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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인간만 평등하면 되나요?

[서평]『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동물 해방』을 위한 물음들

편집위원 김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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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느님’이라는 단어가 있다. 치킨과 하느님을 합친 말로, 치킨의 맛을 칭송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치느님’을 연호하며 진짜 ‘치느님’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삼겹살 무한리필 가게에서 선홍빛 살덩어리를 구우며 그것이 한때는 살아있는 돼지의 일부였음을 사람들은 떠올리지 않는다. 종이팩에 담겨 대량으로 생산·판매되는 새하얀 ‘1A등급’ 우유를 구매하며 그 많은 우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남의 젖을 그렇게나 많이 짜내 송아지 대신 일상적으로 먹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말이다. 고기나 우유가 동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지만, 대다수 사람의 소비생활 속에서 고기와 우유는 공산품인 듯하다.
하지만 고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2016년 3월에만(연간이 아니라 월간이다) 8,282만여 마리의 닭이 인간의 ‘치맥 파티’를 위해 희생되었다. 151만여 마리의 돼지와 6만 6천여 마리의 소가 불판에 구워지고 베이컨이 되고 돈까스로 튀겨졌다. 1 가히 동물 홀로코스트라 할 만하다. 그런데 한 점의 인육에는 경악하면서 이 대규모 학살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좀 이상하지는 않은가?

그건 차별입니다

“동물을 좋아하시나 봐요.” 동물의 처우 개선을 이야기할 때 꼭 따라 나오는 반응이다. 다른 사회 문제와 다르게 유독 동물의 문제는 감정적인 문제로 치부되곤 한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물의 문제를 부차적으로 여기고 시혜적 관점으로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동물에 대한 애정으로 동물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감정에 호소할 경우 동물 문제는 동물 애호가만의 관심사가 된다. 일반적인 통념에 따르면, 동물은 마음 따뜻한 사람이 온정을 베풀어 줄 대상이다. ‘냉철한 사람’에게는 동물보다 인간을 중시하는 게 당연하다.
얼마 전 미국에서 고릴라 우리에 어린아이가 떨어져 위험에 처하자 고릴라를 사살한 사건이 논란이 되고 있다. 동물원 측은 “우리는 하람베(고릴라)를 잃어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아이의 생명이 위험해 속히 결정을 내려야 했다”고 밝혔다. 2 일각에서는 ‘아이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니냐’며 동물원을 옹호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살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며 동물원을 비난했다. 해당 동물원에 대한 보이콧 운동이 일기도 했다.
이 논쟁에서 모두가 의심하지 않는 부분은 “인간이 동물보다 더 중요하다”는 전제다. 그 근거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합당한 답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황당한 주장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기에 백인이 흑인보다 중요하다고 당연하게 전제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고릴라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논쟁점은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에서 경찰에 의한 흑인 사살이 빈번한 것을 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다. 현대에서 흑인 사살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차별이라면, 동물 사살은 대놓고 벌어지는 차별이다. 동물 차별은 아직 의심받지 않는 단계에 있기에 과거의 인종차별이 그랬듯이 이성적인 태도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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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 『동물 해방』, 연암서가, 2012

