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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호 86호 <닻; ( )에 닿다>/문화

우럭 한 점에 사랑과 우럭 한 점의 우주 그리고…

by 중앙문화 2024. 8. 4.

2024 봄여름 86호 <닻; ( )에 닿다>

                                                                                                                                                                     

 

 

                                                                                                                                                                    수습위원 이조은

 

 

<들어가며>

 

"그는 가끔 너무하지만 평소에는 되게 착해. 그러니까 사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그 사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그 사람은 나 없으면 안 돼." 

 

 어떤 관계가 스스로를 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보며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해한 적이 있는가? 혹은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 고통스러워한 적이 있는가? 

 

 진한 로맨스 영화에서 남녀가 서로를 죽일 듯 소리를 지르다가도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익숙하다. 보다 보면 사실 이런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가 하는 사랑을 의심하고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을 꿈꾸기도 한다.

 

 과연 이렇게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아야, 필연적으로 이토록 심각한 고통을 유발해야만 ‘진짜 사랑’인 걸까?  왜 누군가는 이런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걸까? 진짜 사랑의 탈을 쓴 ‘공의존’에 대해 <우럭 한 점 우주의 맛>를 통해 알아보자. 

 

 

마미 이슈?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존재이자 추후 일어날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점인 엄마. 불행하게도 엄마와의 애착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거나 유지하는 데 문제가 발생하면 복잡한 애착 손상이 생겨나게 된다. 이는 이후 자녀가 형성하는 모든 인간관계에 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엄마와 자녀를 둘러싼 모든 총체적인 문제들을 간단하게 일컬어 ‘마미 이슈’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미 이슈’는 각종 미디어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모성’이라고 불리는 어머니의 따뜻함을 적절한 때에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 그의 안락한 품에 안길 수 없었다는 이유로 각종 악독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악당은 작품에서 익숙하게 등장하는 인물 유형이다.

 

     

▲ 스타로드와 하이 에불루셔너리의 논쟁. 유튜브 Trailerspot 영상 캡쳐. [각주:1]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3>의 스타 로드가 아주 시니컬한 투로 자신의 악마적인 계획을 늘어놓으려던 빌런 하이 에볼루셔너리에게 “엄마한테 사랑받지 못했다고 바보 같은 짓을 합리화하는 자에게 연설 따위 듣고 싶지 않다”라고 일축하듯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러한 ‘마미 이슈’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결합되어 캐릭터에게 입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정신분석학의 대표주자로서 문학비평에서 활발하게 활용되는 개념으로 엄마와 아들의 성적인 관계를 다룬다.

 

 다만 이러한 소재가 남성일 경우 대다수는 작품에서 어머니의 부재 또는 아버지의 과실로 인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아버지를 향한 분노로 표출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어머니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따뜻한 성녀와 같이 묘사된다. ‘마미 이슈’를 겪는 남성 캐릭터 중에서 어머니라는 존재의 부재가 아닌, ‘정신적’인 어머니의 부재로 괴로워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나르시시스트 어머니의 지배 아래 자라 ‘정신적’ 어머니가 부재한 동성애자 남성인 ‘나’의 사랑 이야기다. 

 

 

불안한 자아의 연극, 자기애의 두 얼굴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에게 고통을 유발하는 가장 전형적인 부모 유형이다. 우선 나르시시스트, 나르시시즘부터 짚어보자. 나르시시스트는 B군 인격장애 중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애’의 사전적 의미와 다소 구분되는 자기애성 인격장애 내의 ‘자기애’의 의미에 대한 오해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또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나르시시스트 체크리스트는 뚜렷하게 드러나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지만, 나르시시즘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접할 경우 여러 가지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에서 말하는 자기애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사랑하기는커녕 받아들일 수조차 없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 낸 하나의 방어 기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충분히 아끼는, ‘self love’의 자기애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사람들은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들이 보이는 것처럼 자신감이 넘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자아존중감은 누구보다 약하다.  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고 이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나의 약점이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그런 나의 모습도 적당히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약점을 포장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늘 속여야 하는 무거운 짐을 안고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깜빡 속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내고 그 자아가 자신의 실제 모습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나약한 자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꿈틀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를 계속 속이는 것을 방해하는 타인의 부정적 평가에 매우 민감하고 정서가 불안정하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남을 이용해 거짓 자아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 능숙하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유형 외에도 조용하고 소극적인 유형 등 다양한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매우 평범하고 친절하고 매력적이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를 실생활에서 판별해 내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관계로 고통받고 있다면 나와 내 파트너의 모습이 어떤 양상을 보이고 있는지 한 번쯤은 돌아보는 것이 좋다. 

