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호보기/2016 봄여름, 70호 <소수의견>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운동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1. 2. 1.

<70호>, 2016 봄여름

이나영(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합의 장면 ©뉴스토마토

[각주:1]난 2015년 12월 28일에 이루어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외무장관 합의는 대중의 커다란 공분을 샀다. 단순히 '비합리적 과정에 근거한 합의의 기습성’ 때문이거나 ‘뿌리 깊은 민족주의 정서’에 기인한 것이라 보기 어려운 복합적 감정의 집단적 표출이었다. 물론 특정 정권에 대한 반감과 결합되어 새로운 운동의 결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국가’라는 위치의 자각, 더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성에 대한 대면과 연결된다. 망각과 허위의식에 가려졌던 '본질’은 ‘대한민국은 탈식민국가인가’에 대한 질문, '우리’는 진정 식민성을 탈각했는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활동가이자 연구자인 필자는 이 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상식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해오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운동의 본질을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간략하게 개괄해 보고자 한다. 소위 12 • 28한일 외무장관 합의로 분출된 우리의 감정이 기실 이 문제의 뿌리와 가장 맞닿아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소리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는 일제시기 식민지 조선 소녀들의 처참한 경험에서 출발한다. 혹자는 운이 좋아, 더러는 집안이 살만하여 악운을 피했지만, 수많은 여성들은 “단지 조선에 태어났다는 죄”만으로(이용수, 2015년 12월 마지막 수요집회에서 한 발언 중)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은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고 감추어진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유령들’의 비명이 공적인 장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이화여대 영문과 윤정옥 교수의 오랜 개인적 죄책감을 출발점으로 이를 정치적 아젠더로 확대시킨 이화여대 사회학과 이효재 교수, 1970년대부터 원폭 피해자 문제, 일본 관광객들의 기생관광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온 교회여성연합회(이하, 교회연)의 조직적 뒷받침에 힘입어 힌국의 ‘위안부’ 운동은 비로소 발아했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윤정옥 교수는 해방 후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던 여성들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 연행된 남성들이 속속 귀환하던 당시, 여성들의 귀환 소식을 찾을 수 없었던 윤정옥은 스스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 거의 평생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에 재산과 시간과 노력을 다한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의 만남이 집단적 운동으로 성장한 배경에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성장한 진보적인 여성운동단체들의 실천적 동력과 적극적 연대가 있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1990년 11월 16일, 37개 여성운동단체들과 다른 시민, 종교, 학생 단체들이 결집되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결성된다. 1991년 8월 14일, 최초의 피해자(고 김학순)가 세상에 스스로를 공개하였으며,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정신대 관련 자료가 발굴되고 공개되었으며, 외국에 관련 여성단체들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1992년 1월 8일, 정대협 주도하에 정부의 공식 사과와 만행에 대한 역사교육 실시 등을 요구하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처음 열면서 시작된 수요시위는, 2011년 12월 14일, 1000차 기념 평화비(일명, ‘소녀상’) 건립으로 이어졌으며, 2016년 3월 현재 세계인들의 관심 속에 지속되고 있다.

