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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6 봄여름, 70호 <소수의견>

알파고를 맞이하며 - 기술발전과 실업 혹은 경제의 규정성과 정치적 자율성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1. 2. 1.

<70호>, 2016 봄여름

스츠(자유기고가)

1. 알파고라는 오래된 미래?

2016년 3월 15일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끝났다. 그리고 같은 달 22일 일본에서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문학상의 1차 심사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공지능이라는 오래된 (하지만 언제나 미래형이었던) 개념은 이제, 알파고라는 구체적인 실체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도 있었다. 일을 인공지능이 하고, 인간은 누리기만 하는 세상, 혹은 정반대로 터미네이터와 같이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라는 종말론적인 미래를 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은 정말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알파고가 우리의 일자리를 뺏어가면 어쩌지?’ 이미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 너무나도 어려워진 상황, 실업이라는 말이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까지 자리 잡은 만성적인 불안이 되어있는 상황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물음일 수도 있다. 그렇게 알파고는 실업의 문제, 혹은 일자리의 문제와 함께 우리에게 왔다.

알파고의 등장이라는 상황에 흔히 대립되는 두 가지 입장을 취하기가 쉽다. 가장 쉽게 드러나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염려다. 이들은 알파고의 등장이 바로 인간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 것이라 걱정한다. 이러한 입장에는 우파적인 버전과 좌파적인 버전이 모두 존재하지만, 이 둘 모두 같은 방식으로 수렴하기 마련이다. IT 기업의 자본가들과 근래의 한국의 좌파들이 기본소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주요한 논거로 드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기술발전으로 인해서 '현재 존재하는 다수의 일자리들이 사라질 것이다.’라는 예측이다. 이 때 기술은 그 발전에 따라서 기존의 경제구조를 바꾼다. 산업의 양상자체가 이에 따라 변화하고, 기존에 인간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체한다. 나아가서는 그에 따라서 사회의 시스템도 바꿀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를 '기술환원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대해서, 이런 기술의 발전을 온전히 중립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에서는 우리의 정치적-공동체적인 결정(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기술이 어떻게 사용될지 결정할 수 있다. 이들의 입장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알파고에 의해서 사무직 일자리가 사라져서 사회적 문제가 생긴다고? 그럼 알파고를 남용할 수 없게 법으로 이들을 보호하면 되지 않나?' 이 때 기술의 발전과 그 쓰임은 분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기술은 완전히 하나의 도구로서만 기능한다.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내는 경향성 따위는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를 ‘의지주의 적’ 입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또한 좌파적이거나 우파적일 수 있고. 보다 명확하게는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일 수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알파고가 일자리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혹은 알파고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에서 끊임없이 '회귀’할 수밖에 없는 오래된 미래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면 어떨까?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하거나, 어떤 SF 소설에서 처음 구체화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애초에 기술의 발전이라는 문제, 그리고 그와 얽힌 일자리의 문제가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 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파고에 대한 ‘기술환원적’ 입장과 '의지주의적’ 입장이 놓치고 있는 것은 기술 발전이 끊임없이 일어나도록 추동하고 있는 구조적 메커니즘이다. 그와 더불어서 일자리 문제에 있어서도, 일자리-실업문제를 사회구조의 변화와 관계없이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마치 사전적으로 이 모든 변수들이 주어져 있었던 것 마냥.

이를 고찰해보기 위해서 문제를 보다 명석하고 판명하게 만들어보자. 알파고를 둘러싸고 인간의 본질에서부터 시스템의 통제와 변수까지 이를 둘러싸고 다종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것들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 상관없다. 오히려 문제는 기술의 끊임없는 발전 또는 기술 혁신과 그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실업, 일자리의 감소이다. 즉 문제는 기술혁신과 일자리이다.

 

2. 테크놀로지의 발전의 모순적인 효과

사실 기술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한가는 사회-구조적 논의의 한 단면을 다룰 때 어느 정도는 제쳐둘 수 있 다. 이는 '의지주의적’ 입장과 같이 단순히 그 기술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는 인간의 결정에 달려있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술의 발전, 구성과 활용 자체가 사회적 관계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보다 생각해보자면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성장을 해도 고용이 없다는 이야기는 엄청나게 하이ᅳ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탈’-산업시대의 '현대’적인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 상수(常數)이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성립요건 중 하나이다. 우리가 기술 혁신과 실업에 대해서 논의할 때는 이 점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 이제부터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 drooker.com

