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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호 85호 <모자이크: 잊고 있던 조각들>/정치

젠가: 기초 없는 과학의 미래

by 중앙문화 2024. 2. 1.

 

 

편집장 문휘진

편집위원 정다빈

 

젠가 놀이를 시작했다.

바닥에서부터 나무  3개씩 쌓아 올리기 시작해서 어느새 17층 가까이 됐다.

갑자기 새로운 규칙이라며 1층에 있는 나무  3개를 잡고 동시에 빼라고 한다.

처음 들어본 규칙이지만 어쩔 수 없으니 겨우 뺐다. 살짝 흔들렸지만, 다행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또 1층에 있는 걸 빼라고 한다.

이번엔 젠가가 더 크게 휘청거린다.

조금만 더 하면 진짜 무너질 것 같다.

중간부터 하나씩 빼야 는게 원래 규칙인데 아무래도 젠가를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 

 

지금 기초과학계는 마치 휘청거리는 젠가 같다. 지난 8 29, 윤석열 정부의 폭탄선언에 기초과학계가 들썩였다. 당장 내년도 R&D예산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전체 예산은 2.8% 증가했는데 R&D예산은 올해 대비 16.6%(52000 )를 깎는다는 것이다. 주던 돈을 깎는다고 하니 뭔가 심각한 일인 듯 하다. 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 특히 사회과학대학이나 인문대학 계열 학생의 경우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과학의 시작, 기초연구

 

우선 R&D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과학 연구에는 기초, 응용, 기술, 분석, 경험적 연구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중 기초연구 R&D라고 부른다. 이는 Research and Development[각주:1]의 약자로, 응용 등의 특정한 목적을 두지 않고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을 창출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기초연구는 주로 지식을 향상하기 위해 수행되며 즉각적인 상업적 잠재력이 없는 연구이다. 그렇다고 성과가 없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기초과학의 연구과제로서 성과는 있으나, 이것이 적용되어 상업적인 상품으로 나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다. 

 

쉬운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3년 전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불안한 우리의 마음을 쓸어내리게 해준 것은 바로 화이자, 모더나 백신이다. 백신의 핵심은 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했을 때 싸워줄 수 있는 단백질, 즉 항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물질인, ‘mRNA’이다. 

 

mRNA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은 코로나가 기승이던 2020년보다 약 40년 앞선 1980년대부터 시작된다. 당시 로버트 말론은 인간의 세포가 mRNA를 흡수하고 단백질을 생산한다는 걸 처음 발견했다. 이 물질이 약으로 쓰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제약회사들이 이 연구에 집중했고, 2010년대에는 미국은 국가 차원에서 업계 연구원들을 지원하며 관련 연구 사업은 확장됐다. 

 

2020년 코로나19로 대량의 백신이 필요한 시기에, ‘생산이 쉽다는 장점을 가진 mRNA는 곧바로 임상시험을 거쳐 접종할 수 있었다. 여기서 로버트 말론의 긴 연구 끝에 이뤄낸 발견이 기초연구의 성과인 것이다. 중요한 건,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먼 미래의 활용임에도 지속적인 연구가 이뤄졌고, 연구가 끊기지 않도록 국가에서 꾸준히 투자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제 쓰일지 모르는 연구가 기초과학이다. 지금 봤을 때 당장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어렵다. 그래도 해야 한다. 우리 그 누구도 그 연구가 미래에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쓰이기에 반드시 필요하다. 언제 퍼질지 모를 전염병에 필요한 백신을 30년전부터 연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장의 상업적 수익이 날 수 없다는 것. 당연하다. 애초에 그게 목적이 아니니까. 그러니 부족한 예산을 두고 정부가 삭감할 우선순위에 두기 딱 좋은 사업이기도 하다.

 

 

연구원들의 디딤돌, 생애기본연구

 

뭘 어떻게 삭감하겠다는 걸까? 연구개발과제의 구조부터 살펴보자. 과학기술분야의 기초연구사업에는 아래와같이 다양하다. 이중 개인연구의 세부사업은 누가 주도하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nbsp; 과학기술분야 기초연구사업(개인연구사업).&nbsp;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

 

먼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의 개인연구사업에는 크게 우수연구 생애기본연구가 있다.  연구자들의 경력과 역량에 따라 지원받을 수 있는 과제가 다르다. 아래 표는 현재 전임연구자가 직급별로 신청할 수 있는 기초연구사업의 구성을 의미한다.

▲&nbsp; 과학기술분야 기초연구사업.&nbsp;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

 

▲&nbsp; 현재 기초연구사업 구성 .&nbsp; ⓒ 기초연구연합회 .