▲제1차 수요시위 ©정대협

이러한 '위안부' 운동은 민간단체들이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사회·정치적으로 쟁점화하고 세계적인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한국(여성)운동사에 주요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정진성 1995). 특히 여성들의 경험에서 나온 분노와 집단적 저항,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 수집과 축척, 운동의 조직화 경험이 이론화를 촉발한 사례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스트 슬로건을 극명하게 부각시킨 사례가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글에서 필자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위안부'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식민지배체제 및 식민성(coloniality)에 대한 성찰과 극복, 즉, 제도와 구조뿐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탈식민화(decolonization)가 탈식민국가의 조건이라고 볼 때(이나영 2006), 필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대한민국이 진정 '탈식 민' 국가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고 본다. '위안부 문제’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2차 세계대전의 종식 이후, 일본의 공식적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미군정에 의해 지배를 받고 독재개발시대를 경유해 지금도 여전히 두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의 종속적 위치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이 문제가 최근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해결되었다고’ 기습적으로 선언된 배경에는 냉전시대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아시아 포스트식민 국가들의 현실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2차 세계대전 직후 해결되지 못한 배경에는 냉전체제 구축을 위해 일본을 군사적 동맹국으로 선택한 미국의 정치적 판단, 이에 위안소 구조의 가장 큰 책임자인 일본 친황과 관계자들이 면죄부를 받았다는 점이다. 미국의 승인 덕분에 일본은 전쟁의 가해국이라기보다 핵무기의 피해국이라는 에토스[각주:2]로 민족정체성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미(未)청산된 식민주의는 독재체제 속에 고스란히 녹dk들어 1965년 민중의 고통과 욕구를 철저히 외면한 한일협정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오랜 세월동안 국가의 무능력과 무관심, 무책임으로 식민주의에 대한 책임을 일본에 물을 수 없었으며, 경제발전과 안보라는 명목 하에 역사적 사실들을 스스로 매장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는 부녀가 대를 이어 식민국가임을 증명하는데 국익(國益)이라는 명분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식민 지배와 여성에 대한 폭력, 착취, 그리고 이를 용인한 국제법과 국제질서체계, 그리고 식민지민의 협력, 이 모든 관계들은 역설적으로 감춰진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 속에 배태되어 있었으며 운동의 발아와 더불어 폭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일본군 ‘위인부' 문제는 민족주의와 젠더간의 관계, 민족주의로'들’ 간의 경합과 갈등의 지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젠더를 축으로 한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가부장계의 상보적 관계를 드러낸다. “동아시아의 식민주의와 가부장제가 만나는 초유의 장”으로서(양현아. 2001) 일본군 위안소 제도가 우리 사회에 가려진 배경에는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와 가부장제가 있었다. "식민지적 강간 체계"인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한국인 피해자 여성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죄의식과 모호한 가해자에 대한 인식을 남겼지만, 식민지 유재와 무의식적 식민성이 청산되지 않은 포스트식민 가부장 민족국가에 의해 더욱 조장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아무도 국가, 민족, 식민주의와 여성의 경험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1980년대부터,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은 '민족의 수치'로 감추어져 온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에 주목하고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담론에 '여성'이 철저히 배제되어 온 과정을 공론화해 왔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는 민족독립, 민족통일과 분단극복, 민주화 쟁취라는 거대한 역사적 '목표’ 속에 여성은 실질적으로 부재했다. 특히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민족주의는 반(탈)식민, 반독재, 반제에 대한 실질적 저항담론으로 기능했으며, 자주와 통일을 위한 한민족 만들기라는 언설에 동원되어 왔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그 모순을 소리 내어 지적하기란 쉽지 않은 지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효재는 운동의 초창기부터 식민지배 당시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이 청산되지 못한 데서 나타나는 가장 상징적 문제”로 '위안부' 문제를 지목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뿐만 아니라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민족에 그 근본적인 책임을 먼저 묻고 있다(이효재 1992, 8). 덧붙여 이효재는 “식민지 지배와 분단으로 인한 민족수난사 속에 당한 여성의 피해와 고통에 대한 관심”에서 기생관광과 ‘정신대’ 문제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자주적·민주적 정부를 수립하고 민족분단을 극복하려는 민족민주운동의 과정에서 여성운동을 주도해 온 교회여성연합과 여성단체연합이 주축”을 이루어 정대협이 결성되었다고 분명히 밝힌다(이효재 1992, 10-11). 오랫동안 외국인에 의한 한국여성의 성적 착취구조에 문제제기해 온 교회여성연합회의 역량과 새롭게 구성된 민주여성운동 진영 간 연대가 ‘위안부' 운동 결성의 주요한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은 식민지 종속과 전시 하 여성들이 실질적으로 당하는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제기와 더불어 민족정체성 (재)구성을 위해 ‘위안부’ 문제가 다시 포섭되는 방식 또한 적나라하게 폭로해 왔다. '민족’이라는 명목 하에 감춰질 수밖에 없었던, 혹은 애써 외면해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이들의 경험이 다시 민족의 이름으로 전유되거나 지배적 젠더질서를 재생산에 활용되는 방식에 도전해 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일본 대사관 앞에 두 손을 꼭 쥐고 앉아 있는 평화비(일명, 소녀상)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민족주의와 가부장제가 젠더를 중심으로 상보적 관계에 놓여 있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역사의 산증인(證人)을 상징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셋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가장 중요한 결실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남성 주체의 대문자[각주:3] ‘역사’에 문제제기하고 ’서발턴’[각주:4]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로 역사 다시 쓰기의 중요성을 환기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위안부’의 존재는 한일 간 철저히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해 왔으며, 당사자의 커밍이웃 이후에도 일본의 부인과 왜곡이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만한 ‘사료'의 부족, 더 나아가 역사적 진실에 대한 전통적 인식이 깔려 있다. 실제 군 ‘위안부’ 관련 상당수의 문서들은 일본군의 상부 명령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문서자료만으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기는 하기는 힘들다는 현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역사적 실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위안부’ 운동을 주도한 정대협은 피해자의 증언 채록에 많은 힘을 기울여 왔으며, 정신대연구소와 함께 6권의 증언집을 출판하였다. 증언의 법적 증거력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은 2백 여 명에 달하는 피해자로부터 강제동원의 유형과동원자의 국적과 직업, 피해자 나이, 동원되어 간 곳 등에 관한 통계를 산출하고, 한국의 피해자들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거의 유사한 피해 형태를 발견하기도 하는 등, 증언을 통한 사실 규명에 노력해 왔다. 이는 여성 배제와 종속을 정당화해 온 역사에 대한 비판적 행위이자, 여성의 경험으로 대항담론을 구성하는 일이요, 젠더를 중심으로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다.

