다. 두 번째는 수민이라는 인물을 태수 씨와의 차이를 중심으로 파악하면서, 세대와 시대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자 ‘상속’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세 번째로는 세대로 대표되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두 집단에 속한 두 인간이 서로를 ‘대면’하는 과정을 다룰 것이다.
호명
🐾 형주로서, 아빠로서, 태수 씨로서
‘내 동생’이라는 동요를 어렸을 때 한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인 내 동생. 엄마가 부를 때는 꿀돼지, 아빠가 부를 때는 두꺼비, 누나가 부를 때는 왕자님. 무엇이 가장 내 동생다운 별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살면서 하나의 호칭만으로 불리지 않는다. 누가 나를 부르는지에 따라 이름, 별명, 직급이나 가족 호칭 등이 결정된다. 개명을 한 태수 씨의 경우 이름 하나가 더 늘어난 셈이다.
태수 씨에게 처음 주어진 이름은 ‘형주’였다. 그 이름으로 58년을 살았지만 태수 씨는 성별이 모호하게 들리는 형주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작명소에서 받은 이름은 오래 살라는 소망을 담은 ‘태수’였다. 형주와 태수, 그 두 이름 사이에는 ‘아빠’라는 호칭이 있었다. 무엇이 그를 가장 그답게 만들어주는 이름이었을까?
태수 씨가 형주로서 살아온 시간 중 독자가 아는 건 그가 학생운동을 하던 20대의 시간이다. 사학과 85학번 형주는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과 대치하며 삐라를 뿌리던’ PD 노선의 운동권 대학생이었다. 그러던 중 함께 싸우던 ‘엄마’와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다. 수민의 탄생과 함께 형주가 ‘아빠’라는 이름을 획득한 것이다. 가장이 된 형주는 성식이 형에게 함께 러시아에 가 수령님을 모실 수는 없다고,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말하며 300만 원을 건넨다. 성식이 형은 북조선의 지령을 받고 러시아로 떠났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복역하는 동안 태수 씨에게 매년 엽서를 썼지만 태수 씨는 거기에 답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개명 소식을 알 턱이 없는 성식이 형은 장례식에 와서도 이제는 태수가 된 형주를 옛 이름으로 부른다. 남루한 행색으로 나타난 그의 말을 끊고, 수민은 형주가 아니라 태수 씨라고 정정해 준다. 2
가족을 만든다는 건 어쩌면 ‘우리’의 범주를 좁히는 일일 수도 있다. 특별하게 아끼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생기고, 그들을 위해 울타리를 치게 된다. 가끔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그들을 우선하게 된다.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꾸역꾸역 출퇴근을 반복하고, 복수가 차는 줄도 모르고 술을 먹고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던 태수 씨의 삶은 책임질 것이 많은 ‘가장’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참는 것, 견디는 것,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내려두고 가족을 묵묵히 지원하는 것. 또는 쉽게 말해 돈을 벌어오는 것.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 가장에게 요구되는 미덕이다. 그렇게 암이 태수 씨에게 찾아왔다. 암이라는 질병의 특징은 무엇인가? 대개 생활 습관과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지목된다는 것, 알아챘을 때는 너무 늦곤 한다는 것, 한국의 사망원인 1위로 꼽히며 생각보다 흔히 걸리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암에 걸리는 이유는 다양하고, 어느 하나 때문이라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 가공의 인물이 하필이면 암에 걸린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적어도 여기서 암이라는 질병은 그가 참고 살아온 시간에 대한 은유다.
🐾 부모를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날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이 소설이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혈연 중심의 가족주의를 지나치게 아름답게 그려내거나 ‘효도 프로파간다’로 읽히지 않는 것은, 수민과 태수 씨가 딸과 아버지의 관계로 만난 동시에 인간과 인간으로서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민은 태수 씨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인 ‘태수 씨’로 자신의 아버지를 부른다. 가족 호칭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자녀가 부모를 “OO 씨”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한국어에서 ‘~ 씨’라는 호칭은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이다. 공식적·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수민과 태수 씨가 터놓고 대화하게 된 것은 태수 씨의 투병 이후다. 이 시기는 '태수 씨'라는 호칭을 쓰게 된 시기와 자연히 맞물린다. 수민은 자궁경부암 발병률이 높은 인유두종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검사 결과 자궁경부암은 아니었지만, 정작 암에 걸린 것은 태수 씨였다. 엎드려 우는 태수 씨와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수민은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대해, 무슨 잘못을 해서 그런 병에 걸렸는지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그들은 서로가 아파할 수 있는 몸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지 않았을까?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살다 보니 그냥 운이 나빠서 덜컥 큰 병에 걸려버리는 그런 연약한 존재 말이다.
