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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는 떠났지만 ‘말’은 남아있다>

‘안녕들 하십니까’와 ‘말’의 정치

사회학과 3 강석남

2014-07-21 07;52;34 ‘안녕들 하십니까’(이하 안녕들)는 고려대 학생인 주현우가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 정경대 후문 담벼락에 써 붙인 대자보의 제목이다. ‘안녕들’은 이 대자보를 중심으로 발생한 일종의 사회적 움직임을 통칭하기도 한다. 전국의 대학가와 사회 곳곳에 안녕들 대자보가 천여 장 나붙었다. 동시에 안녕들 페이스북 페이지는 개설 일주일 만에 25만 명의 독자를 확보했다고 하니 안녕들 대자보에 대한 사회적 호응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났다. 대학가를 뒤덮은 대자보들이 무색하게도 작년 겨울에 비해 2014년의 봄·여름이 그리 안녕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더 하수상한 시절이 이어지고 있다. ‘안녕들’이 실질적으로 바꾼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비판과 냉소가 만연할 것이다. 안녕들 하시냐는 말은 이제 진부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안녕들’을 뜬금없이 대자보가 나붙었던 해프닝만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21세기에) 직접 손으로 대자보를 써 붙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대자보를 쓰는 것은 쓴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명 정치적인 행위다.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일상의 공간에 써 붙여 하나의 공론장을 형성하고, 그 공간을 지나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흔히 정치적인 것에 무관심하다는 질타를 받아온 대학생들이 갑자기 대자보를 통해 ‘정치’의 무대에 올라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녕들’은 특별한 사건이다. 따라서 다시금 이 사건을 되짚어 보며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안녕들’이 남긴 것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 많던 대자보는 누가 다 써 붙였을까

대자보로 시작된 사회적 움직임으로서의 ‘안녕들’을 혹자는 대자보 열풍, 대자보 현상 등으로 부른다. 여론의 관심은 과거 소위 운동권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대자보의 확산에 집중되었다. 기성 언론은 ‘안녕들’을 대자보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온라인에 익숙한 대학생들이 대자보라는 오프라인 매체에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1 키워드 분석을 통해 안녕들 대자보와 기존 (운동권들의) 대자보의 차이를 분석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2

하지만 이러한 관심들은 대체로 대자보라는 매체의 ‘형식’에만 집중한 결과다. 눈썰미 있는 이들은 대학가 어딘가에 항상 대자보가 존재해왔음을 알고 있다. 대자보로 이슈가 된 것도 주현우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지난 2010년 고려대 학생 김예슬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대자보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전례도 있었다.

사실 ‘안녕들’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대자보라는 형식의 낯섦이 아니라, 대학에서 출발한 대자보가 대학가를 넘어 사회적으로 ‘많이’ 붙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년이 흐른 이 시점에 안녕들의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해서는 대자보가 아니라 그 대자보를 쓴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도대체 그 많던 대자보는 누가 다 써 붙였을까.

 

선언과 물음

안녕들대자보를 쓴 사람들은 누구이고, 그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대자보를 썼는지 알아보기 위해 앞서 언급한 김예슬과 주현우를 비교해보자. 사실 이미 ‘김예슬’과 ‘주현우’를 연결 짓는 시도는 많았다. 3두 사람 모두 과거의 매체로 익숙한 대자보를 통해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비슷한 학번대의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이기도 하다. 처음 대자보가 붙은 장소도 엇비슷하다. 하지만 두 대자보의 차이는 간단하면서도 명확하다. 사회적 파장에 비해 김예슬은 대학생들의 무관심과 냉소적 반응에 직면했지만, 4 주현우의 대자보에 가장 먼저 응답한 이들은 대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대학사회의 반응을 가른 원인으로 ‘선언’과 ‘물음’의 차이를 지목할 수 있지 않을까. 김예슬의 대자보는 그의 선언이었다. 선언은 통상 일방향이다.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공적으로 표명하는 행위다. 반면 주현우는 대자보로 질문, ‘물음’을 던졌다. 물음은 ‘대답’을 전제로 하기에 양방향의 소통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진입 장벽’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선언이냐 물음이냐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일지도 모른다. 김예슬의 대자보는 ‘대학 거부 선언’이라 불렸다. 그 선언에 동조한다는 것은 대학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결심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공고히 자리 잡은 구조 중 하나인 ‘대학’을 둘러싼 시스템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에 비해 안녕들 하시냐는 대자보의 물음에 답변하거나 호응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답하는 것과 안녕하지 못한 이유와 원인, 즉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대답 이상의 행위로 나아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김예슬의 선언에 동의했던 이들이 주현우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쉽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에서 사회 구조적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안녕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주현우의 물음에 대답한 이들이 김예슬의 선언에도 동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학 거부 선언보다 안녕들 하시냐는 물음이 진입 장벽이 낮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김예슬의 선언은 외면했지만 주현우의 안녕들 하시냐는 물음에는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대답한 사람들. 이들은 분명 문제의식을 갖고 각 개인이 직면한 문제가 사회 구조와 무관하지 않음은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안녕하지 못하다 대자보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까지는 부담스럽거나 꺼려왔던 사람들이다. 주현우의 물음이 없었다면 대자보는커녕 ‘정치’라는 무대 위로 올라오지도 못했을, 혹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 힘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이 가진 ‘말의 힘’이다.

