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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17 봄여름, 72호 <변한 것 변하지 않은 것>

혐오로 물든 캠퍼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2020. 4. 11.

72호, 2017 봄여름

편집위원 신현욱

 강남역 살인사건이 1주기를 맞이한 5월 17일의 밤이었다. 늦게까지 진행된 회의를 마치고 헌화를 하러 강남역 10번 출구로 향했다. 한참 전부터 그곳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막상 가기까지 꽤 오래 망설였다. 헌화하는 사람을 몰래 찍는 사람들을 봤다거나 헌화를 하다 조롱 섞인 비아냥을 들었다는 제보가 무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발치에서부터 똑똑히 보이던 수북한 국화꽃들을 눈앞에 마주한 순간, 모든 공포와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폭력을 겪어야 했던 나, 그리고 나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에게 꽃들이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든든함을 느끼며 꽃을 내려놓으려던 그때, 나는 변하지 않은 한국사회의 단면을 또다시 마주해야 했다.

 한 남성이 ‘여자 만세’와 ‘평등’을 쉴 새 없이 수첩에 적은 뒤 찢어 바닥에 놓인 꽃들 위로 뿌리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그가 쉬지 않고 써 내려가고 있는 그 ‘평등’이 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염원하는 ‘평등’과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게 용기를 주었던 흰 꽃들은 어느새 악에 받친 종이들로 뒤덮였다. 그 수많은 꽃들을 발 아래에 두고 웃는 얼굴로 ‘여자 만세’가 적힌 종이를 뿌리던 그 남성에서 일 년 전 같은 곳에서 생면부지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가 겹쳐 보였다. 그 자리에서 함께 추모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그 남성이
행사하는 저열한 권력 앞에서 혐오로 얼룩지고 있었다.

 슬프게도, 터져 나오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덮어버리려고 하는 그의 행동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혐오로 가득한 종이들이 추모 장소에 나부끼는 것을 보며,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여성주의 소모임 <참을 수 없는 페미의 즐거움(이하 참페미)>와 여성주의 교지 <녹지>가 당한 테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만큼 학내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정치국제학과 내 여성주의 소모임 <참페미>는 ‘이 많은 말들은 누가 다 했을까’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학과 내에서 여학생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성차별적인 언행을 제보 받아 과실 벽에 부착했다. 학과 내에서 성적으로 대상화 되었던 일, 성희롱을 당하고도 그것이 당연한 분위기 속에서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던 일, 일상적으로 들어왔던 혐오 발언들에 대한 고발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불과 나흘 만에 활동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종이가 찢긴 자리에는 여성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비웃기라
도 하듯 대량의 과자가 뿌려져 있었다. 사건 이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법학관 지하 1층에 배부된 여성주의 교지 <녹지> 40여 권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다른 간행물들은 그대로인데 <녹지>만 버려졌다는 점, CCTV 확인 결과 범행을 저지른 남성들이 범행을 위해 만났다가 곧바로 헤어졌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는 우발적인 장난이 아닌 <녹지>를 겨냥한 명백한 계획 범행이었다. 테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약 3주 후, <참페미>의 활동물 훼손 사건 이후 게시된 두 개의 성명서, “여성의 목소리는 찢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와 “우리는 찢겨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가 또다시 훼손되었다. “보지 찢어지는 소리?”, “꿀빠니즘”등의 저열한 비난이 빨간 글씨로 적혀있었다. 억압당해 온 여성의 목소리를 가시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무참히 짓밟는 테러가 학내에서 연이어 발생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드러난 뿌리 깊은 젠더 권력 관계는 캠퍼스 내에서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여성의 입을 틀어막으려하는 주체는 사회 어딘가에 잠식해있는 몇몇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과실을 쓰는, 같은 건물을 이용하는 학생들이었다. 학내에서 발생한 연이은 테러는 학교 밖에서 벌어진 사건들보다 훨씬 가까운 위협으로 다가왔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일상에서 겪는 차별과 공포, 두려움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지만, 근 1년 동안 변한 것은 없었다. 젠더감수성이 결여된 학내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틀어 막으려하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변한 것 없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변한 것은 ‘우리’였다. 우리는 일련의 폭력적인 사건들을 목도하며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여성의 목소리는 찢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찢겨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참페미>의 성명서를 시작으로 학내·외를 가리지 않고 여러 단위들에서 <참페미>에 지지와 연대의 성명서를 보내왔다. 연대 성명서를 포함한 수많은 지지 메시지들이 다시금 정치국제학과 과실의 벽면을 빼곡히 메웠다. 여성의 목소리가 무참히 뜯겨나간 자리를 또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가 채웠다. 두 번째 성명서 훼손 사건 이후에는 훼손된 성명서 주변에 범행을 저지른 남성을 비난하는 십여 개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작년 5월 17일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붙은 셀 수 없이 많은 포스트잇들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녹지> 사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학내 여성주의 학회 <여백>, 사회학과 학생회, 정치국제학과 여성주의 소모임 <참페미> 등의 학내 단위들이 연대 성명서를 보내왔고, <녹지>는 “혐오에 굴복한 일보의 후퇴도 없다”는 성명문과 함께 강경대응을 예고했다. 여성주의 집단을 향한, 여성을 향한 폭력과 억압에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수많은 학내 단위들과 여성주의 단체들의 적극적인 연대는 중앙대학교 내에서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지워지는 현실을 공론화했다. 변한 것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는 절망으로 이어지는 대신 더 큰 저항의 발판이 되었다.

 다시, 발아래 놓여있는 꽃을 보며 “여자 만세를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는 이 땅에서 남성으로서 당연하게 주어진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에게는 자신이 누려온 특권에 대해 성찰할 마음도, 여성혐오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 대해 돌아볼 마음도 없었을지 모른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주절거리며 종이를 뿌리던 남성에게 수북한 꽃들은 ‘언제나 그랬듯’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물을 찢고, 과자를 뿌리고, 교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피해의식과 억하심정으로 똘똘 뭉친 종이 몇 장을 뿌리는 것으로 눈앞에 드러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터져 나오기 시작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미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발아래 놓여있는 꽃을 보며 “여자 만세를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는 이 땅에서 남성으로서 당연하게 주어진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에게는 자신이 누려온 특권에 대해 성찰할 마음도, 여성혐오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 대해 돌아볼 마음도 없었을지 모른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주절거리며 종이를 뿌리던남성에게 수북한 꽃들은 ‘언제나 그랬듯’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물을 찢고, 과자를 뿌리고, 교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피해의식과 억하심정으로 똘똘 뭉친 종이 몇 장을 뿌리는 것으로 눈앞에 드러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터져 나오기 시작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미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참페미>와 <녹지>는 사건 이후에도 학내·외의 성차별적인 언행들을 계속해서 공론화시키고 있다. 그 노력 덕분인지, 얼마 전에는 강단 위에서 혐오발언을 일삼던 교수가 그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못 이겨 학과장 자리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용기와 연대의 결과물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 1년 후,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끊임없이 저항해야 함을 깨달았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다시 찾은 사람들의 흔적은 무수한 차별과 혐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도록 내게 용기를 주었다. 내가 목격했던 그 남성의 폭력적인 행위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절망과 분노를 적극적인 저항으로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었을 뿐이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이상 학내에서 언제든지 <녹지>와 <참페미> 테러와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을 겨냥한 폭력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설치며 떠들어야 함을 알고 있다.

 아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가부장적 폭력과 혐오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아마도 쉽게 바뀌지는 않을 테다. 다행히도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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