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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호 87호 <내일로>/인권

안安의 바깥에서 질병권을 외치다

by 중앙문화 2024. 12. 26.

2024 가을겨울 87호 <안安의 바깥에서 질병권을 외치다>

 

안安의 바깥에서 질병권을 외치다

 

수습위원 김한솔

 


 

🥦  청년 세대에 불어온 저속노화 바람

▲ 저속노화 아침식사의 예시(출처: 유튜브 채널 ‘정희원의 저속노화’) [각주:1]

 

마라탕과 탕후루 대신 샐러드와 현미밥을, 설탕 대신 알룰로스를 택하는 이들이 있다. 건강을 염려하기 시작하는 중장년층이나 몸을 가꾸는 다이어터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저속노화 식단'이 하나의 트랜드가 되면서 생활 습관을 바꾸는 청년층의 모습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귀리, 현미, 백미, 렌틸콩을 2:2:2:4의 비율로 배합해 지은 ‘저속노화밥' 사진을 올리거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한 저속노화 레시피를 공유하는 식이다. 이들의 목표는 단지 체중을 감량해 보기 좋은 외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인성 질환의 발병 가능성을 낮춰 나이 드는 속도를 늦추는 데 있다. 정희원 노년내과 의사가 처음 소개한 저속노화 식단은 단순당과 정제 탄수화물의 섭취를 줄일 것을 강조한다. 대신 통곡물과 콩, 채소, 베리류, 견과류, 올리브오일 등 혈당지수(GI, 혈당을 올리는 속도)가 낮은 식품을 더 많이 섭취함으로써 질병의 발병률을 낮추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6월 SNS X(구 트위터) 상에 그가 게시한 사진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해당 광고는 뚱뚱한 몸의 사진을 통해 아이스크림 섭취가 비만을 유발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비판적이었다. 아이스크림의 해로움을 알리려는 공익적 의도와 무관하게 해당 광고는 비만 혐오(fat shaming)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다분했다는 의견이다. 살찐 몸을 희화화하거나 자기관리의 실패 라고 비난하는 것은 비만에 영향을 미치는 호르몬, 스트레스, 유전, 환경 등 다층적인 요인을 배제하고 비만인 사람들을 더 깊은 사회적 고립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이러한 비판을 수용했으며 해당 게시글은 곧 삭제되었다. 그가 꾸준히 개인의 건강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구조적 차원의 변화가 필요함을 언급해왔고, 비용이나 시간의 차원에서 다수가 접근 가능한 저속노화 식단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여러 X 이용자가 주지해왔기 때문에 피드백 이후 이 논란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저속노화 유행은 더욱 짜고 달아지는 외식문화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다양한 연령층으로 하여금 담백하고 슴슴한 생활 습관의 이로움을 발견하도록 했다. 이러한 유행이 불러온 긍정적 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결과적으로 질병의 사회적 측면보다 개인적 실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남기기도 한다. 영양학적으로 좋은 식사는 일터에서 주어진 휴식 시간 안에 끼니를 때워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최선이 아닐 수 있다. 4시간 일했을 때 주어지는 30분의 휴게시간동안, 최저시급보다 비싼 샐러드와 1200원짜리 삼각김밥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 당신이라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과 그 환경의 열악함, 긴 통근 시간과 같은 문제에 대한 정 교수의 지적은 “정제곡물보다는 통곡물을 섭취하자", “7시간 수면이 중요하다" 라는 결론에 희석되어 미디어에 유통된다.

 

 

🥦  아픈 건 본인 책임?