하지만 정말 그게 이성적인 걸까? 정말 논리적으로 따져봤을 때, 동물을 차별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로 불리는 피터 싱어의 저서 『동물해방』은 철저한 이성적 논증으로 답을 내려준다. 싱어는 자신이 동물 애호가가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감성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동물 해방을 주장할 근거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이 동물보다 더 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이 희생되어도 된다고 믿는다. 심지어 그것이 식도락이라는 인간의 사소한 이익과 동물의 생명권 사이의 충돌일지라도 말이다. 싱어는 이러한 태도를 ‘종차별주의(speciesism)’, 즉 종에 근거한 차별이라고 규정한다.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특정 성, 인종의 이익을 다른 성, 인종의 이익보다 중시하듯이, 인간의 이익을 인간 아닌 동물의 이익보다 중시하는 태도는 비슷한 맥락의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싱어는 종차별주의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끌어온다. 그에 따르면, 인간 평등에의 요구는 실질적인 평등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보다 신체적인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요구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흑인이 지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평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흑인의 지적인 업적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지적 능력 등은 평등을 부여하는 척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능력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점을 근거로 평등을 주장할 경우 지능이 낮은 사람 등 어떤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에 대한 차별을 반대할 수 없게 되며, 만약 어떤 집단이 유전적으로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인간 평등의 원리는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이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prescription)이다.” (『동물 해방』 中)
이 같은 원리에 따른다면, 종차별주의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좀 더 나은 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른 존재를(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 착취할 권한을 부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싱어의 논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도덕 원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지적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들을 비장애인을 위해 이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은 어떤가? 동물 또한 이러한 도덕 원칙의 적용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만약 동물을 실험이나 식용으로 이용하는 행위가 옳다고 주장하려면 동물과 지능이 비슷한 일부 인간 또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해야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싱어가 유비했듯 종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는 상당 부분 닮아있다. “흑인과 같이 일하라니, 여성과 같이 일하라는 것과 같다”와 “여성이 권리가 있다면 동물도 권리가 있다“는 조롱은 얼마나 다른가? “더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으므로 페미니즘은 나중에”와 “인간 문제도 많은데 동물 문제는 나중에“는 얼마나 다른가? “육식은 오랫동안 인류의 문화로 자리잡아 왔다. 이를 동물권이라는 이름으로 막는 것은 폭력이다”와 “가부장제는 오랫동안 인류의 문화로 자리잡아 왔다. 이를 여성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막는 것은 폭력이다”는 또 얼마나 다른가? 인간의 식도락을 위해 좁고 더러운 우리에 갇혀 학대당하는 닭들의 모습이, 군인의 성욕 해소를 위해 학대당했던 ‘위안부’와 겹쳐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성평등과 인종평등은 이미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치다. 그 두 평등의 확장형이 종평등이다.
동물 문제는 주로 현실적·물리적 고통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들이 많고 그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 동물 해방의 제1과제이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놓고 보면 동물은 심각한 ‘고통 불평등’ 상태에 놓여있다. 공리주의자인 싱어는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기준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유무’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모든 사람의 고통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이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 피부색, 성별, 계층에 관계없이 개체의 고통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하듯, 종 또한 개체가 느끼는 고통을 차등적으로 고려할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으로 인해 동물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그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 가해지는 고통보다 크다면 그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이다.
고통의 크기를 정확히 측정, 비교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한 논의까지 가지 않더라도 동물 차별 철폐를 주장할 수 있다. 인간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동물을 관람하는 즐거움’, ‘실험으로 축적하는 지식의 가치’ 등을 위해 동물은 전 생애에 걸쳐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차별이 가장 심할 때는 오히려 그 차별이 보이지 않는다. 일례로 성차별이 심한 나라일수록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성차별이 심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가부장제가 가장 강력했을 때에는 아무도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차별을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차별은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차별이다. 이에 차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중요한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차별을 인식해야 이를 철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얼마 전 <TV 동물농장>에서 ‘강아지 공장’의 실태를 폭로해 큰 이슈가 되었다. 강아지 공장의 번식견들은 비위생적인 우리에서 강제로 임신당하고 새끼를 낳고 뺏기기를 반복하며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고 동물보호법 개정을 요구했다.
다른 동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번식장의 개들처럼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동물들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수의 동물이 극악한 학대를 받는 축산업의 현실은 좀처럼 조명되지 않는다. 동물단체에서조차도 축산동물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고기를 먹는 사람으로서 모순에 부딪히기 않기 위한 자기방어일까, 비교적 쉬운 문제부터 해결하려는 전략일까.
고통받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개와 고양이만이 아니다. 축산업, 동물 실험, 동물 전시, 동물 서식지 파괴 등으로 인해 지구 곳곳은 동물들의 보이지 않는 비명으로 가득하다. 나비탕을 위해 산채로 끓는 물에 넣어진 600마리의 고양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돼지들이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축산동물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다큐멘터리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에서 주인공은 밀집형 돼지 사육장에 들어가기만 했을 뿐인데 몇달 동안 알 수 없는 피부병으로 고생한다. 창문 하나 없는 깜깜한 사육장을 열자 숫자를 가늠할 수도 없을만큼 많은 돼지가 오물을 뒤집어쓰고 꽥꽥 울어대는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돼지의 자연수명은 10~15년이지만, 고기용 돼지는 생후 160~170일에 도축된다. 빨리 생을 마감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암퇘지는 새끼 돼지를 생산해야 하므로 더 오랜 기간 고통받는다. 암퇘지는 스톨이라는 자신의 몸 크기만한 개별 우리에 갇힌다. 스톨에서는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 외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생산 기계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일은 낭비이므로 바닥은 똥오줌으로 뒤덮여 있다. 박테리아가 득시글거리는 오물에 잠긴 돼지의 요도는 감염되어 질병을 일으킨다. 어미 돼지는 정액을 주사당해 임신하고 새끼를 낳고 뺏기기를 반복하다 번식 능력이 퇴화하는 3~4년 차에 도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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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새끼 돼지는 태어나자마자 이빨을 뽑히고 꼬리를 잘린다. 좁은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물어뜯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사육장의 밀집 정도를 완화하면 해결되는 일이지만 마취도 없이 신체부위를 자르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태어난 지 한 달 남짓 되어서는 마취 없이 거세를 당한다.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서다. 사육장은 환기가 전혀 안 되어 분뇨 냄새와 사료 냄새 등으로 뒤범벅되어 있으며,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아 배설물과 먼지, 돼지털, 비듬 등이 득시글거려 각종 폐질환을 유발한다. 일련의 상품 만들기 과정에서 스트레스로 사망하는 돼지들도 적지 않지만, 절약되는 비용이 더 크므로 공장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돼지가 축낸 엄청난 사료값에 더불어 판매할 돼지를 잃는 것이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말이다.
알을 낳기 위해 키워지는 닭은 A4용지보다 작은 크기의 배터리 케이지에서 평생 기계처럼 알만 낳는다. 닭은 다른 닭이나 동물들이 보지 않을 때 둥지에 알을 낳고 싶어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축사에서는 전혀 그런 습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다른 닭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축사에서 알을 낳고 싶지 않은 닭은 어떻게든 가릴 것을 찾아보려 하지만 허사다. 횃대에 오르거나 흙으로 목욕하는 습성 또한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날개를 펴는 등 움직이고 싶어하는 본능은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닭은 닭답게 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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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자유연대