상속
🐾 도모하기 어려운 세대
“다 알면서도 참고 사는 거야. 그런데 너네는 왜 그러니?”
태수 씨가 수민에게 던진 물음이다. 수민은 “태수 씨의 삶은 치열하면 치열했지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민이 닮고 싶다고 생각한 태수 씨는 차라리 “모두에게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이다.
수민은 한 회사에 진득하게 다니지 못하고 퇴직금을 받을 만하면 그만두지만, 상황에 맞지 않더라도 하려던 말은 하고야 만다. 이런 기질은 태수 씨와도, 그와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엄마와도 비슷하다. 테니스를 즐기던 엄마는 수민이 태어난 뒤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갔지만, 태수 씨를 은근히 무시하던 페이스북 친구의 머리를 테니스공을 때리듯 내리쳐 응징한다. 미지근하게 사는 것 같으면서도 참고 견디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이 가족은 닮아 있다. 하지만 수민의 삶이 태수 씨와 엄마의 젊은 시절만큼이나 치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NL이 무엇이고 PD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태수 씨와 엄마를 살아 있게 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그것들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똑딱 핀을 만들며 그들은 무슨 도모를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나는 여태까지 도모해 온 일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거창한 일은 생전 해본 적이 없었다.
태수 씨는 정치 변혁을 목표로 NL, PD 진영으로 나뉘어 학생운동을 하던 586세대다. 그에 비해 ‘그렇게 거창한 일은 생전 해본 적이 없었’던 수민은 보다 미시적인 것들과 싸운다. 수민은 조촐한 근무 환경의 플랫폼 기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환경 운동과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다. 수민은 태수 씨가 겪어온 투쟁의 역사를 존중하지만, 그가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묵인한다는 모순을 발견한다. 부녀의 간극에는 사회의 변화가 있었다. 태수 씨와 수민은 각자의 세대를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
우리는 다른 세대와 같은 공동체에서 공존한다. 대학은 공시적으로는 비슷한 세대로 이루어져 있지만, 통시적으로는 한때 20대였던 사람들이 거쳐간 공간이다. 햇수를 채운 사람들은 교정을 떠나고, 그 빈 공간은 매 해 새로운 스무 살로 채워진다. 1916년에 정동교회부설 중앙유치원에서 출발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중앙대학교에도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학생들은 강물처럼 입학하고 졸업해 더 넓은 바다로 떠나가지만, 건물만은 이 땅에 우직하게 남아 낡아간다. 물론 100주년 기념으로 번듯하게 지어진 310관뿐만 아니라 102관, 106관, 의학도서관, 209관, 303관, 305관 등은 2000년대에 들어와 준공된 건물이다. 고학년 인문대생, 사범대생, 사과대생이라면 잘 알겠지만, 1961년 준공된 203관 서라벌홀은 빗물이 새는 등 노후 문제가 오랫동안 제기되어 2023년에 리모델링을 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부분의 건물들이 지난 역사 동안 보수되거나 철거, 신축되었기 때문에 중앙대학교라는 공간은 예전과 완전히 같은 공간이라고 하기 어렵다.
△ 1978년 개교 60주년 기념 ‘한강축전’이 대운동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5
그러나 공간이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사라진 ‘루이스 가든’과 대운동장은 60년대~80년대 학생들에게 광장으로서의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영신관 앞 대운동장은 80년대에 녹지화되면서 루이스 가든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학생운동을 위해 사용되었다. 80년에는 정부 계엄령의 즉각적인 철폐를 요구하는 시국 성토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선 약 4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루이스 가든이 사라졌어도 학생운동의 정신은 여전히 중앙대학교 학생들에게 남아있는가? 2024년 12월 3일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중앙대학교 역시 학교 차원에서 대항하고자 총학생회 회칙 제13조 1항에 의거하여 학생총회 소집을 공고하였으나, 개회 정족수인 본회의 회원 1/10(약 2,500)명을 채우지 못해 해산되었다.
학생총회 무산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세대론을 앞세워 비판할 수도 있다. 요즘 대학생들은 자기 앞가림하는데 급급해서 정치와 사회에는 관심이 없다고, 불평만 있고 담론은 없다고,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는 힘이 사라졌다고, 과거의 치열함은 사라졌다고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요즘 대학생을 만나 보았냐고 묻고 싶다. 수민은 자신과 같은 요즘 애들에겐 “똑딱핀을 만들면서 무언가를 도모할 거리”는 없어도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가 미적지근하게나마 분명 있다고 말한다.