   건강한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을 자기자신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갓생러'[각주:2]로 추앙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자기관리의 신화를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노력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는 양날의 검처럼 충분히 '관리'하지 않은 사람들을 찌른다. 많은 환자들이 병을 진단받은 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문한다. 성인병이면 운동을 하지 않아서, 간암이면 술을 자주 마셔서, 폐암이면 담배를 오래 펴와셔, 당뇨라면 탄산음료를 습관처럼 마셔서... 타인의 평가는 때때로 더욱 냉혹하다. 산부인과 질환인 경우에는 문란하게 살아서, 정신과 질환인 경우에는 멘탈이 약해서... 특정한 삶의 방식이 질병의 발병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질병은 잘못 살아온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업보의 결과도 하늘의 징벌도 아니다. 좋은 음식, 꾸준한 운동, 규칙적 수면, 스트레스 관리 등 개인적인 노력 외에도 사회적, 경제적, 유전적 요인 등 건강에 영향을 주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즉, 여전히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믿음과는 반대로, 건강은 개인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본고에서는 건강관리가 개인의 몫이 되어가는 흐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해, 건강과 질병을 사회적 맥락에서 돌아보고, 건강한 삶을 소망하는 것이 왜 당연한지 의문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 우선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라는 관용구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이 표현은 가끔 섬뜩한 경고처럼 들린다. 왜 건강이라는 외줄에서 미끄러지는 순간, 누려 마땅한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할까. 전부 잃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병을 앓는 시간은 단지 병상에서 낭비되는 비효율적이며 비생산적인 시간이며, 그 기간은 고장난 에어컨이 수리기사를 기다리는 날들처럼 무의미한 중간 단계에 불과한 걸까.

 

 

🦠  질병과 건강 개념의 패러다임

   질병은 그 실체가 명확히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예시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반면, 건강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47년,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안녕 상태로 규정하며, 한 인간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 병이 없는 상태여야 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안식 및 전쟁, 굶주림, 폭력 으로부터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함을 밝혔다. 건강의 논의 범주를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사회의 차원으로 확대한 WHO의 정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서양의 근대적 합리주의에 근간을 둔 생의학의 원리가 건강 담론을 지배하고 있었다. 생의학은 인간의 정신과 신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질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내놓았다. 근대 이 전까지 질병은 영적인 것에 의한, 또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파악되곤 했지만, 생의학에서는 질병을 “정상적 기능 능력의 훼손, 즉 하나 또는 여러가지 기능이 전형적 수준 이하로 떨어지거나, 환경요인으로 기능 능력이 제한된 내부적 상태” 로 정의내렸다. 따라서 건강한 상태는 질병이 없는 상태이며 보통의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질병은 생물학적 정상성에 대한 병리적 일탈이다.
   기계가 고장났다면 말썽을 일으킨 부품을 찾아내 들어내고 교체하면 되는 것처럼, 생의학적 관점에서 질병은 병인을 발견함으로써 고칠 수 있는 일시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설명은 한동안 유효했다. 예를 들어,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은 과학의 발전 덕택에 그 원인이 규명되었으며 치료법이 개발되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은 치명률을 보이고 있다. 서양근대사회는 19세기 소독법과 방역볍의 발전, 20세기 중반 항생제 의 발명 등 의학적 진보를 통해 질병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의사들은 환자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질병을 일으킨 하나의 원인을 지목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또한 근대 이후 전염병 외에도 만성질환이 만연해짐에 따라 이전의 의학적 관점은 필연 적으로 수정되어야 했다. 만성질환은 감지하기 어려우며,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만성질환을 앓는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증상이 정상적인 신체적 경험인지 질환에 의한 것인 지 구분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만성질환은 진행과정이 불규칙하며 예후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환자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커다란 불확실성을 떠안는다. 또한 지속 기간이 매우 길 수도 있기 때문에, 환자는 이 기간동안 치료를 받으면서만 살 수는 없으며 ‘정상인’으로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 질병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만성질환은 이전까지 의사가 독점하던 의학적 권력을 환자에게 분담하며 자기치유(self-care)의 중요성과 개인의 질병경험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기도 했다. Kleinman에 따르면 질병경험은 문화와 사회구조가 정신신체적 과정과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다. 즉, 오늘날 우리는 질병이 사회적, 문화적인 요인과 신체의 정신신체적 과정이 상호작용하면서 발생하며, 그것이 당사자 개인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가족과 지역사회의 집단사회적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음 [각주:3]을 알고 있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질병과 건강에 대한 근대적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현대인과 근대인이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지배적이었던 의학적 담론이 약화되고 새로운 건강담론이 생성되는 과정을 통해 질환과 몸에 대한 유일한 진리는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  질병의 사회적 성격: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몸, 건강, 질병

