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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22 가을겨울, 83호<현현; 사람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망한 세상에서 SF로 싸우는 법

by 중앙문화 2022. 12. 26.

작가 이경희

혹시 ‘사이버펑크(Cyberpunk)’라는 장르에 대해 아시는지? 모르신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 설명할 예정이니까. 이래 봬도 나는 사이버펑크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다.

'사이버펑크 2077' 게임 내 모습. 게임메카

TRPG <사이버펑크>의 제작자 마이크 폰드스미스에 따르면 사이버펑크 장르를 정의하는 것은 ‘분위기’ 그 자체다. 음습하고 어두운 거리, 오염된 대기와 폐기물의 산,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 기모노 홀로그램과 망가진 히라가나 네온사인, 빽빽하다 못해 미어터지는 초고층 빌딩, 단 기술와 자본에 지배당하는 하류층 사람들, 기계에 잠식된 인간성, 디지털 카우보이와 사이버 스페이스, 로큰롤과 반항 정신, 전자 마약과 불법 향정신성 의약품, 뉴웨이브 신비주의… 대충 이런 것들이 등장하는 미래가 사이버펑크인 셈이다.

2022년을 살아가는 입장에선 솔직히 우스운 지점이 한둘이 아니다. 사이버펑크 영화 속 주인공들은 회색 브라운관 모니터를 바라보고 유선 전화기로 통화를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할 줄 아는 소수의 도전적인 사람들을 ‘카우보이’나 ‘넷 러너’ 따위로 부르며 칭송한다. 우웩. 카우보이라니. 촌스러워서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이버펑크는 애초에 70~80년대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다. 유년기와 청년기 내내 히피 정신과 대마와 로큰롤에 찌든 채 성장해온 어른들이 그들의 몰락에 관해 기록한 디스토피아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일 리가 없다. 애초에 윌리엄 깁슨은 타자기로 <뉴로맨서>를 썼다. 먼 미래의 후손들이 핵탄두 비행 궤도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로 인스타그램에 올릴 디저트 사진이나 찍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거다.

그 시절 SF 작가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68혁명은 어영부영 끝나버렸고, 히피들이 꿈꾸던 평화와 희망의 70년대 따위는 오지 않았다고. 전쟁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테고, 인간성의 가치는 퇴색될 것이며, 도시는 질병처럼 번식해 숲과 자연을 말살하고, 기업은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 국가마저 돈으로 집어삼킬 거라고.

하지만 그곳에서도 투쟁은 계속될 거라고, 그들은 믿었던 것 같다. 적어도 희망했던 모양이다. <뉴로맨서>의 주인공들은 초거대기업 테시어 애시풀에 맞서고,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초인이 되어 권력을 초월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칸트들이 자유를 위해 벌이는 처절한 투쟁은 또 어떤가. <다이디 타운>에서는 찌질한 하드보일드 탐정조차 혁명의 주동자가 되고, <토탈 리콜>에선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독재자의 머리를 터뜨려버리기까지 한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혁명 이야기인 <매트릭스>를 거쳐 21세기까지도 이런 전통은 무사히 이어지고 있다.

스팀펑크니 디젤펑크니 온갖 펑크들이 난립하는 요즘에야 의미가 많이 퇴색해버리고 말았지만, 사이버펑크는 어쨌든 펑크 정신을 부르짖는 장르다. 오죽하면 장르 이름에다 ‘펑크Punk’를 넣기까지 했을까. 싸우라. 누구나. 저항하라. 아무렇게나. 아님 다 함께 시원하게 망해버리던지. 반항심이야말로 사이버펑크의 핵심 요소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이버펑크의 의미가 조금씩 달리 읽히게 되는 것 같다. 80년대 사람들에게 사이버펑크는 반세기 이상 떨어진 아득한 미래였지만, 2022년의 우리는 기술적으로 사이버펑크의 목전까지 도달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이제 이 서브 장르는 점차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좀 더 엉성하게 망해버린 버전으로. 적어도 사이버펑크 소설에선 인공지능을 소유한 거대기업 총수가 고작 트위터 서비스를 망치느라 60조를 허비하진 않았단 말이다.

