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마침표를 기다리며
수습위원 장희수
2023년 10월 7일 아침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잠에서 깼다.
TV를 켰는데, 온갖 채널에서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이 이스라엘을 향해 수천 발의 로켓을 발사했다고,
1,200여 명의 이스라엘인과 외국인이 사망했으며 251명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2023년 10월 8일 아침
학교가 문을 닫았다.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빨리 짐을 싸서 대피하라는 방송만 흘러나온다.
2023년 10월 9일
“2023년 10월 8일 우리 이스라엘은 하마스에 대한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충돌이라고 한다.
정말 지금이 2023년이 맞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든다.
2023년 11월 8일
이스라엘이 무차별 공격을 하고 있다.
어젯밤,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은 내 친구는 불바다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졌다.
그리고, 2024년 10월 가자지구에서
지금까지 4만 1,965명이 사망했다.
이 중에는 한 살 생일을 맞기 전 사망한 아이들 700여 명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 감행하고 있는 공격은 인질 구출을 위한 단순한 반격과 대응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인권법은 죄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과 공격을 범죄로 간주한다.
🎬 Prologue,
핏빛으로 물든 가자 전쟁 2이 발생한 지 1년이 되어간다. 휴전을 협상하기는커녕 본격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이스라엘은 전 세계로부터 받는 엄청난 비난을 감수하면서 전쟁을 이어 나가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감행은, 80년 전 제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홀로코스트 비극을 통해 경험한 폭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잊은 듯하다. 이처럼 중동 전쟁뿐만 아니라 지금 국제 사회 한쪽에서는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 수단 내전 등 다양한 전쟁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다. 반복되는 전쟁을 바라보는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너희야? 아니 왜 또 전쟁인데? 또 시작이네, 지겨워.”
또, 또, 또. 정말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반복되는 전쟁인 것일까? 소설가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아무리 필요할지라도 또는 아무리 정당화될지라도, 결코 죄악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어떤 이유로도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이 무고한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어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단순한 승부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고한 희생자들을 하나의 거대한 수치로 기록하는 숫자의 이면에는 전쟁의 기구함과 피해자들의 비극이 담겨 있다. 한 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몇백 명을 죽이는 전쟁은 단순한 수학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만약, 1과 1을 더했는데 2가 아니라 1이 될 수 있을까?
영화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 2011년 개봉작)은 절대적인 수학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전쟁의 기구함과 벼랑 끝에 남겨진 피해자들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벌어지는 비현실적이고 끔찍한 전쟁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삶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이질감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어나고 있다. 그 끔찍한 일이 우리와 멀지 않은 지구 한 쪽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실제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기도 하다.
🎬 Scene 1. 유언장, 그 시작
영화는 갑작스럽게 말을 잃은 후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 나왈의 유언 이행을 맡은 쌍둥이 남매 (잔과 시몽)의 시점에서 출발한다. 유언 내용은 바로,‘레바논으로 가서 아버지와 또 다른 형제에게 편지를 전해줄 것’.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와 평생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남매의 여정은 나왈의 10~20대 삶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나왈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무슬림인 와합과 사랑에 빠져 새로운 생명을 갖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와합은 처형을 당하고, 그녀는 아이를 낳자마자 발 뒤에 표식을 새겨 고아원으로 보내고 만다. 이후 대학에 진학하지만,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 기독교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난민들 간 분쟁이 벌어진다. 그 길로 나왈은 자신의 아이를 찾고자 남부 지역에 위치한 고아원으로 떠난다. 그러나 고아원은 무슬림들의 공격으로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을 찾기 위해 나왈은 난민촌으로 향한다. |
가족 구성원일지라도 종교적 신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명예살인 3을 꺼리지 않는 장면은 충격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러나 당시 레바논에서 종교 분쟁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납득되는 장면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평생을 일구어온 삶의 터전으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했고, 대부분의 난민은 레바논으로 이주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와합도 위와 같은 이유로 피난을 온 난민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비중이 절대적인 레바논에게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팔레스타인인들의 유입 현상은 달갑지 않았다. 이미 레바논은 기독교, 수니파·시아파, 무슬림 등 수많은 종파가 공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1년, 민족 해방 기구를 표방하면서 무장 투쟁 세력의 탈을 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4가 레바논 남부에 본부를 두고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레바논은 기독교 민병대를 결성해 PLO를 탄압했고 그 결과 1973년, 레바논 정부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무력 충돌을 빚었다. 충돌은 여기서 멈췄어야만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으면 무서운 것도 없다고 했던가. 1975년, 팔레스타인계 무장세력은 기독교 정당 조직원들을 사살했고, 이는 결국 작게 타오르던 화염을 걷잡을 수 없는 큰 폭발로 만들었다.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공격이 결국 끔찍한 내전의 불씨를 키우게 된 것이다.