무엇보다도 먼저, 기술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동학 내부의 필요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흔히 자본주의의 특징 증 하나로 바로 역동성을 꼽는다. 자본주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화하며. 변화 자체를 긍정하는 체제이다. 이는 자본이 끊임없이 축적되어야 하는 자본주의의 특성은 필연적으로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성이다. 기슴의 발전도 축적에 대한 요구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외재적인 것이 아니다.[각주:1]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보자면 자본의 끊임없는 축적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생산비용의 절감이 필요하다. 이는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된 생산이나 더 많은 노동을 강제함으로써 가능하기도 하지만 이의 한계는 분명하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기술발전을 통해서 생산비를 줄이고 노동생산성[각주:2]을 상승시키는 방식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본의 내적 동학은 기술의 발전을 요구하며, 나아가서는 테크놈로지의 발전ᅳ기술의 발전만이 아니라, 이를 만들어내고 활용하는 총체적인 사회적 방식의 발전이 필요하게 된다. 흔한 착각처럼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이에 따른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자본 축적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애초에 기술의 발전의 필요와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는 방식, 기술의 채택과 사용과 환용 모두가 자본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필요에서부터 구성된 것이다. 이는 사실상 기술 발전의 기초가 되는 '순수'과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문과 학문인 경영학. 심리학, 교육학 등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다. 보다 나아가서는 산학연계니, 연구중심이니. 프라임 사업이니 하는 대학의 변화들과도 연관된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란 이 모든 것들을 일부분 포함하며,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에 앞서는 고유한 의미의 '테크놀로지’란 존재하지 않"[각주:3]는다.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나타낸다고 여겨지는 경쟁이란 이러한 자본축적에의 요구와 그의 방식 이후에 온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이 개별 자본들의 외적 운동에 표현되어 경쟁이 강제하는 법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하여 개별 자본가를 추진시키는 동기로서 그의 의식에 도달하는 방식을 여기에서 고찰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이 점만은 분명하다. 즉, 경쟁의 과학적 분석은 자본의 내적 본성이 파악된 뒤에라야 비로소 가능”[각주:4]하다. 더 많은 축적을 위한 자본의 요구는 기술(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추구하고, 개별 기업들에서 일어난 기술의 발전은 서로 간의 경쟁으로 표출되어 서로에게 강제되며 이 일련의 과정은 다시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렇게 기술이 발전하는 일련의 과정은 자본주의 생산의 내재적 법칙이 관철되는 방식이며, 그렇기에 사회적 관계의 ‘내재적’이다.

자본의 축적이 관철되는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다. 위에서 말했던 대로 자본의 축적은 기술의 발전을 요구하고 이는 노동생산성을 상승시켜서, 노동에 대한 필요를 감소하도록 만든다. 이는 생산의 기계화를 의미할 수도 있고, 직접적인 생산과정이 아니더라도 그를 둘러싼 관리와 행정, 유통 등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절감 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동시에 자본의 측적이 진행되어 가면서, 자본이 더 축적된 만큼 당연히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만약 기술의 발전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의 축적이 일어난 그 규모에 정비례 해서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고용할 노동자 수 를 늘리거나 고용한 노동자의 수는 유지한 채, 이들에게 더 많은 야근을 강요하거나, 일을 더 많이 시키거나.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발전 자체가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는 접이다. 기술의 반전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기존의 영역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술의 발전 자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증가를 의미하며, 바꿔 말하자면 새로운 영역의 개척을 의미한다. 혹은 새로운 시장의 개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가 두려워하듯이 다수의 사무직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잃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개별적인 개인이나 기업들의 역량을 증대시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만들 수도 있다. 기존의 IT 기술의 발전이 그랬고, 최근의 빅데이터의 활용이 그렇듯이 말이다. 인간 역량의 증가는 인간이 할 수 있고, 해내는 (경제)활동들 자체의 증대와 맞물려있다.

결국 자본의 동학은 노동력의 수요에 대해서 모순되는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정리하자면 하나, 자본이 축적되면서 노동력의 수요는 증가하며 무엇보다도 기술의 발전 또한 새로운 영역의 개척을 통해서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킬 수 있다. 둘, 자본은 축적과정에 서 기술의 발전을 통해 생산에서 필요한 비용 중에 노동력의 비중을 줄임으로써 노동력의 수요를 감소시킨다. 하지만 이 두 경향은 각각의 측면에서만 살펴본 것이다. 이 둘이 어떻게 결합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날지는 사전적으로 알 수 없으며 결과는 열려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봤을 때, 기술의 발전이 일어나서 노동의 필요가 절감되는 것보다, 자본이 축적되고 경제적 영역이 증가함에 따라서 늘어나는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더 많다. 이는 놀랍게도 최근의 10여 년간의 세계 경제의 변동과정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동안 눈부신 IT기술의 발달 등으로 전 세계 노동인구가 줄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임금노동자의 수는 증가했다. 심지어 이는 오랜 시간 동안 실업이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업률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지만, 경제활동인구는 감소한 적이 없다. 경제활동인구 증가율이 감소한 적은 있더라도.

