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Flares Facebook 0 Twitter 0 Google+ 0 Email -- 0 Flares ×

문강형준(문화평론가)

중앙대 영문과에 입학하기 전 다른 학교에서 3년간 경영학을 전공했었다. 그곳에서 공부는 안 하고, 영자신문사에 들어가 3년간 수습기자, 취재부기자, 취재부장, 편집장을 거치며 열심히 신문(과 나중에는 잡지)을 만들었다. 신문을 한 달에 한 번 만들었는데, 신문을 내고 나면 신문사 프로그램에 따라 독서 모임, 영어 공부, 사회과학 공부 등을 배우거나 가르치고, 신문을 내기 직전에는 매일 밤을 새며 편집회의를 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중에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획득하고, 인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며 다시 영문학을 공부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중앙대에 온 이후에는 당시 수업을 듣던 강내희 선생님의 권유로 선생님이 하시던 『문화과학』의 편집회의에 가서 잡지를 만들기 위해 까마득히 높아만 보이던 선생님들이 공부하고 고민하고 편집회의 하는 과정을 수년 간 지켜봤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가서는 당시 대학원생들이 만든 최초의 잡지인 『모색』의 편집위원이 되어 한국 대학원의 문제에 대한 글을 썼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에는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이 되어 한국사회의 여러 양상들을 ‘문화적으로’ 바라보며 기획을 하고 원고를 썼고, 지금은 『문학동네』라는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한국문학 일변도의 계간지에 대중문화비평의 목소리를 불어넣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나는 20대 이후 지금까지 살면서 박사과정 시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이런저런 잡지를 만들어왔던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잡지들을 만들면서 나는 ‘잡지만’ 만든 게 아니었다. 사실 나는 잡지를 만든다는 핑계로 내가 말하고 싶고 쓰고 싶은 것들을 쓸 수 있었고, 다른 이들이 사회에 대해 하는 고민들을 함께 들을 수 있었으며, 뛰어나게 글을 쓰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우리의 고민에 대해 독자들이 보이는 반응을 접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그것은 그냥 살다가 우연히 잡지를 집어드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오직 잡지를 만드는 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와 열정을 쏟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중앙문화』 71호를 읽은 후, 내가 평가서에 가장 먼저 쓰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말이었다. 뭐랄까, 독자들을 위해서보다 이 잡지를 만든 편집위원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잡지의 꼭지 하나하나에 편집위원 각자의 고민과 질문이 박혀 있다고, 이 잡지가 얼마나 나가는지 혹은 언제까지 이 잡지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꼭지 원고 하나를 쓰기 위해 읽고 생각하고 걷고 뛰던 그 모든 순간들은 편집위원들 각자의 삶 속에 자신도 알 수 없을 무늬를 새겨 넣을 것이라고. 그러니 지금 이 순간들에 최선을 다하고, 이 순간을 즐기라고.

이런 말들을 해놓긴 했지만, 사실 비판적 잡지들이 지금처럼 위태로운 순간이 또 있을까. 대학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장치 속의 부속 장치로 스스로를 위치시킴으로써 ‘진리’니 ‘비판정신’이니 하는 말들은 효율성과 수월성과 대학평가 같은 말들에 눌려 찾아보기가 힘들고, 스스로를 휴먼캐피털로 여기며 자신의 역량을 기업이 요구하는 방향으로만 확장시켜야 그나마 살 길이 있다 여기는 대다수 학생들에게도 대학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들은 자신과는 관련 없는 말들일 공산이 크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가 보여주듯, 『중앙문화』가 학교 본부의 시대착오적 발상에 의해 탄압당하고, 이제는 편집공간마저도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은 정확히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공명한다. 내가 90년대 초에 영자신문을 만들며 느끼던 탄압과 폐간의 위기들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이 ‘시대착오성’에 나는 가벼운 멀미를 경험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진보’한다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지난 9년간의 정권에서 경험했듯, 세상은 맞서 싸우는 사람이 없는 한 결코 스스로 진보해가지 않으며, 심지어 퇴보하기까지 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다. 「우리는 왜 빨간벽돌에 남았나」라는 글에서 본부 측이 했다는 말들을 보라. ‘제도권 안에 들어오면 공간 주기 힘들어’ ‘아직 자네들은 학생이라서 완전한 자유를 주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 있어’ ‘학내언론은 학교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등의 말은 90년대 초에도 시대착오적으로 들렸건만, 그런 말들이 오늘날에도 버젓이 교육자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이 놀라운 시대착오성은 한국의 대학건물 중 단일건물로는 가장 크다는 310관이라는 존재 속에서 다시 펼쳐진다. 대운동장을 없애면서 지은 그 거대한 건물이 세워져도 결코 ‘공간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이건 시대착오성의 공간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요컨대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근원적 모순이다. 시간은 자연히 진보로 향하지 않고, 공간은 자연히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중앙문화』가 싸우지 않으면, 학생들의 목소리를 지지자로 두지 못하면 시간과 공간은 언제 어느 때고 뒤로 가게 될 것이다.

