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편집위원 조세령

진정한 ‘엄마’를 찾아서
어머니. 자기를 낳아 준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혹은 자녀를 둔 여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거나 부르는 말. 혹은 자기를 낳아준 여성처럼 삼은 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즉 어머니는 자기를 ‘낳아’준 사람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꼭 자기를 ‘낳아’주지 않더라도 자기를 ‘낳아 준 여성처럼 삼’아도 우리는 그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어머니라는 말은 생물학적 관계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도 쓰인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세상에는 다양한 어머니가 존재한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 나를 낳아주었지만 나를 키워주지는 않아서, 나를 너무 외롭게 만든 어머니,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된 어머니, 어머니가 된 뒤로 여성이라는 키워드는 잃어버린 어머니. 우리는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각기 다른 어머니를 다룬 영화 세 편을 통해 ‘어머니’의 초상을 조명한다.
엄마는 너를 정말 잘 키우고 싶어. 영화 <마미>의 ‘디안’
영화 <마미(202014)> 는 2015년의 캐나다를 배경으로 한다. 2015년 가상의 캐나다에서, 새 정부는 S14법안을 도입하여, 행동문제가 있는 자녀의 부모가 경제, 신체, 심리적인 위험에 처할 경우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도 자녀를 공공병원에 위탁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디안은 남편을 잃은 뒤 ADHD를 앓는 하나뿐인 자식 스티브를 시설로 보낸다. 하지만 스티브가 시설에 불을 내 한 아이를 전신 화상에 입게 한 뒤로 쫓겨나자 디안은 오랜만에 스티브와 재회한다. 다시 같이 생활하지만 생활고의 어려움과 스티브의 ‘툭하면 욕하고 소리를 지르는’ 다혈질 성격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 날 스티브가 디안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고, 이 일로 디안은 화가 나 스티브와 싸운다. 스티브는 좋은 목적으로 한 일인데 디안이 화를 내니 덩달아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등 디안을 죽이려는 듯이 위협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디안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책장을 넘어뜨리고, 그에 맞아 다친 스티브를 옆집의 말더듬쟁이 전직 교사 킬라가 치료해주며 세 사람은 서로 안면을 트게 된다. 이후 디안의 제안으로 킬라는 자신의 말더듬증을 낫게 할 방법으로 스티브를 교육시키는데 킬라의 교육과 디안의 자식을 통제하지 않는 교육법으로 스티브의 욱하는 성격이 차차 나이지게 된다. 디안은 사고뭉치 스티브를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엄마로서의 중립을 지키고자 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지만, 스티브를 자신의 방식대로 훈육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디안은 어쩌면 좋은 엄마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아지던 상황 속 세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것 같지만, 스티브가 불을 질러 전신 화상을 입은 아이의 부모가 디안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며 금이 가기 시작한다. 디안은 하는 수 없이 동네의 홀아비 변호사와의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변호사는 오직 디안의 몸만을 원한다. 결국 양쪽의 암묵적인 목적을 충족시키며 만나는 관계가 지속된다. 그러나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티브가 변호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관계는 파탄난다. 급기야 스티브가 마트에서 손목을 긋는 등 자살 시도까지 하자, 디안은 스티브와 킬라에게 여행을 갈 것을 제안한다. 여행의 종착점은 스티브가 갈 시설이다. 자살 소동으로 인해 더 이상 스티브를 홀로 키우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 디안의 최종 선택이었다. 스티브는 디안에게 자신을 배신했다며 욕설을 퍼붓고 폭력적으로 변한다. 시설 안전요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시설로 들어가는 스티브의 모습을 보는 디안의 표정은 한없이 안타깝다.
