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장희수
들어가며
“당신이 우리를 대포 앞이나 칼날 앞에 두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 앞에 두었는데,
어떻게 당신의 협박이나 생사의 위협이 나를 움직이겠는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참정대신 한규설-
이번 겨울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던 그 순간부터 따뜻한 봄이 오길 무척이나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꽃샘추위는 물러날 생각을 않았다. 오히려 더 매서운 강풍과 함께 4월에는 강한 눈보라도 몰고 왔다. 덕분에 다시 움츠러든 꽃봉오리는 강한 생명력으로 그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야만 했다. 4월의 눈을 밟으며 정동길을 걸었던 그때로 잠시 되돌아가 본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소리가 담벼락을 타고 넘어와 마음 한 켠에 얹힌 응어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를 피하고자 발걸음을 옮기다 어느 순간 작은 골목에 덩그러니 있는 한 건물에서 멈췄다. ‘중명전' ‘重明殿’. 밝음에 밝음을 더 한다는 그 이름과 다르게 분위기는 그날 날씨처럼 얼음장 같기만 했다. 피를 토해내는 통곡과 간절함이 담긴 울림의 진동이 더욱더 커져만 갔다.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지난날에도,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들의 봄은 꽃을 피우는 계절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 때론 자신의 모든 걸 내줘야만 했던 계절이었다. 그들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
Pt1. 울림의 조각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울려 퍼지는 광장의 목소리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5년 3월 1일, 그날의 외침을 아직도 기억한다. 대한민국 헌법정신 근간의 뿌리가 된 선열들의 희생이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랐지만, 현실은 그저 두 세력으로 갈라진 비극을 보여줄 뿐이었다. 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우리의 요새는 길게 늘어진 차 벽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져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본래 국경일은 국가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대의를 위해 세운 목표를 이루고자 화합과 연대, 통합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3.1절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기념일이며 선열들이 남긴 독립 정신과 투쟁 의지, 대동단결과 같은 역사적 자산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난 3월 1일, 대한민국 역사 이래 두 번째로 1 행정부가 공백을 이룬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권한대행이 3.1절 기념행사를 주관했고, 여러 차례 강조된 ‘국민통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는 과연 이룩할 수 있는 목표이긴 한 것일까? 당연한 것을 지키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마저도 힘들어진 세상이 되어버렸는데 말이다. 우리의 선열들이 지키고자 했던 독립, 통합 정신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찬반 세력의 뜨거운 갈등 구도에 의해 잊혔다. 그렇게 균열이 일어난 요새는 분열과 대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乙巳年, 을사늑약
파도가 우리를 서서히 집어삼키는 동안 2025년, 을사년을 맞이했다. 특히 올해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래로 12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우리의 요새를 통째로 다른 나라에 넘겨주어야 했던,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치욕스러운 수난기. 그토록 귀에 박히도록 듣고 공부했던 내용일 테지만, 다시 한번 짚어보고자 한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2
대내외적으로 정세가 불안했던 1904년 대한제국. 고종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대한제국 중립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선포 하기 위해 미국, 러시아, 일본과 유럽 등 강대국들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좌절되었다. 이후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며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1904년, 일본의 기습과 함께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그야말로 한반도 영토에 대한 이권 경쟁이었다.
