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윤성주
“장애는 나와 함께하는 정체성이야”
함께하고 싶었다. 동문이를 처음 만난 5월, 안성은 약간 쌀쌀했다. 당시 나는 장애인 참정권에 관한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안성에 전맹인 학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문이는 안성캠퍼스 전통예술학부에서 판소리를 전공하고 있었다. 안성캠퍼스는 넓었다. 정문에서 기숙사까지 걸어 올라가는 데에만 20분이 걸렸다. 처음 만난 동문이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인터뷰를 하던 중 나이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구 하자고 했다. 동문이가 기뻐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동문이는 술 한잔하자고 했다.
어둑해진 밤, 날은 더 쌀쌀해졌다. 우리는 손을 잡고 정문에 있는 편의점으로 내려갔다. 맞잡은 손에서 동문이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 무게를 나누었다. 서로의 존재가 피부로 명확히 느껴졌다. 그는 장애를 숨기지 않았고 당당히 받아들였다. “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문제가 있어. 장애인을 낮게 바라보기에 가능한 시각이야.” 도와주지 않았다. 함께하고 싶었다. 그와 같은 시간 속에서 걸어 내려갔다. 20분도 넘게 걸렸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아. 나는 볼 수가 없거든. 없을 거거든. 장애는 극복하거나 딛고 일어서는 게 아니야. 장애는 나와 함께하는 정체성이야. 나는 장애를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음악가야.” 20분도 ‘넘게’ 걸렸다는 것. 그것은 비장애인의 시각이었다. 동문이의 시각에서 나의 시간은 ‘짧게’ 걸린 것이다. 장애인에게는 장애인만의 시간이, 장애인만의 시각이 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동문이는 판소리 곡조를 뗐다. 적막한 안성은 그의 가락으로 번졌다. 사뭇 좋았다. 막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동안 동문이의 가락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비장애인의 세상에서 장애인은 배제된다.
세상은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설계되어있다. 비장애인이 정상인 세상에서 장애인은 비정상이 된다. 비정상이 된 장애인은 배제된다. 장애인이 스스로의 시각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중앙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존심이 상했다. 투표결과가 노출된다는 점에서 자유롭게 투표하기 힘들다.” 한 장애학생은 내게 심정을 토로했다. 비장애학생은 투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학생자치에 반영시킨다. 그러나 장애학생은 투표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먼저 기표소의 크기가 작아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학생은 혼자 투표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도우미 학생의 부축을 받고 기표소에 동행하여 투표한다. 시각장애학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기표소에 동행한 도우미 학생이 후보를 읽어주고 대신 찍는다. 동문이는 “투표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장애인 학생회가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가 겪는 문제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점자 기표도구라던가 장애학생을 위한 기표소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장애인의 투표권 문제에 대해 학생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장애학생은 학교 축제에서도 배제된다. 전 고려대학교 장애인권위원회 위원장 신홍규 씨는 “장애 학생들이 고려대학교 축제인 입실렌티
에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정말 놀랐다. 위험하고 보이지도 않는데 가봤자 무엇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장애학생들이 모여 문제의식을 학생사회에 투영한다면 가능하다. 여기는 대학이니까”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려대학교는 14년도부터 배리어프리존을 운영하여 장애학생이 안전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이는 고려대학교 장애인권위원회와 학생자치에 참여한 장애학생의 끈질긴 설득으로 이뤄낸 결과였다. 중앙대학교 대학축제의 현장은 계단이나 경사가 가파른 장소를 포함하며 휠체어나 이동통로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인원이 밀집되어있고 유동인구가 많기에 장애학생은 쉽게 위험에 노출된다. 중앙대학교의 장애학생도 학내 구성원으로서 축제에 참여하여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학내에 만연한 장애인 혐오 발언도 문제다. 이에 대해 지체장애가 있는 원철연 씨(경제학과 1)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애인이 조롱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장애인이 목소리도 많이 내고 권리가 주장되면 조롱거리가 아닌 사회의 한 부분으로 다뤄지지 않을까요. 장애학생들의 위원회는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 ‘병신’이라는 용어는 일상에서 쉽게 발화된다. 주로 우스운 행동을 하는 친구를 지칭하거나 타인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장애인은 우스운 사람이다’, ‘장애인으로 불리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다’라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장애는 조롱거리가 아니다. 장애는 누군가에게 정체성이다. 장애인 혐오 발언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공고화하며 당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작용한다. 본인의 발언이 당사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의도와 관계없이 이는 명백한 가해행위다.