🎬 Scene 2. 나왈의 여정
난민촌으로 향하던 버스를 타고 있던 승객들은 갑작스러운 기독교 민병대 습격으로 무참히 살해당한다. 나왈은 손에 쥐고 있던 십자가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휘발유를 뒤집어쓴 버스에 탄 이들이 불 속에서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끔찍한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린아이에게도 총을 겨누고, 난민촌을 폐허로 만든 무자비한 기독교 민병대의 만행을 본 나왈은 그들을 향한 복수를 꿈꾸게 된다. 결국 그녀는 그 길로 팔레스타인 무슬림 저항 조직에 가담한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된 것이다. |
화염에 휩싸인 버스 앞, 마지막 희망이었던 난민촌 앞에 주저앉은 나왈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죄책감, 분노, 절망. 그 어떤 것으로도 읽히지 않는 나왈의 텅 빈 눈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면 복수심이었을까.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나왈이 종교적 신념을 저버리면서까지 반기독교인이 되게끔 한 결정적인 사건인 기독교 민병대의 무슬림 학살은 놀랍게도 <1975, 베이루트 대학살 사건>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975년, 기독교 민병대 세력은 자신들의 조직원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습격해 27명의 승객을 사살했다. 한때 레바논의 수도였던 베이루트 지역이 전투와 범죄로 가득한 황폐한 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 결과 레바논은 대내적으로 기독교 민병대와 무장세력을 지원하는 이슬람교도 간의 싸움, 대외적으로 PLO의 본거지를 파괴한다는 목적하에 베이루트 지역을 폭격하는 이스라엘과의 싸움으로 번졌다. 1990년 12월, 내전은 종결되었지만, 한 번 깊어진 감정의 골은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해 베이루트 지역은 여전히 전쟁의 긴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75년~1990년
15년 동안 이어진 레바논 내전
12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100만 명의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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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4년 9월 27일,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정밀 공습하여 헤즈볼라의 수장인 나스랄라를 사살했다.
10월 30일,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레바논에 강도 높은 공습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까지 레바논에서는 100만 명 넘는 이재민과 2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5
🎬 Scene 3. 베일을 벗은 나왈의 침묵과 진실
나왈은 기독교 민병대 수장을 사살하고, 크파르 리얏 감옥에 수감된다. 영화는 다시 현시점으로 돌아와 흩어진 전쟁의 조각들을 모아 나왈의 삶을 완성해 가는 잔느의 시점을 따라간다. 잔느는 나왈이 수감 시절, 아부 타렉이라는 고문 기술자로부터 강간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더불어 자신과 시몽의 끔찍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들의 형제를 찾는 것. |
‘72번 죄수’ 혹은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렸던 나왈. 매일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면서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움을 견디고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든다. 놀랍게도 나왈은 소하 베차라 라는 실존 여성을 모티프로 삼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영화 속 나왈이 겪은 일들은 ‘소하 베차라’의 실제 삶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레바논 내전 당시 레지스탕스 6로 활동하면서, 1988년 레바논의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인 ‘앙투안 라하드’ 암살을 시도했다. 이후 악명 높은 감옥에 10년 동안 수감되었고,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노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1살에 불과했다.
