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김윤진
“나 채식해”
“왜, 다이어트해?”
채식주의는 개인적인 선호가 아니다. 비윤리적인 축산산업, 우리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 내린 육식 습관을 부정하는 실천이다. 일상은 제도권 못지않게 정치의 영역이다. 불공정한 계약관계에 대한 거부의 일환으로 ‘공정거래 커피’를 마신다. 여성과 아동 노동착취에 반대하기 위해 ‘H&M 불매운동’을 하기도 한다. 채식도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가치관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동이다. 채식주의는 살을 빼기 위한 혹은 편식에 의한 단순 선호가 아니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건 우리가 무엇에 반대하는지 또 어떤 지향점을 가지는지 보여준다. 육식에 대한 거부는 배려해야 할 개인의 가치관 그 이상으로 보편적인 ‘옳음’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당신은 종차별주의자인가요?
동물을 떠올렸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간을 그 분류에서 제외한다. 인간의 특수한 특징이 있어 그 영역으로부터 구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휴머니스트’라는 말은 좋은 사람을 나타낼 때 쓰이곤 한다. 정확한 의미는 아니지만,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인권을 배려하는 사람, 즉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인간성은 이성, 합리성, 사고능력, 지성, 자율성, 도덕성 등 인간만이 가진다고 추정되는 특성을 주로 이야기한다. 인간은 인간성을 미덕으로 삼는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특징을 찾아내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착취를 통해 육식을 한다
인간성이 실재하는지, 인간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인간은 ‘인간적’인가? 인간만을 고려한다는 게 인간적인 거라면 충분히 그렇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을 ‘사람을 위해서’라는 목적 아래 착취하고 있다. 식탁 위 계란 프라이를 위해 인간은 산란 닭 다섯 마리를 12×20 인치(대략 30×50 센치) 닭장 안에 우겨넣는다. 돼지와 소는 몸은 물론이고 목을 돌리기도 어려운 우리에서 평생을 보낸다. 암퇘지가 잠시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는 임신을 위해 수퇘지와 함께 수용될 때뿐이다. 맛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고기의 색을 위해서 소는 항상 빈혈에 시달리고 철분을 보충하기 위해 자신의 오줌이나 외양간의 철을 핥는다.(소가 자신의 분비물에 대한 혐오가 없기 때문에 오줌을 핥는 것이 아니며, 오줌을 핥으며 분뇨를 함께 섭취하면 병에 감염되기 쉽다.) 단순히 마시는 우유부터 가공된 치즈까지 그 많은 양의 소젖을 위해서 젖소는 ‘강간 막대기(Rape Rack)’을 통해 강간당한다. 젖을 다 빼앗기고 출산 후 두 달이 지나면 다시 임신하기를 반복한다.
동물과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
인간이 비인간동물을 착취해도 되는 이유는 없다. 물론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 인간의 관점에서볼 때, 비인간동물은 인간종의 일반적인 능력을 가지지 않는다. 인간이 장악한 사회에서 동물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없고 투표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차별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평등권을 이해하면 이를 쉽게 수긍할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을 어떠한 사회적 환경에서도 똑같은 가치를 갖는 평등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모든 인간이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인간 역시 성별과 인종에 따라, 장애 여부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 생물학적 요인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도 차이를 갖는다. 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다른 교육을 받고 그에 따라 다른 특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동등한 존재로 대우받아야 한다. 생리를 하거나 IQ가 낮다는 이유로 그러한 사람을 학대하고 죽이면 안 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인간 평등의 원리는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이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prescription)이기 때문이다. 1 현대 사회에서 흑인과 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처럼, 비인간동물에게 가해지는 종차별도 사라져야 한다. 그렇기에 동물권은 전혀 다른 새로운 논리가 아니라 평등의 논리를 확장한 것일 뿐이다.