경험이 언어화되는 장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자기치유의 과정으로도 기능한다. 구술과 증언활동을 통해 생존자들은 ‘유령’ 또는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몸’ 에서 '피해 생존자’로, 다시 운동에 참가하는 ‘활동가’로 자기 정체성을 변화시키게 된다. 한때 ‘몸버린’ ‘조선의 처녀’는 스스로를 ‘인권운동가’로 정체화하며 일본과 한국 정부를 비판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후세대의 역할을 주문하게 된 것이다. 2012년 3월, ‘세계여성의날’에 발족된 〈나비기금〉은 김복동. 길원옥 생존자들이 주도하여 다른 분쟁지역 피해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듬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변화의 또 다른 배경에는 본인 스스로의 적극적인 운동 참여 경험과 정대협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자존감 및 인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위안부’가 우리사회에서 생존하고 '말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을 마련하고자 오랫동안 쟁투해 왔다. 피해 여성들이 다시 상처받지 않고 과거로 석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 '위안부’ 운동의 활동가들은 미시적으로는 생존자들의 생활을 직접 돌보는 일을 하면서, 거시적으로는 동아시아 식민지와 전쟁 중 여성에 가해진 성적 폭력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사죄, 보상이라는 외적 조건의 마련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내부적 각성을 동반한 의식고양을 위해 애써왔던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피해자들이 저마다 안고 있는 상흔에 대한 내적 치유와 정체성 변화를 위한 필요조건이 되었으며, 포스트식민 한국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부분적으로 앓고 있는 식민지 외상의 치유기능성을 제기한 것이라고 본다.

©정대협

결론적으로 '위안부’ 운동은 협소한 의미의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며,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 대한 분노표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동아시아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가부장제의 복합적 산물로서의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직시하고 이에 저항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기획이다. '위안부’ 운동은 피해 여성들의 경험 듣기, 대신 말해주기에서 출발하여,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과 민족 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특정 집단이 타자화되는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갔으며, ‘말걸기’와 권한부여(empowerment)를 통해 피해자 스스로 정체성을 재구성 하는데 기여해 왔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의 경험을 가시화함으로써 가부장제, 식민주의, 민족주의의 공모 체제에 균열을 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거대 역사에 질문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해 온 것이다.

식민지와 전쟁의 상흔은 이미 끝난 과거사가 아니라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나’의 몸과 정신에 각인된 것이자 현재적 실천양식이다. 그러기에 가해자/피해자, 적/동지, 타자/주체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포섭되지 못하는 책임의 문제는 ‘나’ 자신에 내재한 식민성에 대한 질문이 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우리에게 던진 핵심적인 질문은, 식민지배 국가의 책임과 배타적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책임과 ‘내’ 안의 '그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탈'식민을 향한 상상력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이다. 새로운 상상력을 위한 디딤돌을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쌓아가야 할 것이다.

  1. 이 글의 상당부분은 이미 출간된 책 제국의 변호인 박유히에게 묻다(2016, 말)에서 필자의 글,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의미: 남성중심적 민족주의와 포스트/식민국가에 대한초국적 여성운동의 도전”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2. ‘성격’, ‘관습’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사람이나 집단의 특징적인 성질이나 태도를 의미함 [본문으로]
  3. 남성중심, 기득권 중심, 사료중심의 역사 서술 및 흔히 국사라 이해되는 역사 인식을 지칭.  [본문으로]
  4. 원어는 Sabaltern, 하위주체라는 말로 지배집단에 의해 종속된 집단을 뜻함.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