   질병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에이즈 AIDS(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성면역결핍증)이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과거 유행했던 ‘웰컴 투 에이즈’ 괴담을 통해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디지털 풍화된 이미지로 인터넷을 떠도는 이 해묵은 도시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 한 남성을 유혹하고, 둘은 성관계를 가진다. 다음날 일어나자 여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고, 남자는 화장실 거울에 립스틱으로 쓰인 글자들을 발견한다. “Welcome to AIDS” 라는 짧은 문장이었다. 최초의 지은이가 무엇을 의도했든간에, 이 괴담이 무서운 이유는 마지막의 반전 탓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에이즈에 대한 왜곡된 시선에서 쓰였으며 그 짧은 텍스트가 읽는이의 편견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료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병, 성적으로 방탕하게 산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죄값, 또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질병. 에이즈를 둘러싼 오명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에이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에이즈를 유발 하는 것은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로, 에이즈 환자는 HIV가 사람 몸속에 침입해 면역세포를 파괴함으로써 면역기능을 떨어뜨려 에이즈 환자의 판정기준에 속하는 특정한 기화감염이 나타난 사람을 말한다.[각주:4] 또한 HIV 감염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에이즈 환자인 것은 아니며, 유엔 에이즈기구(UNAIDS)에 따르면 약을 잘 복용하여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HIV 감염인은 성 접촉 을 통한 감염력이 없다. 완치가 불가능한 질병이지만 치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HIV는 감염인의 모든 체액에 존재하는데, 특히 혈액, 정액, 질 분비물, 모유에 많은 양이 존재한다. 상처를 통해 바이러스가 체내로 들어오기 때문에 단순한 일상적 접촉이나 생활공간의 공유로는 전염될 수 없다.
   미국에서 에이즈가 유행했던 1980년대에는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혐오적인 시선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의 무관심,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의 동성애 혐오발언, 미디어의 편향된 시각 등으로 인해 감염자들은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이에 맞선 HIV/AIDS 행동주의 운동[각주:5]은 에이즈 환자들을 가시화하고 정책적인 지원을 촉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현재 질병관리청에서는 매년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에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검사 및 상담, 치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검사와 치료의 문턱을 낮춰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에이즈를 둘러싼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 차별과 편견을 해소하는 것은 생명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 지난 10월 31일 중앙대학교 다빈치캠퍼스에서 열린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주관 에이즈 바로알기 캠페인 (출처: 한국에이즈퇴치연맹 홈페이지)[각주:6]

 

   앞서 우리는 건강과 질병, 신체와 정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시대를 거쳐가며 변화해온 과정을 살펴보았 다. 어떤 몸이 바람직한 몸인지, 어떤 상태가 건강한 상태인지 규정하는 것은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무병장수가 모두의 꿈이라고는 하지만, 생명체로서 갖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는 별개로 건강에 대한 강박과 질병에 대한 공포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파고들 필요가 있다. 또한 에이즈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무엇이 질병으로 규정되는지, 어떤 치료를 받는지, 질병이 어떻게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이어지는지 살펴보면 질병이 권력과 관계를 반영함을 알 수 있다.
   질병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평안한 모습일까? 여기 하나의 예시가 있다. 율리 체의 소설 『어떤 소송』 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의무가 된 가상의 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미아'는 동생의 죽음 이후 충분히 건강을 관리하지 않은 죄목으로 법정에 선다. “건강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은 병날 것이 아니라 이미 병들었다.” 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세계에서 건강은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지의 목표이며, 사회와 정치의 목표이므로 주인공은 이러한 세계에 맞서는 반항아인 셈이다. 미아 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란. (...) 자기 힘의 최고점에서 시작해 그 지점부터 계속 하향하며 종말에 접근하게 되어 있어요. 희곡 작법으로 따지면 엄청난 결함이죠.[각주:7] 미아는 인간이 서서히 에너지를 소모하며 약화하도록 설계된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체제의 수호자 ‘크라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동의해요. 그리고 그 결함이 숭배 대상이 아니라 바로잡을 대상이라고 인식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건강을 정상과 동의어로 보는 게 잘못이라 할 이성적 논거가 무엇이겠어요? 고장 없음, 결함 없음, 작동함.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이상에 유용하지 않아요.”