 

 우수연구는 사업 규모가 1 원 이상인 만큼 경력 있는 우수한 연구자들에게 지급하는 사업을 의미한다. 반면 생애기본연구 사업은 2천만 원부터 7천만 원까지 소규모 과제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는 기본 연구 생애첫연구로 나뉜다. 기본 연구는 대학 이공계 전임교원들의 풀뿌리 연구를 폭넓게 지원하여 연구 기반을 확대하는 사업이다. 생애첫연구 사업은 조기 연구 정착을 유도하기 위해 초기 자금을 지원한다. 그 대상은, 박사학위 취득 후7년 이내의 신진연구원 중 개인기초연구사업 수혜 경험이 없는  39세 이하의 대학 전임교원이다. 이 두 사업의 공통점은 연구원 성장의 뿌리,  시작을 돕는 것이다. 

 

 

도움닫기 없는 높이뛰기

 

▲&nbsp;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기초연구사업&nbsp;2023년과&nbsp;2024년 예산안 분석(원그래프) .&nbsp; ⓒ 기초연구연합회 .

 

정부에서는 이 생애기본연구 중 내년부터 신규 과제를 없애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뒤에서 더 자세히 짚어보기로 하고, 그 전에 위의 그래프 괄호에 있는 신규와 계속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과제는 수행의 연속성에 따라 신규 과제 계속 과제로 나뉜다. 신규 과제는 그 해 새로운 주제로 지원하는 사업을 말한다. 반면 계속 과제는 총 수행 기간이 1년을 초과하는 과제 중, 연차·단계평가 등을 통해 계속 수행하기로 확정된 과제이다. 

 

우수연구의 사업은 전년 대비 32.1%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신규 기본과제의 예산은 0이 됐다.[각주:2] 한국연구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올해 기본연구에 선정된 과제는 총 4,328개이고, 이 중 1,235개가 신규 과제이다. ‘생애첫연구는 총 1,200개 중 약 200개가 신규 과제다. 다시 말해, 정부가 삭감한다면 내년 생애기본연구 과제의 약25%가 진행에 차질을 빚는다. 과제를 진행하던 연구원 역시 3천만 , 많게는 7천만 원을 별도로 마련해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그들도 그럼 기본 과제가 아닌 신진 과제로 지원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말도 안 된다. 생애 첫 연구자들에게 신진 과제의 경쟁률은 디딤돌 없이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연구과제가 선정되기 위해서는 아래의 평가 세부 체계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nbsp; 한국연구재단 평가제도.&nbsp;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 .

 

 한국연구재단 내 전문가 평가단은 온라인 평가, 패널 평가, 발표평가를 거쳐 연구지원 과제를 최종 선정한다. 사업별로, 연도별로 다 다르겠지만, 보통 기초연구 사업의 경쟁률은 5:1, 많게는 30:1까지 된다.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제10조에 따르면, 평가 기준에는 연구과제의 창의성 및 수행 계획의 충실성과 활용 가능성, 연구자 개인 또는 소속 단체의 역량(논문, 특허 개수 등) 등이 있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연구자 개인의 역량이다.

 

▲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관리표준매뉴얼(연구개발과제 선정 시 우대 기준)

 

 위의 연구개발과제 우대기준에서 알 수 있듯이, 연구과제가 선정되기 위해서는 연구원이 최근 3년 동안 이룬 연구개발성과가 필수적이다.  경력이 가장 중요하다.

 

 이 혹독한 과정을 거쳐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의 경력이 필요할까. 2020년 당시 신진 연구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중앙대병원 김경우 교수의 경우, 중앙대병원 및 서울대병원에서 안과 임상 강사로 지내고, 이후 중앙대병원 안과 조교수로 재직 중에 각막, 결막질환, 백내장, 외안부 재건술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대한안과학회, 미국시과학학회 등에서 다수 수상한 이력이 있다.[각주:3] 비교적 최근 예시를 하나 더 들어보면, 올해 3월에 우수신진연구 과제가 선정된 충남대 김현수 교수이다. 그는 26개의 논문과 24개의 특허 및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각주:4]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선정 기준에는 연구과제에 대한 평가도 분명 있다. 하지만 경험이 전무한 연구자들이 이미 경력과 수상 이력이 많은 연구원들을 뚫는 것은 하늘 별 따기이다. 연구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생애 첫 연구사업을 지원함으로써 경험을 쌓아주고, 새로운 연구를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실험 테이블과 도구들이라도 마련해줘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내년부터 이 생애기본연구의 신규 과제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비유해 보자면 이는 인턴 제도 없앤다는 말과 같다. 경력직이 되려면 반드시 인턴과 신입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회사는 경력직만 뽑는다는 것이다. 결국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은 중견연구자는 커녕 신진연구자조차 되기 힘들어졌다. 한마디로, 사다리가 붕괴된 것.

 

 

막막한 성장 경로

 

▲ 교육부 이공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 중 학문균형발전지원사업 . 2021&nbsp; 이공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 신규과제 공모 공고 .