한편, 필자는 ‘소하 베차라’라는 인물에 대해 조사를 하다 이런 기사를 접했다. <스위스 극우 ‘레바논 여성 죽이기’ 논란>이라는 제목을 가진 기사였다. 7 2007년, 스위스 국영 TV (TSR)에서 베차라가 다시 베이루트로 돌아가, 헤즈볼라와 접촉하길 원하는 언론인들을 돕겠다며 안내자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스위스 극우 이슬람 혐오자들과 극우 정치인들은 그녀를 ‘레바논 테러리스트이자 악명 높은 범죄자’라고 칭하며 ‘베차라 비난 캠페인’에 앞장섰다. 그러면서 스위스 내에서 이슬람을 절대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자신이 속한 나라와 조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두고 혐오감을 표출하며 혼란과 분쟁만 유발하는 테러리스트로 구분 지은 것이다. 이후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 이슬람 혐오감은 레바논 이슬람 무장세력의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4년, 이스라엘 정부는 멈출 생각이 없다. 하마스의 최고지도자 사살 이후에도 하마스 궤멸을 목표로 가자지구 북부를 지속적으로 공습하고 있다. 더 나아가 레바논의 친이란 세력인 헤즈볼라 소탕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분명 ‘인질’로 잡힌 자국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은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학살과 다름없다. 일방적인 혐오와 분노가 많은 전쟁을 낳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혐오가 또 다른 혐오와 증오를 낳고 있지는 않을까?
2024년 9월 18일, UN 총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불법 점령을 1년 안에 중단하라는 결의가
181개 회원국 중 2/3가 넘는 124개국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2024년 10월 28일, 이스라엘 의회
가자 난민을 지원하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UNRWA)의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미국 CNN에 따르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된 이후
1년 동안 1만 건 이상의 반유대주의 사건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또한 미국 내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다른 종교를 향한 범죄보다 훨씬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FBI는 “미국 인구의 약 2.4%를 차지하는 유대인 집단에서 종교 기반 증오 범죄의 60%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8
스포주의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분은 🎬 Scene 4. 유언 이행으로 이동해주세요.
나왈의 아들인 니하드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헤맸지만, 결국 아부 타렉이라는 이름을 가진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장을 찾은 나왈은 자기 아들에게 새겨준 표식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고 충격을 금치 못한다. 아부 타렉의 얼굴을 한 그 남자는, 평생 그토록 찾았던 그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게 된 시몽은 잔느에게 이렇게 묻는다. “잔느, 1과 1을 더했는데 2가 아니라 1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기나긴 — 침묵. 그들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무거운 침묵이 찾아온 것이다. |
🎬 Scene 4. 유언 이행
이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남매는 나왈의 편지 중 한 통은 자신의 아버지인 아부 타렉에게, 나머지 한 통은 형제인 니하드에게 전해준다. 영화 초반, 잔느가 속한 학교의 교수는 나왈의 유언 이행에 앞서 망설이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피할 수 없는 일을 문제 삼는 쪽이 어리석지. 자네는 알아내야만 해. 안 그러면 영혼이 평온하지 못해.” 정말 진실을 알아야만 평온한 삶이 찾아올까? 필자는 잔느와 시몽의 여정을 따라가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듯이 평생 남은 생을 살아갈 잔느와 시몽의 삶이 끔찍한 악몽으로 이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에서 이야기하는 편지의 내용은 큰 교훈을 가져다준다. |
나의 아들 니하드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널 항상 사랑할 거야.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야. 너는 사랑으로 태어났어.”