이렇게 증가하는 노동벽에 대한 수요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통제를 약화시킨다. 자본의 원활한 축적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경쟁해야한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당장의 임금수준을 낮추기 위해서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자본가의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를 강제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고 애초에 노동을 노동력(상품)으로 공급하는 것 자체는 자본주의의 성립요건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자본의 원활한 축적을 위해서는 노동력의 지속적인 공급이 필요하며, 이를 형성해낼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해지게 된다. 이제 문제는 노동력의 공급으로 넘어간다.

 

3. 노동력이라는 허구적인 상품

사실상 기술환원적 입장과 의지중심적 입장은 숨겨진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노동력 공급에 대한 문제이다.이 두 입장은 노동력 공급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상 일자리 문제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노동력 공급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노동력 공급을 어떤 자연스러운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흔히 고령화사회를 걱정할 때 그러듯이, 자연적인 인구증가에 의해서 노동력 공급이 상당부분 규정된다는 방식의 사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또는 주류경제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력이 여가와 노동함수에서, 임금에 따라서 다른 상품처럼 공급된다고 가정하는 방식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머릿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우리가 노동력에 대해서 사고할 때 중요한 점은 노동력은 허구적인 상품이며, 이는 의식적-적극적인 과정을 통해서 창출된다는 것이다.[각주:5]

무엇보다 우리는 노동력이 애초에 상품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노동력이란 허구적인 상품이다. 노동력은 다른 상품들과 같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동은 측정하고 교환 가능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는 그 자체로 상품은 아니다. 우리는 노동이라는 상품이 노동을 한다는 동어반복 이외의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노동:인용자) 은 자본주의의 도래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허구였다. 부의 생산과 분배를 자유로운 거래 관계 위에 근거 짓기 위해서는 노동과 토지와 화폐가 마치 교환가능한 상품인 것처럼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허구는 법에 의해서만 제도화될 수 있었으며, 노동법이 탄생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각주:6]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노동과 노동력 상품을 구분하는 것으로 드러냈다. 노동력 상품의 사용을 통해서 생겨나는 노동과, 교환될 수 있는 상품인 노동력.

노동력의 체계적인 공급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성립요건 중 하나이다. 하지만 문제는 노동력 상품을 파는 노동자가 애초부터 노동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순히 일을 하는 존재가 노동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적절한 노동규율을 (반)자율적으로 견딜 수 있게 자라야하며, 인격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노동계약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이중적으로[각주:7] 자유로워야 한다. 우선 그들은 신분제와 같은 인격적 구속에서 자유롭다. 농노나 노예와는 다르게 그들은 ‘형식적’ 평등을 누리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타인에게 고용되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토지나 자본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노동자가 아니라 ‘건물주’나 ‘사장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는 생산 수단으로부터 자유롭다. 즉 그들은 형식적으로 평등한 개인이어야 하며, 노동을 해야 하는 경제적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노동자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중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존재는 노동자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경제적 이유를 제외하고도 몸에 새겨진 사회적, 문화적 이유들과 강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노동규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리듬과, 자연의 리듬에 맞게 살아오던 존재를 단지 공장에 데려온다고 해서 그가 바로 노동자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규율을 학습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형성과 노동규율. 이는 자본주의의 초기에는 구빈법과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는 방식으로 폭력적으로 주로 이뤄졌다.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을 가두고, 낙인찍고, 일을 하지 않으면 신체를 훼손했다. 작업장 내부의 분위기 또한 드러나는 방식으로 폭력적이었다. 현재는 흔히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부르는 것들을 통해서 보다 원만하게 이뤄진다. 혹은 푸코가 규율권력, 미시권력이라고 불렀던 것의 작동 또한 경제적 층위에서의 이런 필요들과 조응하며 이뤄진다. 그렇기에 노동력은 항상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자(상대적 과잉 노동인구, 산업예비군)는 자본의 가치증식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육성되었다.[각주:8] 필요하다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위에서 살펴본 이중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의 생성은 앤클로저 운동이라는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뤄졌다), 혹은 평등에 대한 열망을 전유하는 방식으로도 일어났다.[각주:9] 노동력에 대한 공급은 단순히 정해져있지 않다. 아니, 애초에 실업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역동적 과정과 연관이 되어있을 뿐이다. 인간을 노동력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미시권력의 작동에 의한 수많은 노동규율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산업예비군이 만들어지는 것이 노동력 상품의 핵심이다. 산업예비군의 형성 이후에서야 노동은 진정 노동력 상품이 된다. 이 때 이 산업예비군의 생성은 단순히 수요곡선과 공급곡선 위의 움직임만을 말하지 않는다. 자본과 그 국가는 노동력 자체의 재/생산을 관리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창출해낸다. 필요하다면 농촌 공동체의 파괴를 통해서, 여성의 가부장제에서의 해방을(혹은 정확히 말하자면 이중적인 착취를) 통해서, 노예의 조달을 통해서, 전혀 다른 경제체제에 속해있는 국가들의 자본 주의로의 회귀를 통해서, 기타 등등을 통해서, 이는 가능해진다. 이 때 인간학적 차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이런 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기제들이다.

