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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8 봄여름, 74호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현실적 합리성이라는 익숙함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0. 4. 11.

<74호> 2018년 봄여름

편집위원 신동우

  새 학기가 시작된다. 새로운 학생들과 새로운 교실에서 새로운 수업이 시작된다. 교실에 들어와 빈자리에 앉는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몇 명쯤 들으려나. 내심 많지 않기를 바란다. 학칙 상 한 수업의 재적인원이 20명 이하일 때 절대평가를 시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40, 60, 70... 운이 없으면 20명을 살짝 넘긴 채로 수업을 진행한다. 50명의 수강생이 있는 강의를 듣는다고 해보자. 머리가 빠르게 굴러간다. 50명의 35% 17.5, 17등 안에 들어야 A를 받는다.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둘러본다. 내 위로는 몇 명 쯤 있으려나? 부끄럽지만 내 얘기다. 학점관리의 필요성이 피부로 와 닿진 않지만 현재의 취업난을 보면 막연한 미래도 그리 밝지만은 않을 듯하다. 덕분에 수강신청에 앞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배우고 싶은 과목보단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과목을 고른다. 그렇게 고른 강의는 또 어떤가. 시험 기간에 강의실은 기자회견장이 된다. 칠판과 PPT를 휴대폰으로 찍고 강의를 녹취하고 사방에서 노트북 타자치는 소리가 들린다.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바랐던대학다운강의실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문이 든다. 저렇게 해야만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 또 학점이란 것이 저렇게까지 하면서 받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자존심 때문에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수업이 끝나면 후회된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안하면 손해 아닌가? 자존심이라는 게 항상 지키면서 살기도 피곤하지 않을까? 결국 같이 수업 듣는 친구에게 메신저로 부탁한다. 미안한데 강의 때 사진 좀 보내줘라. 그렇게 남아있던 작은 자존심마저 나는 포기한다.

  분명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대학생활은 아니다. 하루는 집-수업-도서관-집의 반복이지만 정작 공부를 통한 보람 같은 건 없다. 일상이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일상 속에 내가 들어가 사는 기분이다. 나는 대체 왜 대학을 다닐까. 아직은 반반이다. 1)남들 다 다니기 때문에 2)간혹 공부가 재밌을 때도 있어서. 다들 그럴까? 물어보자, 각자에게 대학은 어떤 공간이며 왜 다니고 있는지. 사실 큰 영양가 없는 질문이다. 이상적으로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공간이지만 현실 속에선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일종의 투자로서 받아들여진다. 이중적으로 사고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 그 중 현실에 좀 더 가까운 어딘가에 우리가 생각하는 대학이 있다. 이상적인 대학을 논하려 하면, 현실이 이런데란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맞다. 이상은 늘 너무 멀고 현실은 지나치게 가깝다. 현실이 그렇다니 우선현실의 대학을 다닌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자.

  앞서 현실 속 대학은 대개 취업 전 거치는 단계로서 받아들여진다고 했다. 취업을 위해 대학에 오는 것만은 아니지만, ‘대학까지 왔으니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지는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다. 따라서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직업은 자아실현의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보다 심각하게는 생계와 연결된다. 일을 얻지 못하면 소득 없이 살아야 한다.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에서처럼 노동조건에 따라 내키면 일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구조가 아닌 것이다. 경쟁 문제도 있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일자리를 원한다. 그 속에서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주장해야 한다면, 어떠한 형태로든지 남들과의 차별화가 필요하다. 기업 입장에서 더 필요하고 뽑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이 원하는 인재상, 그 기준에 스스로를 맞춰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내 입장에서만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하기도 전에 면접관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를 스스로 되묻는 것, 모든 것을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정신은 그렇게 하나의합리적인 태도로 대학에 자리 잡고 말았다.

 

취업형 대학으로의 변화

  역지사지의 과정에서 기업의 논리와 이해득실은자발적으로수용된다. 이 정신이 상식이 되는 사회구조는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배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내가 무엇을 배웠다는 것이 아닌, 어떻게 내가 열심히 배웠음을타인에게 인지시킬 수 있을지에 초점은 맞춰진다. 예컨대 우리가 토익을 공부하는 이유는 영어를 보다 능숙히 구사하기 위함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기업이 우리를 평가하는 지표 중 하나기 때문이다.[각주:1] 인기 있는 대학이란 어떤가. ‘하늘(서울·연세·고려대)’ 아래에선 삼성의 성균관대, 두산의 중앙대처럼 기업의 득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대학이 인기다(여기서의 포인트는같은이다). 좋은 대학의 기준이란 게 결국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에 졸업생을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대학 안에서 무엇을 배우는지가 아닌, 대학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모든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회적 인식이 이러하니 교육은 점차 실용주의적으로 변한다. 취업이 가장 큰 목표가 되므로 학생들은 필수적으로 회계를 배워야 하고, 교양과목에서는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다. 미리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순수학문에 대한 홀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대학은 경쟁과 자기계발의 장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상대평가제도다.