알을 많이 낳도록 품종이 개량되었기 때문에 달걀 껍데기를 만드느라 닭의 뼛속에 칼슘이 부족해진다. 그 결과 뼈가 허약해져 부러지기 쉽다. 자신의 몸을 희생해 달걀을 만드는 셈이다. 또 달걀이 자궁벽에 들러붙어 알을 낳을 때 자궁이 탈출하기도 하는데, 다른 닭들이 그걸 쪼아 출혈이나 감염으로 죽기도 한다. 닭은 원래 털갈이를 할 때 알을 거의 낳지 않는데, 생산성을 위해 강제로 털갈이를 촉진한다. 5~9일 동안 물과 밥을 주지 않고 빛을 차단해 잠을 못 자게 하는데, 거의 고문이라 할 만하다. 그 결과 닭의 몸무게는 25~30% 가량 빠진다.
고기가 될 닭은 빨리 크도록 개량되고 성장촉진제가 들어있는 사료를 먹어서 사람으로 치면 생후 2개월에 160kg이 되는 꼴로 자란다. 살이 쪄 급사하거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리가 부러지고, 골다공증, 호흡기 질환, 심장병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사육장이 좁으므로 다른 닭에게 쪼이고 철망에 문질러져서 깃털이 빠진다. 분변과 접촉하면서 화상과 피부염증을 겪는다.
경제적 가치가 없는 수평아리는 내버리는 게 효율적이다. 산 채로 분쇄기에 갈아 사료로 만들거나 쌓아놓아 압사당하도록 둔다. 암평아리들은 부리를 자른다. 극도의 밀집 사육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닭이 서로를 쪼거나 동종 포식을 하는 ‘나쁜 버릇’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돼지와 마찬가지로 밀집도를 낮추는 방법이 있지만 부리를 자르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부리를 자르다가 실수로 콧구멍까지 잘라 음식 섭취가 어려워지기도 하고, 제대로 자른다고 해도 신경이 손상되거나 세균에 감염된다. 사람으로 치면 손을 자르는 일이나 다름없다.
송아지의 고기는 색이 연할수록 값을 잘 쳐준다. 연한 색을 내기 위해서 송아지에게 철분을 섭취하지 못하게 해 송아지는 만성 빈혈 상태에 시달린다. 쇠나 배설물을 핥아서라도 철분을 섭취하려고 하지만 충분할 리 없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떨어져서 좁은 우리에 갇힌다. 이리저리 움직이면 근육이 발달해 고기가 질겨지기 때문이다. 인간 아기처럼 무언가를 빨려는 충동이 강하지만 전혀 충족되지 못한다. 새김질 욕구 또한 마찬가지다.
젖을 생산하는 소는 임신과 출산과 새끼 뺏기기를 반복해야 한다. 새끼를 뺏긴 어미소는 큰 소리로 울며 고통스러워한다. 송아지가 먹어야 할 젖은 모두 뺏긴다. 우유 산출을 최대화하기 위해 소가 소화하지 못하는 음식을 먹인다. 한편 소가 섭취하는 것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면, 자기 몸의 조직을 분해해 우유 생산에 사용하게 된다. 다 쓴 소는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이쯤 되면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 싶다. 그런데 죽으러 가는 과정도 순탄치 않다. 한꺼번에 많이, 효율적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좁은 트럭에 동물을 과밀적재하는 건 놀랍지도 않다. 수송되는 동안 물이나 음식은 제공되지 않는다. 곧 도축될 동물에게 음식은 낭비기 때문이다. 열기나 냉기로부터 보호되지도 않는다. 수송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동물이 죽는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도축장에 도착한 동물들은 도축 전에 전기충격기나 타격법 등으로 기절당한다. 기절 후 사슬에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단다. 목동맥을 잘라 피를 완전히 뽑아내면 출혈로 서서히 사망한다. 작업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져 제대로 기절하지 못하는 동물들도 많은데, 이들은 산 채로 철근체인에 매달려 가죽이 벗겨지거나 끓는 물에 삶아지기도 한다.
AI(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의 발생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때마다 수많은 동물이 생매장되었다. 동물 전염병에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그것을 자연재해로 여기는 듯해 보인다. 하지만 AI와 구제역의 확산 원인은 공장식 축산이다. 위에서 살펴본 비위생적이고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동물들은 면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 동물들이 밀집해 있어 전염 속도도 빠르다.