스티브를 시설로 보낸 뒤 실의에 빠진 킬라는 디안에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다는 사실을 밝히려 디안의 집을 방문한다. 디안은 아직 상황이 나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건 아니라며 자신은 희망을 잃지 않으리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스티브는 시설에서 디안에게 전화를 건다. 미안하다며 자신의 안부를 침착하게 전달하는 스티브는 약물 치료를 통해 상황이 많이 호전됨을 보여준다. 하지만 경비가 스티브의 구속복을 잠시 풀자 그 순간 경비를 밀치고 달리기 시작한다. 웃으며 시설을 뛰쳐나가기 위해 달리는 스티브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일반 관객이나 평론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엔딩곡 라나 델 레이의 ‘Born To Die’는 제목 그대로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영화 내에서 중의적인 의미로 작용하는데 스티브의 엄마 디안의 애칭이 ‘Die’인 점을 고려하면 ‘Born To Die’, 즉, ‘다이에게서 태어났다’는 다이의 자식 스티브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티브의 모습을 보여주며 나오는 영화의 테마 송이지만,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이 노래는 스티브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 디안의 노래로도 볼 수 있다. 때때로 사랑은 충분하지 않고 갈 길은 너무 험하다 Sometimes love is not enough and the road gets tough 는 점에서 그렇다. 디안은 최선을 다해 스티브를 사랑하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세상은 너무 험했다. 어쩌면 배상금을 갚을 수도 없고, 스티브와 함께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면 디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스티브가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 즉 스티브를 시설로 보내는 선택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내내 디안과 스티브의 상황은 풍족하지 않은 것으로 그려진다. 디안의 입장에서는 배상금을 내는 것도 문제였겠지만, 스티브와 넉넉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티브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서는 시설로 보내는 것이 맞다는 판단을 했을 확률도 있다.
영화를 다 본 뒤에는 질문이 남는다. 과연 디안은 좋은 엄마였을까? 디안은 스티브가 시설에서 나온 뒤 스티브를 가장 자유롭게 키우고자 노력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스티브가 차분해지기를,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를 진정으로 바란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디안은 스티브를 시설로 다시 보내면서, 스티브를 더 이상 본인이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듯한 행동을 한다.디안은 엄마가 되고 싶은 엄마였다. 디안은 누구보다도 스티브를 잘 키우고 싶어했다. 디안은 최선을 다했다. 스티브를 다시 시설로 보낸 것에 대해서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디안은 엄마로서 스티브를 잘 키우고 싶어했다. 스티브가 사고를 쳐 보육원에서 쫓겨나는 첫 장면에서 보육원 교사는 디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픈 애한테 가장 나쁜 건 부인 또는 아이의 지나친 자기 확신이에요. 사랑과 구원은 별개예요. 사랑과는 무관해요.”디안은 ‘엄마는 영원히 내 1순위일 것’이라는 스티브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엄마가 아들을 덜 사랑하게 될 일은 없어. 시간이 갈수록 엄마는 너를 더 많이 사랑할 거야.” 디안은 스티브를 사랑했다. 다만 사랑하는 것은 구원하는 것과는 달랐다. 영화에서 분명한 것은 딱 하나다. 디안은 스티브를 사랑했다는 것. 온 힘을 다했다는 것.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자살이던, 도망이던 스티브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 ‘달려나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티브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디안도, 스티브도 어딘가에서 서로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서로를 구원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접어두고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그것이 그들이 가장 잘 하는 것이니까. 아이를 가장 사랑한 엄마, 디안의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우리 여전히 서로 사랑하지?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사랑이잖아, 가자!”

너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
주인공 ‘에바’는 자유로운 여행작가 생활을 하며 베스트셀러 작가까지 된 인물이다. 그녀는 스페인 토마토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프랭클린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아이를 갖게 된다. 그러나 에바는 애초에 아이를 전혀 원치 않았기 때문에 프랭클린과 결혼해 정착하기는 했으나 아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이는 영화 초반 케빈을 낳는 에바에게 의사가 ‘그만 힘을 주라’고 이야기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아이가 이미 나오기 시작했는데도, 세상 밖으로 아이를 꺼내고 싶지 않아 ‘힘을 줄 수밖에 없는’ 엄마의 마음을 영화는 담담한 시선으로 따라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 케빈은 예민한 기질을 지닌 아이로 성장한다. 성장 과정에서 케빈은 유독 에바를 싫어하고, 에바는 원체 아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임에도 케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케빈은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지치지도 않고 울어댔다. 이 때문에 에바는 어느 날 유모차를 공사장 옆으로 몰아 공사장의 소음 소리에 케빈의 울음소리를 덮으며 잠시간의 해방을 느끼기도 한다. 케빈은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악의를 품고 고의적으로 에바를 괴롭히고 피곤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에바도 아기라서 할 수 있는 투정 정도로 받아들였고 어떻게든 인내심을 발휘해 케빈을 진정시키려고 하지만 케빈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는다.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 에바는 결국 케빈에게 더욱 신경질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그 뒤로도 케빈의 이상한 행동은 계속된다. 에바는 케빈의 의도적인 행동들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어느 날 에바와 산수 공부를 하던 도중 케빈은 배변 실수를 한다. 에바가 기저귀를 갈아주자마자 곧바로 또다시 대변을 싼 케빈. 