   생명력을 소진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인간 생애의 결함을 합리성으로써 극복하겠다는 크라머의 말은 불로장생을 향한 진시황의 열망처럼 달콤하게 들린다. 그러나 미아가 일견 낙원처럼 보이는 이 건강지상주의 사회에 맞서려 했던 것은, 병에 걸려 아파하는 것 또한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매일 생체 데이터를 측정해 제출할 의무를 거부하는 것, 병균과 바이러스의 침투를 허용하는 것, 쓸 데없이 오래 슬퍼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지만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는’ 행동들이다. 『어떤 소송』에 등장하는 터무니없는 규율들은 어떤 면에서는 우습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건강 숭배의 과장된 버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질병이나 죽음 자체가 지옥이 아니라, 아프면 끝장인 사회가 사람을 지옥으로 내모는 것이다.

 

 

❤️‍🩹  잘 아플 권리를 위해

   한국에서 ‘잘 아플 권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조한진희 활동가는 저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통해 아픈 몸으로서의 언어로 자신의 질병 경험을 나누고, 건강중심사회를 비판적으로 돌아본다. 각 장의 서문을 여는 에피소드들은 다분히 개인적인 사건들이지만, 그 경험들은 환자에 대한 걱정과 간섭, 낙인과 혐오 등 아픈 몸을 구석으로 내모는 건강중심사회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나아가, 여성의 돌봄노동, 의료 민영화, 건강보험, 성폭력 생존자의 건강 문제 등 다양한 관련 현안들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질병에 걸리는 것을 ‘어항 속에 돌 하나 더 얹어지는 것이 아니라 핏물 한 컵이 부어지면서 그 물의 밀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생태계가 바뀌는 일’에 비유하며, 이는 ‘일상이 완전히 재구성되며 내가 기획한 미래가 무효로 돌아간다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각주:8]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3개월간 현장 활동을 다녀온 뒤 신체의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병원을 전전했지만 의사들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대답만을 내놓았고, 결국 종합건강검진을 받고서야 갑상선암을 발견했다. 주변에서는 수술을 권했지만 그는 자신의 몸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의사도 주변 사람들도 자신의 몸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고민해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몸을 돌보는 데 전념하는 동안 부정문의 형식을 한 규칙들이 그에게 쏟아져내렸고, 일상이 온통 질병에 점유되어 있다는 느낌이 그를 버겁게 했다. 어떤 날은 몇 시간이고 일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다가도, 불현듯 심한 현기증이 찾아오는 등 몸은 더 이상 그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아프기 전까지는 몰랐던 감각이었다. 질병을 향한 낙인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꾸짖음, 그리고 그런 힐난이 두려워 자신의 질병을 이야기하길 꺼리는 사람들과 마주해오며 그는 펜을 집어들었다.

   해당 도서에는 ‘아픈 몸’, ‘질병권' 그리고 ‘질병의 개인화'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우선 아픈 몸이라는 용어는 ‘신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의학적으로 진단될 수 있는 장애보다 포괄적으로 만성적으로 아픈 몸,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기 어려운 몸’을 지칭한다. 건강권이라는 단어는 친숙하게 다가오는 반면 질병권은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WHO 헌장에는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에 대한 권리(건강권)가 반영되어 있다. 이는 국제 인권법상으로 건강권의 향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규범, 제도, 법규, 가능한 환경 등의 사회적 장치들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이어진다.[각주:9] 질병권은 건강권을 아픈 몸의 시선에서 재해석하고 재규정한 새로운 단어로, 이러한 논의를 아픈 몸들에게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다. 질병권 운동에서는 건강권이 건강을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로 삼을 때, 질병을 겪는 시간은 서둘러 극복해야 하는 임시적 상태로 받아들여지는 문제에 주목한다. 즉, 질병권은 건강 담론의 초점을 아픈 몸으로 옮겨, 질병을 온전히 겪을 수 있도록 시간과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각주:10]를 말한다.
   구인구직 사이트를 둘러보면 "신체 건강, 용모 준수"라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 건강이 개인의 사회적 삶 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채용 시장에서 요구하는 몸이 노동을 소화할 수 있는 몸이기 때문이다. 부적절한 몸들은 일터에서 배제되며, 생산해내는 주체에서 돌봄을 받는 대상으로, 부양자에서 피부양자로 옮겨간다. 즉, 오늘날 건강은 취업 시장에서 일종의 스펙이며, 무한 경쟁에 뛰어들기 위한 티켓과도 같은 것이 되었으며, 건강한 상태는 개인의 주관적인 효능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건강도 경쟁력이라면,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는 이러한 건강의 개인화 경향을 지적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건강은 사회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건강의 개인화는 몸과 정신의 돌봄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사회의 책임을 은폐한다.
   아무런 질병 또는 질환이 없는 상태가 건강한 것일까? 얼만큼 건강해야 “나 건강해” 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상적인 건강상을 단일하게 구성해놓는 것이 몸의 서열화와 열등한 몸의 규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가 외치는 탈說건강은, 모두가 아프기를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에 대한 강박을 벗어던지자는 의미에 가깝다. 아픈 몸들에게 쏟아지는 “꼭 나아” 또는 “이겨내” 라는 말들은 비정 상적인 아픈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을 품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의에서 비롯된 응원의 말들이 흠결 없는 몸을 표준화하고 그로부터 벗어난 다른 몸들을 일탈 상태로 간주하 는 시선을 증명하는 셈이다.