아무튼 우리도, 아직은 싸우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권위에, 차별과 억압에, 온갖 부당하고 불공정한 처사들에 대하여. 그 시절 사람들이 상상했던 모습처럼은 아니겠지만.

 

늦은 새벽, 텅 빈 모니터를 노려보다 보면 문득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아니 글쎄, 내가 SF 작가라니. 그런데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지? 언제부터 어울리지도 않게 온 세상의 무게를 다 짊어진 양 거들먹거리며 폼이나 잡는 사람이 되어버린거람. 기후 위기며 혐오며 차별이며 세상의 온갖 문제들에 대해 무슨 자격으로 떠들어대고 있는 걸까. 오만하여라. 아무런 해답도 갖지 못한 주제에. 혼자 반쯤 미쳐서는 이야기를 휘둘러 세상과 싸우고 있구나. 세상은 나를 상대할 생각조차 없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투쟁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 흔한 등록금 투쟁에도 참여해보지 못했다. 애초에 대학 생활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했지만. 2013년 겨울,‘안녕들 하십니까.’로 시작되는 대자보를 읽기 전까지 나는 언제나 모든 싸움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싸우고 있었다. 글을 무기로.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 넷플릭스

대체 왜 싸우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연히도 영화 <돈 룩 업>을 보던 도중 깨달음이 찾아왔다. <돈 룩 업>은 운석 충돌 영화인 척하는 기후 위기 이야기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해결하지 못하는 멍청한 인류가 자멸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는 운석 이야기를 하며 기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낄낄대며 비웃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너무 무서웠다. 장면 장면마다 견딜 수 없이 소름이 끼쳐 10분 만에 영화 감상을 중단했는데,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여전히 30분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통령이 주인공의 학벌을 묻는 장면은 토할 것처럼 힘들었다. 실제로도 그럴 것 같으니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이 현실을 해결할 방법을 모르겠으니까.

무섭지 않으신지? 세상은 내일 당장에라도 망할 수 있다. 어쩌면 이미 망했는데 우리만 모르는 걸 수도 있고. 탄소 배출량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고 있는데도 다들 놀라우리만치 평온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두렵다. 두렵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싸우고 경고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다소 허황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더라도. 이야기 창작자의 투쟁이란 대개 그런 식이다. 끊임없이 모래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일.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자연히 책장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나의 동료 작가들도 나와 같은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많은 SF 작가들이 여전히 글로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소셜 미디어에서, 칼럼 조각 위에서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 치열하게 단어를 조립하고 있다. 세상이 가진 모순의 한쪽 귀퉁이를 거칠게 물어뜯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다. 

영화 '헝거 게임(The Hunger Games)'의 세 손가락 제스쳐. 네이버 영화

SF는 예로부터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이 많은 장르였다. ‘변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장르니까. 미국의 SF 작가 테드 창은 이렇게 말한다. ‘SF는 변화하는 세계를 담는 그릇’이라고. 많은 SF들이 변화의 첫 파도를 타고 한 발짝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스타 트렉>은 엔터프라이즈 호의 함교에 여성과 흑인과 성소수자를 승선시켰고, <엑스 파일>의 주인공 스컬리는 많은 여성 청소년들을 이공계 대학으로 이끌었다. <헝거 게임>의 세 손가락 제스쳐는 이제 혁명의 상징이 됐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알고 보니 여성이었다는 사연은 성별을 둘러싼 편견에 대해 많은 메시지를 준다.

SF는 현실을 비틀어 드러내 보이는 장르이기도 하다. SF는 은유와 과장, 추가와 단순화, 미래로 옮겨놓기 등 다양한 기법들을 통해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기 쉽게 재정립한다. 주제에 대한 탐구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사고실험과 특수한 가정을 현실에 끼워 넣어 변화를 추측해보는 외삽(外揷) 기법 등을 통하면 우리는 픽션 속에서 온갖 대안적 현실들을 마음껏 사유해볼 수 있다.