에바는 그런 케빈을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케빈을 강하게 밀어버리고 그 타격으로 케빈의 팔이 부러진다. 에바와 함께 병원에 다녀온 케빈은 아빠 프랭클린에게는 자신이 스스로 넘어져서 다친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한다. 필요한 거짓말을 할 줄 알고, 한자리의 수를 공부할 나이에 두 자리의 수를 줄줄 읊는 케빈의 모습을 보면 케빈은 ‘지극히 의도적으로’ 에바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케빈의 영악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자신에게 좋은 말만 들려주는 아버지 프랭클린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머니 에바와의 관계는 점차 파국으로 치솟는다. 에바는 공동 양육자로서 프랭클린에게 케빈과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케빈의 좋은 점만 보았던 프랭클린은 에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동생 실리아가 테어나고 에바는 케빈과 달리 순하고 밝은, 여느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한 실리아에게 보다 많은 애정을 쏟기 시작한다.
에바는 사춘기 특유의 반항심에 더불어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케빈과 관계를 회복해보려 노력하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다. 에바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탓이었을까. 케빈의 성격은 잔혹하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실리아가 키우던 기니피그를 몰래 죽이거나 실리아의 한쪽 눈을 멀게 하는 범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에바는 실리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케빈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프랭클린은 여전히 그 말을 믿지 못한다. 결국 에바는 이혼까지 말하게 된다. 케빈은 16살 생일이 지나면 부모가 이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16살 생일 직전에 자신의 아버지인 프랭클린과 여동생 실리아를 활로 쏘아 죽인 뒤 학교 체육관의 문을 잠그고 활로 학우들을 학살한다. 재판이 벌어지고, 에바는 살인자의 어머니가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18살이 된 케빈을 만나러 교도소로 간 에바는 케빈과 마주하며 이런 대화를 한다.
EVA: Plenty of time to think about it. I want you to tell me… why.
생각할 시간 많았을 테니 이제 말해줬으면 해. 왜 그랬니?
KEVIN: I used to think I knew. Now I’m not so sure.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르겠어.

영화의 결말에서 에바와 케빈이 나누는 대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뒤따라온다. 첫째는 원래부터 케빈은 문제아였고, 결국 에바가 케빈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은 케빈의 행동 때문이라는 것. 둘째는 케빈의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뒤틀린 방식으로 발현한 것이며, 에바가 케빈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케빈이 에바를 ‘괴롭히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것. 그러나 그 어떤 해석들보다 중요한 것은 케빈과 에바의 관계에서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케빈과 에바는 그 누구보다도 더 ‘닮은’ 인물이기도 하다. 케빈은 타고난 사이코패스가 아닌 보통의 청소년과 다를 바가 없는 인물이고, 에바라는 ‘어머니’ 역시 어머니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케빈을 통해 성찰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영화는 케빈이 모두를 죽이고 에바가 유족 배상비로 모든 재산을 탕진한 후 명성을 잃은 채 허름한 집에서 별 볼 일 없는 일을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에바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힘을 주는 어머니였다. 탄생의 기쁨과 축복 같은 건 에바에게 없었다. 에바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 케빈처럼 차갑고 예민하고 이기적인 인물이다. 케빈과 에바가 함께 미니 골프를 치는 장면에서 이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케빈은 자신은 세상에 관심도 없고 친구도 없음을 말하고 에바는 이에 동의한다. 케빈이 학우들을 학살한 살인자가 된 뒤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는 에바의 모습도 에바가 밀쳐 팔이 부러진 것인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혼자 넘어져 그런 것이라고 프랭클린에게 거짓말을 하는 케빈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즉, 에바라는 인물 자체가 케빈처럼 차갑고 예민하고 이기적인 인물이고 비슷한 성질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케빈이 살인자가 된 뒤 한 대사 또한 주목할 만하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 에바의 말에 케빈이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르겠어’ 라고 대답한 것은, 그동안의 케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왜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가장 악하고 예민한 방식으로 보여주던 케빈은 이제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부모와 세상을 탓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아, 시선이 고팠던 케빈은 사람들을 죽여서 세간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과 단절된 교도소에서 케빈은 느꼈을 것이다. 그동안의 모든 외로움과 고통은 결국 타인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닌 나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걸. 영화에서 처음으로 에바는 케빈을 지그시 바라보며 케빈을 꼭 안아준다. 마침내 에바는, 자신을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사랑을 갈구했던 케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게 된다. 교도소 밖으로 나오는 에바와 밝은 빛으로 페이드아웃 되며 영화의 배경에는 ‘이제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녀가 나의 방황하고 길 잃은 맘을 얼마나 자주 응원해주셨는지’ 라는 가사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들판의 꽃처럼 누구의 아이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케빈은 이제 에바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고, 에바는 일이 이렇게까지 벌어진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마주하는 순간, 그들의 삶은 다시 하나가 된다.