 

이들은 다양한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역할을 차지한다.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 연인 관계, 친구 관계, 업무 관계 등. 특히, 부모-자식 관계에서 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는 큰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자녀의 감정에 공감해 주지 않고, 마땅히 가져야 할 자녀의 최소 경계를 침범하고, 자녀의 감정 표현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자녀를 자신의 뜻에 맞게 조종하고 조건적 사랑만을 준다. 심기에 거슬리면 자녀는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한다.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한 어린아이의 투쟁은 성장한 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감정의 감옥: 나르시시스트 엄마와 ‘나’의 이야기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엄마는 대외적 이미지를 굉장히 중시하고 성취에 목숨을 건 사람이다. 기준이 매우 뚜렷하고 이를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나'에게 밥먹듯이 강요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가 동성인 선배와 놀이터에서 키스하는 것을 목격한 엄마는 나를 정신 병원에 집어넣는다. 그 사건은 '나'의 근본적인 트라우마로 자리 잡는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엄마에게 정상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극히 일부이자 그저 대표적인 장면일 뿐이다. 평소 '나'가 나르시시스트 엄마와 지내며 받았을 더한 억압은 짐작만 가능하다. 이후 엄마는 "다 너를 위해서였다"라고 말하고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조건적 사랑을 가벼운 말 한마디로 평생 시달리며 굶주려했던 무조건적 사랑으로 쉽게 포장해 버리는 엄마에게 '나'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녀에게 일생 동안 가하는 고통에 관련된 이야기는 비단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카프카는 법학도의 길을 강요하며 아들을 자신의 업적이자 자존감의 원천으로 삼은 아버지에게 꿈을 짓밟혔다. '대단한 너'를 보여달라며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압박된 카프카는 성장 이후에도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제가 하는 거의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전 늘 더듬거리게 되고, 결국 입을 다물게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소파에 앉아서 세계를 지배하십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카프카는 이렇게 서술한다. 

 

 또 남자와 마침내 헤어진 뒤 자살 기도를 해 병원 침대에서 깨어난 ‘나’와 어머니의 첫 마디를 둘러싼 한 장면.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그게 엄마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사실은 내내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만 할 게 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삽관이 돼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토록 만성적인 실망감이 만연하여 엄마에게조차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을 하지 못하는 ‘나’가 다른 누구에게 솔직해질 수 있을까.

 

 ‘나’와 같이 오랜 기간 본인의 욕망을 알지도 못한 채 부모 욕망의 대리물로 살던 사람들은 공의존자(codependent)로 자라기도 한다. 타인의 욕망을 본인의 것보다 중시하고, 이를 통해 본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헌신적인 사랑으로 자신의 자신감을 북돋아 줄 공의존자를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이들을 쉽게 끌어들인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 믿고 자란 공의존자는 반쪽짜리 사랑으로 유혹하는 또 다른 나르시시스트들에게 쉽게 마음을 내준다. 연인 관계를 맺고 공의존(codependence) 관계를 형성하고, 결혼하여 다시 공의존자를 만드는 악순환의 굴레에 갇힌다. 

 

이쯤되면 '미친 여자'인 엄마 밑에서 평생을 자라 온 '나'가 '별로인 남자'인 그에게 푹 빠져버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별로인 남자'는 한 번도 '나'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이 없으니 말이다. 