개회 시간으로부터 30분이 지난 오후 6시 30분 기준 정족수의 약 50%가 참석한 ‘무산된 학생총회’는 그대로 무력하게 해산하며 끝나지 않았다. 서울캠퍼스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작성한 선언문을 윤석열 전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규탄 선언문을 총학생회장이 낭독했으며, 이어 단위별·개인별로 연설하고 발언하며 행사가 이어졌다. 광장에 모인 인원은 정치에 대한 요즘 대학생들의 미적지근한 온도를 보여주는 숫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오래 들여다보면 절망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를 섣불리 포기해버리기 전에, 냉담한 현실에서도 저마다의 뜻과 의지로 행동하는 이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 상속재산에는 채무도 포함된다
어린 수민은 태수 씨가 청송교도소에 부치는 엽서를 가져다가 적 한 자 한 자 비밀 일기장에 옮겨 적는다. 투쟁, 노동, 자본, 사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사보타주를 연상케 하는 단어들에 대해 수민은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민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태수 씨와의 정치적 견해는 극도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 부재다. 태수 씨는 가족제도 안 불평등에 대해서만은 무감하다.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서 비판하면서도 불가산 노동인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메갈’이니 ‘한국 여자’니 하는 유튜브 쇼츠를 본다거나, 요즘 여자들은 남자가 무조건 집을 해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인터넷 상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정작 자신 앞에 두 딸이 있는데도, 태수 씨가 보는 젊은 여성은 특정한 프레임에서 왜곡된 상이었던 것이다. 평등한 사회를 도모했던 태수 씨가 보이는 이러한 모순은 새삼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진보 진영의 인사들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그들의 '보편'이 여성에게까지 확장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듯 말이다.
우리 세대는 앞선 세대로부터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을 물려받은 한편, 부지런히 갚아 나가야 할 빚도 이어받았다. 바로 광장 이후, 일상 속의 반민주주의다.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586세대는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고자 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의 20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혹했고, 정권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독재체제에 저항한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논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독재정권이라는 거대 악이 사라졌다고 해서 문제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치에서의 민주주의를 일상의 영역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는 미진했다.
계엄 이후 탄핵 시위에서 여러 세대가 결집했다. 과거의 운동권 세대가 기억하는 시위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일차적으로 그곳에 모인 이유는 같았지만, 같은 구호를 외치는 한편 자유발언 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로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쿠팡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문제, 경기 파주시에 있는 성매매 집결지 용주골에서 재개발 명목으로 진행되는 일방적인 철거(행정대집행)로 ‘성노동자’ 여성들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문제, 학생을 탄압하고 학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동덕여대의 일방적인 남녀공학 전환 추진,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문제, 교제폭력, 이주노동자 자녀가 겪는 차별, 지역 혐오 등 6정치권에서 ‘지금 당장 해결할 일을 하기 어렵다’며 치워두는 문제들을 말했다.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에서 조개로 비유된 것들을 공론화했다.
이제 시민들은 일상 속에 침투한 차별과 배제를 정권 교체가 반드시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운동권 안에서도 성폭력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큰 목표와 조직을 위해 그 사실을 은폐하고 묵인하거나 음모론으로 치부함으로써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추방해왔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저항의 과거사를 기억하는 과정에서 그 한계를 명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거창한 것을 도모하는 일은 아니더라도, 평등을 가장 사소한 영역까지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대면
🐾 개와 그 개
대신 부탁이 있어요. 우리집 개를 장례식장에 데려와 주세요.
장례식은 재미있게 하고 싶다는 태수 씨의 말에 수민과 수진은 그를 도와 프로젝트를 기획해 나간다. 그들은 죽음을 도모하는 사람들답지 않게 우스갯소리를 하며 태수 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묻고, 기록한다. 자신의 마지막을 계획하며, 태수 씨는 수민이 상주를 할 수 없는 제도가 몹시 못마땅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두 딸이 완장을 찰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그제서야 여자는 상주를 할 수 없는 제도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수민은 그의 평소 말버릇을 꼬집듯 “요즘 여자들은 다 해.”라며 태수 씨를 설득해 자신이 상주가 될 것임을 약속한다.