 

 

❤️‍🩹 아픈 몸들의 이야기 듣기

   건강중심사회에서 타자화된 아픈 몸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는 질병경험을 서사화하는 것 이다. 질병경험은 한 개인의 인생에서도 중요한 경험이지만 동시에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한 시대의 경험으로서 의미가 있다.[각주:11]

   개인적인 차원에서, 질병을 서사화하는 것은 환자 본인의 언어를 통해 질병을 통제함으로써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환자들의 병은 의사에 의해 명명되며, 의학의 언어로 설명된다.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의사가 심인성 질환으로 진단한다면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 되는 것이다. 고통을 겪는 이들(영어에서 환자를 뜻하는 patient는 어원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을 의미한다)의 언어는 충분한 신뢰성이 없는 주관적인 표현이며, 이로부터 의사와 환자 간의 불평등한 관계가 발생한다. 또한 환자들은 의료 시스템 상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신체로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에서 저자는 진료를 받으면서 병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 의료진들과, 기계적인 병원 시스템으로 인해 정육점에 걸린 고기의 부위별 명칭 그림을 떠올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큰 병원에서 살인적인 업무량으로 인해 의료진들이 고초를 겪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의 무신경함과 불친절함은 개인의 직업윤리나 도덕성만을 탓할 일이 아니겠지만, 그로 인해 환자들이 병원에서 느 끼는 무력감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그들이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들은 이야기를 매개로 자아를 재정립하거나 만들어내며, 통합하거나 재구성하기도 한다. 투병기가 질병의 발병 부터 치료까지의 기승전결을 갖추고 회복이나 극복을 완결로 삼는 체험기인 반면, 질병서사는 진단과 치료 경험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겪는 실존적 고투에 대해 얘기한다.[각주:12] 질병은 삶의 방식을 상당 부분 바꿔놓는데, 이 과정에서 환자 개인이 질병에 종속되어 움직였다면 질병서사에서는 거리를 두고 이를 회고함으 로써 인과관계를 재구성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회의 차원에서 질병서사가 필요한 이유는 아픈 몸이 배제되는 우리 사회에서 각각의 외침이 저항의 목소리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무지가 만든 폭력적인 말이 지겹다. 하지만 이럴수록 아픈 몸이 사는 세계를 둘러싼 면밀한 설명이 더욱 절실하다. 아울러 다양한 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나와야 하고, ‘이런 몸'이지만 당신처럼 우리도 여전히 계속되는 생 위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켜 줘야 한다. 다양한 몸들이 세상을 가로지르며 더욱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필요하다.[각주:13]

 

 

❤️‍🩹  오늘날의 질병 서사-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 잔의 자유』

 

그래서 나는 나의 상태와 치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자유, 근거 없고 위험한 치료법 콘텐츠에 노출되지 않을 자유,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자유, 에로틱한 사랑을 할 자유, 일할 자유, 쉴 자유, 치료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 그 모든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한계를 자신의 합리성의 근거하여 정 할 자유에 대해 마구 떠들고 싶다. 이 욕망은 나를 오래오래 보고 싶은 타인의 욕망과 불편하게 포개지기도 할 것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병자의 자기결정권'쯤이 될까.[각주:14]

 