 

 또 하나의 청천벽력은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학문균형발전지원사업의 축소이다. 이는 창의 도전 연구기반지원, 보호연구, 지역대학 우수과학자, 학제간 융합연구 등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는 이중  보호연구 지역대학 우수과학자에 대한 투자를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보호연구는 비전임 연구자의 연구나 민간 부문 투자가 어려운 과제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역대학 우수과학자는 지역의 균형 발전 초점을 맞춰 비수도권 대학의 소외되는 연구자들도 지속해서 연구 성과를 창출할  있도록돕는다. 정부는 이러한 균형발전사업 신규 과제에 관한 예산을 절반이 넘는 1,642(56%)이나 삭감했다.[각주:5]

 

▲&nbsp; 교육부 이공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nbsp;2023년과&nbsp;2024년 예산안 분석.&nbsp;ⓒ기초연구연합회 .

 

 균형 발전 사업의 중요성은 비수도권 대학과 수도권 대학의 연구력 차이에서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연구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두뇌한국21(Brain Korea 21, 이하 BK21)’에 따른다.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에서 석·박사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7년간 사업비의 일부를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연구단 또는 연구팀으로 각각 지원할 수 있는데, 연구단의 경우 적게는 10억여 원, 많게는 60억여 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지원 규모가 큰 만큼 많은 대학이 사업에 선정되고자 연구력 향상에 들인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이다. , 대학 내 연구단들이 BK21사업에 얼마나 많은 과제가 선정되는가에 따라 해당 대학의 연구 경쟁력을 판단할 수 있다. 

 

이 사업은 지원 대학의 지역 범위에 따라 전국단위사업 지방단위사업으로 나뉜다. 전국단위사업은 전국 모든 대학을 포괄하는 반면, 지방단위사업은 지방대학의 균형발전을 위한 배려가 이루어지는 사업이다. ‘전국단위사업만 살펴보면, 연구단 성과를 기준으로 이번 4단계 BK21사업 예비선정 결과 서울대 1(42) 이어 성균관대가28, 연세대가 27, 고려대가 25개로 20개 이상의 연구단이 선정된 대학에 이름을 올렸다. 상위 3개 대학이 전체 사업단 수의 25%를 차지한다. 이외에 한양대 10, 중앙대 9, 인하대 8, 한양대(ERICA) 6개 등 상위 10개 대학이 차지한 사업단은 전체 사업단의 85.1%에 달했다.[각주:6] 이처럼 수도권과 지방 대학 사이의 연구력 격차는 심각하다.

 

 교육부의 지역대학 우수과학자 BK21의 지역단위사업 모두 수도권 대학과 비수도권 대학이 균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그 취지이다. 하지만 지역대학 우수과학자 사업이 축소된다면, 수도권 대학에 비해 연구력이 부족한 지방 대학에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에 따라 이미 연구력이 뛰어난 몇 개의 대학에 지원금이 집중되면서 다소 역량이 부족한 지방대학들은 연구력을 개선할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 2020년에 열린 한림원탁토론회에서 유인권 부산대학교 연구처장은 국가에서 연구 인력을 양성한다고 하지만 지역에서 사람이 줄어드는 현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지역 인구수가 감소한다는 것은 결국 일자리가 감소한다는 것과 같다. 지역에서는 정말 열심히 노력해도 성과를 수도권과 비슷하게 내는 것조차 어렵다며 지방 대학 내 대학원생 인력 부족 문제를 호소했다. 이로 인해 돈 되는 연구만 하려고 하고, 기업체 연구소로 취업하려고만 한다며 대학의 본분에 의문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각주:7] 외국의 경우 지역별로 연구 인프라와 인력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은 모든 인프라가 수도에 쏠려있으며 지방 대학들을 위한 지원 제도가 점차 확대되어도 모자란 상황이다. 

 

그럼 박사후연구원들은 석박사 과정 대신, 바로 회사에 취직하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회사에서 일할연구 인력을 양성하는  단계가 대학이다. 실험실에서 고난도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첫 시작이라는 말이다. 학부생이 연구할  있는 범위와 석사와 박사과정을 거친 연구자가   있는 범위는 확연히 다르다. 박사후연구원들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결국 대기업의 핵심 연구 인력이 줄어든다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생애첫연구를 축소한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과기부는 사업 성과가 타 사업에 비해 저조했다고 말했다.[각주:8] 본교 A 교수는 학생 신분에서 연구의 실패는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했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지식을 확장한다. 기초과학연합회 이사이자 본교 약학대학 오경수 교수는 현재 대부분의 제약 회사 전부 대학 실험실(LAB)에서 스핀오프(Spin-Off)[각주:9]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대학에서 첨단 기술의 개발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기대하는 소위 대단한 성과는 최소 몇십 년 이상의 오랜 기간을 투자해야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다. 그런데 예산이 삭감되면 연구자는 도전을 꺼리게 된다. 실패가 허용되지 않기에. 결국 연구자라는 직업의 미래에 막막함을 느끼고 연구 인력들이 연구소를 떠나게 된다. 

 

 

계속 하기 힘든 계속 과제

 

▲&nbsp;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기초연구사업&nbsp;2023년과&nbsp;2024년 예산안 분석(표).&nbsp;기초연구연합회 .