공장식 축산만 아니면 될까?

공장식 축산의 대안으로 동물복지 농장이 떠오르고 있다. 유럽이 그 선두주자다. 스위스에서는 이미 1991년에 배터리 닭장이 불법화되었다. 유럽 연합 차원에서는 2012년에 배터리 케이지가 금지되었다. 송아지용 좁은 우리도 이미 2008년에 유럽 전역에서 금지되었다. 미국은 그보단 느리지만 많은 변화가 일어나왔다. 일부 주에서 스톨, 송아지 우리, 배터리 케이지가불법화되었다. 미국의 맥도날드, 던킨도너츠 등은 방목 달걀을 전면 사용할 계획을 발표했다.
동물복지 농장으로의 전환이 고기의 가격을 상승시킨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는 우리가 그동안 먹어온 고기가 싼값을 유지하기 위해 동물의 삶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적절한 근무환경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상품을 싸게 구매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에 반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물을 굳이 먹어야겠다면, 비싼 가격은 동물의 삶에 지불해야 할 최소한의 정당한 대가다.
아직도 배터리 케이지와 스톨 등이 금지되지 않은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동물의 고통을 인지하고 줄이려고 노력하는 서구의 모습은 분명 고무적이다. 하지만 공장식 축산만 아니면 될까? 동물복지 농장 또한 상품으로 내놓기 위해 동물을 키우기 때문에 그들을 생명으로서 온전히 존중해주지 못한다. 거세, 소인, 어미와 새끼의 격리, 공동체 박탈, 습성 박탈, 감금, 수송 스트레스 등 크고 작은 동물학대가 행해진다. 축산업이 동물의 고통을 경감하는 쪽으로 변화한다 하더라도, 동물을 인간의 목적을 가둬놓고 죽인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피터 싱어는 이를 ‘상대적으로 인도적 형태의 종차별주의’에 불과하다고 본다. 싱어는 인간이 고기가 들어간 식사를 위해 동물을 사육해 죽일 수 있다는 믿음도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동물을 굴복시키는) 태도와 실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싱어는 1975년에 제기된 주장이라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근본적인 문제를 확실하게 짚어주고 있다. 사실 동물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이거나 먹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 동물성 제품을 다른 것들로 대체하기란 오늘날처럼 풍족한 사회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인간들은 ‘필요하다’는 거짓된 명목하에 동물의 착취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걸까? 간단하다. 동물이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동물을 인간보다 덜 고려해도 된다는 믿음, 이를 정당화하는 종차별주의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너무나 쉽게 말할 수 있다. “동물이 고통받는 것도 안타깝긴 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문제들이 많잖아?” 바로 그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동물 해방의 가능성은 묘연하다.