 

 

‘나’와 ‘그’의 운명적 공의존 

 

▲영화 <피아니스트>의 장면. 아시아 경제. [각주:2]

 

 결국 엄마와의 숨막히는 생활과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 이끌리듯 수강한 사설 아카데미의 인문학 교양강좌에서 그가 만난 것은 매력적인 남성의 탈을 쓴 ‘엄마’로도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2001년작 <피아니스트>와  닮아있다. 소설에도 드러나듯 엄마 인생의 대리물로서 나 자신의 심리적인 욕구를 억압하며 살아온, 해소되지 않은 유아기적 욕망을 그대로 지닌 채 몸만 커버린 주인공과 엄마와의 관계가 서사의 주축이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피아니스트>에서는 엄마와 딸이 부부처럼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자며 엄마가 딸의 일거수일투족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또한 딸이 남편 대신 가정의 상징적 남성의 역할을 수행한다.  엄마와 딸의 관계가 (1) 동성이라는 점, (2) 주인공 ‘에리카’의 대학 교수라는 높은 사회적 위치와 비뚤어진 이상성욕적 욕망의 괴리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점, (3) 엄마와의 관계와 상대 남성과의 비극적 관계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에 비해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남성 동성애자인 ‘나’와 엄마, 그리고 어떤 형태든지 ‘나’가 강렬한 사랑을 느낀 남성과의 관계와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피아니스트>의 결말에 ‘에리카’는 가슴에 스스로 칼을 찔러넣고 또다시 집으로 향하면서 비극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나’는 ‘엄마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운명을 되풀이하는 자해적 선택을 하는 것을 거부한 채 스스로의 감정을 마주한다. 5년만에 날아온 그의 편지를 계기로 ‘나’는 한편으로는 성장했다고 볼 수 있을까. 

 

나로서는 그런 것들 따위 별 상관도 없었고, 다만 그냥 그를 안고 싶을 뿐이었고, 그에게 안겨서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온몸으로 그의 촉감이며 심박 같은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는 그런 내 마음은 알지 못한 채 마

침표를 찍듯 이렇게 말했다.

 

—영씨는,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러는 당신도 내 세상을 알지 못하잖아요.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그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그를 껴안은 채 심박 수 따위의 것들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그와 간절하게 하나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가 하는 ‘형이상학적 헛소리’를 한심하게 여기며 미워하고, 나의 치부를 드러낼 수도 없다. 그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다고 느낄수록 모순적으로 더욱 사랑에 몰두하는 듯 보인다. 마치 어머니를 미워하지만, 회사를 두 번이나 관두고 24시간 옆에 붙어 간병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이러한 자발적인 선택들을 반복적으로 운명이라 합리화하며 말이다. 

 

 그의 해소되지 못한 트라우마와 애착 손상은, <피아니스트>처럼 이상성욕의 발현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그의 아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고등학생 때 진단받은 이후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흘러서 그 시절 내린 진단이 어른이 돼버린 현재, 무효화돼 버린 걸까? 아니면 그동안 권유받은 정신과 상담치료를 모조리 거절한 어머니와의 관계가 개선되기라도 한 걸까?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나’의 상처가 자연 풍화라도 된 것일까? 

 

  ‘나’는 전문가의 소견으로 ‘전쟁 피해자와 같은 강도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초연하게 생활하는 듯 보인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엄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그’처럼 아픔을 떠벌리지도 않고 단지 분위기에 맞춰 엄마가 암투병중이라 마지못해 등가교환처럼 둘러댈 뿐이다. 

