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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3 가을겨울, 65호 <멀리 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故 최종범 열사를 추모하며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1. 1. 31.

2013년 가을겨울 〈멀리 하기엔 너무도 가까운〉 (좌) 故 전태열 열사의 사진 (우) 故 최종범 열사의 사진

  이 이야기는 '배고파 못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삼성전자 서비스의 수리기사로 수어 년 일했지만 삼성의 직원은 될 수 없었던. 서른 셋, 세상을 등지기엔 아직 너무 젊었던, 갓 돌도 지나지 않은 딸 별이의 아빠였던, 카카오톡으로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던져야 했던 고 최종범 열사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 어려운 꿈

  그는 배고프지 않기 위해 ‘개처럼' 일해야 했습니다. 매일 야근하다 사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달력에 파랗게, 또 빨갛게 색칠된 주말은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성수기에 명절이라도 끼어 있으면 명절마저 반납하고 일했습니다. 성수기 때 바짝 벌어놓지 않으면 삼성전자 서비스의 수리기사들은 1년을 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삼성전자 서비스는 기본급 없이 처리 건수만으로 수당을 주기 때문입니다. 비수기에 버는 돈 100만 원 남짓. 차량유지비, 통신비, 식비 등을 빼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액수. 그는 그렇게 일했습니다.

  그는 고객에게 ‘개처럼’ 충성해야 했습니다. 고객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고객들이 하대해도, 욕설을 뱉어도 웃어야 했습니다. 건물 외벽에 줄 하나 없이 매달려 일해도 웃어야 했습니다. 일을 마치면 고객에게 걸려오는 전화 한 통, ‘해피콜’입니다. 1점부터 10점까지 만족도를 조사하는 전화입니다. 수리비가 비싸서 낮은 점수를 줘도 책임은 수리기사의 몫입니다. 8점을 받은 수리기사는 '대책서’를 쓰고 동료들 앞에서 읽어야 했습니다. 5점 이하를 받은 수리기사는 영업이 끝난 센터에 남아 동료들 앞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재연하는 ‘역할극‘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개처럼’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때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창립자의 유지처럼 ‘무노조경영’으로 일관하던 세계일류의 대기업 삼성, 그곳에서 처 음으로 싹틔운 노동조합이었습니다.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했습니다. 그것은 ‘인간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사 이후 처음으로 여름휴가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조합원이 되고 그는 그의 형에게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깨닫게 됐다고 했답 니다. 명절 내내 노동조합 얘기만 했답니다. 삼성을 바꿀 수 있다고, 그래서 한국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그의 형은 그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노조 탄압에 폭언까지…

  그런 노동조합을 탄입하기 위해 삼성은 ‘노조 무력화 문건’을 만들었습니다. "노조가 없는 19개 계열사에 노조가 설립될 경우 모든 역량을 투입해 조기 와해에 주력하고, 노조가 있는 8개사에 대해선 기존 노조와의 단체협약을 근거로 해산을 추진하라”고 지침을 내렸습니다. 노조가 결성되자 3년 전 데이터를 들고와 조합원들에 대한 특별감사를 실시했습니다. 포항센터 수리기시•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자 삼성은 포항센터에 속하던 지역을 경주센터로 넘겨 포항센터의 일감을 줄였습니다. 직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센터를 폐쇄시킬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런 고 최종범 열사에게 지난 7월 천안센터 사장이 퍼부은 폭언, “네가 (불만 표한 고객을) 지져불든지, 칼로 찔러서 꼭꼭 조사서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벌든지. 그렇게 하든지 해야지. 왜 말이 나오게 해서 애들이 가서 빌게 만드냐?" "뿌려서 XX 같이 죽여버리면 되지.” “XX, 확실하게 잡든지, 입을 막든지, 정 못 이기겠으면 고객의 수행에 따르든지. 그래야 남자 아니야, 새끼야." 한 인간의 자존심을 더럽힌 폭언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조합에 가입 한 이후로 센터 내에서 받아오던 모종의 차별까지 겹치자 고 최종범 열사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43년 전의 유서와 오늘의 유서가 같은 나라

  결국 그는 10월 31일, 자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딸 별이를 두고,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미처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어머니를 마음속에 묻고 그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저 최종범이,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태일 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2013년, '창조경제'를 운운하는 시대에 쓰인 한 노동자의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배고프다, 못 살겠다, 너무 힘들다.' 그는 그러나 노동조합과 동료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힘들다고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음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저었습니다.

  고 최종범 열사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스스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것은 누굽니까? 폭언을 퍼부은 천안센터 사장입니다.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을 위반한 삼성전자입니다. 법으로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며 '부노조 경영‘으로 일관하는 삼성입니다! 고 최종범 열사의 죽음에 이건희 회장이 그의 영전 앞에 무릎 꿇고 직접 사과해야 합니다. 진짜 사장이 나서서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유서에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이라고 적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꼭 10년 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의 85호 타워크레인에서 자결한 김주익 열사는 유서에 “나 한 사람이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적었습니다. 그때 그의 동지였던 김진숙은 추도 사에서 “세기를 건너뛴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감은 나라”를 슬피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고 최종범 열사는 유언으로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서 아직도 죽음을 택해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대체 언제까지 전태일 열사와 같은 유서를 써야 합니까?

  학우 여러분, 자랑스러운 의혈중앙 학우 여러분! 부디 고 최종범 열사의 한을 기억해 주십시오. 사람이 배고파서 죽는 나라,살기 위해서 노동자가 죽는 나라, 그런 나라는 더 이상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죽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의 죽음을 잠시라도 추모해 주십시오. 그가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것들을. 이제 함께 지켜주십시오.

 

중앙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의혈과 함께하는 진보언론 〈중앙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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