일본이 승리를 거머쥐면서 그들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식민지화를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나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 중명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정동 일대를 일본군으로 장악한 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
대외적으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보호국으로 기능하기 위해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제, 외교,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통제를 행사함으로써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강제 불평등 조약이었다. 사실, ‘조약(條約)’과 ‘늑약(勒約)’은 법적으로는 모두 국제조약을 의미한다. 그러나 체결 방식과 정당성에서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조약은 양 국가가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상호 ‘동등’하다는 조건으로 ‘교섭을 통한 조율, 즉 합의점’을 끌어낸다. 반면, 늑약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세력이 ‘일방적인 강압과 협박’을 가해 이권을 취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평등하며 이를 통해 체결된 내용들의 유효성에 대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을사늑약 또한, 고종황제의 재가가 없었으며 (조약에 명시된 필수 조건), 일본군의 위협과 협박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서명을 했다는 점에서 ‘늑약’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훗날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인 <한일병합조약>의 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살을 도려낸 듯한 아픔을 가져다준 근대사의 시작이었다. 엄연히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불평등 국제조약. 이후 우리 민족은 여러 방식으로 해당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맞섰다. 그러나 이미 한국의 주권을 손에 쥔 일본은 통감부 설치를 비롯하여 천천히 대한제국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에 수차례 을사늑약 체결 반대에 관한 상소를 올렸던 민영환은 자결하고 말았다.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 그를, 우리 조선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의 자결은 칠흑 같던 암흑 속에 놓인 대한제국이 저항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은 전 세계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국민은 모두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제국 만세! 대한제국 만세! 대한제국 만세!’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나는 한번 죽음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4 |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토록 많은 기념일이 흘렀는데, 굳이 ‘120’이라는 숫자에 무게를 싣느냐고. 아마 우리 모두에게 41년 간의 일제강점기 역사는 가슴 한 켠에 맺힌 응어리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매번 기억하고, 떠올리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남겨진 우리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응어리를 흐르는 강물에 조금씩 떠내려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 자꾸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게 하며,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자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혹독한 추위 끝에 피워낸 꽃들을 보면서 우리가 역사를 마주하는 자세에 따라 남겨진 우리의 시간도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운 선열들의 고고한 희생과 죽음이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우리를 돕고 있다면, 그 물음에 응답하고 끊임없이 기억하며 되돌아보는 것이 산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Pt2. 파편들의 흔적을 찾아
순국의 양면
온갖 굴욕과 수모를 겪으며 나라를 빼앗기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 아래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는 부당한 침탈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나섰지만, 누군가는 시대의 혼란을 이용해 자신의 실리를 챙겼다. 역사는 그들을 각각 ‘을사의병’과 ‘을사오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같았을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요새를 지키는 것.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와 목표를 가지고 나아갔을 것이며, 그것은 결국 ‘나라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질 것이다. 그 결과 누군가는 역사 속 ‘영웅’으로, 누군가는 나라를 떠넘긴 ‘도적’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을사오적 또한 처음부터 을사늑약 체결에 있어서 찬성의 뜻을 뚜렷하게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과의 협력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였던 그들은 결국 ‘보호, 생존, 현실적인 선택’을 명분으로 삼아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겼다. 반면 어떤 이는 상소와 망명으로 혹은 자결하면서까지 국권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존엄과 신념,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저항한 것이다. 비록 험난한 장애물들이 그들을 가로막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은 1919년 3•1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아래 독립을 선언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사실 을사오적의 존재와 별개로, 이미 친일 세력이 곳곳에 잠식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목숨을 걸고 을사늑약 체결에 완곡한 반대 의사를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정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도자 탓에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국가의 기반뿐만 아니라, 사실상 지난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을사오적에 속한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은 모두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중요 핵심 인사였다. 심지어 이완용은 당시 고종의 최측근 관료이자,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요새가 거센 파도에 의해 가라앉는 형국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했다. 아무리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한들 수백만 명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한 나라의 지도자와 관료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책임감에 대한 부채를 느끼지 않는다면, 나라는 다시 바로 서기 힘들다. 과연 그들의 선택이 정말 나라를 위한 길이었는지, 혹시 선택의 이유가 그저 ‘명분을 위한 명분’은 아니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결국 중요한 사실은 여러 역사의 순간 속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한 방향과 수단은 언젠가는 정의와 윤리의 기준에 준거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명분을 위한 행동에는 언제나 책임감 또한 뒤따라야만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순국선열’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오늘날도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나라를 지키고자 길거리로 나서는 이들이 많이 보이곤 한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애국’을, 자신들의 요새를 지키기 위해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대한민국의 유구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명분은 같을지 몰라도,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세력과 질서에 따라 그 방향은 달라지곤 한다. 물론 개인마다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점 및 목표, 이상적인 질서와 가치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한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모두 ‘애국시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국은 나라의 올바른 질서와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행동하고자 하는 책임 의식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애국’은 자기 주관은 강하지만, 외부로부터 시야는 차단되어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는 허무한 이상주의와 신념으로 가득한 듯하다. 국민 저항권을 거론하며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무시하는 이들, 심지어 중동전쟁의 주역인 이스라엘 국기와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기 위해 성조기를 휘날리는 이들도 존재한다. 과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나라와 가치는 무엇일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며 광장으로 나왔던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부끄러운 역사의식과 상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빛 좋은 개살구
아래 몇 개의 기본적인 질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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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질문들은 대한민국 국적과 역사적 기본 소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답변할 수 있는 매우 상식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역사 사실들을 부정하는, 우리 역사의 출발점과 근간을 뒤흔드는 세력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과일을 고를 때 겉보기에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으면 잔뜩 기대하고 속을 갈라 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론 이미 썩어있는 속에서 온갖 곰팡이가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될 텅 빈 속을 훤히 들여다보면 괜히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이 올라오기도 한다. 필자는 ‘뉴라이트’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너무 생소한 나머지….그대로 직역하여 ‘새로운 빛’...? 이라고 해석한 경험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부끄러운 일이다. 그들은 우리 역사의 새로운 빛이 아닌, 되찾은 요새를 훼손하고 두 동강 내려는 위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그리고 그들의 등장 배경
기존 보수층 우파를 칭하는 ‘Old Right’가 이념적으로 시대 속에서 저물어가던 중 2005년 1월, 교과서 포럼이라는 이름 아래 ‘민족주의 해체’와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를 내건 뉴라이트 세력이 존재를 드러냈다.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와 이대근 성균관대 교수를 주축으로 하여 만들어진 1987년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시작으로, 서울대 국민 윤리학과 교수인 박효종, 경제학과 교수 이영훈 등이 모여 만든 단체였다.