 

 이렇듯 가장 가깝고 가까워지고 싶은 존재에게조차 그를 구성한 본질적 아픔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를 보고 있으면 각자의 슬픔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모두에게는 슬픔이 있고, 나의 슬픔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전혀 아니니 우쭐대지 말자’는 사고를 바탕으로 모든 부정적 감정을 억압하는 현대인의 모습. 멈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몸과 마음을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이를 ‘갓생’이라 여기며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현대인의 모습. 나만 아픈 게 아니니까 아픔을 티 내기라도 하면 부끄러운 것이 돼버리는 세상 속에서 ‘나’는 슬픔 자체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이를 끊임없이 억압한다. 무언가를 움켜쥔다고, 무언가에 집착한다고 해서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마찬가지로 무시한다고 해서 이미 있던 것이 눈치를 보고 알아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가 오랫동안 억압했던 엄마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는 오히려 몸집을 불려 내면화된 수치심으로 숨통을 조여 온다. 

 

 이 수치심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다가 마침내 사랑할 대상을 발견하자마자 무섭게 치고 올라와 ‘공의존성’으로 발현된다. 엄마처럼 자신을 제대로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 ‘별로라는 걸 알면서도’ 지독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남자를 발견한 이후부터. 그리고 그 사랑을 운명이라 여긴다. 

 

그를 등진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과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로부터?

아무 데나 동성애를 갖다 붙이는 등신 같은 자들에게? 이딴 말도 안 되는 쓰레기 같은 구절을 모으며 자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그에게? 별로인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좋아해버리고, 단지 그를 좋아한

다는 이유로 그의 컴퓨터를 마구 뒤지며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나에게? 어쩌면, 그 모두에게. 아니,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좀 받고 싶어졌다. 딱 한번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그럴 일은 아마 영영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잠시라도 사과받고 싶은 마음을 품은 나 자신이 우스워졌고 얼른 가방을 싸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그를 내버려 둔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의 사랑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그의 파일을 발견한 순간, 그 즉시 학습된 무기력을 느끼며 다름 아닌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마음속 어딘가 깊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랑을 시작했을 때, 혹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 고통은 이미 예견된 거였다고. 상대가 누구인가와 관계없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어머니가 그에게 언젠가 꽂았던 칼이 또다시 그에게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랑의 결말을 포함한 이 망한 사랑의 모든 것을 마치 비통한 운명처럼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받은 정신적 충격을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는 욕구로 치환한 ‘나’는 남자를 엄마와 동일시하고 있었음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 상처를 처음으로 진정하게 받아들인다. 그동안 그가 나에게 준 착취적 사랑을 애써 못 본 척하고 있었지만, 트라우마를 자극함으로써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엄마 있잖아,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을 뗐는데, 다음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중략)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매일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5년만에 그에게서 온 편지 때문에 ‘나’는 조금 흔들리지만, 늘 만나던 장소에 나와달라는 그의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마침내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상처에 대응하기로 한다. 이와 함께 암투병하는 엄마의 수발을 들며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난생처음으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읊조린다. 그녀에게 사과를 받지 못할 것을 생각하며 그저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만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나’는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엄마를 뒤로 한 채 화장실로 도망쳐 그가 준 편지를 갈가리 찢는다. 태어났을 때부터 족쇄처럼 함께한 공의존과의 작별을 예고한다.



 특별한 존재의 환상:공의존의 덫




  ▲만화에서 드러나는 공의존의 모습. 암살교실 6권 44화 일부 [각주:3]

 

 공의존(codependency)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는 ‘나’가 암투병 중이라 배뇨에 어려움을 겪는 어머니를 돕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들이 어머니가 오줌을 누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장면을 통해 오이디푸스적으로 섹슈얼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 이는 이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 평소에 강하고 나를 공격하던 엄마의 가장 무방비하고 약한 모습을, 오직 나만이 지켜보는 것이다. 심지어 늘 내게 필요하지도 않았던 ‘도움’을 제공했던 엄마가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마치 평소 혐오하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던 약점을 허무하게 내보이며 손을 뻗는 상황. 