태수 씨의 마지막 혁명은 유자를 자신의 장례식에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과거의 동지인 성식이 형과 두 딸 수민과 수진이다. 여느 때보다 엄숙해야 할 장례식장에 개를 데려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장례식은 망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이자 하나의 문화로서 사회의 규범을 반영한다. 장례식 및 영결식의 공식적인 주관자인 상주의 우선순위는 맏아들, 장손, 장증손, 장고손 순으로 내려오며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기준을 따라왔다. 딸만 있는 경우에는 사위가, 누나가 여럿 있는 경우 막내아들이 상주를 하는 등 여성은 장례식에서 배제되어왔다.
사회의 질서와 관습을 상징하는 장례식장에서 유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서 그 제도를 뒤엎는다. 그 난장판은 ‘태수 씨의 장례식 프로젝트’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사실 유자가 태수 씨의 장례식을 난장판으로 만든다고 쳐도 그게 무엇을 바꾸겠는가? 태수 씨를 되살릴 수 있겠는가, 인습으로 남은 차별을 뿌리 뽑을 수 있겠는가. 이 혁명의 의의는 그렇게 참고만 살아오다가 시원하게 뒤엎어 보는 게 망자의 마지막 소원이었다는 점에 한정할 수도 있겠지만, 수민과 수진을 위한 연대로 읽을 수도 있다. 딸은 상주가 될 수 없는 가부장제의 공간을 뒤집는 것. 그게 태수 씨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혁명 정신 아니었을까? 그리고 당장 거대한 불평등을 없애버릴 수는 없어도 사소한 것, 구체적인 것에 훼방을 놓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일 아닐까.
🐾 구체적인 존재들 마주하기
소설을 읽고 나면 제목의 그 개가 수민이네 가족의 유일한 아들, 반려견 '유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 이 책 제목이 개와 혁명이 아닌 그 개와 혁명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시관형사는 수식하는 명사를 한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라는 관형사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무엇인가? ‘개’라고 하면 하고 많은 세상의 어떤 개든 상관이 없겠지만, ‘그 개’라고 하면 특정한 개 한 마리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
수민이 다녔던 회사의 차장님은 태수 씨와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운동 같은 걸 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요즘 여자들이 그렇게 싫냐는 물음에, “우리 회사 요즘 여자들은 다 괜찮아.”라고 말한다. 자신이 겪어본 회사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내린 결론인 것이다. 수민은 인셀은 사랑할 수 없어도 태수 씨는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랑은 병들어 죽어가는 태수 씨를 보면서 발견한 것이다. ‘아빠’라는 호칭이 아닌 새로운 이름 “태수 씨”로 그를 부르며, 부서지기 쉬운 몸을 가진 인간인 그를 재발견했다. 7
우리는 한 트럭의 미움 속에서 미미한 사랑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데. 더군다나 나는 태수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태수 씨가 아프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일지라도 직접 얼굴을 보고 그의 역사를 들으면 쉽게 미워할 수 없다. 너무 미온적인 얘기처럼 들리지만, 소설을 읽고 상대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두 번째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상대를 저마다의 투쟁을 하고 있는 타자로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속한 어떤 집단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일단 그 사람을 알려고 해보자. 거창한 단어로 상대의 이름보다 더 큰 이름표를 붙여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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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소연, 「그 개와 혁명」, 2024-01-01, 문학광장 웹진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3000000&bid=0003&act=view&list_no=99810 [본문으로]
- 민중민주파(People’s Democracy Faction; PD)를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민중민주주의혁명을 통한 민중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에 주력하는 1980년대 한국 진보주의 운동의 한 갈래다. 한편 같은 시기 진보주의 운동의 다른 갈래인 민족해방파(National Liberation Faction; NL)는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반미 자주화를 목표로 삼는다. [본문으로]
- 중대신문, “의혈은 광장 위에 세워졌다”, 2016-09-11, 박종현 기자 (https://new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26393) [본문으로]
- 중앙대학교 페이스북, 2013-01-28
(https://www.facebook.com/photo?fbid=448716258516676&set=a.194351797286458) [본문으로]
- 중대신문, “의혈은 광장 위에 세워졌다”, 2016-09-11, 박종현 기자 (https://new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26393) [본문으로]
- 한겨레21, “2024 탄핵 광장, 다양한 동료시민 목소리 쏟아져”, 2024-12-21 등록, 2025-05-26 확인, 오세진·손고운 기자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591.html [본문으로]
- 인셀(incel)은 ‘비자발적인 독신주의자(involuntarily celibate)’의 줄임말로, 연애에서 좌절과 실패를 겪은 젊은 남성 위주 커뮤니티의 사용자 집단을 일컫는 신조어다.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반페미니즘과 여성 혐오 정서를 공유하며, 이러한 공격성은 오프라인에서의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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