 

 과기부 사업의 올해와 내년 예산안을 비교한 표이다.  번째로 보이는 양상은 계속 과제의 감소이다. 그중 피해를 보는 건 집단연구과제이다. 집단연구과제는 보통 5년 이상의 연구사업이기에 계속 과제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공계 기초연구본부는 크게 다섯 가지(자연과학단, 생명과학단, 의약학단, 공학단, ICT 융합연구단)로 구분된다. 이 중 창의성과 탁월성을 갖춘 우수 연구 집단으로 선정되면 선도연구센터의 자격을 갖는다. 선도연구센터는 지원 규모가 크고 장기간 지원(7년 이내)이 이루어진다. 

 

▲&nbsp;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집단연구사업.&nbsp;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 .

 

 집단연구사업의 계속 과제를 진행 중인 본교 화학과 주재범 교수는 현재 공학 분야 선도연구센터(ERC)[각주:10]나노-광융합 바이오의료진단 연구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그는 2020년에 선도연구센터로 선정돼 7년간140 (1년 기준 20) 규모의 지원을 확보했다. 7년 중 4년이 지난 지금, 주 교수는 연구비 약속을 안 지킬까 불안하다. 위의 표처럼 정부가 계속 과제의 예산을 삭감한다면 매우 곤란해진다. 7년간 예산을 촘촘히 계획해서 받아낸 지원금을 중간에 일부 줄인다는 것은 그 계획을 수정하라는 말이다. 

 

 연구비 계획표에는 연구 목표에 맞는 재료비, 인건비 등이 쓰여있다. 주 교수에 따르면, 연구비 지출을 조정해야 할 때 우선 정규 연구원들의 인건비는 보전하고 본다. 연구사업의 핵심 인력인 연구원을 하루아침에 해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보전해야 하는 건 연구 목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재료비이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연구사업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지원금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단계 평가에서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임시직의 인건비이다. 포닥(Postdoctoral Researcher, 박사 후 연구원)이나 행정직 등의 임시직 근로자들의 월급을 줄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모순은, 정부가 인건비 수준을 상향 조정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올해 3월부터 학생 연구자 인건비 기준을 학사는 월 100 원에서 130 원으로, 석사는 월 180 원에서 220 , 박사는 월 250 원에서 300 원으로 대폭 인상했다. 오 교수에 따르면 설상가상으로 최근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인해 전체 연구비 중 인건비 비율이 약 30~40%에서 60%까지 올라갔다. 특히 많은 인원과 함께 연구하는 대규모 연구사업의 경우 인건비는 상당한 부담을 차지한다. 심지어 대학원생들의 삭감 반대 성명과 반발이 본격화되자, 지난 10월 정부는 박사후연구원들의 안정적인 인건비 지급을 보장하는 풀링제의 확대를 제안했다. 

 

 어쨌든 임시직의 인건비도 줄일 수 없게 됐다. 어떻게 연구하라는 것인가. 연구 목표 달성과는 점점 멀어질 뿐이다. 본교 물리학과 한상준 교수는 전체 예산은 삭감하면서 1인당 인건비를 높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르라는 말 아니냐고 말했다.

 

 이러한 계속 과제 삭감 우려에 올해 연구비를 쓰지 않고 모아두는 것이 유행한다는 기사도 나왔다. 내년도 연구비가 얼마나 줄지 모르는 상황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내년으로 이월이 가능한 계속 과제 예산을 쓰지 않고 저축하는 것이다.[각주:11] 연구에 쓰여야 하는 비용을 아끼는 건 결국 연구 진행과 그 성과에도 차질을 빚는다. 오 교수는 연구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사람들이 안 나갈 수 있도록 돈을 모아 버텨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벨상 쫓아 삼만리

 

 한편 위의 표에서 보이는 또 다른 양상은 신규 과제의 예산 증액이다. 여기서 증액되는 신규 과제는 생애기본연구를 제외한 신진연구 중견연구의 신규 과제이다. 이렇게 계속 과제는 난감한 상황을 만들고 정부는성과를 가져다줄 새로운 과제를 찾아 떠났다. 

 

"젊은 과학자 육성에 대한 예산을 증액했다."

 

 과기부 소속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의 말이다.[각주:12] 앞서 살펴봤듯이 생애기본연구는 없앴으니 여기서는 젊은 경력직 신입을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신진연구자 중에서도 여전히 계속 과제는 삭감하고 새로운 신규 과제를 도전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내년에 새로 선정되는 연구 과제를 위해 기존 연구 과제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것과 같다. 한상준 교수는 정권에 따라 예산 배정이 달라지다 보니, 교수들은 연구과제비가 선정되지 못하면 그 원인이 연구 역량이 아닌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교수들도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내년부터 새로운 과제를 진행할 연구자들은 운 좋게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지만, 작년에 이미 지원받은 과제는 한 해 차이로 예산이 줄어 경쟁이 더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산안이 확정되면 연구 경력이 없는 생애 첫 연구자들에게는 더더욱 기회가 없다. 논문도 있고, 강사 경력도 있고, 연구원 활동 이력도 있고, 특허와 수상 경력도 있는 적당한(?) 스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과학자를 기대한다. 정부는 그것이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각주:13]

 

나무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숲을 조성해야 해요

 

 주 교수가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한국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라며 했던 표현이다. 과학에서 중요한 건 저변의 확대이다. 잘하는 사람 20명 정도를 뽑아서 그들만 집중적으로 지원하면 노벨상이 나올까. 절대 아니다. 