 

 실제로는 이 무방비함이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경 써야 할 이미지를 나에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서 오는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공의존자에게는 자칫 이가 나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 사람은 역시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나만 그걸 알아볼 수 있고 나만 이 사람을 도울 수 있으니 나는 이 관계에서만큼은 꼭 필요하고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사고가 공의존자의 머릿속에 깊이 자리 잡는다. 따라서 이후 본인이 나르시시스트들의 욕망의 대리물로 기능해도 크게 괘념치 않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일종의 숭고한 자격으로 여기며 끊임없는 합리화를 통해 꾸역꾸역 고통을 이겨내고 옆에 머문다. 그 옆에 있어야 그동안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부모님과 겪었던 공의존 관계를 그대로 연인 관계에 적용하여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러한 관계만이 사랑이라고 느낀다.



보이지 않는 굴레, 공의존의 욕망과 충돌

 

 건강한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 불건강한 사랑의 형태를 내면화한 결과는 엉망진창인 공의존적 애착 형태로 드러난다. 절대 이들이 남들보다 ‘강렬한 자극’을 진정으로 원하기 때문에 공의존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상대방을 완전히 가지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약간의 불안이 관계를 유지하는 매력적인 요소이긴 하다. 그러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상적인 애착 기능을 상실한 채 의존과 조종에 매달리는 이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공의존 관계는 인격장애를 진단받았거나 앓고 있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공의존 관계를 겪고 있다고 해서 무작정 자기애성 인격장애나 의존성 인격장애를 의심해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겉으로는 공의존 관계에서공의존자가 일방적인 피해자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 모습을 보이고, 이를 기꺼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와 공의존자는 모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둘의 만남은 마치 "널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와 “그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의 끊임없는 싸움과도 같다. 

 

 공의존자를 의지가 없는 일방적 피해자이자 순진무구한 '선'으로 보는 것은 옳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는 시선이다. 왜냐하면 공의존자는 의지와 힘이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의존자의 수동성을 강화시키는 인식, 스스로에게 힘과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근본적인 의지가 없다는 뿌리 깊은 인식이 공의존성을 악화시킨다. 자신을 상대에게 내맡김으로써 고통의 굴레를 자초하고 있음을 깨닫고 굴레를 깰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공의존자는 본인이 평생 욕망을 억압당했음을 깨닫고 스스로의 욕망이 무엇인지 직시할 때 비로소 정상적인 관계로 첫걸음을 디딜 수 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즐거운 사라'의 저자이자 국문학과 교수인 마광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문학과 성』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선 우리에게 친숙한 진달래꽃의 시 일부를 먼저 살펴보자.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마광수는 다음과 같이 이를 바라본다.

 

마조히즘이란 직접적인 성적(性的) 쾌락의 탐닉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자신의 극기적 수련이나 금욕적 생활을 통하여 최고의 기쁨을 느끼는 종교적 고행까지를 포함한다. (중략) 이러한 맥락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해석해 보면 매정하게 떠나는 님은 사디스트요, 버림받는 여인인 이 시의 화자는 마조히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마조히스트인 이 시의 주인공은 버림받아도 좋으니 제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밟아달라고 님에게 호소한다.

 

마조히즘은 일체의 자기주장이나 능동적인 결정권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포근한 안식감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완전히 자기의 몸을 맡겨, 그에게 노예와 같이 철저하게 복종만 하는 데서 얻어지는 쾌감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에 소속되어야 안심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 이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기보다는 누군가가 자기를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잠재적 심리를 갖고 있다. [각주:4]

 

 마광수가 주장한 이러한 마조히즘의 정신적 측면은 더 나아가 공의존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은 실제로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상대방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맡김으로써 쾌감과 편안함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 

 

 공의존자에게 사랑이란 자학과 자기희생을 통해 자신을 찾으려는 모순적 시도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대 최고의 밴드 중 하나인 라디오헤드의 'All I Need'에도 사랑에 관한 해석이 있다. 

 

 “It's a song about need. Need is not necessarily the result of love, but it can be. It's about the need we have to be with someone, and how we find it difficult to see outside of that vicious cycle when we feel there is no one else we can be with.

 Sometimes this happens as a result of love, but sometimes it's just the result of our insecurities. 