당시 이들은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 되어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반공’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목표를 드러냈다. 특히 한국 역사의 원죄 의식을 불식하고 여러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위대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로 대한민국을 정의하고자 했다. 이후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을 등에 업고 몇 차례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마치 역사학계에 새로운 흐름이 탄생한 것처럼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를 주장한다. ‘민족주의의 해체’와 ‘식민지 근대화론’.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우파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사대주의와 제국주의 이념을 누구보다 더 앞세우며 오히려 역사의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 이들을 해방해 주고, 역사의 주인이라는 훈장을 안겨주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실상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는 찾아볼 수 없다. 정체성이 모호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가운데,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는 그들의 주장과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19세기 위기론과 ‘문명사’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시장 경제를 강조하는 사관
19세기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다양한 위기와 혼란에 봉착했다. 이에 뉴라이트는 제국주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내 패망 요인들을 열거하며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때 등장한 이론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여러 제도와 각종 근대시설 덕분에 조선이 위기를 극복했다는 주장을 담은 이론이다. 이는 서양 문명에 기원을 둔 근대 문명이 이식되고 정착되는 과정인 ‘문명사’로 귀결된다. 6 당시 조선보다 문명적으로 발달한 미국과 일본의 도움 덕분에 비통한 역사에도 한 줄기의 빛과 같은 기회가 찾아와 극복할 수 있었다는 맥락이다. 이런 논리로 그들은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재배된 쌀은 ‘착취와 수탈’이 아니라 조선의 시장경제 체제 확립을 위해 도입된 ‘수출과 수입’의 매커니즘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우리의 뼈아픈 역사로 기록되는 강제 동원 위안부 문제 같은 경우,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를 원인으로 지적했다. 총독부가 이들을 강제 동원한 것은 아니며, ‘자발적 고수익 고위험 매춘부’라고 주장하며 본질을 흐리고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아야만 했던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있다. 7
해방 이후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또한 그들은 이승만을 숭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로 여기서 ‘1948년 건국설’을 주장하고 있다. 1919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주권 국가가 아니며, 국가의 3요소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입헌 민주주의 국가 수립은 이승만에 의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비극이 일어났던 1950년대는 암흑기와 독재의 시기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체제와 반공 체제를 앞세우는 발전의 시기라고 비약한다. 이후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 체제 덕분에 비현실적인 민주주의 관점과 위험한 통일지상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한국의 산업화를 이룬 세력이라고 칭송한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앞서 보았듯이 그들의 이론과 역사관은 잘못된 현실 속 ‘승자의 결과만을 기록하는 역사’에 매우 편향되어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보편성, 타당성, 객관성이 부재하기에 역사적 부채감, 죄의식을 느껴야 할 일본과 친일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오히려 패배의 역사로 접어들 뻔한 조선에 극복의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꼴이다. 마치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조림 사업 했죠. 도로를 놓았죠. 학교와 병원도 세웠죠. 우리가 조선인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지 좀 보세요!” 이는 일본인 통치자들이 관광객들에게 즐겨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개선은 근본적으로 누구를 위해 도입되었는가? (…) 조선인들이 만주의 평야나 시베리아 산림에 가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면, 대체 뭐 때문에 좋은 도로와 울창한 산림을 고맙게 여기겠나? - 윤치호 일기, 1949.4.12 |