 

 201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요하임 프랑크는 주제와 완전히 동떨어진, 정말 엉뚱한 연상을 할 때가 많다, 그 연상의 힘이 곧 과학적 발견의 중요한 원천이라고 말했다. 198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는 노벨상을 받으려고 생각하면 절대 못 받고, 그냥 연구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경력을 가진 젊은 연구원은 노벨상 수상과 인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 성과를 저해하는 건 연구비 부족으로 연구과제 이외의 것, 그러니까 돈을 걱정해야 하는 환경이다. 중앙대 약학과 오경수 교수는 만약 그해에 연구과제가 선정되지 못했거나 연구사업의 과제비가 부족할 경우, 기업 또는 정부 기관의 용역 과제를 가져오기도 한다고 밝혔다. 오 교수는 2015년부터 작년까지 이학연구센터(SRC)메타리셉톱 제어 연구센터에서 센터장을 맡아 집단연구과제를 진행했다. 당시 오 교수 연구실은 1년 연구비로 약 7억이 필요했지만, 연구재단 집단과제에서 지원받은 과제비는 약 3억이었다. 이조차 간접비[각주:14]  20%를 제외해야 한다. 

연구는 사람이 하는 거라 사람 없으면 안 돼요. 전문인력은 연구 성과와 직결되기에 인건비를 감축할 수 없었다. 이를 메꾸기 위해 따로 하고 있던 개인과제비 2으로 일부 충당했지만, 여전히 연구비 7억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 교수는 식약처 용역 과제에 개인적으로 참여해, 추가로 1 5천을 보충해야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다행으로 봐야 한다. 본교 물리학과 한상준 교수는 기초과학의 경우 전공이 학문과 이론에 더 집중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업체와의 연결성이 떨어져 용역도 힘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용역 과제도 어려운 연구진들에게는 지원금의 유일한 원천은 국가이다.

 

연구자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과제임에도 일단 급한 대로 연구비를 충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결국 내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실험이 아니어도 실패 확률이 적은, 또는 경제성이 높은 길을 택하게 된다.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연구 성과를 높이는 지름길이 아닐까.

 

본교 B 교수는 기초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넓은 기반이라고 강조하며, 작년 7월 한국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으로 알려진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를 예로 들었다. 
 
허준이 프린스대 교수 겸 한국과학기술원 석학 교수의 학창 시절은 수학과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시 쓰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막상 대학에 가서도 3학년 1학기에 모든 과목을 D F로 채우기도 했다. 그렇게 방황하던 그를 수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당시 서울대학교 석좌교수로 초빙된 1970 필즈상 수상자인히로나카 헤이스케(中 平祐, Heisuke Hironaka)’의 수업이었다. 
 
B 교수는 당시 대학교에서 D F로 채운 허준이 교수에게 필즈상 수상자의 수업을 제공한 것도 효율성 측면에서 따지면 비효율에 가깝다고 말했다. 지금은 비효율이라고 판단되는 것들도 나중에 굉장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기에, 기초과학에서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지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각주:15]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르는 카르텔

 

 왜 갑자기 올해 R&D가 예산 삭감의 타이 됐을까. 올해 6,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R&D를 향해이권 카르텔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먼저 카르텔의 정의는, 동일 업종의 기업이 경쟁의 제한을 목적으로 밀약하여 독점한다는 뜻이다. 이를 과학 분야에 적용해 본다면, 특정 기업체 및 대학 교수진이 추진하는 대형 과제가 다른 과제의 연구비 지원을 막고 연구비를 독식해야 카르텔이 성립한다. 

 

 2018년부터 꾸준히 개선의 목소리가 제기된 사업이 하나 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예산을 2배로 늘린 중소기업R&D 지원사업이다. 수혜기업의 매출 증가율이 지원받지 못한 비 수혜기업보다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수혜기업 선정 절차에 대한 의문점도 제기됐다. 양적 지표 중심의 선정 체계로 인해 이미 기술력이 높은 중소기업 위주로 보조금이 지원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이 오히려 배제된다는 것이다.[각주:16]

 

 하지만 대학 교수진들, 특히 대부분 신진 교수의 연구는 1억 이하의 소규모 과제들이다. ‘카르텔이 발생하기엔 연구비 규모가 매우 작다.  교수는 “5:1이 넘는 오픈 경쟁 상황에서 카르텔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본교 물리학과 한상준 교수 또한 카르텔이란 과학계에 존재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덧붙였다. 본교 연구부총장인 주재범 교수는학교 연구비 수주 현황을 매번 보지만 그런 것을 발견한 적 없다고 언급하며 카르텔의 존재에 대해 부정했다. 