종평등을 생각할 때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고통 그리고/또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다. 2 어떠한 다른 능력을 가지는 지와는 별개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건 고통의 영역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성, 자율성, 지능, 합리성 등을 특징으로 구분 짓는 건 인간중심적이고 따라서 임의적이다.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가지는 특징을 우위에 둘 수 있듯이 인간중심적인 사고는 인간의 특징만을 강조해 주관적인 기준을 만든다.
이런 근거를 바탕으로 인간이 누리는 권리를 똑같이 동물에게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종평등은 동물에게 투표권을 주고, 세금을 걷고, 집을 지어주고, 교육권을 보장하는 등의 공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평등은 다른 것을 같게 보는 ‘기계론적 평등’이 아니라 다른 것을 다르게 대우하는 개념이다. 종평등은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단순히 인간의 미각, 유흥, 편안함을 위해서 동물을 ‘착취’하고 ‘학살’하지는 말아야 한다. 동물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둔감하다
인간에게는 적용되는 ‘평등의 원리’가 비인간동물에게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종차별주의가 너무나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물을 학대해도 된다는 인간중심적인 근거는 타당성이 없음에도 한 치의 의심조차 받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학대라는 사실도 알아차리기 힘들다.
고기는 죽은 동물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은 이미 죽은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생명을 죽인다. 육식 앞에서 이런 사실은 지워지고 왜곡된다. 마트에 진열된 돼지고기를 보고 ‘맛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쉽사리 살아있는 돼지를 떠올릴 수 없어서, 끔찍한 도축 과정을 연상할 수 없어서이다. 미디어와 교육은 동물과 동물고기를 전혀 다른 것인 양 소비한다. 학교 수업에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고기를 먹고 우유를 마셔야 건강해진다’라고 가르치지만 급식에 나오는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는 가르치지 않는다. 또 동물 관련 프로그램에서는 ‘치킨 가게에서 길러지는 닭’, ‘정육점에서 길러지는 돼지’를 귀엽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농장을 ‘산업’이라고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동물원에 가면 ‘농장섹션’이 있다. 가축과가금을 한데 모아 전시해 놓은 공간이다. 농장동물들은 ‘류’나 ‘과’ 혹은 서식지로 나뉘지 않는다. (농장이 서식지라고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에게 착취당하는 동물들을 하나의 군으로 묶는다는 건 생각해보면 이상한 분류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동물원에서 보여주는 농장은 실재하지 않는 농장이다. 다양한 동물이 공존하는 목가적인 농장은 미디어가 그려내는 농장의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 현대의 농장은 공장식 축산이다. 평화롭고 친동물적인 농장의 이미지는 우리가 먹는 것들이 착취에서 온다고 말하지 않으며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준다.
그렇다고 미디어와 교육만을 탓할 순 없다. 결국 문제를 직시하지 않은 건 우리다. 고깃집 간판에 웃고 있는 돼지를 봤을 때, 잠시라도 ‘잔인하다’라는 생각을 했을 테다. 어쩌다 접하는 충격적인 도축장면에 한동안 고기를 무서워하기도 했을 테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실이 너무 불편하다는 이유로, 모든 동물을 다 챙기다 보면 삶이 너무 피곤해진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원래 자연 법칙이니까’라고 말하며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해 버린다. (하지만 동물을 착취하고 대량 학살하는 것이 자연법칙은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살해당하는 동물
사실 인간은 동물을 먹기 위해서만 죽이지는 않는다. 먹지 않기 위해서 죽이기도 한다. 구제역이 한 번 돌면 구제역이 걸리지 않은 가축까지도 살처분 당한다. 올해 초에만 해도 구제역으로 1만1726마리의 돼지가 살처분됐다. 3 지난 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는 AI 예방 조치로 닭 581만1000마리, 오리 69만6000마리, 메추리 3만2000마리가 살처분됐다. 4
미디어는 대규모 전염성 질병의 원인이 철새 등에 의한 자연적인 발병이라고 눈가림하지만 애초에 원인은 공장식 축산의 집약적 사육 때문이다. 가축, 가금은 오직 인간에게 먹히거나 자신의 월경을 먹히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당하고 비동물적인 환경에서 자란다 5. 면역력은 당연히 떨어지며 지나치게 밀집된 공간은 병을 빠르게 확산시킨다. 알을 낳을 수 없는, 그래서 상품성이 없는 수평아리는 산 채로 플라스틱 부대에 버려진 후 서로에게 깔려 죽는다. 혹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가루가 되어 다른 병아리의 모이가 된다. 6인간은 비동물적인 환경을 만듦으로써, 동물을 먹기 위해 그리고 먹지 않기 위해서 죽인다. 이러나저러나 동물은 살해당한다.