일본이 우리 조선에 도입한 근대 시설들과 제도들은 조선의 궁극적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 덕분에 우리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려면, 그것이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식민지 국민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다시 말해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역사 왜곡과 폄하는 제국주의의 침략, 약탈과 수탈적 속성을 부정하고, 비통한 역사로 인해 희생된 많은 민중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8 썩은 뿌리를 제대로 잘라야 했는데, 어느덧 줄기를 키워내 땅속 깊이 박혀 주변 뿌리들까지 썩게 만들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바랐던 광복을 이뤄내고 친일 세력 청산과 처벌을 기대했지만, 곧이어 미국과 소련에 의해 군정이 시작되었다. 특히 미국은 자주, 개혁적인 정신이 있는 독립운동가들보다는 실질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친일파들을 강제 등용했다. 이제 그들은 일제가 아닌, 미국에 충성하며 자신들의 치부를 덮어줄 새로운 정부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이승만 정부가 탄생했다. 당시 이승만은 국회에서 지지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행정 관료와 군대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친일파 출신의 관료들을 대거 등용해 국정을 운영했다. 당시 국회에서는 반민족 행위 처벌법 9 을 제정했지만, 이승만은 친일 세력 청산보다 정부의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한 반공 논리를 더욱더 앞세우며 오히려 반민 특위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친일 세력들을 처벌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던 자료들은 모두 훼손, 압수되었다. 그 결과 노골적인 방해로 인해 688여 명이 조사를 받았으나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오직 40여 명뿐이었다. 그러나 실형 선고를 받았던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나 반민족 숙청 작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던가. 여전히 많은 이들이 친일 세력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과 뉴라이트의 이론과 사상에 대해 많은 의문과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부정되는 한국의 역사
그렇다면 이들은 이런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한 이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걸까? 이들은 왜 잘못된 신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일까? 갉아먹은 양심과 신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역사관과 이론을 통해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세력을 조직화하여 차츰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한때는 사회의 귀퉁이에서 어둠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던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당당하게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은 윤석열 전 대통령 정부의 출범부터였다.
뉴라이트 성향 인사 등용
헌정사상 최초의 검사 출신 대통령이었던 윤석열. 지도자로서 정치적 기반과 경험이 전혀 부재한 상태에서 2022년 새롭게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우익단체 핵심 인사들’로 자신의 기반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국가안보실 차장 김태효, 통일부 장관 김영호, 고용노동부 장관 김문수, 진실화해위 위원장 김광동,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차기환,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정승윤,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김낙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이진숙,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박지향, 독립기념관 관장 김형석, 독립기념관 이사 박이택 등> 이처럼 국가 주요 기관뿐만 아니라 국민의 삶에 다방면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역사, 방송, 교육 등과 같은 분야에도 주요 인사들을 대거 포진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뉴라이트’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답변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과거, 인사 청문 발언을 보면 왜곡된 역사 인식을 뉴라이트의 담론과 함께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는 허수아비의 힘을 빌린 이들은 그들의 왜곡된 사상과 역사관을 여과 없이 구현하고 있었다.
사상 초유의 반쪽 광복절
2024년 여름, 독립기념관 신임 관장으로 ‘김형석’이 임명되었다. 취임 후 독립기념관장으로서 ‘친일파로 매도된 인사들의 명예 회복에 앞장서겠다’라는 발언은 큰 후폭풍을 몰고 왔다. 이에 광복회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독립운동 유관 단체들이 김형석 관장을 두고 ‘뉴라이트’ 인사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반발에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실은 그를 사퇴시킬 명분이 없다며 답변을 일축했다. 그렇게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은 독립 유공자와 후손들이 보이콧 선언을 하며 반쪽으로 쪼개졌다. 이날 경축식에서는 독립 유공자에 대한 언급 없이 2024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중심으로 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여전히 김 관장은 본인과 관련된 뉴라이트 의혹에 대해 부정하며 자신의 역사관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는 점, 1945년 대한민국 광복 인정 여부에 대해 답변을 거부한 점, 1948년 건국설 주장 등과 같은 발언을 보았을 때 그가 과연 자주와 독립의 민족정신을 토대로 올바른 국가, 역사관을 심어주는 독립기념관을 이끌어갈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든다. 한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임기는 오는 27년 8월까지로 예정되어 있다.