 

 한 교수는 카르텔이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핀셋 관리를 해야지, 일률적으로 소규모 과제까지 삭감하는 것은 큰 문제라 언급했다. 만약 구조 속에서 불공정하거나 불합리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전체적인 비용 삭감은 올바른 대안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정부 차원에서도 카르텔이라고 판단한 근거를 명확하게 밝힌 바가 없다. 지난 9월에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카르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에 대해 이종호 과기부 장관은 예시 없이 언론에서 많이 비판하고 있다고 답했다.[각주:17] 자세한 분석을 통한 신중한 판단 없이, ‘균형 과제처럼 일종의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구제책들까지 통틀어 나눠 먹기식이라 말하며 바로 없애기엔 무리가 있다. 한 교수는 비효율의 원인은 연구비를 '주는' 사람이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라며, ‘받는 이에게 비효율을 언급하는 것은 주는 이가 결국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이 있다면 그것만 밀어내서 빼면 된다. 전체를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것이야말로 비효율의 지름길이다.

 

 

중앙대 연구원들의 운명

 

 정부의 R&D 예산 삭감안으로 많은 연구실의 연구비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중앙대학교 식물 분자생물학 실험실김동환 교수의 MBN 뉴스 인터뷰에 따르면 당장 내년도 연구를 중단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비단 김 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 이공계 대학 550 명 중 당장 내년도 연구에 차질이 생기는 연구진이 98%에 육박한다.[각주:18]

 

연구비가 부족할 때 연구책임자가 일반적으로 택하는 방법은 학생연구원을 줄이는 것이다. 매일경제에 따르면 중앙대학교의 경우 올해 상반기에 비해 하반기 학부생 연구원이 430명에서 228명으로,  47% 감소했다. 학사 기준 지급 인원수로는 중앙대가 감소 수준이 가장 .[각주:19]

 

 중앙대 산학협력단 박중열 부단장(이하 박 부단장) 연구비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연구 수행에 가장 핵심인 박사과정, 혹은 석사과정 학생들보다는 학부 연구생에 지급되는 인건비를 먼저 점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다수의 학부 연구생 혹은 연구실 인턴 학생에게 지급되는 인건비 지출 건수가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 원인을 예상했다. 예산은 부족해지는 상황에서 생계와 직결된 박사나 석사를 줄일 수 없기에, 결국 학부 연구생의 수가 가장 먼저 감소하는 것이다. 피해는 정규직이 아닌 연구원이 입는다. 그들은 이력서에 공백이 생기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일자리를 다시 수소문해야 한다.[각주:20]

 

 학생연구원 인건비 지급 인원이 준 것은 중앙대만이 아니다. 석사 연구생 기준으로 고려대가 1829명에서 1440명으로 가장 많이 줄었고, 박사는 KAIST 358명에서 2790명으로 가장 많이 줄었다.[각주:21] 오 교수에 따르면, 그나마 부산대학교 같은 지방거점 국립대학은 매년 교육부에서 지방대학의 연구 환경을 개선할 때 쓸 수 있는 기관보유금을 지원. 이렇게 연구에 필요한 장비라도 정부에서 따로 지원해 준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사립대학의 경우 오로지 교수가 연구비를 따오느냐 못 따오느냐, 그리고 얼마나 따오느냐 그 연구비 수주율이 연구원의 운명을 결정한다. 

 

 

지금 필요한 건 그물망

 

 현재 교내 교수진이 국가로부터 지원받은 기초연구과제비 중 약 25% 간접비로 산학협력단에 납부한다. 이 간접비는 산학협력단 직원들 월급, 연구 기반 시설 유지, 성과 활용지원비(연구원 인센티브, 지식재산권 출원/등록, 창업지원) 등에 쓰인다. 산학협력단은 독립 법인으로, 교수가 획득한 외부 연구 자금의 일부로 운영된다 . 로 되어 있기에 연구사업 규모가 클수록 간접비는 진다.  교수의 역량에 모든 것이 달 구조이다. 교수가 자신의 연구 성과를 통해 인지도를 확보하는 일은 결국 학교의 연구 경쟁력과 직결된다. 교내 연구 환경이 잘 마련되어 있는지에 따라 앞서 말한 BK21사업에 선정되어 대학원생들의 인건비도 확보할 수 있다. 

 

 내년에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하는 교수들에게, 학교가 해줄 수 있는 안전장치는 없을까.