『중앙문화』는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 ‘사회’, ‘페미니즘’, ‘문화’ 섹션에 배치된 글들 모두가 하고 있는 일들이 바로 이런 ‘시대착오성’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다. 외국인 유학생 유치 정책, 본부와 싸우지 않는 총학생회, 이제는 희귀종이 되어버린 ‘운동권’과의 인터뷰, 육식을 거부하는 비건들, 장애학, 시위, 낙태죄 폐지, 연애하지 않는 ‘홀로’의 권리 등 『중앙문화』 71호의 주요한 글들은 모두 우리가 완전하다 생각하는 것들의 ‘빈틈’, 우리가 정상적이라 생각하는 것의 ‘이면’, 이제는 아무도 하지 않는 것들에 생을 던지는 ‘이상한 이들’, 법 ‘바깥’에 있는 현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다룬다. 어려운 말로 이를 ‘담론투쟁’이라 부른다. 이 시대의 주류, 정상, 평범의 문화에 맞서 ‘다른 이야기’(담론)를 꺼내드는 일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싸움, 하나의 투쟁일 수 있다. 우리는 지극히 자유로운 것 같아도, 무슨 주제의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바라는 점들은 남아있다. 현실과 이론을 함께 사유하면 어떨까 하는 게 그 중 하나다. 가령 310관에 대한 커버스토리에서 ‘공간’과 ‘기억’, ‘언론자유’ 등의 문제가 다뤄지는데, 그런 기사들 속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이 변해가는 경향성을 이론적으로 다룬다면 우리는 중앙대의 문제가 한국, 나아가 글로벌한 자본주의 현상의 일부임을 거시적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문화』에서는 수많은 각주가 달린 논문 형식의 글들이 몇 편 있는데, 오히려 논문 형식의 글들보다는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이론을 학부생들의 수준에 맞게 풀어놓은 그런 글들이 훨씬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문과의 ‘문화연구’ 혹은 ‘비평이론’ 수업 때 배우는 공간/자본주의/지식생산 등의 이론적 개념이 강의실 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대학 안에서 현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글이 필요해 보인다. 다른 하나는 오늘날 학생들의 ‘문화’ 자체에 대한 급진적이고 강력한 비판들이 학생 편집위원들에 의해서 시도되었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대학의 변화는 본부‘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언제나 교수와 학생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이 부분에서 중앙대의 경우, 교수와 학생 간의 간극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왜 학생들은 이러이러한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가, 왜 다른 학교 학생들과 달리 중앙대 학생들은 행동하지 않는가, 왜 학생들은 비판적인 교수들을 비판하는가. 나는 이런 질문들과 관련해 한국 대학생의 특징, 중앙대 학생들의 독특한 문화 같은 것들(어떤 이가 내게 서울대, 연고대 학생들과는 다른, 중앙대를 포함한 중상위권 대학생들의 멘탈리티와 정치적 태도를 나름대로 설명해 보인 적이 있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중앙문화』에서 읽고 싶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대사로 말하자면, 오늘날 ‘시간은 어긋나 있다’(사실 시간은 언제 어느 시대고 ‘어긋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어긋나 있는 것을 ‘인식’할 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어긋나 있음을 인식한 사람은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덴마크가 ‘썩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인식의 유무가 어떤 행동을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햄릿』에도 그렇듯, 햄릿과 호레이쇼를 제외한 엘시노어 궁정의 모든 이들은 시간이 어긋나 있지 않다고 여긴다. 햄릿의 ‘광기’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다. 어긋남을 인식한 자들은 그래서 미친 자들이다. 그리고, 미친 자들이 없이는 변화도 없다. 나는 『중앙문화』가 바로 우리 시대의 시간이 어긋나 있음을 인식한 미친 자들의 잡지라 생각한다. 한 때 그리고 지금도 잡지를 만들고 있는 나는, 모두가 즐겁고 평안하게 술을 마시고 춤을 출 때 유령을 보고 진실을 갈망하는 이 미친 자들을 동지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긋난 시간과 싸우기

어긋난 시간과 싸우기”에 대한 1개의 생각

  • 2018년 4월 1일 06:15
    고유주소

    I just want to tell you that I am just new to blogs and actually savored you’re page. Very likely I’m likely to bookmark your blog . You actually have tremendous well written articles. Thanks a lot for sharing with us your website.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