   강렬한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이 눈에 들어온다. 새빨간 배경에 큼지막한 글씨로 적힌 사랑과, 폴리스라인을 연상시키는 자잘한 통제들과, 지그재그로 요동치는 맥주 한잔의 자유가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저자 김도미 씨는 백혈병을 겪은 암 경험자로서 2022년부터 2024년까지의 기록들을 하나로 엮었다. 치료를 받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 지만, 그는 다시 초크 가루가 풀풀 날리는 암벽등반장으로 향했다. 혹자는 위험하다고 손사래칠 일이었다. 그는 미디어에서 보여주던 백혈병 환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던 백혈병 환자들은 대부분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수척하지만 어딘가 처연해보이는 얼굴을 한 채 내내 병상에 앉아있는 가련한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과거 결핵이 낭만적인 질병이 되었던 것처럼, 백혈병 역시 조혈모세포이식 기술이 발전하고 신약이 개발 되기 이전인 2000년대 초반에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의 소재로 쓰였다. 저자는 이러한 질병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건강해지고 싶지만 건강에 나쁜 것도 포기할 수 없다는 모순된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환자됨과 환자 역할에 대해 사유하며 자신과 주변을 돌아본다. 
   모든 것은 환자 자신이 암환자라는 정체성을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자신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그 비극의 당사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한다. 암이라는 질병이 존재하고, 생각보다 빈번하게 보이며, 때때로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본인의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가 민머리로 보조장치를 단 채 여행을 떠나 등산을 하기까지는 받아들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암환자라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저자는 감히 암환자의 성생활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연인 관계에서의 사랑뿐만 아니라, 병동에서 나누는 정에 대한 얘기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혈액병동에 처음 입원했을 때 만난 옆자리 언니에게 오이지 언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골수를 뽑아낼 때 기어코 울음을 터뜨린 그에게 다가가 “많이 아팠지이.” 하고 걱정해준 오이지 언니는,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 뒤 병이 재발한 상태였다. 면역억제제를 끊고 일반식을 먹을 수 있게 될 때 뚜껑을 열려고 했던 오이지를 남긴 채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암환자들은 수많은 염려 및 금지와 마주하며, 균이 득실득실한 바깥 세상과의 단절을 체험한다. 입원을 앞둔 저자에게 휴대용 선풍기, 이쑤시개, 치실, 코 세척기, 전기장판, 취미용품, 부채, 베개, 운동기구, 효자손 등 금지 물품의 목록이 문자로 날아왔다. 물론 환자들이 바라는 건 병이 낫는 것이다. 그러나 상실을 수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다. 그들에게는 무균실에 들일 수 없는 것들을 보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결코 죽음에 대해 초연해지지 않았으며, 질병 이후 '제대로' 살겠다는 각오를 하지도 않는다. 아프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암환자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그가 원하는 것은 '지 쪼대로 아플 자유'다. 이런 특이한 환자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면 어떨까. 시간을 되돌린대도 다시 막 살 거라고 말하는 환자의 얘기 말이다.

 

 

❤️‍🩹  청년 세대와 질병

   청년에게는 유달리 높은 건강의 기준이 적용된다. 우리 사회가 아름다운 청춘을 그려낼 때 전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튼튼한 몸과 탄력성 좋은 마음일 것이다. 이러한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대학생들도 있다. 전국 31개 국립대에서 대학생 5만 9천800여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실태를 조사한 결과 경증 이상의 우울감 등이 발견된 학생은 18.4%에 달했다.[각주:15]

   중앙대학교에 재학중인 A씨는 중학교 2학년 때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은 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학창시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의 질환은 대학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두 번의 자퇴를 거치고 중앙대학교에 재입학해, 현재 재학 중인 A씨는 이번 학기에 결석이나 과제 미제출이 많았다고 한다. 보통 출결은 성적 처리에 있어서 성실성 평가의 척도로 작용하며, 과제 의 제출 여부도 마찬가지다. 우울증은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질병이고, 고정관념과 달리 정신력이나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낮은 성과는 타인의 평판뿐만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에도 영향을 준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우울증이) 너무 큰 영향을 미쳐요. 학교를 잘 못 가고 무기력한 것 때문에 의지가 약해지는 것과,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것이 온전히 제 잘못 같아요. 시도하기가 어려워져요. (시도한 일을) 지속하는 게 힘드니까.”