 

해외에는 존재한다. 올해 기준 국가별 과학기술 혁신역량 지수가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한 미국의 연구 시스템을 살펴보자. 미국에서는 간접비를 오버헤드(Over Head)’라고 부르고, 이를 관리하는 곳을 ‘Organized Research Unit(ORU)[각주:22]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산학협력단과 달리 ORU는 전체 과제비 중 평균 50~60%, 많게는 70%까지 책정한다. 간접비 비율이 높은 대신 더 다양한 영역을 관리한다. 제안서 작성부터 학내 승인 및 제출,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관리를 맡는다. 연구원들의 인건비를 포함한 재무 처리를 담당하며,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성과를 지속해서 모니터링한다. , 연구를 서포트하는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미국의 또 다른 특징은 ‘9 months salary이다.  말 그대로 교수에게 9개월만 월급을 주겠다는 것이다. 나머지6~8,  3개월 동안은 강의 또는 새로운 연구과제 지원을 통해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이다. 다만 임용 초기 3 동안은 여름 한 달은 월급을 더 주는 ‘Start-up Package’가 제공되어 연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만약 여름에 새로운 연구과제비를 지원받았을 경우 개인의 추가적인 수입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교수의 연구 역량을 향상기 좋은 구조를 보인다. 

 

 이처럼 교수가 연구 경쟁력을 향상고자 하는 동기부여를 만들어주는 환경이 중요하다. 하지만 국내 대학의 산학협력단은 평균 25%의 간접비로는 그 역할과 범위에 한계가 있다. 이마저도 향후 20% 못 미치는 수준으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고 박 부단장은 밝혔다. 또한 교내에 있는 적립금은 건축비나 장학금 등 그 용도가 정해져 있기에 현재로서는 연구비 보완에 쓰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외부 연구비 지원받지 못하면 교수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구조이다. 본교 B 교수는 학교가 움직이고 있진 않다, “의외로 교수가 할 수 있는 것도 얼마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본교에서 여러 논의가 있었다고 한상준 교수는 전했다. 연구비를 1~2년간 지원받지 못할 경우 학생연구원의 인건비 일부를 일정 기간 보장해 주는, 일종의 대출 개념. 이후 연구책임자가 연구과제비를 지원받으면 해당 인건비를 본교 연구지원처에 반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정적인 제약과 예산 부족 문제로 이 논의는 무산됐다. 현행법상 대학의 적립금으로 연구실 인건비를 지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교내 교수진이 진행하는 연구 사업의 개수가 매우 많기에 간접비 규모로 감당할 수 없다. 공정성 면에서도 까다롭다. 만약 일부만 지원한다고 해도, 연구과제가 선정되지 못한 사업 중 정말 경쟁률 때문에 아깝게 떨어진 과제 개인의 역량 부족 또는 불성실로 떨어진 과제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은 제도를 통해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미국 대학의 ORU에서 언급한 모니터링 시스템처럼, 연구과제의 발전성과 적합성을 확인하는 절차를 교내에도 도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연구사업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가 가능하다면 당장 다음 연구를 수행하지 못하는 억울한 연구자들을 구제할 대안을 만들 수 있다. 주 교수 또한특정 부서에서 연구비의 절반을 부담해 주는 등 완충 역할을 하면 좋겠다며 이러한 제안에 동의했다. 연구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경제적인 안전망이 대학의 역할이다.

 

 교내 소속 연구원이 받는 연구과제비는 해당 연구에 참여 중인 교수진들, 학내 학부생, 석박사 대학원생, 산학협력단 직원들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교내 구성원들의 직업을 넘어 누군가의 생계가 걸려있는 문제이다. 유일한 소득원일 가능성이 높은 석박사 대학원생들과 교수들이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학교는 일종의 그물망이 되어주어야 한다. 외부 연구비라고 그저 손 놓고 있기엔 딸린 식구가 너무 많다. 그저 성과 낸 연구원들에게 박수만 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인재가 양성될 수 있도록 경쟁력 있는 연구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연구자 개인만이 아닌 연구시스템의 구축을 통해 안정적으로 연구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변화하고 시도해야 한다.

 

 

‘사람’이 쌓는 위상

 

 탑을 높게 쌓으려면 견고함이 가장 중요하다. 대표적인 방법이, 가장 밑에 있는 나무 블록의 개수를 늘려서 바닥 면적을 넓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맨 , 노벨상만 바라보며 안 그래도 부족한 1층 나무 블록들을 빼려고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성공하려면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는 말.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지겹도록 듣던 조언이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과학계는성공적인 미래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교수들의 공통된 답변이다. 한 교수는 앞으로 몇 년간 R&D 예산이 계속해서 삭감될 것이라 예상했다. 오 교수는 예산이 삭감되는 그 기간에는 매년 연구비 문제가 자주 회자 것이고, 연구비는 실질적으로 현상 유지될 것이라 예상했다. 

 

 내년에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통장을 깰 생각입니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인원을 유지하겠다는 교수들이 많습니다 [각주:23]

 

돈 때문에 학생들, 연구원들을 잃고 싶지 않은 대학연구실 교수들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한다. 정부가 지키려는 연구원은 누구일까. 생애기본연구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연구원도, 지방대학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연구원도, 우수 연구 집단으로 선정된 선도연구센터에서 일하는 정규직 연구원도, 몇년전 선정된 연구과제의 다음을 준비하는 연구원도. 그 누구도 아니다. 단순히 성과를 내줄 누군가를 찾는 듯하지만, 정부는 확실히 반대로 가고 있다.