뻔뻔하지만 내가 스스로도   썼다고 생각하는 소설로 <  미래의 유크로니아>라는 단편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 정원은 끝없이 미래로 시간 여행하며 지구 역사의 마지막까지 나아간다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마주한다호모 섹슈얼트랜스젠더인터섹스폴리아모리인공지능 로봇과의 종을 뛰어넘는 연애온몸을 미뢰(味蕾) 바꾸어 설탕 피부를 가진 연인과 나누는 스킨십스무 종류가 넘는 탈착식 성기를 그날의 기분에 따라 바꿔 끼우는 사람자신의 클론과 결혼한 남자, 서로의 뇌를 봉합해 하나가 되어버린 연인, 너무 거대해져 버린 나머지 초신성 폭발의 에너지를 이용해야만 섹스할 수 있는 거인들…… 만약 이 모든 게 사랑이라면. 사랑이라는 개념 속에 내포된 한없는 가능성의 일부라면. 고작 피부색이나 성별의 같고 다름 따위로 사랑에 대해 논쟁하는 우리 곁의 먼지 같은 말들이란 얼마나 바보 같고 시시한 일인지.

SF의 우주 속에선 무엇이든 가능해진다. ‘그녀의 세계가 파괴되었다.’라는 문장은 대개의 문학 속에서 그저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SF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녀가 는 행성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어버릴지도 모른다. SF는 세계를 파괴할 힘이다. 혹은 치유할 힘이거나. 책장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어떤 세계와도 마주할 수 있다. 그곳은 불필요한 감정이 제거된 세계일 수도, 자신의 성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미래일 수도,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죄다 UFO에 납치되어 사라져버린 유쾌한 우주일 수도 있다.

이러한 SF의 특성들이 어쩌면 우리에게 해방구를 제공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의 우리는 고정된 현실에 갇힌 약하고 가엾은 존재이지만, SF라는 가정법의 도구를 통해 소망하는 모든 가능성의 세계로 탈출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이곳으로 돌아올 때마다 나는 비루한 현실을 더 강렬히 체감하게 된다. 변화를 갈망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SF 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이리라.

 

<돈 룩 업>을 이어서 시청할 용기는 여전히 없기 때문에, 그보단 조금 덜 무서운 책을 꺼내 들었다. 존 스칼지의 <무너지는 제국>. 전형적인 ‘존 스칼지 소설’이다. 끝내주게 재미있는 SF소설이란 뜻이다. 왁자지껄한 수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탁월한 페이지 터너. 덕분에 좀 덜 무서웠다. 거기서도 세상이 망하는 건 매한가지지만.

<무너지는 제국> 속 미래 인류는 ‘플로우’라는 웜홀을 이용해 우주로 진출한다. 척박한 환경 탓에 혼자서는 자급자족할 수 없는 여러 행성은 부족한 자원을 교역하며 제국을 이뤘다. 하지만 누군가 깨닫는다. 플로우가 서서히 붕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행성과 행성 사이의 교통이 끊어져 모두가 사이좋게 멸종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플로우 붕괴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붕괴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려는 귀족 멍청이들이 끼어들며 제국은 자멸의 가능성을 차곡차곡 높여간다.

하하하 바보들. 다 죽게 생겼는데 제국 화폐가 무슨 소용이고 권력을 쥐는 게 무슨 소용이람. 멍청이들을 실컷 비웃다 어느새 나는 깨닫는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반성해야지. 고기도 좀 덜 먹고 플라스틱 사용도 줄여야겠다.

반성의 마음을 담아, 기후 위기에 관한 소설을 한 편 썼다. 고작 100페이지짜리 중편을 쓰는데 반년을 소진했으니,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시간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원고인 셈이다. 글밥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선 완전 망한 거지. 사실 대부분의 시간을 백지를 펼쳐놓고 보냈다. 문득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져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매일 확증편향 되는 멍청함의 양에 비해 한 편의 소설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너무나 미미하고 비효율적이지 않나?

소설을 쓰는 내내 절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자료를 조사하고 또 조사할수록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세상은 착실히 망해가고 있고, 뭘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쳐버린 거냐며 추궁하는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는 정도가 그나마 남은 선택지라는 망상에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착각이다. 아직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글을 읽고 쓰는 일 따위는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수많은 투쟁의 방식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발버둥일 것이다. 잘하자. 나중에 두들겨 맞기 싫다면.

부디 100년 뒤의 누군가가 내 소설을 비웃으며, 그 시절 사람들 참 겁도 많았네 깔깔 조롱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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