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정다빈
<잠>을 보고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막막함과 공포였다. 단순히 영화가 스릴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 모습이 수진의 삶과 다를 바가 없으며, 이 사회가 종국에는 영화의 결말처럼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잠>은 수진의 남편인 현수의 몽유병에서 시작된다. 평화로운 삶에 닥쳐온 위험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위기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 가장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끼는 공간인 ‘집’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대상인 ‘가족’에게 닥친 위험. 그 무엇보다 위협적이고 두려운 상황이다.
<잠>은 현실을 기반으로 다루면서 동시에 귀신이나 퇴마와 같은 소재를 강조하며 판타지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영화를 보는 도중, 그리고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며 영화를 곱씹는 지금도 판타지 영화로서의 일면보다는 현실적 측면에 더욱 시선을 뒀을 가능성이 높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 지금부터 <잠>을 찬찬히 짚어보고자 한다.
“누가 들어왔어”
작중 가장 핵심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몽유병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수진은 이 사건을 단순히 남편이 피곤해서 한 잠꼬대겠거니 여긴다. 마찬가지로 밤중의 스산한 일들은 전부 애완견 후추의 일이라 가볍게 넘기며 잠에 든다. 안온한 수진의 삶에는 아직,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별일 없는 것이 확실할까? 우리는 늘 설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설마 내일도 춥겠어? 설마 걔가 그랬다고? 그리고 이 단어의 끝은 무시이다. ‘에이’라는 또 다른 방패로 우리는 불안의 칼날을 슬며시 비껴간다. 설마라는 단어가 주는 가능성은 저편으로 밀어놓은 채 지금이 보여주는 안온한 현실에만 눈을 맞추고 있다.
안전불감증 또한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당장 지난여름을 되짚어보자.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올여름 비가 많이 내렸다. 차와 건물, 누군가의 소중한 이들이 차가운 물 속에 가라앉았다. 흑석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장 동작 01을 타고 가면서 우리 눈에 수없이 스쳐 지나간 아파트, 흑석 자이도 그중 하나였다. ‘침수 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흑석 자이는 지난 6월 로비가 물에 잠기는 사태를 맞이했다. 이유는 뻔했다. 부실시공. 저지대라서 침수에 더 취약했다는 것도 거짓은 아니겠지만 전문가들이 밝히는 직접적인 원인은 빗물 처리 시설 부실과 배수구 크기 문제였다.[/footnote]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30712/120205112/1[/footnote] 시공할 때의 ‘설마 비가 미친 듯이 오겠어?’라는 가정에서 시작된 안일함은 부실시공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참사를 만들어냈다. 서초 그랑자이에서는 침수 전부터 지하 주차장 침수가 종종 발생했다 한다. 하지만 사건의 전조 증상이 보이기 시작했음에도 ‘설마 별일 있겠냐는 안전불감증이 당장의 이익을 합리화했다. 위험이 아직 우리 눈앞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내 삶은 아직 건재하니까.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
수진과 남편의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토템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판이다. 갓 가정을 이룬 신혼부부의 앞날을 응원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줄 둘만의 구호이다. 우리는 삶을 보다 ‘잘’ 살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잘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하는가. 루소의 사회계약설이 있다. 보다 체계적이고 윤택한 삶을 누리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사회의 형식은 계약 사회라는 이론이다. 즉 인간은 보다 질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계약’ 속에서 살아가기로 정했다.
가장 안전하고 안심되는 장소인 집, 가장 믿음직한 상대인 배우자, 오랜 기간 다져온 상호 간의 신뢰. 이 세 가지 요소 속에서 맺어진 암묵적인 계약이 바로 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문구가 아닐까. 문구는 단순히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장밋빛 미래의 가능성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서로 ‘짐을 나눠서 지자’는 책임 분할의 내용을 담고 있다.
더 잘 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걸 포기하고 산다. 당장 어제의 팀플만 해도 그렇다. 더 좋은 학점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각 조원은 친구와 놀 시간, 가족과 밥 먹을 시간, 연인과 보낼 시간, 잠 등을 포기하곤 한다. 모두가 이 공동의 이익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은 있다. 그러한 가운데 생기는 것이 바로 유대감이다. 사람들은 이 유대감을 바탕으로 하나로 묶이고 ‘함께 제시간에 각자의 할 일을 마무리하여 좋은 결과를 내고, 좋은 학점을 내자’라는 계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균열
아래층 주민이 수진에게 느닷없이 마카롱을 쥐여주며 층간소음 좀 주의해 달라고 말한다. 수진은 기가 찬다. 우리 집에서 쿵쾅거릴 사람이 누가 있다고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가 싶은 것이다. 후추는 쿵쾅거리기엔 몸집이 작고, 애도 없는 집이다. 수진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침대에 누운 부부. 현수는 잠에 들었다. 수진도 막 잠에 들려는 찰나 현수가 얼굴을 긁기 시작한다. 벅벅. 벅벅. 벅벅. 벅벅.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긁는다. 놀란 수진은 이를 막아보고자 손에 장갑을 끼운다. 하지만 새카만 밤이 지나고 나니 현수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다. 수진의 안온한 삶 저 구석에 작은 흠집이 생겼다. 이제는 ‘뭐 괜찮아지겠지’ 하며 무시할 수 없다. 남편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괜찮다. 둘이서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괜찮을거야
정신병
불안해진 그녀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등장한다. 무당이다. 무당이 준 노란 부적은 실로 효과가 있었고, 남편이 부적을 붙인 침대 위에서 잠든 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 남편의 기행동은 의사가 말하는 수면 장애가 아니라 무당이 말한 대로 귀신에 씐 것이 분명했다. 잠을 자지 못해 조금 신경이 날카롭지만, 판단력을 잃지는 않았다. 남편은 귀신에 씌었다. 분명했다. 모든 상황과 증거가 그걸 가리키고 있다.