지금껏 장애학생이 겪는 어려움이 공론화되지 못하고 학생자치에 반영되지 못한 이유는 장애학생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장애학생 중심으로 구성된 현재의 학생자치에 장애학생은 참여 자체가 어렵다.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장애인 당사자이다. 장애학생 스스로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고려대학교의 경우 이미 1998년도에 장애인권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 대학 축제 최초로 배리어프리존을 도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장애인권위원회를 통해 장애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이 학생자치에 반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장애인권위원회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장애인권문제를 가시화할 수 있다. 장애학생의 존재는 학생회의 사업에서 쉽게 지워진다. 사업 진행에 앞서 장애인권교육이 시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투표나 축제와 같이 장애학생의 접근조차 고려되지 않은 사업이 빈번한 것이 현실이다. 학생회가 장애인권의식이 결여된 사업을 진행할 경우, 장애인권위원회는 공식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이는 장애학생 또한 중앙대학교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생사회에 명확히 드러낸다.
장애학생회 ‘WE, 하다’
장애인권위원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난 학기 장애 문제에 대한 기사를 쓰며 이 생각은 선명해졌다. 그러나 실천하지 못했다. 기자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당장 단체를 구성하기 무리라고 생각했다. 무력감과 바쁜 일상을 변명 삼아 문제의식은 나태해져갔고 가슴 한편에 장애학생들의 현실을 묻어뒀다. 그렇게 나는 장애학생의 인권을 유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간담회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6월 8일 장애학생지원센터는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당 행사를 기획했다. 나 역시 그 행사에 참여했다. 간담회에는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많은 학생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장애학생의 현실에 공감했고 열정적이었다. 그 자리에서 만난 학생들과 장애학생단체의 필요성을 이야기했고 방법을 의논했다. 혼자라는 무력감은 가능성으로 변해갔다. 김세주 씨(사회학과 3) 역시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김세주 씨는 임예지 씨(사회학과 4), 박지수 씨(사회복지학부 3)와 함께 준비위원회 모집을 시작했다. 16명의 학생이 모였다.
첫 회의는 7월 24일에 시작되었다. 회의 이름은 ‘장애학생회 WE, 하다’로 결정되었다.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함께, 서로를 위하며 공존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장애학생의 권리를 향상하고 공존하는 학생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성격의 단체를 만들어야 할지 논의했다. 몇 번의 회의 끝에 총학 산하의 위원회 형식이 가장 적절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장애학생만의 독립된 단체로는 예산 조달이 어렵고 학생자치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장애학생의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장애학생이다. 장애학생이 정치에 참여하고 제도를 구성할 수 있어야 당사자의 어려움이 해결 가능하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인권침해 실태조사를 하던 중, 학내 장애 인식과 관련되어 그 수준이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학교의 경우에는 장애학생인권위원회를 통해서 장애 학생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말하고, 대변하지만 중앙대학교는 그렇지 않아 인식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당사자성’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기구가 필요합니다. 당사자를 제외하고 중앙대학교 내 장애 학생 관련 사업, 정책, 서비스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장애학생이 장애학생을 위해 스스로 정치하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자치기구는 필수적입니다. 또한, 중앙대학교의 현실을 보았을 때 동아리의 형태로 실제 학생 자치에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기구의 신설을 주 목표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 박지수 씨(사회복지학부 3)
‘WE, 하다’의 활동
투표를 통해 위원장과 집행부를 선출했다. 처음 장애학생단체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 김세주 씨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장애학생회 회칙을 구성했으며 매주 수요일마다 정기 회의를 진행했다. 총학 산하 자치위원회의 발족을 목표로 크고 작은 사업을 시행했다.