나의 아들딸 시몽과 잔느에게
“너희들의 탄생은 공포 그 자체였지,
하지만 그 탄생 배경은 위대한 사랑이었단다.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무거운 침묵이 깨지고 나왈의 유언이 이행되자, 쌍둥이에게도 위와 같은 편지가 전해진다. 나왈이 그토록 바랐던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은 진실을 알게 된 잔느와 시몽이 형제와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줌으로써 지켜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약속이 잊고 살아갈 수 있었던 비극을 잔느와 시몽이 다시 꺼내야만 했던 이유와 연결된다. 나왈은 자신이 겪은 삶을 그 누구도 다시는 겪지 않았으면 한 것이다. 자신의 비극이 그 누구에게도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갈등으로 인해 자신과 같은 무고한 희생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목에 꽂힌 칼’과도 같은 고통을 감내한 나왈이 남겨진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2024년. 중동 내 긴장이 최고로 고조됐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죽어가고 있다. 4만 명이 넘는 사망자 중 과연 이스라엘이 표적으로 삼는 하마스 대원은 얼마나 될까? 헤즈볼라의 수장이 죽는다고 해서 이들의 분노가 사그라들까? 남겨진 90만 명의 난민들은 어디로 떠나야 할까? 떠난 그곳에서도 안정적인 삶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보장이 있을까?
🎬 Scene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보았듯이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여러 분노가 단절되지 못한 채, 수년 동안 대물림과 반복 현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표출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 것이고, 대상은 누구인 것인가?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싶다면, 우리는 사회 깊은 곳에 각인된 다양한 형태의 분노를 이해해야 한다. 아랫글에서는 위와 같은 분노의 원인과 형태를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지금 현재, 전쟁을 겪고 있는 당사국들로 좁혀 들어가 보자.
🇱🇧 레바논은 한때 중동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나라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관은 일평생 지속되는 종교갈등과 무장 단체의 전쟁으로 인해 폭발과 화재로 그을리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레바논 이슬람 무장 단체 헤즈볼라의 완전 궤멸을 위해 공습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을 지키지 못하는 레바논 군대, 행정부, 의회는 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레바논은 행정부, 군대, 의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레바논은 이슬람과 기독교 비율이 50대 41로 구성되어 있다. 9심지어 이슬람 안에서도 다양한 종파로 구분되어 있어 매우 복잡한 종교 갈등을 오랜 시간 동안 겪어 왔다. 이런 종교 갈등은 복잡한 정치 시스템을 야기했다.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로 나뉘어 배출하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은 국민들의 투표가 아닌, 의회 선거에서 3분의 2 이상 득표한 인사로 선출된다.
2022년 10월, 미셸 아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 후임자 선출을 위한 의회투표가 12차례 열렸지만, 득표수가 채워지지 못했다. 얽혀 있는 여러 종교 이해관계가 풀리지 못해 후보가 선출되지 못하고, 헤즈볼라 무장단체의 돌발행동이 혼란을 가중해 대통령의 자리는 2년째 공석이다. 최종 결정자인 대통령 및 행정부가 불완전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보호받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한편, 의회에서 13석을 차지한 헤즈볼라는 4~5만 명의 병력과 이란으로부터 최신 무기들을 지원받아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과 이스라엘의 싸움은 레바논 국민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헤즈볼라의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한편, 이 끝나지 않는 전쟁의 배후인 🇮🇱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16년 최장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다. 그는 재임 기간에 온갖 부패와 비리 의혹으로 많은 국민들의 불신을 사고 있지만, 여전히 극우 정당 세력과 다른 국가들의 신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당하지 못한 사법개혁을 시도하고, 전 세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위협을 감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전쟁의 배후이자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당하고 있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휴전을 위한 시위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인 공습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네타냐후는 임기가 만료되는 즉시 법의 처벌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국민과 다른 국가들로부터 인정받는 이스라엘의 굳건한 입지이다. 어쩌면 그에게 마지막 기회일 수 있기 때문에 무슬림 처단, 공포 세력 몰살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고 있다.