결국 자본은 자신의 운동 속에서 노동력의 끊임없는 공급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이를 자신의 운동과정의 바깥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자본의 역동적인 운동은 이 둘 다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둘의 효과가 어떻게 작용할지는 사전적-논리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4. 최종 심급으로서의 경제? 자율성의 장인 정치?

기술환원적 입장과 의지중심적 입장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지반 위에 자신들의 논의의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둘은 사회적 관계 내에서 기술과 노동력을 사고하지 못하고, 마치 기술과 노동력이 외재적인 변수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처럼 가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렇게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이 두 모습이 궁극적으로 ‘탈노동’이라는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둘 중 어떤 입장이든, 기술의 발전은 ‘탈노동’을 불러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 기술수준에 따라서 주어진 양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에 따르면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기계화가 되고 노동은 점점 필요 없어지기(탈노동이 진행되기) 때문에 줄어들 것이다. 반면 인구는 자연적인 법칙에 따라서 (한) 국가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증가율이 조정되고, 앞으로 몇 년간 인구가 얼마나 늘어날 것이니, 우리는 엄청난 잉여노동력들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든,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단념하고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발상이야 말로 얼마나 기술결정론적인 것인가?

그렇기에 단순히, 기술과 사회의 발전이라는 추상적인 규정으로 실업의 문제가 결정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자본이 자신의 축적구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역동적인 운동 과정 속에서 노동력 상품의 (재)생산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기술-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언제 가능했으며, 그 자체가 어떠한 편향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들을 외재적 변수로 취급하는 것(경제+기술+인구증가율+.....과 같이 사고하는 것)은 같이 마치 다양하게 변수를 고려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 한, 두 가지의 변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며, 사전적으로 미래를 속단하는 편향을 가지게 된다. 추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준에서 실업의 문제는 결정된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를 ‘그래, 역시 경제(자본주의라는 사회적 관계)가 진짜고 나머지는 다 가짜야’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의지주의를 충분히 경계해야 하지만, 정치(자율성에 입각한 결단)를 경제(사회적 관계들)로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정치적 결단의 문제를 의지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환원하는 것보다 사회적 관계들 속으로 정치를 형해화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우리는 결코 기술발전과 일자리 문제를 단순히 사고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발전해서 탈노동화가 일어날테니, 우리는 기본소득과 같은 정치적 결단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역 또한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결단의 문제, 경제와 정치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기술발전과 일자리의 문제에 대처함에 있어서, 정치적 차원의 결정을 언제나 사회적 관계로 돌려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경제적 문제, 사회적 관계의 문제가 언제나 정치의 영역에서만 해결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기술-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관계와 ‘함께’ 정치영역의 자율성-정치적인 결단을 구해내야 한다. 기술환원론적 입장이 보여주는 진실의 단면이 존재한다면 이는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의 역동적인 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바꿔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추동이 표출되는 형태가 바로 경쟁과 테크놀로지의 끝없는 발전이다. 반면 의지주의적 입장이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필연성이 반드시 결정된 하나의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의 결정을 통해서, 의식적인 사회변화의 노력을 통해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경제의 동학은 모순적이며 예정되어 있는 정해진 결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끊임없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필연성이 존재하며, 그 속에서 신업의 문제-노동의 문제가 어떻게 자리해야 하는가는 '사전에’ 결정되어 있지 않다. 경제(사회적 관계)의 결정성은 '사후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경제는 사회를 재구성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것은 언제나 효과 속에 자리한다. 그리고 이 효과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모순적인 사회적인 세력들 간의 선에 의지한다. 경제는 정치를 결정한다. 단, 그것은 정치의 자율성의 장 자체를 열어젖히는 방식으로 정치를 결정한다.