지적장애, 청각장애학생을 위한 특수학교인 구화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중앙대학교 캠퍼스 투어를 진행했다. 소책자를 제작해 배부했으며 특수학교 학생들의 궁금한 점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캠퍼스 투어를 진행한 장애학생회 홍보부장 김세희 씨(국어국문학과 3)는 “어떻게 하면 다양한 장애 영역을 가진 학생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동선 등을 고민하며 진행했다. 제가 대학진학에 어려움을 느꼈던 당시를 떠올리며 준비했다. 특수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캠퍼스 투어를 진행한 사례는 처음으로 알고 있다. 많은 장애학생들이 좋은 대학교에서, 좋은 복지를 누리며 학문의 꿈을 펼쳐나갔으면 좋겠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중앙대 학우들과 함께 장애의 현실을 고민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장애를, 읽고, 생각하고, 쓰다’라는 글쓰기 세미나를 진행했다. 세미나는 4주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한 번의 세미나에 최대 30여 명이 참석했다. 세미나에 참여한 한 장애학생은 “장애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며 좀 더 폭넓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부스사업도 진행되었다. 인권문화제 주간, 장애학생회의 부스를 설치하여 장애학생의 인권 실태에 대한 판넬, OX 퀴즈, 공존 방향에 대한 포스트잇 참여를 진행했다. 특히, 장애인권위원회 설립을 지지하는 학우들의 서명을 받았다. 많은 학생이 장애학생인권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대학교 페미니스트 퀴어 공동체, FUQ’에서 매년 진행하는 FUQ영화제에서 함께 행사를 주최했다. 장애여성의 인권을 다룬 영화 “거북이 시스터즈”의 기획을 담당했다. 장애학생지원센터에 협조를 구해 FUQ영화제 전반에 속기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행했다. 행사에 참여한 한 청각장애 학생은 속기 지원에 대해 “영화제에서 장애학생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있어 고마웠다. 나 같은 경우에는 청각장애가 있는데, 속기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도 장애학생이 차별받지 않게끔 모두가 노력해서, 함께 즐기는 행사가 많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강서구 특수학교설립 주민 토론회에서 발생한 차별에 대해 “차별과 배제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습니다”라는 이름으로 법학관과 페이스북에 대자보를 게시했다. 해당 대자보를 쓴 김지수 씨(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3)는 “당사자성을 가진 장애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장애학생위원회는 학내 문제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에 장애학생은 포함되어 있는가
이 모든 행사는 불과 한 학기 동안 이루어졌다. 장애학생의 인권실태에 대한 문제의식과 자치기구 신설에 대한 구성원 공동의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시간에 진행한 다양한 사업들은 현재 장애학생회가 총학 산하 위원회로 사업을 진행함에 부족함 없는 역량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한다. 구화학교 특수학교 학생의 다양한 장애영역을 고려한 세심한 동선 배치와 진행, 영화제에서 실시간으로 지원되는 속기, 장애학생의 목소리가 반영된 대자보. 당사자가 아니라면 고려하고 구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장애학생의 단체설립은 작년 2학기에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관심의 부족과 물질적 어려움으로 좌절되었다. 더 이상 장애학생의 인권이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 장애학생은 ‘우리’와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우리’에 장애학생은 포함되어 있는가. 장애학생을 인지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는 장애학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서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학생회 WE, 하다’의 마지막 강령은 다음과 같다. “의와 참의 정신의 계승 아래, 구성원이라는 동등한 입장에서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이바지한다.” 중앙대학교 구성원들과 공존하고자하는 장애학생들의 바람이 더 이상 미뤄지지 않기를 바란다.
“장애인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장애인은 소수라고만 생각해서 그래. 장애학생들이 모여야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야 장애 학생이 다니고 있다는 것을 학우들이 알 수 있지 않을까. 장애인권위원회는 우리의 어려움과 요구를 말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학우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 조동문 씨(전통예술학부 2)
'지난호보기 > 2017 가을겨울, 73호 <시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원이동 이제 시작이다 (0) | 2020.04.11 |
---|---|
QS사태, 대학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0) | 2020.04.11 |
학생을 위한 전공개방제도 될 수 있을까? (0) | 2020.04.11 |
권리는 무릎을 꿇어서 얻을 것이 아니다 (0) | 2020.04.11 |
길을 밝혀주리니 - 장애학생인권위를 말하다 (0) | 2020.04.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