극단주의 세력은 어떠한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중동 전쟁에 가장 많이 얽혀 있는 당사자일 것이다. 분명 ‘종교’로 뭉쳐진 이들인데, 이들은 왜 종교라는 이름 아래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조직들은 지하드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지하드는 알라의 뜻에 따라 성스러운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0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선제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먼저 무력을 이용해 공격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성전의 뜻이 공격적이고 과한 의미로 해석되면서 지하드의 본질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의무를 확장하고, 이슬람이 아닌 모든 곳을 이슬람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사상이 확대되면서 누구나 지하드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과거 이슬람교가 서구 기독교 세력에 의해 핍박받았던 시절 혹은 자신들을 해체하려는 세력들에 대한 복수를 강조하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여러 국가가 경고 혹은 선제공격을 가하며 이들을 잠재우거나 해체하려는 시도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부에 대한 위협과 공격은 또 다른 분노를 유발하여 영향력을 확장케 한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창시자이자 최고 지도자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지만, 하마스는 붕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지난해 10월 이스라엘인 1,200명을 살해하고 기습공격을 단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레바논 극단 이슬람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 경우, 나스랄라를 잇는 후임자가 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지도자들은 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기반이 약해진 조직에서 신임을 얻고, 세력의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해서이다.
다음으로는 전쟁을 바라보는 다른 세계 강국들을 살펴보자.
앞서 다룬 내용들이 영화에 등장한 국가들을 비롯한 세력 단체들의 현재 입장과 상황이라면, 필자는 조금 더 나아가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 취하고 있는 세계 강국들의 태도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국가는 휴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전쟁을 겪는 당사국들에 ‘휴전’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종전’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제 3자의 개입을 통해 임의로 종료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전쟁 당사국들이 아닌, 제 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전쟁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살펴봐야 한다.
🇺🇸미국은 패권국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형식적인 경고와 휴전 조장에 그칠 뿐, 오히려 그들의 외교정책은 친이스라엘 기조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누구보다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사실은 미스터리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이토록 절대적인 것일까? 존 J. 미어샤이머, 스티븐 M. 월트의「왜 미국은 이스라엘 편에 서는가」 11라는 책에 따르면, 절대적 지지의 핵심은 바로 미국을 주도하는 ‘로비 단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체의 대부분은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국의 각종 외교 정책들을 친이스라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 가장 큰 아픔을 안겨주었던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의 중동 정책은 상당히 이스라엘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로비 단체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국회의원을 비롯해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이스라엘의 국익을 보장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편중된 미국의 정책들은, 미국을 등에 업고 일방적인 폭력을 지속하는 이스라엘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미국 정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유대인 로비 단체의 영향력을 줄이고, 국제협력 질서를 조성할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후 과거의 죄악을 청산하기 위해 여전히 힘쓰는 🇩🇪독일 같은 경우,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불명확하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과거 청산을 확실하게 표방하고 있는 국가인 만큼 이들은 친이스라엘 정책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찬성과 지지를 보이는 것이다. 반대로, 스페인과 아일랜드는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들이다. 특히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팔레스타인 또한 그들과 같은 경험을 겪은 국가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입장에서, 정당한 ‘영역 인정’과 국가로서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팔레스타인의 싸움은 더욱더 의미가 크게 다가올 것이다.
이렇듯 전쟁은 종교, 정치, 사회적 문제가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한쪽 손을 들어주면, 다른 한쪽에서는 자연스럽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아주 골치 아픈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심각성을 인지하는 정도, 종교적 그리고 과거 청산의 이유만으로 잘못된 일을 눈감는 행위와 한쪽으로 편중된 지지 정책은 매우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싶다. 결국 이런 일들은 반대 세력의 분노를 낳고, 그 분노는 대물림되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노를 지켜보는 다른 개개인들 또한 또 다른 분노를 자아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여러 이해관계를 낱낱이 풀어 헤쳐보고, 하나씩 따져봐야 분노의 원인과 행태를 이해할 수 있다.
🎬 Epilogue.