 

상대평가와 교육의 방향성

  상대평가는 학생들에게 경쟁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서로에 대한 건설적인 경쟁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탁월함을 끌어내는 것, 상대평가의 기본 전제다. 그러나 현실은 의도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취업의 수단으로서 학점의 중요성이 커진 것, 다른 하나는 그 학점을 취급하는 방식이 상대평가라는 것. 이 두 문제는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대학을 병들게 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상대평가는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인지’를 평가하는 제도가 아닌, ‘상대방에 비해 우위에 있는지’를 평가하는 제도다.

2. 스스로를 상품화할 때, 학점은 하나의 스펙이 된다. 강도 높은 경쟁의 상황 속 학점은 취업 시장에서 개인의 유능함을 드러내는 객관적 지표다.

3. 따라서 ‘내가 상대방보다 우월/열등한지’를 명확히 따질 수 있는 기준을 원한다. 근거를 댔을 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평가 기준과 시험을 원하고, 이는 배움보다는 공정한 성적의 처리가 강의의 본질로서 이해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4. 공정한 시험은 결국 모두가 인정할 수 있도록, 강의한 내용 혹은 교재에 확실히 있는 내용을 ‘잘외웠는지’ 확인하는 정도로서 받아들여지고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강의실은 기자회견의 장이 되어버린다. 모두가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지만, 위의 문제에서 사실상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상적인 교육과 대학에 대한 생각이 서로에게 있어 다를 수는 있으나, 적어도 현재 상황은 아닐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학점에 집착하게 만들고 성적평가방식은 경쟁의식을 심화시키며 그러한 상황 속 주입식 교육은 가장 공정한 수업이 되어버렸다. 대학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 안에서의 배움이 아닌 대학 밖에서의 취업이 되었다. 앎은 주체성을 띠지 못하고 타인의 평가와 승인에 의해서만 의미를 부여받는다.

  대학이라는 특수한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 제기한 학내 상대평가 혹은 실용주의적 교육은, 기업적 경쟁의 논리가 구체적인 제도로서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음을 드러냈다. 공동체의 모든 제도는 그 집단의 철학과 가치관-그것이 자율적이든 타율적이든 간에-을 구현하고, 따라서 우리의 사고와 밀접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래에서는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인재론에 대해 다룬다. 약간은 추상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이 추상성은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의 사고를 효과적으로 제약한다.

 

우리는 어떤 인재를 원하는가

  “글로벌 인재가 되어주세요중앙도서관 3층 어느 서가의 기증자 명의로 쓰인 말이다. 여기서 글로벌 인재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아마 못해도 외국어 서너 개쯤은 할 줄 알고 뛰어난 업무처리능력을 겸비하여 해외로의 잦은 출장과 그를 통해 큰 이윤을 회사에 가져다주는, 막연하게나마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인재(人材)의 사전적 정의는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학식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의외로 기업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글로벌은 통상적으로지구적인의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순수 정의대로만 보면 글로벌 인재는지구적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학식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글로벌 인재란 기업인보단 차라리 칸트, 마르크스와 같은 세계적 석학 혹은 지구적인 어떤 일을 했던 레닌에 가깝다. 하지만 글로벌 인재라는 단어에서 그들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데, 쓰임 자체가 사실상 기업인을 가리키는 데 한정되고 이것이 사회 내에서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인재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한 사회가 지향하는 여러 가치를 함축하며, 대학은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다. 양성된 인재들은 사회의 각 분야에 배치되어 그들이 그렸던 이상을 구현한다. 어떤 인재냐에 따라 그 사회의 모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런데 이어떤 인재인가에 대한 담론은 그동안 철저히 기업의 시각에서만 존재해왔고, 또 받아들여져 왔다. 우리는 인재라는 단어에서 무의식적으로 인적 자본을 떠올린다. 그 결과 현재에 이르렀다. 기업 중심의 사회에서 대학은 인적 자본을 길러내고, 우리는 배움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만 한다.

 

물음: 익숙함에 대하여

  물론 그렇다 해도, 이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현재의 사회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앞으로 더욱 익숙해져 갈 것이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좋은 성적을 받고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어 최종적으로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일반적이고 또 자연스러워 보인다. 마땅히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 그 정당함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배움이 일자리를 얻기 위함이라는 생각, 인재는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정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단지 익숙할 뿐이다. 그리고 이 익숙함은 태초부터 객관적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닌, 누군가의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시도로 만들어진 주관적 결과물이다. 과거 신분제가 그랬고 유교적 정절이 그러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취업형 대학이 그렇다. 신분제와 정절이 그랬듯 이 역시 우리의 생각을 재단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며, 우린 이 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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