동물을 착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동물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노력, 그래서 결국 동물의 권리를 찾는 일은 인간과 동물을 기계적으로 평등하게 세우는 일이 아니다. 동정심에 기대어 시혜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단지 인간의 편의를 생명권에 앞세우지 말자고 말할 뿐이다. 평등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왜 채식인가?
착취당하는 동물은 농장 동물뿐만이 아니다. 농장동물, 실험동물, 전시동물 등등 비인간동물은 우리가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취당하고 있다. 우리는 착취 받는 동물 전반을 고려해야 한다. 동물을 착취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논리는 산업 분야와 상관없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식은 그 중 농장동물에 대한 운동이다. 이는 ‘채식주의자 되기’가 모든 동물권을 보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물권에 대한 실천은 채식주의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서 ‘일관적으로’ 해야 한다. 채식을 하며 동시에 동물실험 제품을 지양하고 동물원에 가지 않아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동물을 착취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채식주의는 직접적으로는 농장동물만을 고려한다. 하지만 채식주의는 동물권 전반을 보호하기 위한 첫 단계이다. 일상생활에서 동물 소비를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멈추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는 것은 동물을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착취하는 행동이다. 한 마리의 동물 (혹은 그보다 많은 동물)의 삶이 한 끼 식사에서 미각만을 위해 희생된다. 생명권을 미각에 앞세우는 것은 동물권을 지키는 아주 기본적인 일이다.
채식은 동물 착취에 대한 ‘영구적인’ 보이콧이다. 배터리 케이지(대형 농장에서 닭을 가둬놓는 우리)가 사라지면, 공장에서 동물복지가 실현되면 끝나는 운동이 아니다. 인간 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한 육식문화를 바꾸는 것이 근본적인 목표다. 따라서 채식의 방향은 동물권을 보호하는 방향의 축산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고기 소비 그 자체를, 우리 사회에서 고기가 차지하는 비율을 줄여나가야 한다.
“육식은 자연스러운 거 아니냐?” 채식주의자에게 쏟아지는 질문 중 가장 대표적인 질문이다. 채식주의는 고기를 먹는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어떠한 고기인지, 그 ‘어떠한’이라는 수식어가 중요하다.
“동물을 먹는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Is it ever right to eat meat?)”라고 물어서는 안 되고, “이 고기를 먹는 것이 옳은 것인가?(Is it right to eat this meat)"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동물해방 中)
동물이 어떻게 길러졌고 어떻게 죽었는지, 고기가 되기까지의 그 생산과정이 문제이기 때문에 채식을 선택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을 착취하는 거대한 구조를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채식을 지향하고 다른 동물권에 관심을 꾸준히 가져야 하는 이유는 ‘동물권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엔 당연히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간도 한 때는 불평등한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스스로의 권리를 외치며 여성과 유색인종은 교육권, 투표권을 쟁취했다. 평등은 비인간동물에게도 확장되어야 한다. 동물이 목소리를 낼 수 없기에 인간만 평등한 사회를 모른 척하는 건 기만이다. 인간만을 위한 사회가 아닌 모두가 평등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인간은 착취와 살인이라는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옳음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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