말의 힘은 단순히 대자보를 쓰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안녕들 하시냐는 물음에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대자보를 쓴 사람들은 스스로를 ‘안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특히 문제의식은 있으나 그 해결을 위한 ‘정치’와 괴리된 개인에게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 개인의 안녕하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자기-규정은 자신의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직시하게 되는 계기이고, 여기서부터 ‘안녕하기 위한’ 실천이 이뤄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자보를 쓰는 행위만큼 중요한 것은 대자보를 읽는 행위다. 대자보를 직접 쓰지 않아도, 안녕하냐는 물음과 안녕하지 못한 대답이 담긴 대자보를 읽으며 얼마든지 스스로의 안녕하지 못함을 깨달을 수 있다.

물론 말의 힘만으로 어떤 사회적 움직임이 촉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다수의 ‘안녕들’과 비슷한 현상이 존재했어야 한다. ‘안녕들’이 최초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예외적인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말이 사회적, 정치적인 힘을 얻는 것은 그 말이 던져진 사회의 상황과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한국 사회가 충분히 ‘안녕’한 상황이었다면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자연히 ‘안녕들’ 정도의 사회적 움직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안녕들’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주현우는 이렇게 답한다. ‘대저 들판에 불씨가 떨어져도 풀이 말라 있지 않으면 쉽사리 번지기 어려운 법입니다’ 5

결국 ‘안녕들’은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정치적 주체가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촉발시킨 사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녕들’이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었거나, 일각에서 의미부여하는 ‘자기-정치’의 장이었다는 평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답하는 것과, 그 대답 이상의 정치적인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당장 자보를 쓰고 읽었던 수많은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했지만 정작 그들이 정치적인 성과를 얻은 것은 없다. 애초에 정치적인 큰 흐름을 보여주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 이 지점이 ‘안녕들’에 대한 비관적인 평가와 냉소의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말의 힘 그리고 말의 한계

‘안녕들’이 그간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대 위로 끌어 올렸지만, 정작 그들이 무대 위에서 제대로 된 ‘정치’를 수행하지는 못한 형세다. 이에 대한 장본인 주현우의 생각은 어떨까. 지난 5월 22일 합정동에서 열린 강연을 마치고 만난 그는 ‘말의 힘’이 가진 태생적 한계를 지목했다. “말의 힘이 강한 이유는 말의 규정성이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예요. 추상적인 차원에서 누구든지 안녕하지 못할 수 있는 거죠”

말의 규정성이 약하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먼저 그 말에 누구나 응답할 수 있다는 의미와, 그 말에 응답한 이들을 묶어주는 힘이 약하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에는 누구든지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그렇게 모인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전자는 말의 힘이 가진 장점이자 ‘안녕들’이 급속히 확산된 요인이고, 후자는 ‘안녕들’이 뚜렷한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한 태생적 한계일 것이다.

주현우는 그 태생적 한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큰 틀에서 사회적 구조의 문제라는 동의는 가능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은 사람마다 달라요. 개별의제가 다르게 설정되는 겁니다” 사실 지금까지 강조해 온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자보를 읽거나 쓰는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안녕하지 못함을 인지했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 있는지, 어떤 이유와 원인으로 안녕하지 못한지는 각각 다르다.

이는 안녕들 페이스북 페이지와 안녕들 대자보를 모아 엮어 발간한 책 『안녕들 하십니까』를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고려대를 중심으로 초창기에 게시된 안녕들 대자보는 공통적으로 ‘철도 파업’ 등의 특정 의제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점차 ‘안녕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의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밀양 송전탑 문제, 성소수자 문제, 여성 문제, 청소년 문제 등을 ‘안녕하지 못한 이유’로 서술한 대자보들도 붙기 시작했고, ‘성소수자 안녕들’, ‘김치 안녕들’, ‘청소년 안녕들’ 페이스북 페이지들이 개설되었다. 중앙대에 붙은 대자보들의 경우 최근 몇 년간 강행된 기업식 구조조정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다는 내용과, 작년 겨울 시작된 청소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심지어 특정한 의제 설정 없이 자신의 지난 일 년을 묵묵히 서술하면서 그저 안녕하지 못함을 말했던 대자보가 많은 공감을 사기도 했다.