사람들은 모두 안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돼.” 근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전쟁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있어? 저건 내 일이 아냐, 저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팔짱을 끼고 멀리서 관망한다. 놀랍게도 이건 지금 우리나라가 지구 한 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대부분의 태도이다. 심지어 글 앞부분에 언급했던 “또 또 또”는 작년 이스라엘 - 하마스 전쟁 뉴스를 보던 필자가 사과 한 쪽을 우걱우걱 씹으며 티비를 보면서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글을 쓰기 위해 이 영화를 다시 보는데, 부끄러움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또 또 또” 같은 소리나 하면서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자는 이야기를 하는 꼴이라니. 그러나 매일 쏟아지는 뉴스들을 보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그냥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단순히 전쟁 종전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을 이해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엔 이번 전쟁의 끝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11월 미국 대선 결과 12에 따라 전쟁은 더 악화할 수도, 혹은 점차 사그라들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11월 6일, 보다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 (America First)와 함께 다시 열린 트럼프 시대. 이에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에는 웃음과 안도감을, 이란에는 위협의 공포를 안겨주면서 희비가 교차하게 됐다. 과연 그의 외교정책에 따라 향후 전쟁이 어떤 전환을 맞게 될지 궁금하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큰 폭풍보다는 고요한 평화의 바람을 불게 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라고 글을 마치고 싶었지만, 글을 쓰다 보니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을 발견했다. 대한민국 사회는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와도 같다. 살을 도려낸 것과도 같은 아픔을 겪은 35년간의 일제 치하,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누어야만 했던 6.25 전쟁 그리고 독재 타도를 외치며 자유민주 사회를 외쳤던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무관심’으로 가득하다. 일각에서 뉴라이트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며 항일역사를 지우려는 시도가 보이고, 북한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하며 남북 전쟁을 다시 수면 위로 올려도 우리는 평화롭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태도로 그저 관람하고 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평화로운 건지, 아니면 속은 불안으로 가득한데 평화로운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때마침 이런 시기에 들려온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한국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국민들은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문화강국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다.
한편,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정 이유로 뽑았다. 전 세계가 한국의 트라우마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그리고 다른 국가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관심이 있을까? 그래서 기쁨의 웃음이 나다가도 씁쓸한 생각에 잠긴다.
결국 중요한 건 전쟁을 버텨내고 있는 국민들, 매일 피난을 가고 생이별해야 하는 가족들, 하루 만에 집을 잃고 난민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삶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계속하여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며, 그들이 이 전쟁을 통해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다. 매일 참혹하고 긴장감이 웃도는 전쟁 속에는 몇천만 명의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의 무관심과 외면이 점차 관심으로 바뀌어, 최소한의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떠돌고 있는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으면 했다. 더 나아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회로 변화했으면 한다. ‘깨어있는 의식’의 중요성이 절실히 느껴지는 시대이다. 좁게는 개개인, 더 나아가 학생 사회, 그리고 더 넓게는 우리 사회로 관심이 확장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10년도 더 지난 이 영화를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 2024년 10월 8일, 가자 지구 보건부 발표 [본문으로]
- 2023년 10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 발생한 무력충돌 [본문으로]
-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을 죽이는 관습. (두산백과 두피디아) [본문으로]
- 1964년 독립국 팔레스타인을 수립하기 위해 세워진 기구로 유엔과 100개 이상의 국가로부터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법적 조직”으로 인정되고 있다. (위키백과) [본문으로]
- MBC뉴스룸, “[이 시각 세계] 이스라엘, 가자·레바논 맹폭 지속”, 2024.10.30, 정슬기 아나운서 [본문으로]
- 프랑스어로 ‘저항’이라는 뜻으로, 넓은 의미로는 점령군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행위를 일컫는다. (위키백과) [본문으로]
- 연합뉴스, “ <스위스 극우 `레바논 여성 죽이기' 논란>”, 2007.04.09, 이유 특파원 [본문으로]
- 이데일리, “가자전쟁이 낳은 혐오…美 반유대주의 위협 '역대급'”, 2024.10.07, 이소현 기자 [본문으로]
- 조선일보, ” [글로벌5Q] 이스라엘 폭격에 600명 숨진 레바논, 대통령 2년째 없다”, 2024.09.27, 정지섭﹒김지원 기자 [본문으로]
- 두산백과, 두피디아 [본문으로]
- 존 J. 미어샤이머, 스티븐 M. 월트 , 「왜 미국은 이스라엘 편에 서는가」, 2024 [본문으로]
-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2024년 11월 7일이다. 추후 이뤄지는 트럼프의 외교 행보에 따라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 수위와 휴전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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