 

   인터뷰의 끝자락에 A씨에게 앞으로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물었다. 그는 “온전한 정신건강, 활달한 신체” 라고 대답했다. 무기력함 탓에 무언가를 해낼 수 없는 자신의 모습과, 폭식으로 인해 살이 찐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는 것이 자괴감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자신의 우울증이 먹고 잠자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면, 미래의 자신은 다각적으로 세상을 둘러볼 수 있는 생각을 갖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는 건강한 정신을 원하는 한편, 아픈 것을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밝혔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곳을 찾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대화는 ‘인정과 이해’라는 주제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는 씁쓸한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우울증 증상을 이유로 시험을 보러 가지 않고 과방에 있던 중, 시험을 치고 온 친구들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시험을 보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아파서 시험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친구는 A씨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우울증이 있다고 해서 늘상 힘들기만 한 건 아닌데, 환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불행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A씨는 학교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경제활동 역시 하고 있다. 이전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서” 라는 이유를 댔는데, 이후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일을 구하자 이전 동료가 의문을 내비쳤다고 한다. “전에 힘들어서 그만뒀다더니, 왜 또 알바해?” 라는 질문이었다.

 

어디를 가도 이해받지 못하고,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아팠습 니다. 주변에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괜찮다” “잘 하고 있다” 라는 말만 해줘도 될 것 같아요.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힘이 됩니다.

 

   재학생 B씨는 강도가 높은 불안장애를 진단받았다. 병명을 꺼낸 뒤 그는 자신의 질환이 거의 다 나은 상태며, 아픈 와중에도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음을 밝혔다. 증상은 공황장애와 같았지만, 공황장애를 진단받기 위해서는 공황발작으로 응급실에 2번 이상 가야 하는데, 그 조건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증상을 인지하고 병원에서 진단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몇 단계로 요약해, 각 챕터에 ‘뮤지컬 사건’ 또는 ‘법학개론 사건’ 과 같이 재밌는 이름들을 붙여 설명했다. 공황장애의 가장 큰 특징은 탈출에 대한 강박인데, 대중교통, 공연장이나 영화관 등 바로 나가기 어려운 곳에서 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고충은 수업을 듣는 중에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증상의 발현에는 강의실에서 어디에 앉느냐가 관건이 된다. 뒷자리에 앉으면 바로 그 장소를 벗어날 수 있지만 앞자리에 앉으면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 다. 실제로 한 수업에서 시험을 볼 때 교수님께서 각 학생들에게 좌석을 지정해주셨는데, 앞자리를 배정받은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교수님께 질환에 대해 설명드리고 뒷자리로 자리를 변경할 것을 요청하자 흔쾌 히 바꿔주셨다.

 

주변으로부터 멘탈이 강하다고 인정받곤 했습니다. 그래서 진단을 받고, ‘아 이게 뭐야, 약해 빠져 가지고’ 라고 생각했는데, 연예인들만큼 스트레스를 받지 않더라도 ‘팡’ 터지듯 나타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부끄럽지만, 예전에는 (정신질환에 대해) ‘멘탈이 약하니까 그렇지’ 라고 생각 했어요. 겪어보니 ‘나도 그렇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3월에 공황 증상을 처음 느꼈으나 6월이 되어서 정신과를 방문했다. 약 3개월의 시간동안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그날따라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며 넘어갔다. 그러나 지하철을 탈 수 없는 등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을 느끼고 병원을 찾은 것이다. 병원 문턱을 서성인 시간들이 무상해질 정도 로 약은 복용한지 2주만에 즉각적인 효과를 보였다. 그가 의사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에 따르면, 공황은 기계적인 치료법이 가능하다고 한다. 만성적인 질환의 경우와 달리 세로토닌 재흡수제를 먹으면 나아진다. 그는 그 과정을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것, 또는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약을 먹는 것에 비유했다. 이전에는 정신이 나약하기 때문에 공황을 비롯한 정신질환에 걸리는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질병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고, 누구나 아플 수 있음을 실감한 것이다.
   A씨와 B씨는 각각 다른 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객관적이고 심리적인 경중에도 차이가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A씨의 경우에는 타인으로부터, B씨의 경우에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온 고정관념이었다. 단일한 환자상을 요구하는 것, 질병에 대한 책임을 개인의 의지에 돌리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건강 숭배가 드리운 그림자일 것이다.