물론 각자의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다양한 의제들을 대자보에 서술함으로써 공론장을 형성하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경험이자 유의미한 행위다. 특히나 그간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의제들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안녕들’의 의의는 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의제에 집중해 모인 수많은 개인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실 많은 개인들이 공통된 의제에 집중해도 사회 구조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심지어 ‘안녕들’처럼 공통된 의제 설정 없이 각각의 개별의제만으로 형성된 사회적 움직임이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도모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은 각자의 안녕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그들 공통의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안녕들’이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말의 정치는 계속된다

주현우가 지적한 것처럼, 말의 힘은 양날의 칼과 같다. 말의 규정성이 약할수록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지만 그만큼 하나의 단일한 의제로 뭉치기는 어렵다. 말의 규정성이 강하다면 하나의 단일한 의제를 밀고 나갈 수 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는 어렵다. 말의 힘은 강력하나 그 태생적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다.

그렇다고 말의 힘을 포기하고 지양해야 할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리고 문제의 원인이 사회 구조에 있을 때 이를 개인이 혼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힘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통상 ‘연대’라 부른다. 말의 힘은 연대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안녕들’에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은 각자 흩어져 있는 개인들을 하나의 말로써 묶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의 힘을 활용하려는 노력과 시도, 즉 ‘말의 정치’는 계속될 것이다.

말의 정치가 의미를 갖기 위해선 앞서 나열한 말의 힘이 가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즉 말의 규정성이 낮더라도 하나의 의제로 사람들을 뭉칠 수 있거나, 말의 규정성이 높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전자와 후자가 무엇이 옳은 지는 상황마다 다르다. 적어도 ‘안녕들’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워낙 다양한 의제들이 쏟아진 상황에서 그 의제들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대신, 대자보를 쓰는 행위 자체가 확산되는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대자보를 쓰는 행위의 확산은 곧 ‘경험’의 확산이다. 대자보를 읽거나 쓰면서 스스로를 안녕하지 못한 사람으로 정의하고,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인식하고 나아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에 나서는 일련의 경험은 곧 정치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치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은 적어도 그 경험이 없는 사람들보다 높은 수준의 ‘말’에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의 정치는 계속될 것이고, ‘안녕들’이 말의 정치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임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더 이상 안녕들 대자보를 찾아보기 힘든 현 시점에도 여전히 ‘안녕들’로부터 출발한 말의 힘, 말의 정치는 유효하다.

 

안녕들 하십니까가 우리에게 남긴 것2014-07-21 07;52;53

물론 ‘안녕들’이 처음 시작된 지 반년이 지난 시점에, 안녕들 하시냐는 말이 처음과 같은 힘을 가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 나붙었던 대자보들도 거의 다 떼어졌고 자발적으로 형성된 각 의제별, 대학별 안녕들 페이스북 페이지도 대부분 그 생명을 다했다. 자칫 ‘안녕들’은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말의 정치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많은 시민들이 촛불과 국화, 노란 리본을 지니고 거리로 나선다. ‘가만히 있으라’라고 적힌 피켓을 든 이들은 추모에 멈추지 않고, 이번 참사의 사회적 책임을 물으며 ‘이윤보다 생명을’ 위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분명 말의 정치다.

한국 사회가 경험해 온 참사는 한 둘이 아니지만 단순히 추모를 넘어 ‘사회적 책임’을 추궁하는 어떤 정치적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세월호 참사가 처음이 아닐까. 다양한 맥락이 있겠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의 힘으로부터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침몰 중인 세월호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던 ‘부당한 명령’이다.

이는 비단 세월호에 국한된 명령만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적이다. 그간 한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 그리고 그 사회 구조적 원인들을 문제시하고 바꾸려는 사람들이 늘 들어온 말이 아닌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가만히 있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려 낙오되고 배제된다는 불안을 심어주는 명령이 ‘가만히 있으라’이다. 마침내 이 명령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안녕들’은 대답을 전제한 질문의 형식이었고 누구나 쉽게 안녕하지 못함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대답이 아니라 순응과 복종을 전제한 명령의 형식이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저항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말의 규정성이 ‘안녕들’보다 한층 강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거리로 나서고 있다. 이들로부터 정치적 경험으로서 ‘안녕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전히 하 수상한 시절, 대자보는 떠났지만 ‘말’은 남아있다. 앞으로 다양한 수준의 규정성을 가진 말들의 정치가 계속될 것이다. 한 걸음 물러나 말의 정치가 어떻게 변모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말의 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 아닐까.

대자보는 떠났지만 ‘말’은 남아있다

참고:

  1. <시사저널>, 「손으로 쓴 ‘나직한 안부’가 세상 울리다」, 2013.12.24
  2. <중앙일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100개 키워드 분석」, 2013.12.21
  3. <한겨레>, 「주현우, 김예슬 그리고 대학의 죽음」, 2013.12.24
  4.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page 49, 2010
  5.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안녕들 하십니까』, page 49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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