우리는 모두 처음이다. 첫 생이고, 첫 경험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기에 어떤 부분은 미숙하다. 특히 타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평생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떨 때 가장 행복한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나 자신도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상황 속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수많은 관계의 실패의 과정 속에서 깨닫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에바와 케빈이 그러했듯. 이 두 모자에게는 그 어떤 것들보다 솔직한 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 입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나의 주변을 구성하는 것들에 조금이라도 더 귀를 기울였다면. 에바와 케빈은 조금 더 일찍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대해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삶, 영화 <첫여름>의 ‘영순’
영화 <첫여름>의 주인공 영순은 그녀의 오랜 춤 파트너이자 애인이었던 학수가 갑작스레 연락이 두절되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남편을 간병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왠지 모를 고단함을 느낀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콜라텍에서 춤을 추며 잠시나마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려고 한다. 그러다 젊은 노인 학수를 만나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알게 된다. 이후 그녀는 학수를 통해 인생의 ‘첫여름’을 느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노인이 아닌 한 여자로서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엄마를 딸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영순은 콜라텍에서 춤을 추고 학수를 만나는 자신에게 걱정 어린 목소리를 보내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평생 너희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며 살았다. 이제 즐거움이 뭔지를 알았다.”

하지만 어느날 학수에게 연락이 끊기고, 학수의 아들로부터 학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영순은 학수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섭섭해하고, 아들은 그렇다면 절에서 열리는 사십구재에 오시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영순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학수의 사십구재가 열리는 날은 손녀딸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앞둔 손녀에게 영순은 야한 속옷을 건네며 “너를 즐겁게 해주는 놈이 최고다” 라고 말한다. 결국 결혼식 날 영순은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거대한 몸집의 남편을 부축하다가, 남편의 휠체어를 밀어버리고 한복을 입은 채 학수의 사십구재가 열리는 절로 향한다. 사십구재가 열리는 대웅전 밖에서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영순은 춤을 춘다. 비로소 그녀는 자유로워진다.

3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 <첫여름>은 영순이라는 여성이자 노인인 한 인물의 삶을, 그녀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여름’을 그려낸다. 주인공인 할머니 영순은 ‘결혼식’과 ‘사십구재’그 가운데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다. 두 선택은 매우 대비적이다. 결혼식은 가족과 사랑의 시작을 의미하며, 사십구재는 고인을 떠나보내는 장례의 마지막 절차이기 때문이다. 한 삶의 시작과 끝. 그곳에 영순이 있다. 이 두 소재는 영순의 내면에서도 대비된다. 결혼식을 앞둔 손녀에게는 ‘너를 즐겁게 해주는 놈이 최고’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놈과 결혼하지 않았다. 이는 영순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손녀에게 있어서 순간의 선택이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미리 맞춰둔 한복을 입어보는 영순에게 그녀의 딸이 헤어핀을 꽂아주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시작을 앞둔 손녀의 맑은 모습과는 달리, 깎아둔 사과를 씹으며 어울리지 않는 반짝이는 헤어핀을 꽂고 있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무언가가 성에 차지 않은 듯 생기를 잃었다.