부적의 효과를 확인하고 못 잔 잠을 자는 수진. 한참을 자다 눈을 뜨니 밖이 까맣다. 비가 거세게 온다. 밤인 걸까. 아이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지만 아이 침대에 아이는 보이지 않고 온갖 쓰레기만 가득하다. 설마 싶어 정신없이 아파트 쓰레기통을 뒤진다.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딸의 머리가 보인다. 꿈이다. 식은땀을 흘린 채 거실로 뛰어가 보니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거실 너머 부엌에는 냄비가 끓고 있다. 사골국. 수진의 삶은 산산조각 났다. 수진의 신경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현수의 병은 고쳐질 기미가 없다. 냉장고만 보면 후추가 떠오른다. 가족사진 한가운데의 후추. 우리 가족. 우리 아이. 딸. 둘이서 함께한다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 해결할 수 있나?
타협
민간 신앙에 극도로 의존하게 된 수진. 급기야 현수가 수면 클리닉으로 병을 완치됐다는 걸 신뢰하지 못한다. 오랜만의 재회는 신혼집이었다. 현수가 잠든 사이 각종 굿이 진행되었던 터라 거실은 부적으로 가득 도배돼 새빨갛다. 수진은 현수가 귀신에게 씌었다는 증거를 낱낱이 설명한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수진의 모습과는 달리, 수진이 말하는 모든 내용은 기이하다. 수진은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닌 걸까. 아랫집 개를 죽여 후추처럼 냉동실에 넣어놨고, 아랫집 여자를 납치했다. 여자의 머리에 드릴을 가져다 댄 채 현수의 몸에서 할아버지가 나가지 않으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살인 현장을 목도에 두고 현수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딸, 아빠 간다. 손자 잘 키워. 세상에 미친 놈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남기고 현수는 쓰러진다. 현수의 입에서 나온 짤막한 이 문장. 진짜 할아버지가 나간 걸까. 이미 수진이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일단 살고 보자는 마음에서 임기응변이었을까? 현수의 직업은 배우였다. 깨진 수진의 삶을 얼기설기 붙여 안온한 삶으로 돌아가려는 현수의 타협이 아니었을까?
광기에 물든 자기 아내를 계속해서 설득하는 것과 자신이 귀신에 씐 게 맞다고 거짓말하는 것 그 갈림길에서, 현수는 살아남기 위해 타협을 선택했다. 실제로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당장 오늘 점심시간만 생각해도 그렇다. 특식을 먹을까, 홈쿡을 먹을까. 그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지는 반드시 버림받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타협의 회로를 가동한다. ‘아 돈까스는 어제 먹었으니까, 오늘은 미역국을 먹자. 건강해지고 좋네!’와 같은 과정 말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회피의 기제를 진화시켜 왔다. 좀 덜 스트레스 받고, 좀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함이다.
집, 가족, 잠. 영화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세 가지 소재에 약간의 위협을 넣어 올여름 최고의 스릴러를 연출했다. 영화를 통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최후의 방어선’이 뚫렸을 때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고 간절하게 변화하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수진은 자신의 안온한 삶을 지키기 위해 과한 행동들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관객들은 그 과함에서 거북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과함이 전부 타당성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 더욱 공포를 느낀다. 수진은 영화 속 인물이지만 그의 행동들이 영화에만 존재할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영화에서 등장한 일상의 위협은 몽유병이었다. 아주 평범한 어느 날, 한 신혼부부의 일상에 몽유병이라는 ‘이물질’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별거 아닌, 그저 닦으면 지워질 ‘때’라고 생각했지만, 생명에 위협을 받고 나니 정신은 혼란해졌고, 판단 능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른가?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 관계 없이 한 일이 우연히 다른 일과 때가 같아, 둘 사이에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의심받게 된다.’라는 뜻이다. 수진의 눈에 무당의 말과 부적의 효과, 남편의 행동은 전부 유기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관계가 맺는 타당성에 관객들은 현혹됐다.
이 글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우리 삶에 살인이라는 막연한 공포가 너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기 때문이다. 호신용품을 챙겨야 하나? 방망이? 스프레이? 나도 칼을 들고 다녀야 하나? 애초에 그래도 되나? 판단 능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돌아다닐 때마다 괜스레 불안해져 오는 마음에 한두 번씩 뒤를 돌아본다. 분명 영화인 걸 알면서도 좀처럼 현실과 구분할 수 없다. 우리는 마냥 수진을 미친 사람으로 볼 수 없다.
'지난호보기 > 2023 가을겨울, 85호 <모자이크: 잊고 있던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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