 When you're experiencing it, all you want to do is cling to the pain, hold on to the misery... you hate it but don't wanna let it go, like a tasteless piece of gum…

 

“필요에 대한 노래입니다. 필요가 반드시 사랑의 결과는 아니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할 필요성,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그러한 맹목적인 필요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의 결과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지 불안정함(결핍)의 결과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경험할 때,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은 고통에 매달리고, 불행을 붙잡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싫어하지만 절대 떠나보내기는 싫어합니다. 마치 단물 빠진 껌 조각처럼…”

 

 공의존은 단물이 빠진 지 오래된 껌을 턱이 아파도 영영 질겅질겅 씹으면서, 사랑이 주는 극심한 고통 따위 고통스럽다고 여기면서도 그 고통 자체에 마침내 의지해버리는 것이다. 나의 다른 문제를 잊기 위해서 수면 위의 단 하나뿐인 고통에 죽도록 매달리며 자기 자신을 속이며 견딘다. 해로워도, 아니 해로울수록 멈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의 탈을 쓴 바로 이 공의존이다. 

 

 나는 음악 감상을 참 좋아한다. 평범한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음악이 특별하다는 <비긴 어게인>의 어느 대사와 마찬가지로. 음악은 24시간 내내 폰과 에어팟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고, 음악만 있으면 주위와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것들을 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극악무도한 지옥철 등굣길과 무엇이든 필요한 시험 기간 같은 순간들 말이다. 틈날 때마다 최대한 자극적인 음성에 내 귀와 영혼을 점철시켰고 언젠가부터는 무의식적으로 시끄럽거나 우울한 음악만 들었다. 그러다 에어팟을 깜빡하고 챙겨 나오지 않은 어느 날, 새로운 경험을 했다. 바람 소리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을 그대로 들으며 정말 우습게도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고 평소에 생각했던 것들이 다르게 느껴졌다. 시끄럽고 정신없다고만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는 왠지 포옹처럼 느껴졌고, 피하고만 싶었던 내면의 목소리는 평화로운 주변과 어우러져 그다지 날카롭지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음악을 온전히 좋아한 것이 아니라 도피 수단으로 이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혹은 도파민 중독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어쩌면 음악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음악과 공의존하며 사랑의 아름다운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던 게 아닐까 같은 조금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전부 다 그냥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속이고 스스로를 희생시키며 붙잡고 있는 것이 얼마나 나쁜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사랑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부정하면 밑 빠진 독에 끊임없이 독극물을 쏟아붓게 된다. 너와 나의 흐릿한 정신적 경계가 너와 나를 모두 파괴시키는 비극. 너의 문제까지 다 내가 떠안아버리게 되는 게 당연해져 버리는 건 생각보다 아름답지만은 않다. 어쩌면 사랑이란 "너 빼고 세상 사람들 다 싫어"같은 로맨틱해 보이는 말보다 “내가 사랑하는 세상을 너와 나누고 싶어”처럼 조금은 슴슴한 말일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 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

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앓았던 열망과도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에 대한 열망?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열망?

그래, 한없이 나 자신에 대한 열망.

예수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열렬히 삶에 투신하는 자신에 대한 열망. 어쩌면. 한때 내가 그를 향해 가졌던 마음. 그 사로잡힘. 단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에너지도 종교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까만 영역에 온몸을 던져버리는 종류의 사랑. 그것을 수십 년간 반복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삶인가. 어떤 형태인가.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나’는 사랑을 지독한 질병과도 같은 것으로 여김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사랑의 아름다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목소리에는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희망이 느껴진다. 이 희망은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불타도 불타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씨와도 같다. 기대하게 될 때마다 ‘역시나’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상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못한 ‘나’에게 사랑 따위는 사치라고 이미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글을 통해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나’에게, 그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나’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잘못되었거나, 사랑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저 방법이 잘못된 거였다고. 당신도 남들처럼 스스로를 해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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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암살교실 6권 44화 [본문으로]
  4. 마광수, 『문학과 성』, 20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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