 

 오 교수는 해당 기조의 원인에 대해 정부와 과학자 간의 소통 부재와 국내 경제적 문제를 짚었다. 연구 과제를 단순히숫자로 바라보면 안 된다.  그 과제를 끌어나가는 사람이 없으면 지금의 과학 위상도 없는 일이다. 젠가를 잘 모른다면 일단 규칙을 들어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규칙을 들어보기도 전에 젠가를 무너뜨리려는 듯하다.

 

 아직 확정된 건 없다. 예산안도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국회의 예산 심의와 통과 절차를 거쳐야 한다. 아직 재고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한 번 무너진 젠가는 되돌릴 수 없다. 오랜 시간 쌓아온 젠가에서 나무 블록을 빼려고 할 땐 신중해야 한다. 젠가의 탑이 노벨상까지 뻗어나가는 그날을 위해.

 


*구글 드라이브를 통해 PDF 판형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UCTelQnoSxrDFlmTqK6xtc-6_YX3q60W/view?usp=sharing

 

85호 내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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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각에서는 Research and Design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 Design은 설계, 즉 순수연구소를 의미하며 응용분야 관련 기관에서는Development라고 주로 표현한다. [본문으로]
  2. 공감언론 뉴시스, “기초연구 예산 삭감 = 풀뿌리 연구 짓밟기”, 2023.09.21. [본문으로]
  3. Daily Clinic Journal, “중앙대병원 김경우 교수,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사업 신진연구과제 선정”, 2020.03.04. 김보미 [본문으로]
  4. 충청뉴스, “충남대 김현수 교수, ‘개인기초연구사업 우수신진연구 과제 선정”, 2023.03.03. 이성현 [본문으로]
  5. 굿모닝충청, “교육부 소관 이공계 연구개발 예산 싹뚝’”, 2023.09.25. 신상두 [본문으로]
  6. 한국대학신문, “[데이터로 본 대학]BK21로 본 대학별 연구력’...서울대 성균관대 두각’”, 2020.08.18. 박대호 [본문으로]
  7. YTN 사이언스, “[한림원탁토론회]BK21 사업과 대학 혁신”, 2020.12.05. 배경호 [본문으로]
  8. 동아사이언스, “신진 연구자 지원책 확대? 생애 첫 연구는 소외’”, 2023.09.08. 박정연 [본문으로]
  9. 파생적으로 발생한이라는 뜻 [본문으로]
  10. 이공계 분야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는 대학의 연구자 10인 내외 연구그룹 [본문으로]
  11. 연합뉴스, “계속과제 삭감 우려에올해 연구비 못 쓰고 저축하는 연구자들”, 2023.11.13. 조승한 [본문으로]
  12. 동아사이언스, “신진 연구자 지원책 확대? 생애 첫 연구는 소외’”, 2023.09.08. 박정연 [본문으로]
  13. 한겨레, “윤 대통령, 미래 과학인재들 만나 노벨상, 이제 쏟아질 것””, 2022.12.22. 배지현 [본문으로]
  14. 간접비란, 대학이 자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재원으로서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동으로 이용하는 연구시설과 지원인력을 유지하기 위해 발생한 연구수행기관의 실경비를 말한다. [본문으로]
  15.  동아사이언스, “[한국계 첫 필즈상 수상]허준이 교수 인터뷰 수학은 자유로움을 학습하는 일얽매이지 않고 생각해야”, 2022.07.05. 이채린 [본문으로]
  16. 한국일보, “ 3조원 중소기업 R&D 지원금 밑빠진 독 물붓기’, 2018.04.12. 박준석 [본문으로]
  17. 미디어스, “장제원도 속 터지는 나눠먹기식 R&D 카르텔 정체”, 2023.09.04. 송창한 [본문으로]
  18. MBN뉴스, “R&D 예산 깎인데다 의대 정원 확대까지…’이공계 위기론 확산”, 2023.10.17. 김영진 [본문으로]
  19. 매일경제, “하반기 학생인건비 10% 줄어든다…”R&D 삭감 여파 현실로””, 2023.10.03. 조승한 [본문으로]
  20. 동아사이언스, “서울대 교수도 포닥 해고…R&D 예산삭감에 엑소더스 현실화”, 2023.11.01. 박정연 [본문으로]
  21. 매일경제, 앞의 기사 [본문으로]
  22. 대학의 전공이나 연구과 중심 관리로부터 벗어나 강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외부 자금으로 운영되는 연구 조직이다. [본문으로]
  23. 동아사이언스, “서울대 교수도 포닥 해고…R&D 예산삭감에 엑소더스 현실화”, 2023.11.01. 박정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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