영순은 평생을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선택으로 살았다. 영순의 반려자인 남편의 이야기로 얼핏 짐작할 수 있다. 남편은 영순을 “어이”라고 부르며 무심하고 무뚝뚝한 모습을 보인다. 지병을 앓고 있는 그는 요양병원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영순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엉덩이를 닦아 주고, 소변과 대변을 치워주고, 빨래를 돌려주는 영순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영순은 화장실에서 손을 닦으며 거울을 다시 바라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공허한 그녀의 얼굴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삶을 잠시나마 짐작해볼 수 있도록 만든다.

손녀의 결혼식이자 학수의 사십구재였던 날, 결국 영순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차에 탄다. 남편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영순은 늘 그랬던 것처럼 남편을 부축해 거동을 도와준다. 꽉 막힌 길목과 영순의 두 배는 되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남편. 앞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는 휠체어가, 뒤에서는 지나가려는 자동차가 있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 오래전부터 죽어 있던 영순의 삶은 그렇게 비춰진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으로. 말하자면 나의 선택권이 없는 ‘꽉 막힌’ 삶으로. 매 순간이 모여 현재가 만들어진 것처럼 영화는 그 수많은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삶은 곧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나의 모든 의지가 삶이고, ‘살아있음’을 이어가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영순은 딸이 꽂아준 헤어핀을 결국 뽑아버린다. 그 대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만지작거렸던 ‘나비 브로치’는 한복의 가슴팍에 달아 둔다. 영화에서 나비는 영순의 삶이나 다름없다. 누구보다도 ‘날아가고 싶었던’ 영순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비는 죽어 있는 삶에서 진정으로 숨을 쉴 수 있는 삶을 향해 날아가고자 하는 영순의 진짜 목소리나 다름없다. 나비 브로치는 단순한 브로치가 아니다. 친구와 찾은 콜라텍에서 실수로 떨어트리고 만 브로치이다. 그리고 그 떨어트린 브로치를 영순을 ‘살아가게’ 만든 인물인 학수가 주워준다. 영순은 음악, 그리고 춤으로 즐거움 그 자체를 느낀다. 그리고 그 즐거움으로부터 영순의 삶이 시작된다. 영순은 말한다. “나는 어떤 여자일까? 나는 음악 소리만 나오면 춤추고 싶어. 성미가 그래.” 영순은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학수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삶을 시작한다.
여름의 뜻은 ‘연다’에 기인하고 있다. 일 년을, 성장을 연다는 것이다. 영순이 ‘즐거움이자 삶’그 자체인 곳으로 향하는 주체적인 모습은 결국 영순이 자신을 둘러싼 벽의 문을 스스로 여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보통 할머니의 삶에 대해 무기력하고, 주체적일 수 없으며,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의 삶에 집중하게 된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단조롭고 획일화된 구조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학수의 사십구재에 가는 영순의 선택은 영순의 삶 속의 벽 뿐만 아니라 감독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벽까지 허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학수와의 사랑이 혈연으로 맺어진 결혼식만큼 의미있고 커다란 마음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이, 개인적이고 싱거운 사랑이 우리 삶에서는 꼭 필요하다. 영화의 소개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영순은’ 손녀의 결혼식 대신 학수의 사십구재에 가길 ‘원한다’. ‘영순은 원한다’. 영순이 무언가를 원하기 시작함으로써, 영순의 여름이 열렸다. 영순의 ‘첫 여름’이.
우리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엄마란 무엇인가. 우리는 <마미>의 ‘디안’,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 그리고 <첫여름>의 ‘영순’이라는 세 명의 여성을 만났다. 엄마라는 이름 아래 그들의 삶은 결코 사전적 정의처럼 단순하지 않다. 디안은 아들을 구원하고 싶은 엄마가 되려 했지만 사랑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에바는 ‘엄마’가 되길 원치 않았고, 자신과 닮은 아들과의 지독한 불통 끝에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야 비로소 아들을 마주 안았다. 그리고 영순은 평생 짊어진 ‘엄마’와 ‘아내’라는 역할을 벗어 던지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신의 첫여름을 향해 주체적으로 걸어나간다. 영화들은 말한다. ‘엄마’가 완성된 존재나 성스러운 자리가 아니라고. 그것은 사랑과 현실, 증오와 이해,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기 삶을 향해 나아가는 치열한 분투의 또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엄마가 된다는 것’은 완벽한 역할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때로는 부서지고, 때로는 도망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랑하거나 혹은 자신을 찾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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