퇴행의 길을 걸었던 무능한 지도자
위 사진은 지난 윤석열 정부의 광복절 경축사를 과거사 언급, 일본 비판, 국내 정치, 주요 발언 측면에서 비교한 그래프를 보여준다. 특히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광복회와 독립운동 단체의 불참에 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으며, 지도자로서 ‘협치와 설득’의 자질을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줬던 ‘가짜뉴스와 사이비 지식인들의 거짓 선동’에 대한 비난을 퍼붓기에 바빴다. 과연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란에 진정으로 휘둘렸던 이는 누구인가? 참고로 그는 계엄 전후로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강하게 편향된 정치 색채감을 드러내며 각종 음모론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극우 유튜버들과 긴밀한 소통을 해왔다. 또한 자신과 대척점에 놓인 이들을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 세력들로 몰아세우며 과거 독재정권에서 세력화를 위해 주로 사용하던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라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의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발언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에 대통령은 일본이 이미 수십 차례 사과했기 때문에 피로감이 쌓여 있다며 마치 짜증 내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단 사탕이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발언으로 국민의 애통과 분노에 기름을 가득 부었다. 그가 그렇게 강조하곤 했던 ‘국민의 뜻’에 5천만 명의 국민은 더 이상 포함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여전히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있어 해결되지 않은 사안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독도 영토 분쟁, 위안부, 강제징용,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해 일본은 반성하지만, 법적 책임 이행,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사과, 역사 청산에 있어서 어떠한 노력도 보이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역사, 사회적 제도와 각종 시스템은 윤 정부의 세력화를 위해 국가조직에 본격적으로 침투한 반민족적, 반민주적 집단에 의해 급속히 훼손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쌓아 올린 자유와 평등의 역사, 민주주의를 ‘아무렇지 않게’ 폄훼하고 진실을 향한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그 순간 진정한 위기는 찾아온다.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지는 것’은 결국 역설적 상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과 한국은 앞으로도 계속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 측면에서 협력 파트너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한일 협력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역사 앞에서 최소한의 부끄러움이 없을 때, 피해자 중심의 진실한 사과가 동반되어 서로에게 신뢰감과 믿음을 안겨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여전히 첫 단추조차 제대로 끼우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당신과 내가 깊이 끓어오르는 울분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면, 우리에겐 아직 역사와 시대를 지킬 힘과 의지가 충분하다. 10
Pt3. 조각들을 모아, 모아
유독 길었던 그해 겨울,

지키고자 하는 것들에 한해 영속하고자 하는 욕망은 가득했지만, 이를 위해 부차적 수단으로 내세웠던 이념과 세력은 한계를 다했다는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전에 닥친 위기 끝에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당연한 것을 말하고 지키는 것조차 어려워진 수난기 즉 시대의 역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앞선 세대의 희생과 투쟁으로 얻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다시 한번 광장에 나섰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함께’라는 울타리 안에서 목소리 높이고, 온기를 나누며 123일이라는 시간을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이 드디어 우리에게 한 발짝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법은 그를 심판했고,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공화국임을 재확인할 수 있는 희망의 꽃을 피워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토록 추웠던 지난겨울을 보내면서, 한 가지 확신을 얻게 되었다. ‘과거는 현재를 돕는다. 또한 죽은 자는 산 자를 돕는다’라는 것을.
120년 전 우리의 요새를 치욕스럽게 빼앗겨야 했고,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희생과 눈물을 감내해야 했던 지난 과거는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1919년 3월의 조선이, 1960년 4월의 시민들이, 1980년 5월의 광주가 결국 2024년 12월의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이렇듯 수많은 실패와 눈물, 환희, 고통의 기억 속에서 얻은 교훈과, 시대를 초월하는 역사적 가치와 자산들 덕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요새를 지킬 수 있었으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 앞에 묵직한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원죄 의식 속에서 죄책감과 패배감만을 오롯이 짊어지자는 뜻은 아니다. ‘어제와 오늘의 기록’이 언제나 지금의 우리를 향해있는 가운데,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떠한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다시 만날 세계
모두가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당연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꿈을 기꺼이 내려놓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때의 봄, 지금의 우리가 맞이한 봄 또한 매순간 무언가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
역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난 시간 속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그들은 진정으로 무엇을 위해 싸우며 어떤 꿈을 꾸었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계속 던져야만 한다. 앞서 이야기한 부채감은 어쩌면 이 질문들을 던지며, 지난 시간을 잊지 않고 되돌아볼 수 있는 9자에게만 남겨진 몫이다. 끊임없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관심을 가지고, 비평적인 시선을 가진 자만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역사를 기록하는 눈과 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그들의 꿈을 씨앗처럼 품고 더 먼 곳으로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잊힌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그날까지.
- 이름 없는 희생 또한 모두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
- (첫번째 사례는 2017년 3.1절, 16년 말부터 국회 탄핵소추로 직무정지 처분을 받았던 박근혜 대통령을 대신해 황교안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으로서 기념사를 진행했다.) [본문으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5.04.30 [본문으로]
- 민영환이 자결순국하면서 남긴 유서 (공훈전자사료관) [본문으로]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 역사교육연대회의,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2009 [본문으로]
- 이영훈 외 4명, 「반일종족주의」 , 2019 [본문으로]
- 역사교육연대회의,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2009 [본문으로]
-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 (위키백과) [본문으로]
- 한겨레, “윤석열이 남기고 간 폭력의 구조”, 2025.04.30, [신진욱의 시선] [본문으로]
- 정상규,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 2017, 1990년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인물들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들을 소개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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