이는 인공지능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은 그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인공지능의 발전의 시초, 그것이 일어나는 방식, 인공지능이 활용되는 양태들 자체가 이미 사회적 관계에 배태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자본의 축적 구조 속에서만 실업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 효과는 모순적이다. 그래서 인공지능과 실업의 문제에는 사전적으로 결정된 결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적 관계에 외재적인 것이어서 법과 규제, 정책 따위의 의사결정과정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 내적으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며, 그런 한에서 인공지능 기술 발전의 효과는 정획히 정치의 장 안에 자리한다.

우리가 애초에 알파고의 등장에서 일자리의 문제를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어쩌면 꽤나 적절한 것일 수도 있다. 기술의 발전과 실업이 연결되는 것 자체가 바로 자본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가능성이 얼마나 협소한가를 보여주는 기표다. 정치적 자율성은 경제에 토대를 두지만, 이는 언제나 경제를 넘어서는 과잉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적 자율성은 항상 해방적 기획들-유토피아적 기획들에서 자신의 온전한 실현을 찾았다. 그 때, 디스토피아의 모습은 유토피아의 거울 쌍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논하면서도 이것을 유토피아적 기획이나 디스토피아적 파국과 연관 짓지 않는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줄어드는 일자리를 어떻게 결정할(될) 것인가의 문제뿐이다. 이제 우리의 결단은 오직 딱 두 선택지 사이에서 뇌동하며, 정치적 자율성의 장이라는 문제는 소별해버린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정치적 자율성의 장과 결합하는 경제, 사회적 관계라는 문제설정 또한 희미해지며. 이 둘은 외재적인 관계로 멀어져간다. 그래서 인공지능과 일자리의 문제를 사고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돌아오는 질문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정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이는 언제나 과잉되어 있는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항상 '경제’와 절합된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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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티엔 발리바르, 육체노동과지적노동의분할, 역사유물론의 전화. p187. [본문으로]
  2. 투입노동(시간) 대비 생산된 상품의 양이라는 측면에서의 노동생산성. [본문으로]
  3. 에티엔발리바르, 같은글, 같은쪽. [본문으로]
  4. 자본론 1권 12장, 428. (김수행, 구판) [본문으로]
  5. 이는 '재생산 영역'의 문제이다. [본문으로]
  6. Alain Supiot, 프랑스노동법. 박재성 역, 오래, 2011,18쪽, 서동진.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 노동을 되찾자」(201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징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의미다. -자본론 1권 6장, 221 (김수행, 구판)- [본문으로]
  8. 그런데 과잉노동인구가 축적의 필연적 산물 또는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부의 발 전의 필연적 산물이라면, 이번에는 이 과잉인구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로, 심지어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생존조건으로 된다. 과잉 노동인구는 [마치 자본이 자기의 비용으로 육성해 놓은 것처럼] 절대적으로 자본에 속하여 자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 현실적 인구증가의 한계와는 관계없이, 산업예비군은 변동하는 자본의 가치증식욕을 위해 언제나 착취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는 인간재료를 이룬다. -자본론 1권, 862 (김수행. 구판)- [본문으로]
  9. 노예의 해방, 여성의 해방 등을 이런 식으로 전유하였다. 사실상 자본주의는 강력한 평등의 기제이기도하다. 자본은 자신의 축적의 동학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흔히 말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공모와 같은 것들은 '필연적’이며이미 규정된 '사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우연적'이고 '사후적’인 것에 가깝다. 둘의 이해관계는 애초에 일치하지는 않으며, 모순적이다. 자본은 더 많은 노동력과 더 넓은 시장을 위해서 가부장제를 폐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와 동시에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절감을 위해서 가부장제를 강화하려는 경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이 해방적일 수도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해방적 효과 또한 굴절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해방과 그 효과 또한 세력관계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가부장제에와 자본주의의 모순은 해방과 그의 반 경향의 모순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 대한 '이중적 착취’로 나타난다. 이렇게 열망은 전치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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