육식이 아니라 ‘육식주의’다

2007년 이천에서 군부대 이전 반대 집회 중 돼지를 찢어 죽이는 퍼포먼스가 행해져 많은 사람의 분노를 샀다. 다른 돼지들의 삶은 이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소수 악마의 학대보다 훨씬 큰 규모의 동물 학대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학대는 심지어 정부의 묵인과 지원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시스템에 공모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공장식 축산 얘기다. 분명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고 온정을 베푸는 감수성이 있음에도, 어떻게 끔찍한 대규모 동물 학대가 존속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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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 조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모멘토, 2011

사회심리학자 멜라니 조이는 그의 저서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육식주의를 해부한다』에서 그 이유를 분석한다. 조이는 사람들이 정신적 마비 상태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어떤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정신적·감정적으로 단절시키는 심리적 과정이다. 어떤 충격적인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물에게 고통을 주면 안 된다는 가치 기준과 육식이라는 행동은 상충한다. 이는 도덕적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이 불편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가치 기준을 행동에 맞추거나 행동을 가치 기준에 맞출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행동에 대한 ‘인식’을 바꿈으로써 그것이 가치 기준에 맞는 ‘듯해 보이게’ 만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을 생각하지 않고 육식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육식의 폭력성은 정신적으로도 보이지 않지만, 물리적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머릿속 농장은 소가 자유로이 풀을 뜯는 널찍한 들판이다. 학교에서는 축산공장이 어떤 모습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미디어에서도 왜곡된 이미지만을 보여줄 뿐이다. 도축장 벽이 유리라면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도축 장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육식의 폭력성은 쉽게 가려진다.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육식을 해왔던 사람들이 육식의 정당성 자체를 의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육식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는 정당해서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이기에 정당성을 획득한다. 육식은 합법이기에 옳은 행위라 느껴진다. 도축업자는 동물학대죄로 고발당하지 않는다. ‘농림축산식품부’라는 이름의 정부부처의 존재는 축산을 몰가치적 행위로 만든다. 육식이 필요하고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신화를 반박하는 증거와 논거가 수없이 밝혀졌음에도, 이 신화를 이끌어가는 이해당사자들과 축사 담장 밖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신화는 힘을 잃지 않는다.
싱어가 종차별주의 개념을 이야기한 것과 비슷하게, 조이는 육식을 ‘육식주의’라 이름 붙인다. 그에 따르면 육식주의는 특정 동물을 먹는 일이 적절하다고 믿는 신념체계다. 그는 육식주의를 가부장제에 비유한다. 가부장제가 당연하고 옳다고 여겨질 때는 아무도 그 이데올로기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름이 붙어있지 않은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당연한 진리인 척 모습을 가장하고 우리를 지배한다. 육식주의 또한 하나의 지배적이고 잘못된 이데올로기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기 위해 먼저 이름을 붙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원래 먹어왔으니 먹어도 된다고 말하기 전에 생각해보자. ‘원래 그래왔던 것’이 사실 가장 의심해야 할 무언가임을.

그럼 우린 무엇을 할까?

두 저자 모두 동물성 제품을 소비하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극단적 채식을 고수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육식을 강요하는 구조 속에서 채식을 고수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종차별주의를 자각한 사람들이 가능한 만큼이라도 동물성 제품의 사용을 줄이면 동물의 고통을 경감하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채식을 비롯해 일상에서 종차별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종차별주의의 실체를 알게 된 이상, 종차별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를 비판할 경우 모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하루를 동물 착취에 기대어 살아간다. 매일 고기가 포함된 식사를 하고, 동물 실험을 거친 제품을 수없이 사용한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끔찍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어도 될 수많은 동물을 우리가 외면할 권리가 있을까.

“어느 날 우리의 손녀, 손자들이 물을 것이다. 동물들의 홀로코스트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디 계셨어요? 그 끔찍한 범죄에 대항해 무엇을 하셨어요? 우리는 이미 한번 했던 변명을 다시 내놓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했다는 변명을.”
– 헬무트 카플란

 

참고문헌

박상표,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건강하다』, 개마고원, 2012
김재민, 『닭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시대의 창, 2014

인간만 평등하면 되나요?

참고:

  1. 농림축산식품부 ’16년도 3월 도축실적 통계
  2. 전정윤, “우리에 빠진 4살 남아 구하려 멸종위기 고릴라 사살”, < 한겨레>, 201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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