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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보기/2021 봄여름, 80호 <끝말잇기>

일상에 대하여―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나 있다, 3일간의 기록

by 중앙문화 2021. 6. 22.

2021 봄여름, '끝말잇기' 5월 22일, 국제성소수자반대의날 공동행동

편집장 김시원

 

일상(日常)

「명사」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 일상으로 하고 있는 일.
  • 현대인은 시간에 쫓기며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3 월 12일, 변희수 하사 추모행동

 당신의 일상은 어떤가? 흔히 일상은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고, 때로는 지루하게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일상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보편적인 일상의 지루함은 평화와 안전이라는 밑바탕 위에 있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사람들에게 일상은 벗어나고 싶은 지옥이나 감옥이 된다. 오늘과 같은 내일은 더욱 고통이기에 스스로 일상을 놓아버린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평범함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일상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늘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줄곧 마음 깊이 가지고 있던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한 마음을 줄곧 억누르고 또 억누르며,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힘들었던 남성들과의 기숙사 생활도 이겨 넘기고, 가혹하였던 부사관학교 양성과정도, 또한 실무 부대에서의 초임하사 영내대기 또한 이겨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면서 제 마음 또한 무너져 내려졌고,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 2020 122, 변희수 하사 기자회견 中

 모두의 일상이 지켜지지 않는 세상에서는, 스스로 일상을 지켜야 하는, 그것 만으로 숨 돌릴 틈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납작하게 짓눌리고, 틀 안에 갇히고, 존재가 지워진다. 그러나 때로는 마법 같은 순간이 일어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우리를 어떻게 지울 수 있겠냐고 말하며, 꽉 눌려 있다가 손을 떼는 순간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마법은 서로 손을 잡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3 월 27일, 변희수 하사를 기억하는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공동행동

  서울 지하철 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많다는 2호선 시청역. 주말 낮의 역은 다른 때보다 한산했다.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지닌 이들이 하나 둘 모이자 따뜻한 소란이 일었다. 오후 130. 우리는 고요한 소란을 몰고 지하철에 탔다. 지극히 일상적인 그 공간에서 우리는 책을 읽고, 간간히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강을 건널 때는 경치를 구경했다.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아 출발지로 돌아오는 동안 알록달록 꾸며진 열차는 이들이 온전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도시 구석구석 흔적을 남겼다.

“나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이다.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더라도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자 나의 일부이다. 무심코 잊혀지기엔 오늘만큼은 나의 일부를 드러내고 지하철에 타고 서울시청에 갔다.”

- 2021 3 31,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기자회견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나 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빗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드러냈다. 비를 막는 하얀색, 분홍색, 하늘색의 우산으로. 광장에 모인 우린 우산을 맞대고 비를 막았고, 우리의 외침이 빗소리에 묻히지 않게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럼에도 가슴에 물이 차는 것처럼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도시의 중심을 채워나갔다.

 

3 월 31일,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기자회견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나 있다"

 광화문에 다시 모였다. 또다시 마법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하늘은 새파랬고 햇살은 초여름의 것처럼 따뜻했다.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깃발은 비 온 뒤 뜨는 무지개처럼 눈부셨다.

 우리는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조금씩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말이 끝날 때마다 모두 찡그린 얼굴 위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미간의 주름과 올라간 입꼬리의 조화는 낯설었지만 아름답고 자연스러웠다.

"퀴어하게 산다. 나대로, 다르게 살아간다. 이해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나대로 나름대로 온전한 나로서 살아간다."

성소수자인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상을 구현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며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힘쓴다. 가족을 꾸리기도 하고, 일하면서 야근도 하고, 공부하고, 운동도 하고, 섹스도 하고, 먹고 마시며, 아프기도 하면서 반려동물과 함께하고 종교를 가지며 힘든 삶을 이겨내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서 같으면서도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퀴어인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거나 드러내는 것을 막으려는 수많은 권력과 억압, 배제와 낙인에 대해서 굴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으며, 저항하고, 권리를 요구하며, 평등과 인권을 외쳐왔다. 저항의 역사는 결국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있는 동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몸소 체험했다.

- 2021 3 31,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기자회견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나 있다"

 기자회견이 끝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안부를 나누며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그 순간 광장은 그들의 온전하고 따뜻한 연결된 일상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그런 순간이 언제나 있기를,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되기를 바란다. 평범한 일상이 모두의 것이 되었으면 한다. 언제 어떤 사람이 모여도 모두가 따뜻한 일상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로는 비가 오더라도 함께 우산을 맞대고 떠오르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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