 

 

❤️‍🩹  그대들 어떻게 안부를 물을 것인가

   안녕하세요? 초급 한국어 교재를 산다면 맨 첫 페이지에서 만날 수 있는 문장이다. 안녕安寧의 사전적 의미를 풀어 다시 쓰자면 우리는 매일 누군가에게 아무 탈 없이 평안하신가요? 라는 물음을 건네고 있는 셈이다. 안녕한지 그러지 않은지를, 또는 그 여부를 묻는 것을 안부라고 하고, 암묵적인 규칙에 의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문의 형식이어야 한다. 아주 가까운 사이라면 모를까, 잘 지내냐는 물음에 “아니, 별로.” 라고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잘 지내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돌아올 반응이 두렵기 때문이다. 아프면 아픈대로, 아픈데 아픈 사람답게 굴지 않으면 그런 대로 사방에서 비수가 날아오곤 한다. 온정 어린 걱정 또는 꾸지람 섞인 오지랖, 야단과 속단, 금지와 금기가 병의 무게와 더해져 그들을 짓누른다.
   건강한 몸이 표준인 사회에서 환자는 언제나 불행한 상태에, 불능의 상태에 있을 것으로 상상된다. 그러나 실제로 늘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앞선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질병은 떨쳐낼 수도 있겠지만 안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총천연색의 방식으로 살아가듯 아픈 몸들의 이야기도 그들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질병권 운동은 환자의 삶이 투병-회복이라는 단순한 꼴로 요약되는 것을, 병을 앓는 시간이 정상성을 되찾기 위해 매진해야 하는 과도기적이고 일시적인 단계로 수렴되는 것을 거부한다. 삶의 일부인 질병의 시간동안 아픈 몸들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건강과 질병의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삶은 무익한 수난passion inutile이다. ‘passion’이라는 명사에는 정열, 열정이라는 의미의 앞면과 고통, 괴로움, 정념이라는 뒷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늙어가고, 쇠약해지고, 병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심장의 고동소리에 잠 못 이룰 정도로 열렬하게 사랑할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 대상이 다른 존재가 되었든, 삶 자체가 되었든 말이다. 둘은 분리되 어 있지 않고, 얼마든지 교차하고 중첩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이제 곧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올 한 해를 맞이할 때다. 연말연시에 자주 들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라는 인사말을 고쳐쓸 것을 제안한다. 담긴 애정은 덜어내지 않으면서,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으며 보다 포용적인 표현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1. 유튜브 채널 '정희원*****', "정희원 교수의 실제 아침 식사 공개", 2024.11.12. [본문으로]
  2. ‘갓생’이란 신을 뜻하는 god과 인생을 뜻하는 생의 합성어로 부지런하고 타인의 모범이 되는 삶을 뜻하는 신조어다. ‘갓생러’는 이에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접미사 -er을 붙여 ‘갓생’을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조병희, 『질병과 의료의 사회학』, 2006, 169p, 집문당 [본문으로]
  4. 질병관리청 [본문으로]
  5. HIV/AIDS 행동주의 운동을 위해 1987년 처음 결성된 단체는 액트 업(ACT UP,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으로, 침묵=죽음을 표어로 한다.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치료법을 찾아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으며 병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교육 및 급진적, 비폭력적 저항을 통해 제공하고자 했다. [본문으로]
  6.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캠페인] 에이즈 바로알기 캠페인 실시_중앙대학교 건강센터와 함께하는 캠페인”, 2024.10.31. [본문으로]
  7. 율리 체, 『어떤 소송』, 2009, 장수미 옮김, 183p, 민음사 [본문으로]
  8.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관통기』, 2019, 30p, 동녘 [본문으로]
  9. 국가인권위원회, “건강과 인권에 관한 25가지 질문과 답변” 2007, 9p. [본문으로]
  10.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관통기』, 2019, 381p, 동녘 [본문으로]
  11. 조병희, 같은 책, 169p [본문으로]
  12. 김향수, 사회과학으로서의 질병 서사: 이론과 연구. 문화와 사회, 2024, 32(2), 235-288 [본문으로]
  13.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관통기』, 2019, 348-349p, 동녘 [본문으로]
  14. 김도미,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 잔의 자유』 2024, 96p, 동아시아 [본문으로]
  15. SBS뉴스, “[단독] "뭘 해야 하나"...마음의 병 앓는 '코로나 학번' (풀영상)”, 2024.9.12., 권지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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